공명하는 혼 (이케다 SGI 회장 대담록)
제4회 평화와 과학의 ‘20세기 거인’ 라이너스 폴링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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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간 정신의 힘’을 믿는다
라이너스 폴링 박사가 세상을 떠난 뒤의 일이다.
박사가 열쇠를 채워 소중하게 보관하던 금고를 도구를 이용해 열었다. 그곳에는 에바 헬렌 부인에게 보낸 편지 750통이 있었다.
박사는 이케다 SGI 회장과 나눈 대담집 ‘생명의 세기를 향한 탐구’에서도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결정적으로 아내에게 변함없이 존경 받고 싶다는 바람에서 핵무기를 반대하는 태도를 취하겠다고 결단했습니다.”
“나의 스승은 아내였다고 생각합니다.”
박사는 역사상 유일하게 단독으로 두 가지 노벨상(화학상과 평화상)을 받은 ‘현대 화학의 아버지’다.
박사가 연구실 안에만 관심을 갖는 데 그쳤다면 그 93년의 인생은 상찬과 존경으로만 장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공산주의자’라는 수식어가 박사를 따라다녔다. 주 연방회의가 소환했고, 해외 도항을 제한 당했다. 근무하던 대학이 압력을 넣었다. 그리고 대중 언론 기관이 박사를 공격했다.
소련에 맞서려면 원수폭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다수파에 저항해 완강하게 핵무기 폐기를 외쳤기 때문이다.
그 원천에는 국가가 아닌 ‘인류’에게 봉사하겠다는 신념과 논리적으로 잘못되지 않은 한 자신의 주장을 절대로 굽히지 않겠다는 각오 그리고 끊임없이 격려한 부인의 응원이 있었다.
“5년 전에 세상을 떠나신 부인에게 불법자로서 진심으로 애도의 뜻을 전합니다.”
두 사람은 1987년 2월 24일, 처음 만났다. 이케다 SGI 회장이 미국 소카대학교의 로스엔젤레스 캠퍼스(당시)에 달려온 박사에게 가장 먼저 에바 부인을 상찬하는 말을 건넸다.
또 미국 소카대학교 오렌지군 캠퍼스에 건설한 교실동에는 ‘폴링 부부동’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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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는 제2차 세계대전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인간주의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미국이 일계(日系) 사람들을 강제로 수용해도 부부는 일계 정원사를 계속 고용했다.
집 차고에는 페인트로 ‘우리는 잽(일본인을 멸칭한 말)을 좋아한다’는 말이 씌어 있었다. 익명의 전화와 협박 편지를 받았다. 그래도 부부는 정원사를 지켰다.
박사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 사실을 알고 수개월에 걸쳐 핵무기의 위험을 주장하는 강연을 시작했다.
아들인 폴링 주니어 박사가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는 어느 쪽인가 하면 감정을 잘 표현한다기 보다 감정을 안으로 숨기는 성격이었습니다.”
에바 부인은 그런 박사에게 강연의 내용을 충고하고 용기를 불어넣었다.
이윽고 박사는 대중에게 핵무기와 방사능의 위험을 설득력 있게 전하는 핵무기 반대 운동의 기수가 되었다.
1955년 7월, 철학자 러셀과 아인슈타인 박사 그리고 로트블랫 박사(퍼그워시 회의 창설자) 등과 함께 핵무기 금지를 요구하는 ‘러셀 아인슈타인 선언’의 서명자 열한 명 중 한 사람이다.
1958년에는 과학자 1만 명 이상이 유엔에 핵실험을 반대하는 서명을 제출했다. 그중에는 노벨상 수상자 서른일곱 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부 정치가는 몹시 놀라며 ‘부부의 힘만으로 저토록 커다란 규모의 서명을 이루었을 리 없다’며 어떤 조직을 배경으로 움직이는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1960년 6월, 연방회의 상의원이 박사를 불러 ‘서명을 모으기 위해 도운 사람의 이름을 대라’고 요구했다.
박사는 회의 모욕죄를 각오하고 대답하기를 거부했다.
“나는 공산주의의 이상과 목적을 위해 봉사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사회적이나 정치적인 문제 또 전쟁을 막고 세계 평화를 지키려는 커다란 문제에 대해 활동하면서 전 인류 이외에 어떠한 것에도 봉사한 적이 없습니다.”
1963년 여름, 만족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박사의 싸움이 ‘부분적 핵실험 금지 조약’ 체결로 조금이나마 성과를 이루었다.
그리고 이 조약이 효력을 발휘한 10월 10일, 박사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노벨 평화상’을 받는다는 소식이었다.
‘뉴욕 타임스’가 이렇게 평가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국가와 이념 특히 권력을 위해 발언하는 데 반해 라이너스 폴링은 인류의 관점에서 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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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와 이케다 SGI 회장은 네 번 만났다. 1993년 1월 29일, 미국 클레어몬트 매케나대학교에서 열린 이케다 SGI 회장의 강연에서는 박사가 해설자 역할을 했다.
“우리는 십계론 중 ‘아홉 번째’ 즉 보살의 정신에 입각해 행동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SGI가 있습니다. 그리고 본디 종교의 사명인 평화를 건설하고자 헌신하는 이케다 SGI 회장이 있습니다.”
아들 폴링 주니어 박사에 따르면 만년 박사의 사무실은 이케다 SGI 회장과 나눈 대담집으로 둘러싸여 있었다고 한다. 박사는 “저명한 사람을 만날 때에는 꼭 이 책을 드린다” 하고 말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이케다 SGI 회장에게 자신의 생각이나 기분을 정말로 허물없이 이야기했습니다. 그만큼 아버지는 이케다 SGI 회장에게 감명했습니다.”
두 사람의 우정은 가족에게 계승되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1993년 3월 마지막 회견에서 약속한 ‘라이너스 폴링과 20세기’전도 실현되어 세계에서 백만 명 이상이 관람했다.
박사는 이렇게 써서 남겼다.
“세계에는 군사력이나 핵폭탄이라는 악의 힘보다도 더욱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선의 힘, 도덕과 인간주의의 힘입니다. 나는 인간 정신의 힘을 믿습니다.”
박사가 바로 ‘인간의 고뇌를 최소화’하고자 목숨을 불태워 ‘인간 정신의 힘’을 증명한 ‘과학 보살’이다.
◆라이너스 폴링
1901년 2월,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에서 태어난 물리화학자다. 1994년 8월에 세상을 떠났다.
오리건농과대학교(현재 오리건주립대학교)와 캘리포니아공과대학교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캘리포니아공과대학교나 스텐퍼드대학교에서 교수로 일했고, 미국화학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에바 부인과 함께 평화 운동에 힘썼다.
1954년 노벨 화학상과 1962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세계에서 오직 박사만이 단독으로 두 가지 노벨상을 받았다.
1974년부터 라이너스 폴링 화학의학연구소 소장이 되어 비타민C를 연구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저서로는 ‘화학결합론’ ‘노 모어 워(No More War)’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