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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회 마로니에전국여성백일장’ 산문 부문 장원>
골목 끝에도 찾아올 봄을 기다리며
서 한
박스 아래 구멍에서 뭔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어린 길고양이였다. 녀석은 구멍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주위를 살피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재빨리 안으로 사라졌다.
도 했다. 어찌나 조심성이 많은지 구멍 안에서 고개도 내밀지 않은 채 눈만 반짝이는 모습이었다. 가만히 보니 벽돌 한 장만 한 넓이의 구멍은 바로 옆에 있는 다른 컨테이너박스와도 통하게 되어 있어 녀석은 비록 세들어 살지만 집을 두 채 나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컨테이너 아래는 시멘트 바닥이지만 버젓이 1층이니 반지하같이 칙칙하지는 않겠구 나 하는 생뚱맞은 생각도 들었다. 나는 상상으로나마 도저히 들어가볼 수 없는 녀석의 방안에 수시로 들락거렸다. 내가 우리집 베란다 한구석에 나만의 공간을 만들어 책을 읽거나 사색을 즐기듯 녀석도 혹 그런 걸까, 하는 지레짐작을 하면서.
어가 키만 뻘쭘하니 녀석의 집 앞까지 그림자만 길게 두고, 단풍이 미처 들지 못한 등나무 잎이 둥글게 말려 바닥에 깔렸 다. 나는 공연히 애꿎은 나뭇잎을 걷어차며 가을을 느낄 새도 없이 바삐 가는 시간을 탓했다. 늦가을을 재촉하는 찬바람 을 맞으며 월말 관리비를 정산하러 가는 길, 통장의 잔고를 떠올리며 녀석은 월동준비나 제대로 하고 있는지 구멍 안을 잠깐 들여다보았다. 물가는 오르고 집안 경제는 해가 다르게 곤두박질을 친다고 다들 아우성인데 나는 주머니에 동전 소 리가 나도 제 잘난 맛에 자존심만 세워 의연한 척 사는 것 같아 공연히 쑥스러웠다.
때 아닌 소낙비가 내렸다. 구멍 앞 쌓인 흙 위에 녀석의 앙증맞은 흔적이 보였다. 새끼손가락으로 콕콕콕 세 번 찍은 모 양의 뒤쪽에 다시 엄지손가락으로 쿡 누른 듯한 선명한 발자국이 옆 컨테이너 구멍까지 나 있었다. 녀석이 소통한 거리 라야 고작 10미터 남짓이다. 하기야 요 며칠 내 걸음걸이를 어림잡아 보니 우리집에서 골목 끄트머리를 돌아 녀석의 집 앞을 거쳐 재활용집하장까지 80미터 정도다. 녀석과 나의 몸집으로 비교해 보면 우리의 행동반경은 얼추 비슷한 듯하다. 동안거나 면벽참선을 하는 것도 아닌데, 이 좋은 계절에 그 흔한 여행 한번 못 가고 동네나 왔다 갔다 하는 나나 녀석이 나신세가 비슷해 보인다. 그래서 흉흉한 세상인심에 잔뜩 주눅이 들어 살맛 죽을맛 곱씹지나 말자며 밑도 끝도 없는 한 마디를 툭 던져 주었다.
종종걸음이다. 찬바람이 불고 어제 내린 비에 길바닥까지 질퍽했다. 관리소에서 낙엽을 녀석의 집 쪽으로 쓸었는지 구멍 앞이 완전히 막혀 있었다. 안에서 잠가야 할 대문인데 밖에서 걸었으니 녀석이 놀라지나 않았을까. 나는 얼른 맨손으로 젖은 낙엽을 파헤쳤다. 주춤주춤 엉덩이를 들고 안을 들여다보니 휑한 게 바깥보다 더 한기가 느껴졌다. 재건축을 위해 서 만들어 놓은 추진위원회 사무실인데 사람들이 오가지를 않으니 온기가 있을 리 없다. 그런데 세입자끼리도 저렴하고 괜찮은 전셋방 구하기 추진위원회 같은 뭔가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고 보니 집 문제로 녀석과 내가 논의해야 할 공통 주제가 생긴 셈이다.
이 따뜻하다. 신문을 보면서 깜박 졸다가, 다니는 직장에 하루 휴가를 내고 신촌에 간 큰애의 전화를 받았다. “엄마, 졸고 있었죠?” 하고 묻는 큰애의 졸린 듯한 목소리가 되레 내 잠을 깨웠다. 작은애 학교 교정에 왔는데 평일인데도 휴일 같이 한가로워 생각하니 자기만 노는 날이고, 오늘 날씨가 너무 좋다고 일러 준다. 요즘 날이 춥다는 핑계로 내가 집에만 있는 게 마음에 걸렸는지 “지금 밖에 나가 보세요.”라고 아이 달래듯 말한다. 나는 트레이닝복 차림 그대로 운동화를 끌고 현관 문을 나섰다. 해거름이 되려면 좀 더 있어야 하지만 혹시 녀석을 볼 수 있을까 걸음을 재촉했더니 구멍 안이 빈 듯하다. 녀 석의 코에도 이미 따뜻한 기운이 들어갔나 보다.
해가 녀석과 내가 보내는 마지막 해가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아무튼, 누가 알까. 왠지 허기진 겨울을 벗어나기만 하 면 느끼기만 해도 배부른 계절, 봄을 기다리는 들뜬 심정을. 골목 끝에 있는 우리집이나 녀석의 집에도 봄은 찾아올 것이 라는 믿음을. 봄이 오면 나는 가장 먼저 베란다로 나가는 덧문을 떼어낼 것이다. 그동안 직장에 다니느라 몸보다 마음이 바빠 덧문을 떼어내면 집안이 환해질 거라는 생각만 했다. 진종일 햇볕이 들어 스멀스멀 집안이 통째로 낮잠에 빠지면, 나 는 그저 거기 베란다 한구석에 앉아 글을 쓰고 싶다. 녀석은 어떨까. 아마 춘정을 못 이겨 동네방네 마실 다닐 것 같다. 풀 밭엔 제철 맞은 개망초가 피어나 지난해보다 더 환한 봄이 녀석을 찾을지 모른다. 그 사이를 우리는 누비며….
서한 I 서울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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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진하시기를.....
베란다 구석에 나만의 공간을 만들어 책도 읽고 사색을 즐기신다고요...저에겐 요원한 소피의 세계에 사시는군요...부럽습니다...축하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