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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감>
- 앞에서 강한 감정인 분노와 슬픔을 언급했다. 이것은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정신적 충격(외상)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3장에서 그린 외상 달걀과 관계가 있다. 여기서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것은 외상에는 두 가지 유형인 외상유형 A형(Trauma Type A) 과 외상유형 B형(Trauma Type B)이 있다는 것이다.
- 외상 A형이 ‘우리가 자라오면서 우리의 삶 가운데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인데 없었던 것들’이라면, 외상유형 B형은 ‘우리가 자라오면서 우리의 삶 가운데 있지 말았어야 하는데 있었던 것들’을 의미한다.
- 외상유형 A형으로 인해 처리되지 못한 슬픈 감정, 다시 말해 상실감이 생긴다면 외상유형 B형으로 인해서는 슬픔과 분노가 생긴다. 그것을 적절히 처리하지 못할 때 자신과 상대방을 향한 적개심이 남는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느끼는 상처는 아마 외상유형 B형에 가깝겠지만, 상처를 정말 용서하기 힘든 것은 외상유형 B형보다 외상유형 A형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삶 가운데 있었어야 하는 것인데 없었던 것’이다.
- 이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가 별로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자라왔다.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같은 처지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자신이 이 외상 유형 A형으로 인해 갖게 된 상실감이 얼마나 큰지 깊은 인식이 없다. 하지만 이 부분을 다루지 않고서는 진정한 용서를 하기 어렵다. 이것은 우리 안에 채워져야 할 사랑의 욕구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 눈에 보이는 학대는 어렵더라도 용서하면 되지만 눈에 보이지 않고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조차 알기 어려운 어린 시절에 경험한 상실감은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또한 무엇을 슬퍼하고 용서해야 하는지 알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면 이 상실감이 우리의 삶 가운데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치며 상대방이 우리에게 끼친 상처를 왜 그렇게 용서하기 어려운지 살펴보자.
- <내 마음의 벽>의 저자 부루스 탐슨 박사는 다림줄이라는 치유 모델을 통해 이 상실감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사랑과 관계의 결핍으로 우리의 마음에 두 가지의 벽이 형성된다. 그것이 바로 거절과 반항의 벽이다. 이 거절과 반항의 벽은 두려움이라는 감정 속에 우리의 속사람을 가두어서 누구에게도 사랑을 받을 수 없고 줄 수 없는 상태를 형성한다.
* 거절이라는 벽의 주춧돌 - 상실감
- 상실감은 우리 안에 있는 정체성을 상실케 하는 요인이다. 특별히 가정 안에서 부모를 통해 받은 거짓말과 속임은 그것이 행동을 통한 묵시적인 메시지였든지, 직접적인 언어였든지 사랑 받기 위해 부모에게 다가갔던 아이에게 거절감이라는 거대한 벽을 형성하게 된다. 그 거절이라는 벽의 주춧돌이 바로 상실감이다. 그것이 크든 작든 거절되면 깊은 슬픔으로 우리 마음에 거절의 벽의 기초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 거절의 벽은 반항의 벽과 마찬가지로 세 가지 영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가 감정의 영역, 두 번째가 지적인 영역, 세 번째가 영적인 영역이다. 이 세 가지 영역 가운데 감정의 영역의 첫 번째 벽돌은 상실, 즉 받아야만 하는 사랑을 받지 못해서 생긴 슬픔의 벽돌이다.
- 여기서 ‘슬픔’은 우리가 슬퍼하지 못함으로 잃어버려서 생긴 상실감을 의미한다. 학대받은 것보다 더 큰 아픔은 부모님과 즐겁고 의미 있는 시간을 갖지 못한 데서 오는 슬픔이다.
- 두 번째로 이와 같은 상실감은 자기 연민의 벽돌을 만든다. 이것은 자신을 사랑해 주었더라면 하는 과거의 동경과 연민 가운데 빠지게 만든다. 이것은 계속해서 ‘뭐가 슬퍼, 너도 그렇게 해! 살기 싫어! 먹자, 숨어 살자!’하며 자신을 격리시키고, 스스로 맹세하고 관계를 파괴하는 자기 증오에 빠지게 한다. 또한 이와 같은 자기 증오는 영혼의 불꽃이 점점 더 타들어가게 함으로 삶의 의욕을 상실하게 만든다. 또한 무엇이든 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우울증을 유발한다.
- 이와 같은 우울증이 점 점 깊어지면 감정을 상실해 아무 감정을 느낄 수 없는 무감각 상태로 이어진다. 이때 자신의 감정을 찾기 위해 감각적인 것을 추구한다. 성적인 것, 자극적인 행동을 쫓아가거나 약물 또는 각성제를 먹고 중독에 빠진다.
슬픔(상실감) → 자기연민(동경) → 자기증오 → 우울증 → 무감각
- 특별히 감정적으로 예민하고 잃어버릴 것이 많은 자매들이 형제들보다 감정 영역에서 더 많은 상실감을 경험한다. 그러므로 충분히 슬퍼하고 애통해하지 않으면 그 고통을 회피하기 위해 잘못된 죄성, 습관들을 만들어 가게 된다.
-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 슬픔이라는 감정을 허락하신 하나님은 애곡하는 법과 애가를 자녀들에게 가르치라고 말씀하신다. “부녀들이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너희 귀에 그 입의 말씀을 받으라 너희 딸들에게 애곡을 가르치며 각기 이웃에게 애가를 가르치라.”(렘 9장20절)
- 내가 사역하는 동안 상실감으로 인해 심한 정신적, 신체적 고통을 당했던 사람들을 기억한다. 그녀의 표면적인 증상은 ‘폭식증’(bulimia nervosa)이었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기에 자신도 감당할 수 없이 목구멍까지 음식이 차도록 먹고 나서 먹었던 음식을 토하는 섭식장애를 앓고 있던 자매였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 부모를 따랄 영국으로 이민을 갔으나 부모님과 형제들이 언어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 그러나 다른 가족과 달리 의지가 강했던 자매는 환경이 어렵다고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신은 그냥 영국의 이모 댁에 남고 다른 가족들만 한국에 돌아오게 되었다. 비록 방학 때마다 어머니가 영국을 방문해 딸을 돌보아 주기는 했지만, 딸이 힘든 객지 생활과 이모의 잔소리와 통제를 견디기에는 힘겨웠던 것 같다. 그는 학교에서 공부도 열심히 하고 친구들과 교우관계도 원만했지만, 사랑받아야 할 사춘기에 엄마와 아빠가 없다는 것은 몹시 힘든 일이었다.
- 점점 우울한 시간이 많아지고 심지어는 자살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의 상담 선생과 면담하는 가운데 자살에 대한 질문을 받게 되었다. 자매는 아무 생각 없이 ‘자살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는 대답을 해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것은 그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자신에게 원인을 제공한 부모에 대한 증오가 점점 깊어졌다.
- 그는 자신의 무감각함을 깨우기 위해 폭식을 시작했다. 곧 먹고 토하는 폭식증으로 악화되었다. 나중에는 다른 신체 기관까지 영향을 미쳐 빈혈과 위장 문제로 건강은 몹시 악화되었다. 누구도 자매의 닫힌 마음을 열수가 없었다. 결국 학교에 휴학계를 제출하고 한국에 돌아왔다.
- 그와 상담하는 동안 자매는 문제의 근원을 강압적인 통제와 잔소리로 많은 스트레스를 주었던 이모에게 두었다. 하지만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근본적인 문제가 부모, 특별히 어머니에 대하 애착의 상실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비록 부모로 인해 고통 받긴 했지만, 여전히 부모를 사랑하며 부모에게 사랑 받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 상담을 통해 그는 직면하고 용서해야 할 사람이 부모임을 알게 되었다. 부모님을 직면하기 전에 자신이 그 동안 마음에 품었지만 부모님께 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솔직히 털어놓는 시간을 가졌다. 자신에게 ‘있어야 했지만 없었던 시간’에 대한 상실감을 표현하는 시간을 통해 죽었던 감정이 점차 회복되어 폭식증도 없어지고, 부모님도 용서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 사실 이 자매의 경우 부모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직면을 겸손하게 사랑으로 받아주었기 때문에 회복이 가능했다.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지만 상실감이 그토록 오랜 시간 자신을 고통스럽게 했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까짓 상실은 자신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별로 큰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상실에 대한 문제를 직면하기보다는 다른 것으로 자꾸 대체하며 고통을 직면하지 못한 채 도망가다가 자살을 시도하기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 치유세미나를 진행하는 동안 상실감으로 인해 고통 받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몇 년 전에 치유세미나를 통해 만난 40대 후반의 자매였다. 치유세미나 과정 중 그림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보는 시간이 있었다. 흰 백지를 나누어 주고 눈을 감고 왼손으로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자신의 상처를 그림으로 표현하도록 했다. 그림을 다 그리고 자신이 그린 그림을 나누기 원하는 사람을 앞으로 초청했다. 한 자매가 망설이다가 앞으로 나왔다. 그는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왔고, 5년 전에 남편과 사별했다고 말했다.
- 그는 약간 상기된 얼굴로 그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가 그린 그림은 큰 산같이 생긴 두 선과 그 옆에 작은 점이 있었다. 비록 그가 그리긴 했지만 자신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런데 강의하고 있는 중감에 그가 얼굴이 상기 된 채 앞으로 뛰어나오면서 이제 그 그림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림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았다.
- 그는 남편의 장례식에서 울 수 없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남편 또한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는데, 직장동료들이 장례식에 왔을 때 자신이 남편의 죽음을 크게 슬퍼하는 것을 보면 남편이 인도한 초 신자인 그들이 ‘천국은 없다’고 생각할까 봐 너무 슬프고 괴로웠지만 울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 이후 5년이 지난 오늘까지 한 번도 울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 그리고 그는 자신이 진짜 화난 이유는 남편을 그렇게 데리고 간 하나님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이 남편을 데려가실 때 단 한마디 “good-bye(잘 있어! 먼저 갈게)”라는 말만 하도록 허락했더라도 그렇게 슬프고 분노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 나는 그에게 말했다. “자매님! 자매님은 하나님에게 분노할 수 있고 또한 하나님에게 슬픔을 토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갖고 있던 잘못된 신념체계를 깨닫고 또한 자신의 남편을 빼앗아간 하나님께 분노하며 5년 동안 간직했던 슬픔을 마치 화산이 폭발하는 것과 같이 데굴데굴 구르며 깊고 강한 슬픔과 분노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 사실 그가 슬프고 분했던 것은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보다는 남편이 죽기 전에 “Say Good-bye”라는 말조차 허락하지 않았던 하나님에 대한 분노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무나도 큰 산과도 같았고, 그에 비하면 자신은 먼지와도 같은 미세한 존재였던 것이다.
- 남편을 잃은 상실감의 슬픔과 하나님께 표현할 수 없는 분노는 자매의 몸을 5년 동안 파괴해 왔던 것이다. 이제 그가 가지고 있던 많은 상실감들 중 가장 핵심적인 상실감의 회복은 그 동안 인식하지 못했던 슬픔과 분노를 느끼는 시간을 갖는 데 충분했던 것이다.
- 상실감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영화 한 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톰 행크스가 주연한 <포레스트 검프>(Forrest Gump)다.
- 포레스트 검프(톰 행크스 분)는 보통 사람보다 지능이 떨어지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육체적, 정신적인 어려움을 순수함과 성실함으로 극복해 간다. 그런 과정 중에 월남전에 참전하고 자신의 상사인 댄 중위를 죽음의 문턱에서 건져낸다.
- 하지만 이 과정 중에 댄 중위는 목숨은 건졌지만 두 다리를 잃는다. 자존심이 강한 댄 중위는 포레스트에게 감사하기보다는 평생을 불구로 살아가야 할 자신의 처지가 너무나도 괴로운 나머지 왜 자신을 전쟁터에서 영광스럽게 죽게 내버려두지 않았냐고 하며 원망한다. 전쟁 이후 불구로서 술과 여자로 절망하며 살아가던 댄 중위에게 포레스트가 찾아간다. 자신이 나중에 새우 잡이 어선의 선주가 되면 같이 새우 잡이를 하자고 제안하며 떠난다.
- 정말로 나중에 새우 잡이 어선의 선주가 된 포레스트는 댄 중위에게 편지를 쓰고 댄 중위는 포레스트를 찾아온다. 그러나 생각처럼 새우가 잘 잡히지 않자 댄 중위는 포레스트에게 그 이유를 하나님에게 물어보라고 하며 자신은 방관자적인 입장을 취한다. 포레스트는 댄 중위의 말을 듣고 교회에 열심히 나가며 성가대에서 봉사하지만 그래도 새우는 잡히지 않는다.
- 그러자 댄 중위는 하나님에게 분노하며 신은 없다고 했다. 그날 밤 엄청난 태풍을 동반한 비바람이 포레스트와 댄 중위가 타고 있는 배를 삼킬 듯이 덤벼든다. 포레스트는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댄 중위는 배 꼭대기에 올라가 하나님께 분노하며 소리친다. 마치 자신이 가장 고통스러울 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느냐고, 그렇게 믿고 신뢰하던 하나님이 두 다리를 잃은 자신에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대들 듯이 분노하며 소리치는 방면이 나온다. 긴긴 밤을 지새우고 그 태풍 속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포레스트와 댄 중위는 이제 새우 잡이에서 성공을 거듭하게 된다.
- 어느 날 댄 중위는 포레스트에게 “나를 구해 준 당신에게 감사하다는 표현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당신이 나를 구해준 것에 대해 감사한다.”면서 바다 속으로 뛰어들어 수영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포레스트는 “이제 댄 주우이가 하나님과 화해를 한 것 같다.”고 말한다. 댄 주우이가 화났던 대상은 포레스트가 아니라 자신이 믿고 신뢰했던 하나님이었다. 자신의 두 다리를 잃을 때까지 개입하지 않았던 하나님께 화가 나 있었던 것이다.
- 그러나 그는 그 동안 고통 속에서 침묵하면서 잊어버리려고 했다. 그 분노를 자신과 타인에게 쏟아 붓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났고, 그가 잃어버린 것에 대한 강한 감정(슬픔과 분노)을 하나님께 쏟아내기 원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분노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NO'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잘못해서가 아니라 그분이 우리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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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