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우리 강북 사람들 독(毒)이 바짝 올랐습니다" <이 기사는 주간조선 2055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지금 강북 사람들은 독(毒)이 바짝 올랐습니다.”
지난 4월 29일 만난 이노근(李老根·55) 서울 노원구청장은 작심한 듯 말을 꺼냈다. “강남에는 각종 개발 호재가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데 강북은 소외되고 있습니다. 노후 아파트 재건축도 지연되고 강남 잠실에는 112층 제2롯데월드가 올라가는데 노원구는 55층 주상복합 신축도 안 됩니다. 강북 사람들도 이제 과거와 다릅니다. 실리(實利)에 눈뜨기 시작했습니다.”
이노근 구청장은 지난해 말 오세훈 서울시장에게 정면으로 반기(反旗)를 들었다. 발단은 노원구가 민자유치사업으로 추진 중인 공릉동 55층 주상복합빌딩. 법조단지가 이전하는 부지에 55층 주상복합빌딩을 짓겠다고 하자 서울시가 제동을 걸고 나섰기 때문이다. 당시 서울시는 “노원구의 55층 빌딩은 지역 여건과 도시계획을 고려하지 않은 과도한 계획”이라며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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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북 청주 출생. 제19회 행정고시. 중앙대 경제학과 졸업. 경기대 공공정책학 석사. (2006년~현) 노원구청장. / photo 허재성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그러자 이 구청장은 “송파구 잠실에는 제2롯데월드(112층)와 종합운동장 국제컨벤션복합단지(121층)가 들어서고, 강남구 삼성동 한전 부지에도 초고층 빌딩인 그린게이트웨이(114층) 건설 계획이 속속 발표되고 있는데 강북 특히 노원구에는 100층도 아닌 55층 건물조차 세우지 못할 이유가 뭐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급 자치단체장이 상급 단체장에게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하는 것은 아무래도 이례적인 일이다.
이노근 구청장은 인터뷰에서도 서울시에 반기를 든 이유를 강조했다. 55층 주상복합빌딩은 노원구의 상권 위축을 막기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55층 신축이 거론되는 곳은 노원구 공릉동 북부지원 앞입니다. 그동안 법원의 권위주의 때문에 높은 건물이 들어서지 못한 곳이죠. 강남 서초구의 법조단지도 주변에 20층 이상의 높은 건물이 없잖아요. 하지만 북부지법과 지검은 내년이면 도봉구로 옮겨갑니다. 주변 상가를 먹여살려온 지원과 지검이 이전하면 이 상권도 같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변 지역 경기 부양 효과가 큰 주상복합 건물의 신축이 필요한 겁니다.”
그는 또 “도시계획 자체가 과거의 ‘1도심 5부심 체제’에서 이제 ‘다핵 체제’로 바뀌어가는 추세 아니냐”며 “직주근접 기능이 강화되고 있는 마당에 과거에 만든 도시계획의 틀만 고집하는 서울시의 반대는 근거가 충분하지 못하다”고 했다.
최근 이 구청장이 서울시를 강하게 몰아치자 오세훈 시장도 한발 물러서는 모양새다. 2010년 시장 재선 도전을 공언해온 오 시장 입장에서는 이 구청장과 맞서며 강북 민심을 자극하는 게 부담스러울 수 있다. “오세훈 시장과도 수차례 만났습니다. 오 시장도 작년 12월 노원구의 상공인 250명을 대상으로 한 강연회에서 ‘개인적으로는 법규 한도 내에서 높은 층의 건축물을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한 바 있습니다.”
현재 노원구의 55층 주상복합사업은 서울시와 입장을 절충하는 식으로 타협이 이뤄져 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노근 구청장이 서울시를 상대로 목소리를 높인 것은 실은 ‘역사’가 깊다. 서울시나 이른바 강남의 부유한 구청들을 상대로 한 ‘쌈꾼’이란 얘기도 한다. 그는 ‘준공 후 40년 이상 아파트’만을 대상으로 삼은 서울시의 재건축 조례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해 왔다. 건축법은 준공 후 20년 이상된 아파트만 재건축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자치단체별 조례는 20년에서 40년까지 기준이 들쭉날쭉하다. 대개 지방 아파트는 20~30년, 서울은 40년 이상을 재건축 대상으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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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원구가 건설을 추진 중인 55층 주상복합.
“지방 아파트는 20년이고 서울 아파트는 40년이라는 기준 자체가 말이 안 됩니다. 똑같은 건설사가 지은 아파트인데 지방 아파트는 부실하고 서울 아파트는 튼튼하다는 게 말이 됩니까. 한강 이남의 잠실과 반포 아파트는 당장 무너져 내릴 것이 걱정돼서 재건축을 허가했습니까?” 서울시는 1998년 외환위기 직후 부동산 경기 진작 차원에서 반포·도곡·잠실 등 5개 저밀도지구 5만여가구에 대해 재건축 규제를 대폭 완화했었다. 하지만 이후 강남발 부동산 폭등이 사회문제가 되자 2003년 조례를 개정해 재건축 연한을 40년으로 연장하는 등 규제를 다시 강화했다. 이 구청장은 “강남 지역은 IMF 경제위기 때 부동산 경기 부양을 목적으로 일시적으로 재건축을 허용하는 바람에 재건축이 거의 끝난 상태인 반면 강북 지역은 경제위기가 끝나자 오히려 재건축 규제가 강화되면서 재건축 사업들이 지연되고 있다”며 “그 때문에 강북의 일부 지역은 이미 슬럼화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고 했다. 그는 오락가락하는 서울시의 재건축 규제를 빗대 “축구 경기도 실력이 아닌 심판 판정 때문에 지게 되면 관중이 들고일어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이 구청장은 강남권 구청들이 볼 때 정말 ‘악동’이다. 얼마 전에도 임대주택 건립 문제를 놓고 강남구와 서초구를 싸잡아 비판하다가 맹정주 강남구청장과는 가시 돋친 설전을 주고받았고, 박성중 서초구청장과는 토론회에서 날카로운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강남·서초 구청에서는 “왜 남의 일에 참견하냐”며 그에 대해 불만이 가득하다.
하지만 이 구청장은 강남 지역 자치단체장들과는 일전을 불사한다는 태도다. 지난해에는 강남·서초·송파 등 이른바 ‘강남 3구’를 주 타깃으로 한 재산세 공동과세제도 도입 전쟁에서 승전고를 올린 바 있다. 공동과세제도는 서울시가 구청이 걷는 세금인 재산세의 50%를 재정이 열악한 다른 구청에 나눠주는 것. 당연히 도입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재정이 풍부한 강남·서초·송파의 극심한 저항에 부딪혔었다. 하지만 당시 이 구청장은 “강남 개발 자금의 근본 출처를 따져 보자”는 논리로 강남권 자치구들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지금의 강남이 자신만의 노력과 능력으로 이룩된 것이라고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어디 한번 원조를 따져 봅시다. 허허벌판 황무지이던 강남이 누구 돈으로 이만큼 발전했습니까. 강북 사람들이 낸 세금으로 한강다리를 놔주고, 좋은 학교들 다 옮기고, 서초동 법조단지와 예술의전당을 짓고, 올림픽까지 개최해서 이만큼 발전한 것 아닙니까. 이제는 반대로 강남 돈으로 강북을 발전시키자는 것인데 뭐가 문제입니까?”
그는 강남 지역 구청장들이 내세웠던 ‘세금은 세금을 거둔 곳에서 써야 한다’는 방어논리도 조세의 정책적 기능을 들어 무력화시켰다. “조세에는 ‘자원취득기능’과 ‘자원분배기능’ 그리고 ‘경기조절기능’이 있습니다. 강남구에서 세금을 거둬들였다고 해서 원천적으로 그 세금에 대한 권리를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주민세와 자동차세는 노원구나 강남구 등 각 자치구에서 걷지만 서울시에서 다 가져가죠. 이처럼 강남구 재산세의 경우도 ‘정책적 판단’에 따라 충분히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는 겁니다.”
특히 그는 강남구의 임대주택정책에 관해서도 ‘실체 없는 정책’이라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강남구에서 그린벨트 해제지역이 아닌 기존의 역세권에 임대주택을 짓겠다고 했는데 전문가가 보기에 이 말은 결국 임대주택을 안 짓겠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또 강남구에서 주장하는 역세권 임대주택은 무늬만 임대주택입니다. 강남구 역세권에는 임대주택을 지을 땅도 없고 짓는다고 해도 전세금만 최소 2억~3억원에 달할 겁니다. 결국 서민층을 대상으로 하는 임대주택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렇다고 이 구청장이 일손을 놓은 채 비판만 하는 타입도 아니다. ‘강북의 대표주자인 노원구에 강남을 능가하는 복합컨벤션센터를 유치하겠다’는 등 야무진 발전 계획도 속속 추진하고 있다. 노원구 한가운데 자리잡아 지역 발전에 걸림돌이 되어버린 지하철 4호선 창동 차량기지와 바로 옆 자동차운전면허시험장을 시 외곽으로 이전하고 그 자리에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보다 큰 복합컨벤션센터를 유치하겠다는 계획이 대표적이다. 부지 면적(7만5000㎡)만 코엑스(5만3000㎡)의 1.5배가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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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노원구에 들어설 이 복합컨벤션센터의 경쟁력을 코엑스와 비교해 강조했다. “코엑스는 올림픽대로의 교통 체증이 심해 접근성이 떨어집니다. 반면 노원의 복합컨벤션센터는 뻥 뚫린 외곽순환고속도로를 이용할 경우 50분 내외면 인천공항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대신 창동차량기지는 남양주로 이전하기로 남양주시와 합의했습니다. 상계동 당고개에서 끝나는 지하철 4호선을 남양주 진접지구까지 연장하는 조건이지요. 차량기지 이전에는 오세훈 시장도 적극적으로 지원 의사를 밝혔습니다.”
이 구청장이 오세훈 시장이나 맹정주 강남구청장 등을 상대로 연일 날을 세우자 일각에서는 그 배경에 ‘정치적 목적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던지기도 한다. 1년 앞으로 다가온 서울시장 선거에서 강북 지역의 표를 결집해 서울시장 자리에 도전하려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난 직업 공무원이지 정치색은 전혀 없는 사람”이라며 “과거 강남구에서도 근무해봤고 서울시에서 주택정책도 다뤄봤다. 주택정책 전문가로서 부당하고 불공평한 것을 참지 못하는 것일 뿐”이라며 정치적 야심설을 일축했다.
이 구청장은 자신의 말대로 전형적인 직업공무원이다. 1976년 19회 행정고시에 합격한 이후 강남구(시민국장), 도봉구(재무국장), 중랑구(부구청장), 금천구(부구청장), 종로구(부구청장), 서울시청(문화과장·주택기획과장) 등을 두루 거쳤다. 특히 서울시 공무원 시절에는 ‘아이디어맨’으로 불리기도 했다. 요즘 외국인 관광객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덕수궁 수문장 교대식, 인사동 순라군 행렬 등이 그의 머리에서 나온 작품이다.
“영국 런던의 버킹엄궁 앞을 지나갈 기회가 있었는데 근위병 교대식을 하더군요. ‘아니 영국도 하는데 우리가 왜 못하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이후 각 대학의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들을 두루 만나서 이것저것 물어보니 정작 교대식에 관해서는 자료가 없더군요. 마침 그 당시 조선왕조실록 한글판 CD롬이 나왔는데 그걸 보고 관련 자료를 일일이 수집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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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수문장 교대식이 성공적으로 자리잡기까지는 우여곡절도 많았다고 한다. 누군가가 당시의 조순 시장에게 ‘역사적 고증이 완벽하지 않아 향후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말한 것이 문제가 됐다. “학자 출신인 조순 전 서울시장은 고증 문제가 불거질 것을 우려해 수문장 교대식 추진에 소극적인 입장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왕궁 수문장 교대식은 역사적 의미보다 관광자원의 성격이 더 강합니다. 광화문이 아닌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다니는 덕수궁 앞을 선택한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고증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보완해 나갈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결국 이후 고건 전 시장이 적극적으로 밀어줘서 덕수궁 수문장 교대식이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수문장 교대식은 이제 서울의 대표적 관광자원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지금은 덕수궁뿐 아니라 경복궁·창덕궁을 비롯 전국 각지에서 거행하고 있다. 2003년 5월부터는 덕수궁 수문장 교대식의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역시 그의 머릿속에서 나온 ‘인사동 순라군 행렬’이 시작됐다. 매주 일요일 오후 5시에 인사동 거리에서 조선시대 순찰을 도는 순라군(巡邏軍) 행렬을 재연한 행사다. 시정잡배를 격투 끝에 체포하는 포졸들의 화려한 액션까지 가미돼 인사동을 찾는 내외국인 관광객들로부터 호응을 얻고 있다.
그의 이런 아이디어들은 어디서 나올까. 그는 자신의 ‘완찰(完察) 6법’을 꼽는다. 완전히 관찰하는 6가지 방법이란 의미의 ‘완찰 6법’은 △겉을 보는 표찰(表察) △속을 뚫어보는 통찰(通察) △자세히 살피는 세찰(細察) △역지사지(易地思之)로 보는 역찰(易察) △균형 잡힌 시각으로 보는 균찰(均察) △시대흐름에 비추어 보는 동찰(動察)의 6가지를 모아 직접 명명한 것이다. 노원구청 직원들은 한때 드라마로 유행했던 궁예의 ‘관심법’에 비교하기도 한다.
그는 최근 노원구에서 개발한 ‘시각장애인용 음성안내 내비게이션’을 예로 들어 ‘완찰 6법’을 설명했다. “얼마 전 한 장애인이 한강에 투신한 일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사건의 겉만 보고(표찰) ‘안됐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그칩니다. 하지만 저는 왜 그 장애인은 자살했을까(통찰), 장애인들이 살아가는 데 무엇이 문제인가(세찰), 내가 장애인이 되면 어떨까(역찰), 일반인은 어떻게 생각할까(균찰), 과거 장애인 정책은 어떻게 변했을까(동찰)에 이르기까지 동시다발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는 시각장애인 자살사건을 이렇게 ‘완찰 6법’을 동원해 살피고 구 예산을 투입해서 한 IT업체와 공동으로 ‘시각장애인용 내비게이션’을 개발했다. 시각장애인이 들고 다니면서 음성으로 길 안내를 받을 수 있는 장비로 곧 상용화를 앞두고 있다.
그는 “이제 구청장이 주민들과 만나서 악수나 하고 술 한잔 하던 ‘새마을 시대’는 지났다”며 “구청장도 이제는 일로써 무엇인가를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수필 쓰는 구청장 이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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