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칼럼] (3) 2001년 추기경 서임과 프란치스코 교황의 시대
교황청 개혁 앞장서는 ‘2001 동기생’
16년 전인 2001년 2월 21일은 가톨릭교회의 역사 안에서 또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이날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대교구장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 대주교를 추기경으로 서임했다. 물론 무명이었던 베르골료 대주교에게도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가 보편교회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모두 44명이 서임된 ‘2001년 동기생’ 중 많은 이들이 프란치스코 교황 치하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우선 교황 자문단 역할을 하고 있는 9인의 추기경위원회(C9) 중 2명이 ‘2001 학번’ 출신이다. 의장인 온두라스의 오스카 안드레스 마라디아가 추기경과 칠레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에라수리스 오사 추기경이 바로 이들이다. 또 브라질 상파울루대교구 전임교구장인 클라우디오 우메스 추기경이 있다. 우메스 추기경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출되던 날 오후 교황에게 “가난한 사람을 잊지 마십시오”라고 조언했다. ‘2001 학번’에는 또 한 명의 브라질 출신이 있는데, 바로 베르골료 대주교가 아르헨티나주교회의 의장을 맡았을 때 브라질주교회의 의장이었던 헤랄도 마헬라 아넬로 추기경이다.
또 페루 리마대교구장 후안 시프리아니 토르네 추기경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설립한 경제평의회 위원 중 하나다. 교황과 같은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도서관장을 맡았던 호르헤 마리아 메히아 추기경도 빼놓을 수 없다. 메히아 추기경은 1992년 당시 국무원 총리 안젤로 소다노 추기경의 반대를 무릅쓰고 당시 베르골료 신부를 주교로 추천했다.
2001년 서임 ‘동기’ 중 3명의 유럽 추기경은 베르골료를 교황으로 선출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들은 2005년 콘클라베에서는 실패했지만, 2013년에는 결국 성공했다. 바로 웨스트민스터대교구장 코맥 머피 오코너 추기경과 독일의 발터 가스퍼와 칼 레만 추기경이다. 이들은 베르골료가 전 밀라노대교구장 카를로 마리아 마르티니 추기경의 개혁적 입장을 물려받을 인물이라고 믿었다. 미국 에드워드 이건 추기경(전 뉴욕대교구장)과 시어도어 맥캐릭 추기경(전 워싱턴대교구장)도 베르골료의 교황 선출을 지지했다.
2001년 서임된 이들 추기경에게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이후의 교회를 설계할 책임이 주어졌다. 당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이미 파키슨병을 앓고 있었으며, 이후 4년 동안 교황청 부패와 사제성추문 등의 문제가 불거지고 있었다.
당시 서임된 추기경들의 단골 대화 주제는 교황청 중심주의와 교황청 부서의 부패였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그해 5월 추기경 회의와 10월에는 세계주교대의원회를 열고 이 문제를 논의하게 했다. 당시 열린 주교시노드에서 베르골료 추기경은 보고 책임자 역할을 했다. 베르골료 추기경은 시노드 참가자와 교황청의 통제 사이에서 능숙하게 회의를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되돌아보면, 당시 ‘2001 학번’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베르골료 추기경은 그 일을 진행할 적임자였다.
베르골료 추기경은 2002년부터 로마 내에서 ‘교황 후보자’로 부상하고 있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선종한 후, 교황으로 선출된 이는 베르골료가 아닌 라칭거 추기경이었다. 하지만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그 어떤 교황보다도 남미교회를 위해 애썼다. 소다노 추기경이 반대해 왔던 남미 주교회의 개최도 승인했다.
2007년 5월 브라질에서 열린 남미 주교회의는 남미교회와 베르골료 추기경에게 새 시대를 여는 순간이었다. 만장일치로 선언문 작성위원회 위원장으로 뽑힌 베르골료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시대에 실행할 의제를 작성했다.
물에 떨어진 돌은 멀리 그리고 널리 잔물결을 일으킨다. 2001년 베르골료가 쓰게 된 ‘빨간 모자’는 그저 돌 하나에 불과했다. 하지만 현재 이 잔물결은 전 세계에 퍼지고 있다.
오스틴 이버리(크럭스(Crux) 편집위원)
※오스틴 이버리는 영국 출신 작가 겸 기자로, 전 세계 20여 개국에서 다양한 미디어 관련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자서전 「위대한 개혁가」(The Great Reformer)의 저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