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중순(10수)
하루시조 315
11 11
달 밝고 바람은 찬데
무명씨(無名氏) 지음
달 밝고 바람은 찬데 밤 깊고 잠 없어라
북녘 다히로 울어 예는 저 기럭아
짝 잃고 우는 정이야 네오 내오 다르랴
다히로 – 따히로. 땅으로.
거의 한글로 지어진 옛시조인지라 참 반갑습니다.
님을 잃은 슬픈 마음을 기러기를 불러와 이입(移入)시켰습니다.
초장의 우리말 시어들, 달 바람 밤 잠 등이 주는 정서가 친근합니다. 서당개 풍월(風月)이 곧 바람과 달이니 더욱 그렇습니다. ‘네오 내오’는 ‘너나 나나’의 현대어보다 더 운율이 좋게 느껴지고요.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316
11 12
금준에 술을 부어
무명씨(無名氏) 지음
금준(金樽)에 술을 부어 옥수(玉手)로 상권(相勸)하니
술맛도 좋거니와 권(勸)하는 임(任)이 더욱 좋다
아마도 미주미행(美酒美行)은 너뿐인가
금준(金樽) - 금 술통. 여기서는 금잔(金盞)의 뜻도 있다.
옥수(玉手) - 임금의 손. 어수(御手). 여기서는 미인의 손이라는 뜻도 있다. 섬섬옥수(纖纖玉手).
상권(相勸) - 서로 권함.
임(任) - ‘님’의 한자 표기.
미주미행(美酒美行) - 좋은 술에 고운 행동. 좋은 술을 권하는 미인의 마음.
자고로 술은 권하는 맛으로 한 잔 더 한다고 합니다. 거기에 섬섬옥수 미인의 권함이야 일러 무삼 하겠습니까. 곁에서 술을 쳐주는 미인에게 답례로 한 가락 읊었을 법한 노래입니다.
종장 끝구의 생략은 시조 창법(唱法)에 의한 것으로 ‘하노라’ 정도가 되겠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317
11 13
기러기 외기러기
무명씨(無名氏) 지음
기러기 외기러기 동정소상(洞庭瀟湘) 어디 두고
반야잔등(半夜殘燈)에 잠든 나를 깨우는다
이후(以後)란 벽파한월(碧波寒月)인 제 영배회(影徘徊)만 하리라
동정소상(洞庭瀟湘) - 동정호와 소상강. 동정호는 중국 지명 ‘둥팅호’를 우리 한자음으로 읽던 이름. 중국 후난성(湖南省) 동북쪽에 있는 호수. 샹장강(湘江江), 쯔수이강(資水江), 위안장강(沅江江) 따위가 흘러 들며 호수 안에는 웨양루(岳陽樓) 따위가 있어 아름다운 경치로 유명하다. 소상은 샤오상의 우리 한자음으로 읽은 것으로, 중국 후난성(湖南省), 둥팅호(洞庭湖) 남쪽에 있는 샤오수이강(瀟水江)과 샹장강(湘江江)을 아울러 이르는 이름. 부근에 경치가 아름다운 샤오샹 팔경이 있다.
반야잔등(半夜殘燈) - 한밤중 등잔불도 꺼져가는 때.
깨우는다 – 깨우는구나.
이후(以後)란 – 앞으로는.
벽파한월(碧波寒月) - 푸른 물결 추운 달. 한겨울의 달밤.
제 – 때.
영배회(影徘徊) - 그림자 노닐기.
기러기 중에서도 짝 잃은 외기러기와, 밤늦도록 잠 못 이루는 작가가 동심(同心) 일체(一體)입니다. 중국의 지명이 나와서 중국인가 싶지만도 예전의 선인들은 중국 땅이 곧 우리 땅이었답니다. 급기야 조선이 곧 소중화(小中華)였다지요. 암튼 유명한 동정호로 가지 않고 내게 왔구나 반기면서도 다음에는 겨울날 그림자만 저 혼자 배회하도록 해야겠구나 마음을 먹습니다. 심란한 자기까지 야심한 시각의 기러기를 쫓아다니지는 말아야겠다는 다짐인데, 작품의 끝마무리일 따름일 터이지요.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318
11 14
나도 이럴망정
무명씨(無名氏) 지음
나도 이럴망정 옥계난초(玉階蘭草)이러니
추상(秋霜)에 병(病)이 들어 낙엽(落葉)에 묻혔어라
어느 제 동풍(東風)을 만나 다시 순(筍) 나 보려노
이럴망정 – 요 모양 요 꼴이지만.
옥계난초(玉階蘭草) 오 계단에 놓인 난초.
이러니 – 이었더라니.
추상(秋霜) - 가을의 찬 서리.
동풍(東風) - 동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봄바람.
나이 들었음을 한탄하는 노래입니다. 이래봬도 고울 적에는 향기마저 고고한 난초였거늘 지금은 낙엽에 묻혀 남의 눈에 띄지도 않는 신세랍니다. 누가 아니랍니까, 인생(人生)은 초로(草露)와 같다지요. ‘오늘이 가장 젊은 날’이라고 믿고 끝까지 가는 수밖에요.
종장은 착각이 심합니다. 새봄에 새순이 나는 것은 진짜 난초의 일생이고요, 우리네 인생은 일회성이니 겨울이 오면 조용히 근원(根源)으로 돌아가는 겝지요.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319
11 15
낙엽이 말발에 지니
무명씨(無名氏) 지음
낙엽이 말발에 지니 잎잎이 추성(秋聲)이라
풍백(風伯)이 비 되어 다 쓸어 버리도다
두어라 기구산로(崎嶇山路)를 덮어둔들 어떠리
말발 – 말 발굽.
추성(秋聲) - 가을철 바람 소리.
풍백(風伯) - 바람의 신. 단군신회에 단군의 신시(神市) 개창에 풍백 운사(雲師) 우사(雨師)가 동행하였다고 합니다.
기구산로(崎嶇山路) - 험하고 험한 산길.
작자는 말을 타고 가을 낙엽 풍경에 자신을 들여 놓고 있습니다. 달리 보면, 말 탄 일련의 군대 또는 어떠한 시대적 흐름으로도 풀어질 수 있습니다.
낙엽이 쌓인 길. 도시인들에게는 낭만적일 수도 있겠고요, 실제로 한동안 쓸지 않고 내버려 두기도 합니다. 바람비를 든 풍백은 우리들이 잠잘 때 부지런히 쓸어버리곤 하지요. 자연이 하는 일인데 내버려 둘 수밖에요.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320
11 16
남도 준 바 없고
무명씨(無名氏) 지음
남도 준 바 없고 받은 바도 없건마는
원수(怨讐) 백발(白髮)이 어드러로 온거이고
취(醉)하고 화방(花房)에 지내자 하니 죄(罪)지은 듯 하여라
바 - 앞에서 말한 내용 그 자체나 일 따위를 나타내는 말.
백발(白髮) - 하얗게 센 머리털.
어드러로 – 어디로부터 어떻게.
화방(花房) - 꽃집. 여기서는 젊은 여인네의 집일 수도 있다.
백발이 저도 모르게 어디서 어떻게 느닷없이 왔을거나, 놀람이요 한탄입니다. 백발이란 게 서로 ‘주고 받는’ 것이 아니라는 일반론으로 초장의 긴장감을 더했습니다.
제 장인 어른께서는 백발을 넘어 낙발(落髮)까지도 훌륭한 시제(詩題)로 삼았더랍니다. 늙음을 인정하고 함께 늙어가야겠습니다.
나이가 들어 머리가 세면 취하자니 그렇고 꽃방에 들어 살기도 그렇고. 조화롭던 일이 뜬금없어지나 봅니다. 그렇다고 죄지은 듯하기까지야 하겠습니까만, 그런대로 과장(誇張)이 솔직(率直)으로 절창(絶唱)이 되었습니다.
초장과 중장이 같고 종장이 다른 작품도 두엇 있는데, ‘백발이 공도(公道) 없도다 나를 먼저 배안다’ 등이 그것입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321
11 17
늙은 줄 모르더니
무명씨(無名氏) 지음
늙은 줄 모르더니 아해(兒孩)가 자랐구나
이 아해(兒孩) 다 늙어서 어드러로 가려 하노
두어라 천명(天命)이 유수(有數)하니 갈 데 알아 무삼 하리
아해(兒孩) - 아이.
천명(天命) - 타고난 수명. 천수(天壽).
유수(有數) - 헤아림이 있음. 정해진 숫자가 있음.
늙은이의 대오각성(大悟覺醒)이 글쎄 아잇적 생각으로부터 왔습니다. 내 나이 몇인지 생각 안 나다가 곁의 아이들 커버린 걸 보면 그 때서야 헤아리게 된다지요. 중장의 ‘어디로 가는 것일까’하는 질문에 답을 못 하고 쩔쩔 매곤 한다지요. 그러게요. 온 데를 모르니 돌아갈 데를 또한 모를 수밖에요. 종장에서 그 딴 것은 몰라도 된다고 억지 쓰듯 말을 막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322
11 18
님이 가오실 제
무명씨(無名氏) 지음
님이 가오실 제 노구(爐口) 넷을 주고 가니
오노구 가노구 그리노구 여의노구
이제는 그 노구 다 모아 가마나 질까 하노라
노구(爐口) - 부뚜막. 솥.
이 작품에서는 핵심 단어가 ‘노구’입니다. 소리와 뜻이 번갈아 쓰여 말장난 같지만 자꾸 읽어보게 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음(音)만 가져다가 ‘~ㄴ구나’의 뜻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오는구나 가는구나 그리는구나 헤어지는구나를 이어 붙여 님만 생각하면 이 네 가지 상념 중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노구를 주고 간 사람은 물론 사랑하는 님이지요.
종장의 노구는 부뚜막이 여러 개인 가마로 곧장 본래의 의미를 살려 이어갔습니다. 처음에는 무슨 소린지 몰랐다가 이런 식의 억지 비슷한 풀이가 가능해지니 우리말의 재치가 느껴집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323
11 19
달아 달아 밝은 달아
무명씨(無名氏) 지음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李太白)이 놀던 달아
태백(太白)이 기경상천후(騎鯨上天後)니 눌과 놀려 밝았는다
내 역시(亦是) 풍월지호사(風月之豪士)라 날과 놂이 어떠리
이태백(李太白) - ‘이백(李白)’의 성(姓)과 자(字)를 함께 이르는 말. 중국 당나라의 시인(701~762). 자는 태백(太白).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 젊어서 여러 나라에 만유(漫遊)하고, 뒤에 출사(出仕)하였으나 안녹산(安祿山)의 난(亂)으로 유배되는 등 불우한 만년을 보냈다. 칠언절구(七言絶句)에 특히 뛰어났으며, 이별과 자연을 제재로 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현종과 양귀비의 모란연(牧丹宴)에서 취중에 <청평조(淸平調)> 3수를 지은 이야기는 특히 유명하다. 시성(詩聖) 두보(杜甫)에 대하여 시선(詩仙)으로 칭하여진다. 시문집에 ≪이태백시집≫ 30권이 있다.
기경상천(騎鯨上天) - 고래를 타고 하늘로 올라감.
풍월지호사(風月之豪士) - 풍월(風月) 곧 음풍농월(吟風弄月)을 즐기는 호탕한 선비.
이백에 얽힌 전설이 있습니다. 그가 술에 취해 채석강(采石江)에서 뱃놀이를 하다가 물속에 비친 달을 건지겠다며 뛰어들었는데, 고래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답니다. 이 풍류남아의 이야기를 아는 선비가 달더러 이르기를 ‘너 달아, 괜스레 밝았느냐, 나 또한 이백 못지않으니 함께 놀자꾸나’ 은근히 속삭이고 있군요.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324
11 20
추풍이 살 아니라
무명씨(無名氏) 지음
추풍(秋風)이 살 아니라 북벽중방(北壁中枋) 뚫지 마라
원앙금(鴛鴦衾) 참도 찰손 님 없는 탓이로다
달 밝은 영야한경(永夜寒更)에 전전반측(輾轉反側) 하소라
살 – 화살[전(箭)].
북벽중방(北壁中枋) - 북쪽 벽을 가로지르는 기둥. 중방(中枋) - 중인방(中引枋). 벽의 중간 높이에 가로지르는 인방.
원앙금(鴛鴦衾) - 원앙을 수놓은 이불. 부부가 함께 덮는 이불.
참도 찰손 – 참으로도 차가운데.
영야한경(永夜寒更) - 긴 밤의 추운 시각.
전전반측(輾轉反側) - 전전불매(輾轉不寐). 누워서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함.
하소라 - ‘하노라’보다 객관적인 표현으로, ‘그럴 수밖에 없다’는 뜻이 담겨 있음.
가을바람이 화살도 아닐진대 방이 찬바람에 식어 있고, 이불이 있음에도 참으로 차갑답니다. 이유는 단 하나, 님이 없어서입니다. 사별(死別)이라면 체념할 수도 있겠으나, 생이별(生離別)이라면 더욱 못 참겠지요.
종장 전구가 ‘다만지 한야잔등(寒夜殘燈)에’로 된 작품도 있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첫댓글 어릴 적 대중목욕탕에서 듣던 영감님들의 시조창. 집안에서는 아버지의 막 시작하는 쇳소리 시조창. 그나따나 저는 아직 창은 못하고 창작만 하고 있습니다. 완째로 가볍게 제 작품을 읊을 날이 오기는 오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