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
한글 575
- 류준열
방탄소년단 팬클럽 ‘아미’는
노래를 우리말로 따라 부르며
한글을 전 세계에 전파하는 우리말 첨병이 되었고,
드라마와 영화, 상품을 통하여
우리말과 한글이 세계로 번져 나가는 놀라운 현실,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대왕이 500여 년 후 세계 젊은이들이
우리말로 된 노래를 따라 부르고,
세계 각국의 학교에서 한글을 배우는 광경 상상이나 했을까.
*류준열: 수필가. 작품집 ‘무명 그림자’ 등. 천상병 문학제추진위원장, 이형기 기념사업회 부회장
절이 있던 경남 Y시에서 지리산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지만, 그녀가 내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었다. 최근 외삼촌을 뵙고 싶었는데, 상황이야 어떻든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은 즐거웠다. 그는 평생, 결혼하지 않은 채 지리산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젊은 시절, 통기타 가수를 하며 유유자적하게 살았던 외삼촌으로 인해 나는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지리산 초입에 이르자, 산수유, 매화, 개나리 등이 지천이었다. 차창을 열고 나와 그녀는 봄 향기를 한껏 맡았다. 나보다 그녀가 더 좋아해서 나는 갑작스러운 제안이었지만, 날짜를 정하고 그날에 맞추어 가는 것보다 오히려 이편이 더 나은 것 같았다. 빨리 가야 한다는 강박감에 고속도로 휴게실을 그냥 지나친 나는 원지 시외버스터미널이라는 팻말을 확인하고 그쪽에 잠깐 차를 세웠다. 무산 시나 동부 경남에서 지리산으로 가기 위해서는 꼭 지나치는 이곳은 시골 마을치고는 꽤 번잡했다. 교통요충지이고 면 소재지가 이곳에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나는 근처 가게에서 외삼촌이 좋아하는 정종 두어 병과 초콜릿, 등 과자 몇 봉지를 샀다. 내가 고등학교 졸업 때 외삼촌은 졸업 축하기념으로 자신의 민박집에서 함께 정종을 먹었다. 그 시절이 뚜렷하게 기억나는 것은 비단, 술 때문은 아닐 것이다. 외가 핏줄이지만 외삼촌과 나는 넉넉한 정이 있었다. 그래도 아내 대신, 유희를 데려가면 그가 어떻게 반응할까, 하고 살짝 걱정은 되었다.
“아직 멀었어요? 외삼촌 댁이?”
그새 화장실에서 화장을 고친 그녀가 생글거리며 물었다. 시외버스 정류소에 젊은 여자들이 꽤 있었지만, 그녀는 단연 돋보였다.
“응, 여기서 사십 여분을 더 가야 해.”
“그렇게 많이요? 와. 여기도 지리산 같은데, 더 들어가면 얼마나 경치가 아름다울까.”
그녀는 마치 소풍 나온 소녀처럼 신이 나 있었고 살짝 들떠있었다. 나는 이곳에 오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원지를 출발해 단성교를 지날 때였다. 계속 창밖을 두리번 그녀에게 나는 이 지역에 대해 마치 많이 아는 것처럼 소개했다.
“여기가 ‘단성’이란 곳이야. 예전 조선 시대 때에는 현감이 있었어. 그 말은 이곳이 그때는 이 지역의 중심지였단 말이지. 지금은 아니지만.”
“그래요? 아까 원지보다 더 시골스럽게 보이는데.”
“사람도 그렇듯 지역이란 것도 세월 따라 달라지는 모양이야.”
그러기나 말기나 그녀는 여행이 즐거운지 콧노래를 불렀다.
“피곤할 텐데, 잠깐 눈 좀 붙여. 도착하면 내가 깨워줄 게.”
“피곤하지 않아요. 이렇게 경치가 좋은데 잠은 무슨 잠?”
그렇게 말을 해놓고선 그녀는 단성을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잠이 들고 말았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나는 갓길에 잠시 차를 세우고 내 쪽으로 기댄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이건, 반칙이에요.”
낮게 깔린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 나는 다시 엑셀 레이드를 밟았다.
마침내 목적지였다. Y시에서 빨리 온다고 했으나 민박집에 도착하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외삼촌은 안내실에서 멀리 차가 들어오는 것을 봤다며 마당에 서 있었다.
“어서 와. 먼 길에 고생 많았지?”
외삼촌은 작업복 차림이었지만, 경륜과 기품이 넘치는 산사람처럼 늙어있었다.
“유희 씨. 인사드려. 외삼촌이야.”
“안녕하세요?”
막 잠에서 깬 그녀는 여기가 어딘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이내 상황판단이 되는지 조심스럽게 외삼촌에게 허리를 굽혔다.
“잘 왔어요. 그래, 우리 조카랑 어떤 사이이신가?”
외삼촌의 말에 내가 급하게 대답했다.
“직장 후배입니다. 몇 달 전에 서울에서 내려왔는데, 평소 지리산에 가보고 싶다 하여 오늘 마침, 시간이 되어 함께 왔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당연히 방을 두 개 내주어야겠지? 참! 아직 밥 안 먹었지?”
“그럼요. 외삼촌이랑 오랜만에 술도 한잔하려고 빈속으로 왔죠.”
“좋아. 이럴 줄 알고 미리 마당에 불을 피워놓았어. 오랜만에 흑돼지나 구워 먹자꾸나. 일단, 따라오너라. 방부터 잡아야지.”
외삼촌은 성큼성큼 먼저 민박집으로 들어갔다. 뒤이어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뒤따르다 그녀에게 아쉬움을 표현했다.
“왜 방이 두 개람? 눈치 없이.”
그녀는 키득거리며 내 옆구리를 찔렀다.
옷을 갈아입고 마당에 나오니 해는 서산으로 빠지면서 노을이 지고 있었다. 지척엔 푸른 숲이요, 민박집 주위엔 꽃들로 장관이었다. 그녀는 이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너무 멋져요!”
“그래, 덕분에 나도 잘 온 것 같아.”
나는 은근슬쩍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렀으나, 그녀는 가볍게 뿌리치면서 눈짓을 했다. 하긴, 민박집에는 우리뿐만 아니라, 봄꽃놀이 온 손님들이 제법 있었다. 외삼촌은 마당 한쪽에 고기를 굽고 있었다. 얼른 가서 거들어주고 싶었으나 그는 손을 저었다.
“고기도 굽어본 사람이 굽는 거야. 오랜만에 왔으니, 예쁜 아가씨랑 먹기나 해.”
노련한 외삼촌의 입담과 고기 굽은 솜씨는 여전히 일품이었다. 흑돼지는 일반 돼지고기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쫄깃하면서 향이 달랐다. 고기를 마저 구운 후 마침내 외삼촌은 나의 술잔을 받았다.
“집에는 별일 없고? 네 처와 아이들은?”
외삼촌은 의례적인 인사를 한다 했으나, 듣는 나는 솔직히 불편했다. 하지만 사정을 모르는 그로서는 당연한 질문이었다.
“다 잘 있어요.”
“그래, 아가씨는 직장 때문에 혼자 무산 시에 있다는 거요?”
“네, 그렇게 되었어요.”
“어쨌든 여긴 잘 왔어요. 그렇지 않아도 내가 요즘은 나이가 들어서인지, 자꾸 외롭고 쓸쓸했는데, 오늘 내 사랑하는 조카와 아가씨와 함께 있으니 힘이 나구먼. 허허.”
그러고 보니 외삼촌은 많이 늙어있었다. 아내도 아이도 없이 혼자 사는 처지인 걸 뻔히 알면서도 자주 연락을 못 한 게 마음에 걸렸다.
“림아. 우리 오랜만에 기타 한 번 칠까?”
술이 반병쯤 들어가자 외삼촌은 기분이 좋은지 노래 이야기를 꺼냈다.
“기타요? 아니 그럼 외삼촌도 기타 치세요?”
깜짝 놀란 그녀가 날 바라보았다. 나는 외삼촌의 전력을 말할까, 하다 본인이 하는 게 더 낫다고 판단하여 입을 다물었다.
“서울에 산다 그랬죠? 지금은 없어졌겠지만 내가 젊었을 때 고정적으로 노래하던 곳이 있었어요. 명동에 있는 「OB’S CABIN’」이라고 들어봤나요? 쎄씨봉도 당시 나와 함께 출연했는데.”
“와우! 대단하셔요. 쎄시봉이라면 송창식, 윤형주, 조영남, 김세환 씨 말하는 거 맞죠? 그분들과 함께 음악을 하셨다니. 그래서 여기 계신 우리 과장님도 기타를 잘 치시구나. 역시 핏줄은 못 속여요.”
외삼촌은 안내실에서 기타를 가져왔다. 밤하늘엔 별들이 반짝이고 마당엔 모닥불이 피워져 있었다. 풀벌레 소리만 들릴 뿐 사방은 고요하고 적막했다. 드디어 젊은 시절, 자신을 불태웠던 노래를 외삼촌은 기타로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 처음 만난 날.
비가 몹시 내렸지
쏟아지는 빗속을
둘이 마냥 걸었네」
이쯤 들으니 이 노래는 김세환 씨가 부른 ‘비’란 것을 알 수 있었으나, 그녀는 연배가 한창 낮으니 당연히 모르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오산이었다. 후렴 부분을 부를 때, 그녀도 나처럼 이 노래를 따라부르고 있었다.
「먹구름아 모여라, 천둥아, 울리렴.
오늘 비가 내리네. 하염없이 내리네.
…….
눈물처럼 내리네.」
아르페지오 주법과 경쾌한 슬로우 고고 풍의 주법을 섞어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한 외삼촌의 노래에 유희는 완전히 황홀경에 빠진 듯했다.
“다음은 한때 대학가에서 기타 좀 만져본 우리 조카님.”
바람은 약간 쌀쌀했다. 하지만 도시에서 보기 힘든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나는 사랑하는 그녀를 위해 노래를 부른다는 자체에 엄청나게 떨렸고 가슴이 뛰었다. 나는 기타의 6번 줄에서부터 1번 줄까지 손가락으로 천천히 긁었다.
「필요 이상 말하진 않을게.
느낌으로 얘기할 수 있어.
…….
그대를 사랑해요」
내 노래는 끝났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는 울고 있었다. 사위는 어두웠지만, 모닥불에 비친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기타만 잡고 있었는데, 마침 외삼촌이 조용하게 물었다.
“네가 만든 거야?”
“네.”
“곡목은?”
“그대에게.”
“선율과 가사가 참 아름답구나. 최림아!”
외삼촌은 손수 내게 잔을 따라주었다.
“너, 요즘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구나.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호소력 짙은 노래가 나오지 않는 법이지. 하하. 축하한다.”
나는 그의 의외의 말에 몸 둘 바를 몰랐다.
“사랑?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야. 나도 언제인가 모를 정도로 이 단어를 잊고 살았지. 상대가 누구이든, 사랑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지. 암, 그렇고말고. 자! 나는 이제 들어가마. 둘이 할 얘기도 많을 터니, 천천히 하도록 해.”
외삼촌은 할 말만 하고선, 안내실로 들어갔다. 밤하늘의 별들이 마치 모닥불이 있는 나와 그녀의 동그란 테두리에만 비치는 것 같았다.
“왜 그래?”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등을 감쌌다.
“너무 행복해서요.”
그녀는 거침없이 내게 기댔다. 재스민 향이 내 얼굴 쪽으로 풍겨왔다. 나는 그녀의 입에서 행복, 이란 말이 나오자, 이상하게 내 눈에도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음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