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의 현상학
권혁웅
빨래가 생활의 항복을 선언합니다 다시 더러워지겠다는 결심이죠 오래도록 통 속에서 내 통속通俗을 두들기고 비틀고 짜냈는데 그렇게 힘없이 기어 나와서는
저것 좀 봐요, 뼈와 관절을 다 내다버렸어요 경축 신장개업 써 붙인 풍선인형처럼 혼자 들떠서는
빨래는 어째서 이기지 못할 생활일까요 나는 죽은 피부를 가루비누처럼 옷 위에 쏟았는데요 몸에 밴 기름을 마가린이라도 되는 듯 얇게 도포했는데요
살을 다 파 먹힌 게가 물살에 집게를 흔드는 거나 물에 불린 쌀알이 전기밥솥 안에서 익어가는 거나 생활의 검은 피부가 빨래에 다시 내려앉는 거나......
간장게장에 밥 비벼먹을 때 노란 빛으로 빨래는 돌아가겠죠 바람이 빠지면 주르륵 내려앉는 풍선인형처럼 바구니에 쌓이겠죠
빨랫감이 만드는 심산유곡 하나, 우리는 생활을 버리고 생활을 등지고 거기에 들어가서는......
―『현대시』2011년 7월호
첫댓글 빨래라면 16년간 해 온 김병만달인보다 많이 해봤는데 왜 이런시 못 쓰는 거죠? ㅋㅋ 대상에 대한 객관화가 어려운가??? 지순시인님 더위에 장마에 안녕하신지...
통속에서 통속을 두들기고 비틀고 짜내도 다시 혼자 들떠지는 때의 부유...
내일 다시 빨래해도 되는 허무한 기대 하나 가집니다 퍼갈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