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명으로 풀어본 한국사
□ 마포구 성산동의 유래
김자점이 반역을 위해 무기를 제조한 곳
풀무골(야동冶洞)은 월드컵경기장 부근의 지하 기름 탱크가 있는 성산동을 일컫는데, 조선 인조 때 김자점金自點이 반역을 위한 무기 제조를 위해 풀무질을 한 데서 유래하였다.
풀무골(야동)에 있는 김자점의 무기 공장
말무덤재라는 고개 이름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이 말을 타고 이곳을 넘어오다가 말의 다리가 부러지자 차고 있던 군도軍刀로 말을 베어 죽이고 이곳에 묻은 까닭으로 유래하였는데 지금의 월드컵경기장 자리이다.
기름 저장소가 있는 밑은 석벽인데 이곳은 강의 수심이 깊어 전에는 용이 나왔다는 설이 전해지는 곳으로 용문출 또는 용미출龍尾出이라고 하였다.
상암동 북쪽의 뒷산은 도당재라고 불렀는데, 이는 전에 부군당府君堂이 세워져 마을의 제사를 지냈으나, 일제 때에 건물은 훼손되고 고목나무만 남아 있다.
□ 마포구 현석동의 유래
화산암으로 유달리 돌이 검은 마을
현석동玄石洞동명의 유래는 이 근처의 돌이 특히 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은 옛 발음으로 감은돌 동네라고 불렀는데 이곳 사람들은 옷감은돌 마을과 안감은돌 마을이라고 나누어 불렀다.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바라보면 강변북로와 밤섬을 사이에 두고 얼음 창고와 천주교 성당이 보인다. 이곳 주변은 농암農岩과 와우산이 규장암 지층으로 화산암이며 깊은 땅속에서 오랫동안 중화 작용이 노출되어 규장암 덩어리가 되어 원래 붉은색이었지만 표토가 변하여 흰색과 거무스름한 바위로 변했다고 한다.
한편, 현석동 177번지 터는 조선 숙종 때 문신인 현석玄石박세채朴世采가 소동루小東樓를 지어 살았는데 그의 호를 따
서 현석동으로 불렀다고 하기도 한다.
소동루는 중국의 동주東洲에 비하여 작은 곳이라는 뜻으로 박세 채가 말년을 보내며 집필을 했던 곳인데 강 위로 나는 갈매기와 강에 유유히 떠 있는 황포 돛대의 매력을 뿌리칠 수 없어 언제나 강 쪽으로 나 있는 문을 열어 놓고 지냈다고 한다. 그가 죽은 후 소동루는 한때 허물어져 안동 김씨가 한창세도를 부릴 때, 김병근金炳根의 첩에게 돌아가 날마다 이곳에서 주연을 베풀기도 했다. 이 소동루는 다시 안동 김씨를 미워했던 흥선 대원군의 소유가 되었는데 그 당시 대원군이 직접 쓴 소동루란 현판을 김태봉金太奉이 오랫동안 소장하고 있었는데 현재는 없어졌다.
□ 서대문구 연희동의 유래
임금이 머물던 궁궐이 있던 곳
경복궁 앞에서 사직 터널을 시원스럽게 빠져나오면 내리막으로 확트이면서 시야에 전개되는 일대가 흔히 알려진 새터말
(신촌新村)이다. 1980년대 초에 개통된 성산대로를 따라 연세 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 사이에서 우측으로 방향을 잡으면서 김포 쪽으로 달리면 우측에 안산 지맥 자락이 나타난다. 이곳 일대는 조선 초기 때 명당으로 보고 궁궐터로 두 차례나 계획되었던 유명한 대야평大野坪, 일명 대얏굴의 중심부가 전개된다. 바로 이 구릉을 옛 사람들은 대궐재(대궐현大闕峴)라고 하였으며, 대궐재를 지나면서 궁말(궁동宮洞)로 불린 지금의 연희동延禧洞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전직 역대 대통령 네 분도 살았던 곳으로 지금도 연희궁터말로 입에 오르내리기도 한다.
조선조 초에는 한성부 서부 반송방 성외였으나 1867년(고종 4) 5월『육전조례六典條例』를 보면 북부 연희방 성의 연희궁계 궁동, 정자동, 염동廉洞으로 칭하게 되었으며 1911년부터 1936년까지 일제가 서울에 대해 5부 8면제를 실시하면서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으로 속한 때도 있었다.
궁말이란 이곳이 궁이 있었던 마을이란 뜻에서 궁들 대궐재골로 불렸다.『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의 기록을 보면
<도성 밖 서방 15리 양주 땅에 연희궁이 있었다. 조선조 초 정종이 태종에게 왕위를 선양한 후 이궁離宮에서 거처하였다.>
하였으니 당시에는衍퍼질연자와禧복희자를 쓴 연희궁에 정종이 머물렀음을 알 수 있다. 또『세종실록』의
(세종 2년(1420) 정월 무악 명당터에 궁을 건축하라는 왕명을 내려 공사에 착수했다. 당시 가뭄이 심하였으나 공사를 강
행하여, 11월에 완공시켰다.)
라는 기록으로 보아 세종이 상왕인 태종을 위해서 서쪽으로 피방避方할 이궁을 설치한 것으로 보이는데, 처음에는 서이궁西離宮이라 하다가 1425년(세종 7) 8월에 정식으로 연희궁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세종은 연희궁을 피방의 목적보다 이어소移御所로 사용하고 1426년에도 잠시 이곳에 머무르다 이듬해에 창덕궁으로 돌아가는 등 자주 들렀다고 한다. 연희궁은 희우정喜雨亭(망원정望遠亭)과 모화관慕華館에 행차할 때나 사냥시 휴양소로 사용하였으며, 1431 년(세종 13) 4월 주변 일대에 과실목과 뽕나무를 심도록 하여 궁중의 잠실蠶室로 쓰기도 했다.
세조 때에 이르러 연희궁을 서잠실西蠶室이라 하고 정5품 관리를 현지에 배치하였는데, 특히 세조는 농업을 장려하기 위해 이곳에 들러 모내기를 하고 환궁하는 길에는 모화관에서 군대를 사열했다고 기록되고 있다.
1505년(연산 11)에 연희궁을 수축하고 궁중 연회장으로 삼았다가 후에 폐쇄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일찍이 조선 개국 때에 태조와 태종에 의해서 궁궐터로서 손색이 없는 곳으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태종은 하륜 등이 이곳을 도읍지로 삼을 것을 주청하여 궁궐 축조 계획을 세우다가 그치고 말았다.
오늘날 옛 궁터 자리는 밀집된 주택과 연세대학교 부지 일부로 추정되나 궁지宮址나 전각들의 자료를 채취하지 못하고 있다. 언젠가는 관계 당국과 학교의 도움을 받아 지표 조사를 비롯한 유물을 추출 확보하고, 발굴 복원하여 경복궁 다음으로 오래된 연희궁을 조선왕조 6대 궁의 하나로 보존해야 될 것이다. 더하여 정종 대인 1400년부터 연산군 집권 말기인 1505년(연산 11)에 이르기까지 약 105년간 왕의 잠저, 이궁, 이어소, 별궁, 연희궁으로 기록되고 있는 이곳을 복원하는 사업은 학술 단체들의 당면 과제라고 주장하고 싶다.
당시 연희궁에서 바라보이는 곳에 큰 느티나무와 정자가 있어 정자말로 알려진 부근에는 조선조 후기 숙종 때 희빈禧嬪장張씨의 친가가 살았다는 설이 전해진다 현재의 궁말에는 전직 대통령 두 분이 살고 있으며, 안산 자락에 광복 후 모두 네 분의 전직 대통령들이 재직 중 거처했던 것으로 보아 어쩌면 그 당시 사람들이 생각했던 대로 명당임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생각해 본다.
한달 고개를 넘으면서 우측으로 옛 봉우재길을 따라 동쪽 산으로 오르면 동봉수대東烽燧臺가 있는 안산 정상에 이른다
연희궁터[태종은 무악(毋岳)에 도읍하지 못함을 아쉬워하였다(연세대 자리)]
첫댓글
정종의 잠저라 잘 알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