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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넘버 001 전업주부
렘 31:1-40(31-34)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코드넘버 001 전업주부’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코드넘버 001하니까 그 말의 리듬이 코드넘버 007이 연상이 되지 않습니까?
007은 영국 비밀정보국인 MI6(Military Intelligence, section six) 소속의 요원입니다.
007의 의미를 보면, 00은 사람을 죽여도 좋다는 나라의 허가를 받은 자입니다. 따라서 00이란 코드넘버가 붙은 요원이 사람을 죽이게 될 경우 그로 인해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는 국가가 책임을 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7은 살인해도 된다는 코드번호 00을 지닌 일곱 번째 요원이라는 뜻입니다. 이 007은 영국 작가 이언 플래밍이 쓴 소설에 나오는 가상인물입니다. 실제로 MI6 영국 비밀정보국에서 00의 코드를 허락받은 사람은 세 사람이었다고 하던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오늘 설교 제목인 코드넘버 001 전업주부에서 001의 뜻이 무엇일까요?
역시 죽이는 겁니다.
00에서 첫 번째 0은 내 마음에 관심을 끌고 내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모든 대상을 죽이는 겁니다. 그리고 두 번째 0은 내가 마음에 끌려서 하고 싶어하고 해야만 될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을 마음에서 죽이는 겁니다.
007의 00은 살인을 하는 건데 이 001 전업주부는 007 제임스 본드와는 다르게 내 마음 안에 들어와 있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죽이고 이 세상의 모든 일을 죽입니다.
또한 001에서 1은 내 마음 안에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죽이고 모든 일을 죽이면 남는 건 하나님 한 분 남습니다. 따라서 마음 안에 하나님만 두고 하나님과의 관계만 유일한 1로 생각하는 전업주부가 001 전업주부라는 것입니다.
007 제임스 본드는 영어 불어 독어 삼개 국어를 기본적으로 하는데다가 너무나 영민한 통찰력을 갖고 있고 각종 무술도 체득하고 있고 최신 무기를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는 정말 1개 대대 이상의 화력과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007 제임스 본드가 무섭고 대단하고 하늘을 나는 사람이라고 해도 001 전업주부를 대항할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코드넘버 001 전업주부가 누구일까요?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본문의 내용은 이제까지 포로로 잡혀가게 될 참으로 참혹할 멸망에 대한 예언이 계속해서 주어지고 있다가 오늘은 분위기가 바뀌어서 절대로 선민을 내가 포기하지 않겠다는 그래서 포로에서 다 귀환시키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선언이 나옵니다.
그래서 1-30절까지에서 처음부분은 북왕국 이스라엘이 그 옛날 앗수르에 사로잡혀서 사방으로 흩어졌는데 그 사람들을 다시 모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고, 뒷부분에서는 남왕국 포로귀환을 말씀하십니다. 그 사랑의 표현이 얼마나 절절한지 모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마치 원수도 그런 원수가 없을 만큼 잔인할 정도로 느껴질 정도로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보복을 하는 것처럼 멸망을 시키시다가 왜 또 갑자기 이렇게 애절하게 그들에 대한 사랑의 표현을 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여러분, 하나님은 절대로 선민에 대한 사랑을 중단하지 못하십니다. 선민 스스로가 끝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해서 멸망의 길로 갈수는 있지만, 하나님께서 선민에 대한 사랑을 중단하실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속에는 선민에게 주어지는 어려움과 환난과 고난은 저주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속이 상해서 궤도 이탈한 상태를 바르게 잡으려고 하는 일은 있어도 저주가 없습니다.
혹 여러분이 사업이 망했습니까? 여러분이 지금 건강이 저주받은 상태입니까? 여러분의 자녀의 일이 기가 막힐 정도로 되는 일이 없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이 교인이세요?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저주가 아닙니다.
뭔가 사랑의 또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뭔가 좀 더 복된 길로 이끌어 가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징계와 채찍일망정 저주가 없습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물먹는 하마처럼 우리들에게 주어져야 할 마땅할 모든 저주를 다 빨아들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선민에 대한 사랑은 그 사랑이 자발적입니다.
자발적이란 우리가 보통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남녀 간의 사랑을 한번 생각해봅니다.
회사에 근무하는 두 사람이 사랑을 하게 됩니다. 처음부터 사랑이 불꽃이 튄 게 아닙니다. 지내다 보니까 좋은 점이 보이고 매력적인 포인트가 포착이 되고 이러면서 점점 마음에 나도 모르게 사랑의 감정이 싹이 틉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사랑은 대상에 의해서 촉발되고 자극되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아예 대상이 없을 때 그 속에서 사랑이 용솟음치시 면서 사랑의 대상을 만들어내신 것이고 사랑의 대상을 찾아다니셨습니다. 이미 어떤 매력적인 대상이 있어서 그 대상에 의해서 사랑의 감정이 촉발되고 생겨난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신 스스로 속에서 용솟음치는 사랑 때문에 사랑의 대상으로 선택한 것이 선민이기 때문에 도대체 선민이 아무리 악해도 그 선민에 대한 사랑을 끊을 수가 없습니다.
단지 말씀드렸던 것처럼 선민 스스로가 끝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할 수는 있습니다.
왜냐하면 선민은 인격체이기 때문에 하나님도 사랑을 하시긴 하시지마는 로봇과 사랑을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마치 짐승들이 본능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것처럼 본능에 따라서만 새끼를 보호하고 본능에 따라서만 먹이를 찾아다니는 것처럼 그렇게 본능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인격적인 사랑이 아니며 사랑에 대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선민이 하나님의 사랑을 끝까지 거부할 수는 있습니다. 아니면 오해해서 잘 못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전제하에서 『새 언약』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새 언약이라는 말은 전체 성경에서 이곳에만 나옵니다. 한 부분에서만 나오는데 보통 귀한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을 언약(Testament)이라고 말하는데 여기선 새 언약입니다.
새 언약이 무엇인가 이전에 먼저 구 언약에 대한 부분이 먼저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민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손을 붙잡고 나왔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19장에 보면 시내 산에서 율법을 주시면서 계약을 맺고 결혼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스스로가 당신이 그들에게 남편이 되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만 아내로서의 이스라엘이 계약을 파기해버리고 맙니다.
왜 율법과 말씀을 중간에 두고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맺습니까?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Spirit을 영이라고도 하지만 정신이라고도 번역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말씀을 드리는 대로 소설가의 글 속에 소설가의 spirit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결혼을 할 때 율법을 가운데 두고 말씀을 가운데 두신 이유는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말씀 가운데 거하십니다.
그러므로 아내된 이스라엘 선민들이 남편을 사랑한다는 것은 율법을 사랑하는 것이고 말씀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남편 사랑입니다.
여기에서 남편으로서의 역할과 주부 아내로서의 역할이 결정이 되었던 것입니다.
주부로서의 역할은 무엇이고 남편되시는 하나님의 역할은 무엇이었습니까?
예를 하나 들어서 제가 읽어봅니다. 여호수아 1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 1:7-8)
이 말씀 속에서 남편이신 한나님과 아내되는 여호수아의 역할이 나타납니다. 아내로서 여호수아가 해야 될 일은 전업주부의 일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전업주부란 남편과 이룬 가정 안에서 가정의 일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여호수아에게 놓여진 상황은 가나안 정복전쟁을 시작해야 됩니다. 가나안 7족속과 피를 튀기는 싸움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싸움이 시작되는 상황 직전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야, 너는 전업주부다. 전업주부의 할 일은 가정 안에서 남편과 관계되는 가정의 일만 하듯이 너는 나하고 관계되는 일만 해라.”
그러면 하나님의 일은 무엇입니까?
여호수아가 나가서 정복전쟁을 해야 되는 그 전쟁이 남편되시는 하나님의 바깥일임을 말합니다.
전업주부로서 할 일은 주야로 율법을 묵상하면 됩니다. 이 세상 현실적 차원에서 말하자면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진두지휘하면서 전쟁을 치러야 되는데 실지로 그가 할 일은 주야로 칼을 갈고 주야로 작전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주야로 율법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주부가 할 일입니다. 전쟁은 바깥 일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나님과 여호수아가 묶여서 우리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결혼했다면 여호수아의 아내, 자식들 그리고 여호수아가 치러야 될 전쟁은 다 바깥일입니다. 바깥 일을 하는 남편 그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전업주부로서 여호수아가 할 일은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입니다. 이게 전쟁을 치러야 될 사람에게 하실 말씀입니까?
지금 연평도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그렇다면 이명박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이 해야 될 일이 무엇입니까? 주야로 율법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북과의 전쟁이라는 바깥 일은 하나님이 하실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깥 일에 손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과 내가 우리입니다.
그래서 그 우리 안에 있는 일을 전업주부로서 하면 되는 것입니다. 내 남편도 내 아내도 내 자식도 내 바깥 일입니다. 나하고 하나님하고만 우리이고 안의 일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나 이외에는 다 바깥 일입니다. 자식도 바깥 일이고 남편도 바깥 일이고 아내도 부모도 사업도 농사짓는 것도 학교가는 것도 다 바깥 일입니다.
그것은 바깥 양반되시는 하나님이 할 일이었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스스로 바깥 일에 손을 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남편이라는 뜻을 가진 바알을 숭배합니다. 다른 남자를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바깥에 있는 남자를 사랑하기 시작하고 바깥에 있는 일들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망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새 언약을 맺으신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새 언약을 만드십니다.
이제 전업주부의 일을 바꾸십니다.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면서 율법을 지키라 했더니 지키지 못합니다. 율법을 사랑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그 모든 말씀을 주님의 십자가 사건 안에 다 집어넣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구약시대 때는 돌에 새겨서 사람 마음 바깥에 두시고 마음이 솔선수범해서 그 말씀을 지키라고 했는데 이제는 마음 안에 말씀을 새겨 넣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 마음 안에 말씀을 새겨 넣으면 내 마음이 그것을 하고 싶게 되는 이 모든 일들이 새 언약을 통해서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코드넘버 001 전업주부가 새 언약을 통해 탄생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보기만 하면 됩니다.
모세가 구리뱀 장대를 든 것을 보기만 하면 불뱀의 독에서부터 구원을 받는 것처럼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전업주부로서의 모든 일들을 완성하는 것으로 간주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자식 일, 내 남편 일, 내 아내 일, 내 직장 일, 내 일생의 모든 일들이 다 바깥 일이므로 바깥 양반되시는 하나님께서 직접해주십니다.
여러분, 구약의 이런 바깥 일과 주부로서 해야 되는 안의 일이 계속 반복해서 언급됩니다.
예를 한 번 더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신명기 28장 1절 이하에 보면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신 28:2-6)
하나님의 음성을 청종하는 것이 전업주부의 일입니다. 나는 그것만 하고 있으면 됩니다. 그러면 광주리 만지고, 떡 반죽 그릇 만지고, 성읍에 가서 일을 보고, 양이 새끼를 낳고 소가 새끼를 낳은 이 모든 일은 바깥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부는 전업주부로서 집안 일만 하면 되는데 나와 삼위일체 하나님이 내 집안입니다. 남편과 내 집안이 아니며 자식을 포함해서 내 집안이 아닙니다. 이 부분에서부터 틀렸던 것입니다.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말 하나로 줄어들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그저 먼 산 바라보듯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00이라는 코드가 생깁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내가 죽었다는 고백을 하며 내 마음 안에 들어와 있는 모든 사랑의 대상들을 죽입니다. 내가 죽으면 사랑의 대상들도 없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007에서 00이 살인을 허락한 것처럼 주님의 십자가 사건은 내가 죽은 것임과 동시에 내 마음에서 내가 사랑하는 모든 대상들을 다 죽이는 것입니다.
이 사실 다시 말해서 “내가 죽었습니다. 주님, 내 마음에서 내가 사랑하고 싶어하고 사랑하고 있는 모든 대상들이 다 떠나가게 해주세요.” 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바라보고 기다리고 있으면 됩니다. 그게 기도입니다. 그러면 다 없어지게 됩니다.
또 내가 걱정하고 근심하고 내가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모든 일에 대해서 손을 떼는 겁니다. 손이 못 박히고, 발이 못 박히고, 머리에 가시 면류관이 박히고, 배에 창이 들어왔으니까 힘 쓸래야 쓸 수가 없고 손 댈래야 댈 수가 없습니다. 문제 해결을 위해 뛸래야 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에 들어와 있는 모든 일이 다 죽고 00코드가 만들어집니다.
그러고 나면 세상 것이 내 마음에서 다 없어졌으니까 유일하신 한 분이 들어오십니다.
이게 새 언약(약속)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것 뿐입니다.
여러분, 너무 쉬워서 안 하고 있습니까?
돈 버는 것보다 어렵고 자식 키우는 것보다 어렵겠습니까? 내 몸을 가꾸는 것보다 어렵겠습니까?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 중에 제일 쉬운 일입니다.
십자가 바라봄을 통하여 00코드가 만들어지면 유일하게 남아 계시는 1되신 하나님께서 내 안에 들어오시고 내 안에 들어오시면 바깥 양반으로서 하나님께서 바깥 일을 다 하실 것입니다.
누구 좋으라고 왜 우리는 이것을 믿지 못하는 것일까요? 누구 좋으라고 왜 우리는 이대로 해보지도 안 하는 것일까요?
001 전업주부인 내가 할 일은 하나님과 내가 우리 집안입니다. 집안 일만 하면 됩니다. 집안 일이란 내 마음 안에 들어와 있는 바깥 일, 바깥 사람들을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다 마음에서 몰아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유일하신 내 바깥 양반되시고 내 남편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실 수 있게만 하면 됩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이 날마다 죽는다고 합니다.
날마다 죽는다고 할 때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날마다 죽는 것이고 00코드를 만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대상 제로, 내가 책임감을 느끼고 걱정하고 부담을 느끼는 일 제로. 그러면 하나님이 들어오십니다.
여기서 한 가지 물어보겠습니다.
이렇게 제로코드 001이 되는 죽는 일을 날마다 하는데 날마다 언제 하실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언제 했을까요? 공복에 하면 더 효과가 좋으니까 공복에 했을까요? 아니면 위를 상하게 하니까 밥 먹은 다음에 했을까요? 세끼 밥 먹을 때 날마다 죽는 일을 했을까요?
날마다 죽는다는 것은 매 순간마다 죽는 것입니다. 매 순간마다 001 코드의 전업주부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하십시오.
전업주부는 가정 일을 돌보는 자입니다. 나의 가정은 하나님과 내가 가정입니다. 아들도 딸도 바깥입니다. 남편도 아내도 부모님도 바깥입니다. 사업도 바깥입니다. 바깥 일은 바깥양반이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분명히 남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32절)
남편이신 하나님께서 바깥 일을 해나가시려면 내가 가정을 든든히 지키면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내 마음 안에 편안하게 들어오셔서 바깥 일들을 다 이루어나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제 그것이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새 언약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28장 말씀을 이렇게 바꿔 봅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바깥 양반되시는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고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신 28:1-6)
또 신명기 6장 5절의 쉐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그러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를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차지하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차지하게 하사 네게 배불리 먹게」(신 6:10-11) 하시는 것은 바깥 일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왜 바깥 양반의 일 남편의 일을 내가 짊어지고 생난리를 부리는 겁니까? 그러지 마시기 바랍니다.
남편과의 관계에서 코드넘버 001 전업주부로 살라는 언약입니다.
코드넘버 001. 00은 사랑하는 대상을 내 마음에서 죽이는 것입니다. 내가 해야 될 것 같은 모든 일을 내 마음에서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에서 남게 되는 것은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하나님 한 분이 내 안에 들어오시면 하나님이 내 남편이 되셔서 바깥 일을 해나가실 것입니다. 나는 전업주부로서만 있으면 됩니다.
물론 전쟁터에 여호수아가 나갔습니다. 여호수아가 칼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의 말대로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나는 직장에서건 집에서건 친구를 만날 때건 언제나 내 집안은 하나님과 나입니다. 따라서 사람을 만나고 있는 중에도 십자가를 기억하면서 말을 합니다. 상대방이 밉살스러운 말을 해도 십자가를 기억하며 마음에서 죽이고, 저 사람이 사랑스럽다 해도 십자가를 기억하며 마음에서 죽이고 오직 하나님이 들어오셔서 그 사람과의 관계에서 필요한 일들을 바깥 양반으로서 일들을 해나가실 것입니다.
코드넘버 001의 전업주부!
이게 바로 주님의 십자가 사건 새 언약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신분입니다.
007 제임스 본드? 우습지요. 바깥 양반되시는 하나님이 내 인생의 모든 일들을 당신의 일로 삼고 해나가실 때 제임스 본드가 문제가 되겠습니까?
[기도]
하나님 아버지!
001 전업주부의 신분을 한시도 벗어나지 않기 위하여 날마다 죽는다는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새 언약의 사건이신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00의 코드를 실현시키게 해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유일하신 참되신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와 평안히 거할 수 있는 하나님의 편안한 가정이 되고 방이 될 수 있도록 내 마음을 주장하고 지켜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0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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