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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푸르나 트레킹을 다녀왔다.
20여년을 기다렸던 일인데
막상 떠나려고 하니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무엇을 보고 싶은 것일까?
무엇을 얻고 싶은 것일까?
20여년을 마음으로 그리며 준비해서 떠난 트레킹인데
다녀와서 허망한 생각이 들지는 않을까?
챙겨야 하는 많은 것들 가운데 우선 묵주를 챙겼다.
무엇을 얻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일행들에게 누를 끼치는 일은 없었으면
30년 가까이 만나온 친구들과의 관계가 서먹해지는 일이 없었으면
무엇보다 트레킹을 안전하게 잘 마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함께 한 친구들
안나푸르나로 인해 인연을 맺게 된 히여동 회원들
가이드, 포터, 주방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사람과의 관계다.
30년 가까이 친구로 만나왔지만
이렇게 긴 여행을 함께 하는 것은 처음인데
여행을 하면서 그동안 모르고 있었던 많은 모습들을 보게 되었다.
친구는 여행을 함께 해보라고 했는데
20대 같았으면 어쩌면 토라지고 싸웠을지도 모를 일을
우리는 이미 많은 세월을 살았고
나와 다른 상대를 인정할 줄 아는 나이가 되었다.
여행은 간소하게 떠나야 한다고 믿는 이놈의 성격 때문에
혼자 고산증을 느끼면서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아
친구들이 준비해 온 약품에 의존했다.
어쩌면 무책임하고 대책 없는 놈이라고 흉볼지도 모르겠다.
11박 12일을 함께 한 히여동 회원들,
내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평생 만날 일이 없을 사람들이다.
내 성향으로 봐서 아마 그럴 가능성이 많다.
새로운 사람과 만나게 될 때
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또 어쩌면 나의 포장된 모습을 보이려고 한 것은 아닌지.
가식의 내가 아닌
바른 삶의 가치를 찾기 위해 아파하는 나도 봐주었으면.
험난한 길을 함께 해준 틴바, 비루, 나왕
누군가의 안내자가 되어준다는 것은 사랑의 실천이다.
나는 그들의 겸손과 배려를 보면서
천성으로 타고난 것일까? 아니면 직업의식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의 시선으로 봤을 때
그들은 열약한 환경에서 사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삶의 가치에 따라 행복하게 살고 있을 것이다.
틴바와 비루에게는 작은 감사를 표현할 수 있었는데
얼떨결에 헤어진 나왕은 아무 것도 챙기지 못해 마음 한편이 찜찜하다.
결국은 내 마음 편하자고 하는 짓인데······.
나의 무거운 여행 보따리를 옮겨준 포터와
맛난 음식으로 우리의 기운을 챙겨준 주방팀
그들과는 면식할 일이 별로 없었다.
아침에 카고백을 롯지 방 앞에 두면 다음 숙소까지 옮겨놓고 사라지고
식사시간에도 가이드들이 서빙을 하기에
주방팀을 직접 만날 일은 거의 없었다.
그들을 처음 보는 순간
나는 왠지 모르게 죄를 짓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가 여행을 함으로써 그들에게 일자리를 준다고 자위하지만
마음 한켠을 할퀴는 죄책감은 어쩔 수 없었다.
트레킹 마지막 밤에
몇 달러의 팁을 받기 위해 기다리는 그들의 선한 눈빛을 보면서
하느님의 사랑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20여년을 기다렸던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마치고 돌아왔다.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고
아무 것도 변할 것이 없다.
다만 산행하면서 생각하고 기도했던 것들을
삶으로 살아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여행의 동반자가 되어준 친구들과 히여동 회원들
도움을 받았던 많은 분들
그들에게 받은 배려와 사랑을
나는 또 누군가에게 나누며 살아야 그 빚을 갚는 일이 될 것이다.
좋은 여행이 될 수 있도록 배려해 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함을 전한다.
▶첫째 날: 설레임과 어색함
인천공항에서 일행을 만나 카트만두 호텔에 투숙하기까지
공항에서 11박 12일을 함께 할 일행을 만났다.
상대방을 파악하는데 3초가 필요하다는데
짧은 인사를 나누며 안심을 했다.
카일라스 대장님을 보는 순간 무한 신뢰······.
연세가 꽤 드신 분도 있었고 여자들도 많았다.
‘저들도 가는데, 설마 내가 못할까?’하는 생각을 했다.
어쨌든 인솔자와 산행을 함께 할 사람들의 첫인상이 좋았다.
다행이다.
긴 여행을 함께 하기 위해서는 동반자의 성향도 중요하니까.
일곱 시간의 긴 비행 끝에 카트만두에 도착했다.
공항을 빠져나오자 두 대의 승합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분주한 가운데 카고백을 차에 싣고 승차를 하려고 하는데
한 사람이 만원짜리 지폐를 여러 장 손에 쥐고 ‘만원, 만원’하며 외쳤다.
나는 당연히 줘야할 돈인 줄 알고 만원을 건네주고 승차를 했다.
그런데 차에 타자마자 당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네팔에 있는 동안 선한 그들을 경계하는 이유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첫 경험이 중요한 것이다.
카트만두에서 낯선 네팔 음식으로 첫 저녁식사를 했다.
어두침침한 식당에서
네팔의 전통 무용이 공연되는 가운데 식사를 했다.
공연을 할 때 일행 중 두 명이 무대에 나가 함께 춤을 추었다.
나는 이 분위기에 적응하려면 상당한 노력을 해야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호텔로 들어와 방 배정을 하고
처음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닉네임으로 자기를 소개하는 것이 영 어색했다.
사람을 잘 파악하지 못하는 둔한 성격 때문에
마지막까지 친구들을 제외한
열여섯 명의 닉네임을 정확하게 외우지 못했다.
비교적 쾌적한 호텔방에 들어갔다.
공기는 서늘하고 이불은 무거웠다.
그렇게 낯선 나라에서의 첫 밤을 설치며 보냈다.
▶둘째 날: 트레킹을 시작하다.
카트만두 - 포카라 - 나야풀 – 비레탄티 - 힐레
포카라행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히말라야의 풍경은 경이로웠다.
그곳을 내가 걷게 된다니······.
포카라 공항에 내리자 마차푸차레봉이 눈앞에 펼쳐졌다.
우리는 인증샷을 찍기에 바빴다.
앞으로 더 멋진 마차푸차레봉을 수도 없이 보게 될텐데······.
미국에서 오신 분이 비행기에서 짐을 분실하여
포카라에서 급하게 필요한 등산 장비를 구입하느라 30분가량 쇼핑을 했다.
나도 털모자를 2000원에 구입했다.
덕분에 산행에 꼭 필요한 모자를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었다.
포카라에서 나야풀까지 덜컹거리는 버스로 한 시간을 달렸을까?
트레킹 시점인 나야풀에 도착해서 포터들에게 짐을 맡기고 트레킹을 시작했다.
역시 마차푸차레봉이 우리 눈앞에 우뚝 서 있었다.
트레킹 내내 거의 우리 시야에 있었던 것 같다.
네팔에서도 신성시하여 등정 허가를 내어주지 않는다는 마차푸차레봉.
그 봉을 바라보면 30분가량 걸어 비레탄티에 도착해서 점심식사를 했다.
비빔밥이었다.
일정표에 한식 제공이라도 되어있었지만
서울에서 먹는 것처럼 완벽한 비빔밥이 나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약간의 허기로 점심을 맛있게 먹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 사이 주방팀이 설거지를 끝내고 짐을 챙겨 먼저 출발했다.
대나무로 만든 큰 소쿠리에 주방 도구와 식재료를 가득 담아
넓은 끈으로 묶은 소쿠리를 머리로 지탱해서 이동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가슴이 싸했다.
내가 무엇이관대 그들의 등골을 빼먹으며 여행을 한다는 말인가?
여행객이 많아야 그들의 일자리가 생긴다고 하지만
왠지 모를 죄책감으로 울컥했다.
식사 장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엄홍길휴먼재단이 설립한 비레탄티 세컨더리 초등학교를 방문했다.
미리 준비해 간 학용품을 전달하려고 했는데
토요일이라 학교에 아무도 없었다.(네팔은 토요일이 휴일이었다)
그래서 학교 앞 가정집에 맡겨두고 돌아섰다.
정리되지 않은 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이름을 걸고 하는 일은 더 큰 책임을 느껴야 하는데
혹여 학교만 지어놓고 지원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렇게 학교를 방문하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좀 더 많은 학용품을 준비했을 텐데
그저 길에서 만나게 되는 아이들에게 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아들 서랍에 있는 여러 가지 필기도구를 한 묶음을 가져갔을 뿐이다.
왠지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비레탄티에서 힐레로 가는 길은 넓고 평탄했으나
가끔 지나가는 차량의 먼지로 조금 불편했다.
첫 숙소인 힐레의 롯지에 도착했다.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열약했다.
외벽은 벽돌이었으나 방 사이는 나무판자로 구분해놓았을 뿐이다.
옆방의 말소리와 코고는 소리까지 들렸고
거저 비와 바람만 막아주는 역할을 했다.
네팔의 모든 롯지는 힐레의 롯지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롯지에서의 저녁식사로 돼지고기 수육이 나왔는데 별미였다.
단순히 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누군가 네팔에 가면 삼겹살을 먹어보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네팔에서의 두 번째 밤과
롯지에서의 첫 밤을 가슴 설레임으로 또 설쳤다.
▶셋째 날: 어쩔 수 없이 나를 조금 드러내다.
힐레 – 팅계퉁가 – 울레리 - 반단티 – 고레파니
아침을 든든하게 먹었다.
밥도 맛있었지만 기운을 차려야 산행을 잘 마칠 수 있다.
식사 후 팅계퉁가의 가파른 돌계단은 숨을 헐떡이게 했지만
멀리서 바라본 산 중턱의 집들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가파른 돌계단에서 가방을 메고 등교하는 초등학생들을 만났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산을 하나 넘어 등교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길에서 만난 네팔 주민들
그들은 자연스럽게 ‘라마스떼’라고 인사했다.
선한 그들의 눈빛만큼이나 정겨웠다.
3일 만에 발견한 또 하나는
가는 곳곳마다 송아지만한 개들이 있었는데
어떤 개도 목줄을 하고 있지 않았다.
개를 싫어하는 나로서는 다소 불편한 존재였지만
우리 일행이 차를 마시며 쉬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다가와 편안한 자세로 누워 잠을 잤다.
그러고 보니 개뿐만 아니라
말이나 당나귀도 목줄을 하고 있지 않았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그저 자연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산행 길 곳곳에는
몇 종류의 과자와 음료수를 놓고 파는 가게가 수도 없이 많았다.
그곳에서는 네팔차나 망고차와 비슷한 차도 팔았다.
적어도 하루에 서너 번은 차를 마실 기회가 있었는데
네팔에서 마신 차들은 대부분 달달하여 나의 입맛에 잘 맞았다.
돌계단을 오르고 또 올라 반단티에 있는 롯지에 도착했다.
온몸이 땀으로 뒤범벅되었다.
마당에 있는 수도에서 비누 없이 머리를 감았다.
머리를 하루 감지 않았다고 근질근질 했는데
머리를 감고 나니 기분이 상쾌했다.
잠시 기다리자 점심으로 라면이 나왔다.
산행하며 먹는 라면은 유독 맛있지만
멋진 풍광을 내려다보며 먹는 라면 맛은 특별했다.
반단티에서 고레파니까지의 길은 비교적 순탄했다.
가는 길 내내 밀림이 펼쳐졌다.
음산한 숲이 마치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장면 같았다.
고레파니 롯지에 도착했다.
고레파니는 푼힐전망대로 가는 길목이라 롯지 규모가 매우 컷다.
롯지의 식당에 큰 난로가 설치되어 있어 자연스럽게 난로 주위로 모였다.
저녁이 준비되는 동안
난로를 중심으로 둘러앉아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일행 중의 한 분이 박재현님의 <히말라야>라는 시집을 가져와
돌아가며 한 편씩 낭송을 하게 되었다.
아주 짧은 시였는데 <포터>라는 시를 읽을 때
‘나는 왜 이리도 짐을 많이 가지고 왔을까?’하는 문구에서
2인분의 짐을 지고 나르는 그들의 모습이 떠올라 눈물이 울컥했다.
나이가 들면 눈물이 많아진다고 하는데
아무 때고 이렇게 눈물이 난다. 참 주책이다.
방배정이 끝나고 모두 올라갔는데
전직 교사였다가 미국으로 이민 가신 분이 교사 예찬론을 거론하기에
지금은 완전한 ‘을’의 위치에 있는 교사의 신분을 말하다
본의 아니게 내가 교사임이 밝혀지고 말았다.
집단에서 신분이 드러나면 심리적인 제약이 따를 수도 있는데······.
그래서 나를 드러내기 앉고 조금은 자유롭고 싶었는데······.
또 그림을 그리는 두 분이 있어
그림을 배우고 있는 나로서는 흥미로운 관심사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린 그림도 보여주고
늙은 나이에 그림을 배우게 된 사연도 얘기했다.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겠지만
부족한 나를 포장한 것 같아 공허한 마음이 든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패키지여행도 아니고 긴 시간을 함께 산행하며 지내려면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넷째 날: 위기를 맞다.
고레파니 롯지-푼힐전망대-고레파니 롯지(아침식사)-데우랄리-반단티-타다파니-추일레
새벽 네 시에 일어나 간단한 장비를 챙겨 푼힐전망대로 향했다.
가파른 계단길이기도 했지만
3000미터 고지에 올라오니 약간의 숨찬 증세가 나타났다.
손전등으로 길을 비추며 올라가는데 배에서 이상 신호가 왔다.
네팔로 출발하기 전날 볼일을 보고 나흘을 보지 못했으니······.
사람이 뜸한 틈을 이용해서 길을 살짝 비켜 급한 불을 껐다.ㅋㅋ
우리 일행은 조금 일찍 전망대에 올랐다.
왼쪽 멀리 다울라기리, 정면으로 안나푸르나 남봉, 오른쪽으로 마차푸차레봉....
전망대에서는 히말라야의 영봉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안나푸르나 남봉이 구름으로 살짝 가려졌다.
날씨가 추우면 구름 한 점 없는 영봉을 볼 수 있다는데
11월 날씨처럼 포근하여 구름이 낀다고 했다.
푼힐전망대는 바람도 거세고 춥다고 하여
완전무장을 하고 올라갔는데 생각보다 춥지 않았다.
구름으로 살짝 가려진 풍경이라도 날씨가 포근해서 좋았다.
일출을 감상하고 롯지로 내려와 아침식사를 하고 데우랄리로 향했다.
데우랄리로 가는 길은 푼힐전망대에서 본 풍경을 고스란히 볼 수 있었다.
가는 길 내내 왼쪽으로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으로 힘든 줄을 몰랐다.
그런데 이틀 만에 3193미터의 푼힐전망대를 오른 탓일까?
미리 비아그라를 먹었는데 고산증 증세가 나타났다.
함께 간 친구들과 일행에게 누를 끼쳐서는 안 된다고
지나친 우려를 한 때문이었을까?
고산증은 심리적인 요인도 크게 작용한다는데······.
얼굴이 붉게 부어오르며 뇌가 흔들리는 것처럼 아팠고
속은 멀미를 하는 것처럼 매스꺼웠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고 숨을 헐떡이며 묵묵히 걸었다.
그 와중에 데우랄리에서 반단티로 가는 길에 복병을 만났다.
계곡의 음지에 눈이 녹지 않아 빙판길이었다.
아이젠은 카고백에 넣어 포터가 가져갔고
어쩔 수 없이 조심조심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곳곳에서 넘어지는 소리가 났지만
크게 다친 사람이 없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힘겹게 계곡을 내려가는데
주방팀이 따뜻한 차를 준비해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또 한 번 울컥했다.
반단티에서의 점심 메뉴는 수제비였다.
그동안 맛있다고 하는 수제비를 많이 먹어봤지만
반탄티에서 먹는 수제비 맛은 잊을 수가 없다.
단순히 허기 때문만은 결코 아니었다.
한 번도 같은 메뉴가 중복되어 나온 적은 없었는데
우리의 요청으로 수제비는 또 한 번 먹을 기회가 있었다.
그만큼 맛있었다.
한국식당의 주방장으로 일했다는 주방팀장은
네팔 사람이었음에도 맛깔스러운 음식 솜씨로 우리를 감동시켰다.
뜨끈뜨끈한 수제비로 원기를 회복했고
친구가 건네 준 혈액순환개선제를 먹고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되어 오후 일정을 소화할 수 있었다.
일출이 좋다는 타다파니를 거쳐
가파른 내려막길을 내려와 추일레 롯지에 도착했다.
롯지에 도착한 시간이 여섯 시
새벽 네 시부터 일정을 시작하였으니 열 네 시간의 강행군이었다.
아침과 점심식사 시간, 중간의 휴식 시간을 뺀다고 하더라도
꼬박 열 시간을 걸은 셈이다.
전체 일정 중에 가장 강행군을 한 날이다.
추일레 롯지에 도착해서 잠깐 나온 따뜻한 물에 머리를 감고 샤워를 했다.
내가 샤워 중에 따뜻한 물이 끊겼으니 정말 잠깐 나온 것이다.
그 절묘한 타이밍에 맞춰 샤워를 한 사람은 일행 중에 나뿐이었을 것이다.
나는 샤워를 했는데
룸메이트인 친구가 샤워를 하지 못해 영 마음이 불편했다.
샤워를 하고 저녁식사를 위해 모였는데
일행 중의 나무지기님이 내가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약을 챙겨주었다.
참 감사했다.
누구나 제한된 기간을 함께 하는 일행에게 조금의 친절을 베풀 수 있으나
그것이 그 사람의 내면인지 아닌지는 알 수 있다.
나무지기님의 따뜻한 마음을 읽을 수 있어 더 감사했다.
열네 시간 강행군 후의 샤워로 네팔에 와서 처음으로 숙면을 했다.
▶다섯째 날: 몸을 회복하다.
추일레-시프롱-구중-촘롱-시누와
전날 강행군을 한 이유 때문일까?
다섯째 날의 일정은 조금 여유 있게 짜여졌다.
약을 먹은 이유도 있지만
거의 1000미터 고도를 내려왔기에 몸도 정상적으로 회복되었다.
추일레에서 시프롱, 구중, 촘롱까지의 길은
네팔의 전형적인 시골 마을을 감상할 수 있었다.
그래서 가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을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촘롱에 도착하여 점심식사를 했다.
촘롱에서는 좀 더 가까이 다가온 마차푸차레봉과 마주했다.
조금씩 안나푸르나의 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오후 일정은 계곡 저편에 빤히 보이는 시누와 롯지까지였다.
3800계단을 내려가서 다시 그 만큼의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엄청난 돌계단이기는 했지만
누군가 실제로 세어보니 1800개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ㅋㅋ
시누와 롯지에 도착했다.
시누와 롯지는 전망이 참 좋은 곳이었다.
하산할 때 가게 될 지누단다 방향이 한 눈에 들어왔고
뒤로는 마차푸차레봉이 성큼 다가왔다.
좀 춥기는 했지만 머리도 감고
땀으로 범벅된 몸을 물수건으로 닦고 나니 기분이 상쾌했다.
탁 트인 풍경을 바라보면 몇 사람이 가볍게 시작한 맥주 한 잔이
친구가 정상주를 꺼내놓으면서 술자리기 조금 커졌다.
이 사람 저 사람이 맥주를 사면서
일행 모두가 나와 한 잔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저녁으로 나온 닭백숙을 안주 삼아 술잔이 돌고
우리의 놀이문화가 늘 그렇듯 돌아가며 노래를 불렀다.
우리 네 명 가운데 그나마 술을 좀 마실 줄 아는 친구 차례가 되자
친구는 우리의 특성을 소개했다.
친구는 내가 동화를 출간했고 여전히 집필활동을 하고 있다고 하자
일행은 ‘와우’하고 탄성을 부르며 박수를 쳤다.
사람의 심리가 묘하다.
기분이 좋았다.
내가 말하지 못한 것을 친구가 말해주어 고마웠던 것은 아닐까?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의 드러나기를 바랐는데······.
인간의 얄팍한 속성일 뿐 교만이 아니었기를 바란다.
글을 쓰는 것은
운동을 잘 하거나 춤을 잘 추는 것처럼 그 사람의 특성일 뿐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독 글 쓰는 사람을 우월하게 보는 경향이 있다.
아마도 유교문화의 영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게 히말라야에서의 네 번째 밤이 깊어갔다.
▶여섯째 날: 여유로운 산행
시누와-뱀부-도반-히말라야 롯지
눈을 뜨니 새벽 세시 반이었다.
일찍 잠자리에 들기도 했지만
평소 내가 자는 수면습관만큼의 적당한 수면을 했다.
기상 시간까지는 너무 많은 시간이 남아있었다.
뜬 눈으로 뒤척이다 일어나 앉아 묵주기도를 했다.
마지막까지 트레킹을 잘 마칠 수 있기를
일행 모두가 안전하고 즐거운 트레킹이 되기를
그리고 집에 두고 온 가족이 안녕하기를 빌었다.
기도를 하고 있는데 룸메이트인 친구가 일어났다.
역시 잠이 오지 않는 모양이다.
기도를 마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밖으로 나왔다.
롯지 2층에서 계단을 내려오는데
종아리와 허벅지가 뭉쳐 제대로 내려갈 수가 없었다.
이틀 전의 강행군과 전날의 무지막지한 촘롱 돌계단을 오르내린 탓이었다.
이런 몸 상태로 여섯째 날의 산행을 소화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여섯째 날의 산행은 비교적 여유로웠다.
시누와에서 히말라야 롯지까지는 지리산 종주길 같았다.
완만한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하는 사이
종아리와 허벅지에 뭉쳤던 근육이 풀려 한결 가벼워졌다.
히말라야 롯지에 도착하니
산행 내내 우리 시야에 있었던 마차푸차레봉이 코앞에 우뚝 서있었다.
그 웅장함이란······.
히말라야 롯지에서의 밤은 좀 추웠다.
그래도 다음날 ABC(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를 간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설레었다.
밤이 깊었는데 우리방 문 앞에서 개가 요란하게 짖어 잠이 깼다.
옆 침대를 보니 룸메이트인 친구가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침낭을 열고 나오는데 친구가 화장실에 갔다가 들어왔다.
잠이 깬 김에 화장실에 가려고 밖으로 나왔다.
캄캄한 하늘에 별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개 짓는 소리에 잠이 깨서
히말라야의 높고 푸른 밤에
영롱히 빛나는 별을 볼 수 있는 덤을 얻었다.
▶일곱째 날: 극한의 고통을 맛보다.
히말라야 롯지-데우랄리-MBC–ABC
일곱째 날은 ABC까지의 산행이다.
일행의 상황에 따라 MBC에서 묵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일행 모두 산행이 순조로워 MBC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약간의 눈발이 날리는 가운데 ABC로 향했다.
점점 숨은 차오르고 다리는 무거웠다.
MBC에서 한 시간 반쯤 걸어 ABC에 도착했다.
가슴이 벅찼다.
ABC 안내표지판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데 눈물이 났다.
ABC 롯지에 도착해서 저녁을 먹기 전에
박영석, 신동민, 강기석의 추모비를 참배했다.
추모비에는 생전에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이 꽂혀있었다.
그 가족들은 얼마나 아플까?
산이 좋으면 그냥 산을 즐기지
정상이 무엇이라고 그런 아픈 역사를 만들었을까?
영화 ‘히말라야’가 오버랩 되어 눈물이 폭풍처럼 쏟아졌다.
만약 누군가 보았더라면 마치 가족인 줄 알았을 것이다.
나는 잠시 고개를 숙여
산이 좋아 산에 묻혔으니, 영원한 안식을 누리기를 기도했다.
기운을 차리고 간신히 내려와 저녁식사를 했다.
저녁을 먹고 난 이후부터는 움직이는 것도 힘들었다.
친구가 준비해간 비아그라도 떨어졌다.
방으로 돌아오니 모두에게 배정된 이불이 나에게만 없었다.
무슨 이유였을까?
가이드에게 이불을 달라고 할 기운도 없었다.
침낭을 펴고 파카를 입은 채로 들어가 쓰러지듯 잠을 잤다.
잠을 잤는지.
쓰러졌는지 그냥 그렇게 아침을 맞이했다.
▶여덟째 날: 안나푸르나에 서다.
ABC-MBC-히말라야 롯지-도반-뱀부
밀크티를 가지고 온 가이드가 문을 두드려 눈을 떴다.
일어나 침대에 앉았는데 머리는 어지럽고 토할 것 같았다.
아침마다 방으로 배달되는 밀크티를 마시며 하루를 시작했는데
밀크티를 받으러 일어설 기운도 없었다.
룸메이트인 친구가 건네주는 밀크티를 마시며
정신을 차려보려고 했는데 소용이 없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찼다.
간신히 짐을 챙기고 밖으로 나와
옆방의 솔마루님에게 비아그라 한 알을 얻어먹었다.
빨리 약효가 들어야 할 텐데······.
아침식사를 하는데 속이 메스꺼워 도저히 넘어가지 않았다.
뱀부까지 내려가려면 기운을 차려야 할 것 같아
국물에 밥을 말아 몇 숟가락 떠 넣었다.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누군가 일출이 시작된다고 했다.
모두들 서둘러 밖으로 나가는데
한참을 앉아 있다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눈 덮인 안나푸르나 일봉과 남봉이 불타오르는 것처럼 붉게 물들었다.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는데
이 풍경을 다시 볼 수 있을지 몰라 몇 컷의 사진을 찍었다.
전날 눈발이 내려서 날이 흐리면 일출을 볼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안나푸르나의 멋진 일출을 보았다.
산행하는 기간 내내 날씨가 좋아
히말라야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을 본 셈이다.
이런 행운에 감사한다.
약효가 나타나는 것이었을까?
정신을 조금 차릴 수 있었다.
또 하산하면서 고도가 낮아지자 조금씩 몸이 회복되었다.
MBC를 거쳐 이틀 전에 잤던 히말라야 롯지에서 점심을 먹었다.
잠깐 와이파이가 되어 가족들에게 안부를 전할 수도 있었다.
점심을 먹고 도반을 거쳐 숙소인 뱀부 롯지에 도착했다.
뱀부에서의 밤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롯지에서 하룻밤만 더 자면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가벼웠다.
▶아홉째 날: 관계의 어려움
뱀부-시누와-촘롱-지누단다
벌써 아홉 번째 날이 밝았다.
내리막길이기도 하지만 산행 거리도 그렇게 멀지 않았다.
시누와에서 점심을 먹고 조금 일찍 지누단다에 도착할 계획이었으나
산행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지누단다에 도착해서 조금 늦은 점심을 먹었다.
점심식사 후에는 온천욕을 했다.
일인당 100루피. 우리 돈으로 천원이었다.
계곡물 옆에 있는 노천온천이었는데
온천이라고 하여 어떤 시설을 갖추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저 따뜻한 물이 흘러나오는 것을 가두어 두었을 뿐이었다.
그래도 그동안 씻지 못한 찝찝함과 피로를 한꺼번에 날릴 수 있었다.
온천물로 깨끗이 씻고 올라와 저녁을 먹기까지 시간 여유가 있어
산행을 하며 땀에 쩐 옷을 빨아 말릴 수도 있었다.
저녁은 며칠 전에 모비드님이 양을 잡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정말 두 마리나 잡았다.
우리 일행뿐만 아니라
가이드는 물론이고 주방팀과 포터까지 함께 음식을 나누는 훈훈한 자리였다.
다만 모두가 한 자리에서 먹었으면 좋았을 것을
우리는 식당의 식탁에서 먹고, 포터들은 바깥에서 먹었다.
먹었다고 하는데 정말 먹었는지 눈으로 확인하지는 못했다.
무슨 계급 사회의 귀족도 아닌데
내가 그런 상황에 있는 것이 왠지 마음 불편했다.
식사시간이 끝나고 포터와 주방팀에게 팁을 주는 시간이었다.
사전에 일인당 20불씩 거두어 두었기 때문에 빨리 진행했으면 좋았을 텐데
사람 수에 혼선이 있어 다소 지체되었다.
몇 불의 팁을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그들의 선한 눈빛이 가슴을 아프게 했다.
수완이 좋은 사발통님이 뒷정리를 잘 했고
부족분은 미국에서 오신 분이 부담하겠다고 자원했다.
대충의 정리가 끝나자 돌아가며 노래를 불렀다.
사실상 트레킹을 종료하는 자리라 매우 흥겨운 분위기였는데
나는 그런 분위기에 맞는 노래를 잘 모른다.
트로트를 싫어해서 가사를 끝까지 알고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없다.
이럴 때는 참 난감하다.
그래서 분위기에 맞지는 않지만
최근에 흥얼거리며 부르는 하현우 버전의 ‘백만 송이 장미’를 불렀다.
참 민망했다.
그러는 사이에 이미 절반 정도는 자리를 정리하고 방으로 돌아갔다.
적당한 시기에 일어났어야 했는데
눈치 없이 앉아있다 보니
우리 네 명이 일어서면 자리가 끝날 판이 되고 말았다.
술자리가 정리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일행 중의 두 사람이 과거에 인연이 있었는지 추억을 곱씹었다.
거기서 멈추었어야 했는데
그놈의 한 잔 마신 맥주 탓에 ‘추억 만들기’를 자청해서 부르고 말았다.
아! 이 주책······.
안나푸르나의 트레킹 중에 삭제하고 싶은 순간이다.
그렇게 롯지에서의 마지막 밤이 깊어갔다.
▶열째 날: 트레킹을 정리하다.
지누단다-씨울레바잘-나야풀-포카라
고도를 많이 내려왔기에 다른 롯지에 비해 춥지도 않았고
전날 온천욕을 한 상태라 개운하게 숙면을 했다.
아침을 먹고 씨울레바잘로 출발했다.
우리나라의 산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하산 길이었으나
8박 9일간의 산행으로 지쳐있었고 다리는 무거웠다.
씨울레바잘에 도착하자 점심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주방팀이 해주는 마지막 식사는 김치볶음밥이었다.
그동안 매 끼니마다 다른 메뉴로 맛깔스럽게 차려주었는데
식사전 기도 때, 그들의 노고에 감사하며 안녕을 빌었다.
식사를 마치고 덜컹거리는 비포장도로를 달렸다.
나야풀로 가기 전에
트레킹을 시작하면서 학용품을 전달하기 위해 들렀다가 아무도 없어
학교 앞 가정집에 학용품을 맡겨놓고 왔던
엄홍길휴먼재단이 설립한 비레탄티 세컨더리 초등학교를 방문했다.
그곳에 있는 김규현 선생님이 다녀갔으면 하고 요청을 했다고 한다.
학교에 들어서자
명예교장이자 미술을 담당하고 있다는 김규현 선생님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학생이 총 200명이 넘는다고 했다.
그렇게 오지에
그것도 산중턱에 있는 마을에서 어떻게 그런 많은 학생들이 있을까?
우리의 농촌에 학생이 없어 폐교하는 현실과 비교되었다.
우리가 가져간 학용품이 학생당 한 개씩 돌아갔다고 한다.
그렇게 학교를 방문하는 줄 알았더라면
카고백 무게가 15킬로를 넘어서는 안 된다고 하지 않았더라면
좀 더 다양한 학용품을 준비했을 텐데 못내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학교 방문을 마치고 트레킹 시발점이었던 나야풀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버스를 타고 포카라로 갈 예정이다.
나야풀에서 주방팀과 포터와 헤어지기 전에
일행 전체가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버스에 올랐다.
다른 가이드는 포카라까지 함께 갔는데 나왕은 그곳에서 헤어졌다.
얼떨결에 헤어지는 바람에 아무 것도 챙기지 못했다.
돌아와서도 영 마음이 찜찜하다.
내 마음 편하자고 하는 짓인데······.
순박한 스물 두 살의 청년
어린 나이에 우리 일행을 살뜰히 챙겼던 따뜻한 청년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한다던 젊은 청년의 앞날에
하느님의 은총이 가득하길 빈다.
포카라 호텔에 투숙하고 저녁을 먹을 때까지 세 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다.
우리 친구 네 명은 쇼핑을 하기로 했다.
다음날 카트만두에서 시간이 허락된다면 힌두교 사원을 방문할 생각이었다.
친구들은 가족들을 위해 이것저것 선물을 구입했는데
나는 립빠 몇 개를 사고 치즈를 주문했을 뿐이다.
여행지에서 물건을 잘 사지 않는 성격도 있었지만
아내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말했기 때문이다.
화려한 색상의 네팔스러운 숄을 사갔다가는 티박을 맞을 게 뻔하다. ㅋㅋ
그리고 나를 위해 3만원 짜리 짝퉁 노스페이스 배낭을 샀다.
색상이며 디자인이 내 마음에 꼭 들어 기분이 좋았다.
그래도 시간 여유가 있어 맥주 한 잔을 했다.
라지 사이즈의 피자에 맥주 두 병, 커피를 시켰는데 15000원이 되지 않았다.
저렴한 가격에 담백한 피자와 맥주로 우리들만의 여행을 정리했다.
호텔로 돌아와 일행 모두와 저녁식사를 하러 갔다.
산마루(?)라는 한국음식점에서 삼겹살을 먹었다.
우리는 공동 경비로 맥주를 샀다.
트레킹 내내 일행이 끊임없이 간식을 내놓았다.
참 종류도 다양했다.
마치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빵 다섯 개로
남자만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의 기적 같았다.
일행에게 얻어먹는 빚을 갚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맛있는 저녁식사를 마치고 다하지 못한 쇼핑을 했다.
쇼핑을 마치고 친구인 북극성이 아들의 수의사 국가고시 합격턱을 내겠다고 해서
라이브 카페에서 맥주를 한 잔하고 열두 시가 넘어서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로 들어서는데 틴바와 비루가 우리를 맞이했다.
산행을 하며 베풀어준 따뜻한 배려에 작은 답례를 했다.
이놈의 쫀쫀한 성격이란······.
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 사람들이고
어려운 환경에서 사는 사람들인데 좀 넉넉하게 챙겨줄 걸.
그래서 가난했던 성장과정을 숨길 수가 없나보다.
롯지에서가 아닌 깨끗하고 포근한 호텔에서 마지막 밤을 보냈다.
▶열하룻 날: 돌아간다는 설레임으로······.
포카라-카트만두
다섯 시에 일어나 사랑곶에서 일출을 보기로 했다.
푼힐전망대에서 그리고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에서 일출을 보았는데
또 무슨 일출일까 하는 마음에 별로 가고 싶지 않았으나
친구들이 가겠다고 해서 마지못해 따라나섰다.
새벽에 승합차를 타고 3,40분을 달려 사랑곶에 도착했다.
손전등으로 길을 밝히며 한참을 올라가다가
일인당 50루피에 옥상에서 일출을 조망할 수 있도록 자리를 내주었다.
옥상에 올라가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네팔차가 올라왔다.
소박한 그들의 국민성이란······.
그동안 수도 없이 많이 본 히말라야 영봉인데
한 눈에 펼쳐놓으니 또 다른 느낌이었다.
잠시 후 일출이 시작되었다.
내 기준으로 봐서는 아주 멋진 풍경이었는데
사진작가 관점에서는 엷은 안개가 낀 것이 못내 아쉬운 것 같았다.
나는 휴대폰에 파노라마로 찍는 기능이 있다는 것을 그때야 비로소 알았다.
한 컷에 다 들어가지 않는 히말라야 영봉을 파노라마 기법으로 찍어 담았다.
일출을 보고 호텔로 돌아왔다.
마지막 일정은 잡지 않아도 괜찮았을 텐데
굳이 새벽부터 이 일정을 추가한 것은
흩어져있는 히말라야의 풍경을 잘 정리하라는 대장님의 뜻이었던 것 같다.
아침식사를 하고 포카라 공항으로 이동해서 카트만두행 비행기를 탔다.
날씨 사정으로 비행기가 뜨지 않으면
버스로 여섯 시간을 이동해서 카트만두로 가야한다는데
마지막까지 날씨가 협조해주어 예정된 시간에 카트만두로 갈 수 있었다.
카트만두에 도착해서 늦은 점심을 먹고
타멜 거리에서 한 시간여 쇼핑을 할 기회가 있었다.
친구가 양가죽 지갑을 사주며 아들 주라고 선물을 해서
나는 남은 네팔 루피로 친구가 좋아하는 빵을 샀다.
짐을 챙겨서 카트만두 공항으로 갔다.
카트만두 공항은 도착할 때처럼 여전히 어수선했다.
입국할 때 ‘만원, 만원’에 넘어갔던 기억이 있어
신경을 곤두세우고 그들을 경계했다.
출국수속을 마치고 비행기 탑승장으로 갔는데
헐, 네팔 공항에는 면세점이 없었다.
아내가 크리스찬 디올 028 립스틱을 사오라고 했고
아들은 저렴한 스포츠 가방을 사오라고 했는데······.
이런 난감함이란.
스포츠 가방은 아니더라도 립스틱은 비행기에서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비행기에도 아내가 원하는 제품은 없었다.
이런.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이상하고 네팔스러운 양모 숄이라도 살 것을······.
안 되는 놈은 이래도 저래도 안 되나보다.ㅋㅋ
그렇게 나의 11박 12일의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마무리 했다.
▶열이튿 날: 일상으로 돌아오다.
아침 일찍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울산과 대구로 내려가는 친구에게 아침을 먹여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자마자 씻지도 않고 소파에 누워 단잠을 잤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나 샤워를 하고 손톱을 깎았다.
출발하기 전에 손톱을 깎았는데 열이틀 동안 많이도 자랐다.
손톱을 짧게 자르면 왠지 기분 전환이 된다.
이놈의 성격도 참 독특하다.
손톱이 조금만 길어도 견디지를 못한다.
손톱을 자르고 나니 드디어 일상으로 돌아온 느낌의 든다.
편안해서 좋다.
편안한 곳을 두고 왜 떠났냐고 묻는다.
돌아올 곳이 있었기에
돌아올 이유가 있었기에 떠났고
떠났기에 돌아올 수 있었다고······.
아무런 변화가 없다.
친구와 지인들에게 몇 장의 사진과 메시지로 서울로 돌아왔음을 전했다.
‘정말 대단하다’라는 영혼 없는 답장이 돌아왔다.
무엇을 해야 할까?
우선 기억이 희미해지기 전에 여행 후기를 쓰기로 했다.
또 삶으로 살아내겠다고 했는데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를 생각했다.
삶으로 살아내기 위해 안나푸르나로 떠난 이유를 되새겨 보았다.
왜 떠났던가?
나에게 그런 시간이 필요한 시기였다.
교직생활 30년을 마무리하고 31년째 접어들면서
한번쯤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했고
9년 반 후의 퇴직을 준비해야하는 점검도 필요했다.
세 편의 장편동화를 탈고하고 출간을 알아보고 있는데
얼어붙은 출판시장으로 인해 출간의 기회를 잡는 것이 너무 힘들다.
이 문제가 해결되어야 다음 작품을 시작할 수 있는데······.
이 또한 어떤 돌파구가 필요하다.
올해는 출판비 일부를 내가 부담하는 형식으로라도 이 문제를 마무리하고
다음 작품을 시작하고 싶다.
아니, 출판문제와는 별개로 다음 작품을 시작해야겠다.
다음 작품은 동화가 아닌 장편소설을 쓸 생각이다.
개요를 짜놓은 지 이미 오래다.
어떻게 잘 구성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이 시대상을 반영한 멋진 글을 쓰고 싶다.
안나푸르나가 내 삶의 터닝 포인트가 되어 줄지는 나의 태도에 달렸다.
사실 안나푸르나가 아니었더라도 열심히 살겠지만
‘삶으로 살아내겠습니다’라고 했던 말을 메아리처럼 되새기며
나는 다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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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어쩜 이렇게 꼼꼼하게 잘 쓰셨어요. 인천공항에서 만나 출발할 때부터, 다시 이른 아침 공항에서 헤어질 때까지가 눈에 선하게 그려집니다. 그거 아세요? 제가 출발할 때 비행기 옆좌석에 앉았는데. 옆사람한테 말 한마디 안시키고 어쩜 그렇게 기도만 기도만 열심히 하시는지. 아! 이 분하고 놀지 말아야겠다.ㅋㅋ 그랬거든요.ㅎㅎ 장애우를 가르치시고 그림그리기 좋아하시고 게다가 동화작가님이시라 하니 역시 딱 맞는 성품의 일을 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길에서 만난 이는 천사가 아닌 이 없습니다. 우리도, 도와주신 많은 분들도 선한 사랑의 빛으로 함께 한 것 같아 지금도 감격스러워요. 저는^^
나왕군은 저와 사리님이 어미같은 마음으로 각별히(^^)챙겼어요. 마음 놓으세요. 나왕도 아쉬운지 카톡이 몇 번 오네요. 잘 해낼거라 저도 믿고 기도합니다. 첨부터 끝까지 말없이 감격하시던 라파엘님, 자상한 큰오빠같던 잠자는 곰님, 정겨운 북극성님, 섬세하신 우리형님..독수리사형제, F4, 귀한 인연 감사합니다. 우린 안나로 맺어진 인연이니 아낌없이 무한대로 응원,축복,기도하겠습니다^^
ㅋㅋㅋ
그러셨군요.
카트만두행 비행기 옆좌석에 분명히 우리 일행 중의 한 분이었는데
산행하면서 누구였을까 하고 생각해봤습니다.
나무지기님인 줄은 몰랐구요.
제가 주위를 섬세하게 잘 챙기지 못하거든요.
한 마디로 싸가지가 없다는 얘기죠.ㅋㅋ
저는 여행 후기에 사진까지 넣어서 편집하려구요.
살면서 히말라야가 새록새록 그리워질 때 꺼내서 볼 생각입니다.
그래도 히말라야 약효가 떨어질 때쯤이면 또 어딘가를 가겠죠?
이번에 함께 가고싶어했던 분을 조금 전에 만나고 왔습니다.
20여년 전에 유럽 배낭여행을 함께 했던 샘이지요.
가까운 날에 좋은 계획을 세워보자고 했습니다.
삶은 참 할 일도 많고 즐겁지요?
즐겁게 지내세요
우리형님?ㅋㅋ 작가님의 솜씨로 맘을 녹여 내시네요. 같이 걸으면서도 몸이 불편하신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데 고생이 많으셨네요.
직접 쓰신 동화책이 정말 궁금해지네요.
제가 막내로 자라서 엄살이 좀 심하죠.
누구나 겪는 고산증인데......
쟁쟁거리는 소리를 들은 친구들은 힘들었을 거예요.
좋은 산행을 함께 할 수 있어서 감사드리구요.
새해에는 소망하는 모든 것 이루시길 빕니다.
물 흐르듯이 깔끔하고 편안하게 글을 읽었습니다. 역시!! 전문가는 다릅니다.ㅎㅎ
장편동화와 장편소설이 기대됩니다.
출판되면 젤 먼저 히여동에 알려주세요.
바로 구입해서 읽겠습니다.^^
행복한 동행으로 함께 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감사합니다.
과찬이세요.
동화를 쓰다보니 호흡이 긴 글을 쓰면 안 되거든요.
감사합니다.
이번 트레킹은 모든 박자가 잘 맞은 것 같아요.
날씨, 사람들, 도와 주신 분들 등등
그 중에 하나만 삐끗해도 힘든데.....
좋은 산행을 함께 할 수 있어서 감사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여행후기 잘 읽고 갑니다.. 그토록 힘들어 하시는줄도 모르고 부은 얼굴만 보고 놀렸던 일이 부끄럽게 생각되네요..진심으로 사과 드립니다^^포터들과 쿡팀에 대한 마음은 우리 모두 다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요즘 아침마다 하는 기도 제목이 저도 조금 바뀌었어요.. 그들 각자의 기도가 이뤄지길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입니다.. 또한 우리형님의 새로운 시작에 응원의 마음을 보냅니다 ^^
무슨 말씀을요?
누구나 다 힘든데 저만 힘든 것처럼 엄살을 부려서 죄송한 걸요.
지누단다의 피자가 생각납니다.
피자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담백해서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새해에도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친구 잘 둔 덕분에 명절 연휴에 드러누워 여행기를 읽으면서 빙긋빙긋 웃기도 하며 다시 트레킹을 떠나 거기에 있는듯한 생생함에 또 한 번 호사를 누립니다. 우리형은 준비해둔 동화도 올해 꼭 출간하기 바라고, 장편소설도 기대 만땅!! 히여동 여러분도 올해 소망하시는 일들 모두 이루시기 바랍니다~
언제 다녀가셨는가?
어제도 톡으로 소식을 전했는데
이렇게 카페에서 만나니까 느낌이 이상하다.ㅋㅋ
오늘 안나푸르나를 같이 가고 싶어 했던 두 사람을 만나고 왔네.
좀 미안하기도 했고.....
좋은 정보를 주고 왔지.(내가 순 엉터리면서 무슨 정보?ㅋㅋ)
이야기를 하면서
뭔가 생각이 같은 점이 많다는 것이
이렇게 좋은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
생각만 같은 게 아니라 함께 할 수 있어서 고마웠네.
잘 쉬게나.
따뜻한 감성의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곧 2월에 떠나는 일원인데요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행복만땅하세요^^
2월에 가시는 군요.
잘 다녀오세요.
많이 보고 많이 생각하시고.....
저는 고산증으로 조금 힘들었던 것 외에는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고산증으로 조금 힘들었던 것도 오히려 추억이 되구요.
저는 여행을 할 때
그 나라의 환경과 문화를 받아들이려고 마음을 활짝 열어놓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신비로운 체험이 되었습니다.
1월의 일정처럼
날씨는 물론이고 함께 산행하시는 분들
그리고 도와주시는 모든 분들이 잘 화합해서 좋은 트레킹이 되시길 빕니다.
잘 다녀오세요.
@우리형 네~고마워요^^
출발하기도 전에 많은 힘이 되는군요
감사감사^^
안나푸르나 여행기를 소설 읽듯이 한숨에 재밌게 읽었습니다. 냉탕 온탕을 힙겹게 오간후에 이제야 찬찬히 읽어 봅니다. 엄친아 처럼 단정하고 조용한 분이라 지누난다 에서의 폭발이 없었더라면 스쳐지나갈 뻔 했습니다. 하루하루 여정을 읽으며 저의 느낌과 오버랩해 보았습니다. 세심한 후기 감사 드립니다.
소중한 기록, 열심히 정독했습니다. 벌써 기억이 가물가물한 것도 있고 어떤 것은 아예 몰랐던 것들도 있네요. 잘 읽고 제 기억속으로 옮겨 갑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