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리가리 박사의 밀실(Das kabinett des Dr. Caligari 1920) :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모태
로베르트 비네(Robert Wiene) 감독
영화사를 통틀어 1920년대만큼 영화매체의 독자성을 밝히기 위한 실험이 활발했던 시기는 없다. 프랑스의 인상주의, 러시아의 형식주의, 독일의 표현주의가 그 시기 영화의 대표적인 경향들인데, 그들의 공통 분모는 현실을 재현한다는 영화매체의 속성에 도전해 현실을 새롭게 인식하도록, 낯설게 바라보도록 영상의 내재적 의미를 탐구하고자 한 점이다.
1919년에 제작된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은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모태가 된 작품으로서 그 서사와 시각적 특성은 당대의 가장 실험적 양상의 하나로 꼽힐 뿐 아니라 이후 수년간 지속된 표현주의 영화 경향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영화는 주인공이 칼리가리라는 연쇄 살인범을 회상하면서 얘기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에 따르면, 칼리가리는 몽유병자에게 최면을 걸어 자신의 친구를 죽이고 여자 친구를 유괴한다. 그의 추적으로 칼리가리는 18세기에 있었던 대리 살인을 재현하고자 하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정신병원의 원장임이 밝혀진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면 지금까지의 이 이야기를 해준 주인공이 사실은 정신병원의 환자이며, 칼리가리는 그를 담당한 의사라는 것이 드러난다. 주인공은 병실로 끌려가며 소리치고, 의사 칼리가리는 그제야 그의 병증을 이해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영화의 시각적 스타일이 관객의 의구심을 누른다.
영화의 정면은 현실감과는 거리가 멀다. 형태와 색채를 통한 왜곡, 구성의 부조화 같은 당대 표현주의 회화의 특성이 세트 곳곳에 그대로 살아 있다. 평면적으로 그려진 세트에는 원근감이 과장되어 있고, 사물의 형태는 각지거나 왜곡되어 있다. 인물 또한 분장이나 의상을 통해 그 세트의 일부처럼 기능한다. 조명은 명암의 대조가 극단적으로 드러나도록 조절되고 있으며, 연기도 극히 기교화되어 있다.
이런 극히 양식화된 장면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환상 세계를 창조한다. 독일 표현주의 영화에서 공간의 표현이란 곧 정신의 표현이다. 즉, 영화 속의 공간에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불안과 과대망상으로 가득 찬 세계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이 광인의 이야기가 시각화되어 표현주의 영화의 모태가 된 데는 헤르만 바름같은 세트 디자이너의 역할도 중요했지만, 무엇보다도 제작자 에히리 포머의 역할이 컸다. 칼리가리가 연쇄 살인을 저지르는 미친 악당이던 원래 각본을 뒤집어 주인공을 광인으로 설정한 것도 그였으며, 세계 시장을 지배하고 있던 미국 영화와 경쟁하기 위해 표현주의 회화기법을 영화에 끌어들인 것도 그의 결정이었다.
포머의 그런 결정은 이 영화를 해석하는 데 흥미 있는 변수가 된다. 원래 각본의 의도는 개인이 폭정적 권력을 등에 업고 자유를 남용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완성된 영화는 폭정적 권력이 어쩌면 개인들에게 유익할지도 모른다고 시사한다. 이는 당시 독일인들의 의식 저편에 있는 불안과 공포심을 암시한 것이며, 칼리가리라는 인물을 통해서 히틀러의 등극을 예시했다는, 이 영화의 의미를 명확히 해준다.
ㅡ주진숙(중앙대 교수,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