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남지는 낙동강을 끼고 있는 고장이다.
4월이면 낙동강변에 심어놓은 유채꽃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낙동강변 따라 만들어 놓은 개비리길을 걸으면서 낙동강 풍경을 즐기기기도 한다.
아름다운 낙동강 풍경을 보여주는 곳이지만 1950년 한국전쟁때는 피로 물든 강이였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과 북한군 그리고 국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역사 현장을 찾았다.
찾아 간곳은 남지읍 고곡리 윤씨부자 비가 있는 모은정과 박진전쟁기념관 이였다.
학교에서 방문하는 곳이지만, 유레가 기자단 친구들끼리 와서 보고 듣고 이야기 나누면서 전쟁의 아픔을 생각하며 평화로운 세상을 기원해봤다.
창녕 남지읍에 있는 박진전쟁기념관.
남지읍 고곡리 윤씨부자 비각.
피란 중에도 공동체 나눔을 실천한 사람 윤씨 부자 -남지읍 고곡리 살구정에 가면 모은정이 있다. 앞에 <경인란세관정현부자시혜비>가 비각 안에 있다,
1950년 8월3일 피난길에 오른 남지사람들은 밀양 초동면 신호리 초동 수리조합저수지 제방에 도착한다. 8월8일 해질 무렵 이미 수천명의 피란민이 재방을 덮어 이들은 모두 풀 섶에 앉고 누워 밤을 맞이했다. 손씨가 이곳에서 만난 사람은 윤 정현(당시44세)이다. 6척의 큰 키에 건장한 40대 농부가 산더미 같은 보리짚 더미 앞에 서서 피란민들을 불러 모아 땅바닥에 깔보리 짚을 나누어 주고 있었다. 윤씨는 이틀째 피란민에게 보리짚을 나눠 주고 있었다, 방에 비가 내리자 피람민을 10여가구에 분산시켜 비를 피하도록 했다.
노인과 어린이들을 위해 죽을 쑤어 주었다. 10일이 지나자 피란민들도 양식이 떨어졌다. 윤 씨는 창고를 영어 보리를 찧어 보리쌀을 나누어 주기 시작했고, 땔감 소금, 된장까지도 나누어 주기 시작했다, 피란민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면 갚겠다고 했다. 10월까지 피란을 하고 있었으니 윤씨도 가진 식량이 다 떨어졌고 된장마저 다 떨어져 소금으로 반찬을 대신하기도 했다.
윤씨 가족도 죽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본 피란민들의 감동은 말 할 수 없었다. 1956년 11월 윤씨를 위한 위로연을 갖기도 하고 윤 씨의 선덕을 기억하는 주민들에게 모여 달라는 유인물을 군내 각 마을에 돌렸다, 6개 읍면 약 300여명이 참석하여 사은 행사를 했다. 헌시가 200여편 사은문이 10편이었다. 사은 행사를 하기전에 윤씨를 찾아 곡식과 돈을 전달하고자 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고 한다. 이 기회에 모은계를 조직하여 윤 씨의 정신을 영원히 잊지 말자고 하였다. 그리하여 살구정에 1973년 12월 은혜를 사모한다는 모은각을 세우고 비각을 지어 시혜비를 세워 매년 그를 기리고 있다. 이런 일은 전국에서 처음 있었던 일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한국일보 등에 널리 보도 되었고, 보은계 활동상황과 계원 명단을 기록한 창선록을 발간하였다. 윤씨부자세관정현병인란시혜비 난리에 먹을 것이 없으니 어떻게 살소냐, 시든 얼굴들 허등지둥 하는 사람이 수백명이로다 아버님 말씀이 이를 구원하라 하시기에 아드님이 이를 행하여 두 달이 경과하니 가산이 다 기울어졌도다 이가 은혜가 된지라 어찌 가슴에 새기지 않으리오 하여 비를 마련하여 천억대를 길이 보이노라. |
박진전쟁기념관 2024년 6월에 기념관 내부를 새롭게 단장을 했다.
그런데 기념관 바닥을 너무 미끄러운 타일로 깔아 아이들이 미끄럼을 탔다.
비가 오는날은 바닥이 미끄러워서 넘어지는 사람도 생길 것 같다.
2317 이현지 저는 박진전쟁기념관에 가서 기사단 활동을 하였는데 원래 전쟁에 크게 관심이 없던지라 큰 기대 없이 가서 활동에 참여했는데 예상과는 다르게 매우 좋았습니다. 선생님은 전쟁 기념관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전생을 기념하는게 아닌 평화를 기념해야한다고 하셨습니다. 듣고보니까 전쟁 기념관에 대해 조금은 흥미가 생겼습니다. 짧은 동영상을 보고 들어가서 조사하였는데 거의 다 6.25전쟁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6.25전쟁에 대해서는 원래도 많은 내용을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아는게 적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전쟁에서 실제로 사용했던 총이 전시되어있는데 평소 게임에서 보는 총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실제로 총을 보는 것은 처음이기에 조금 신기했지만 선생님은 자신의 친구와 가족을 죽이는 무서운 무기라고 하셨지만 저는 그 무기가 있었기에 우리 나라를 지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북한과 남한 통일에 대한 생각이 많이 복잡해졌습니다 원래 좀 쉽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때까지의 전쟁과 논쟁을 보니 큰 문제 인것 같아서 6.25에 대해 큰 관심이 없던 것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이제부터는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져볼려고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