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통일운동을 위한 기초인식
1. 미국과 러시아의 분단책임
일제강점 35년 동안의 기나긴 압박생활에서 벗어 난지 50여년, 이제 반세기를 넘고 있다. 우리 겨레는 해방의 달 8월을 맞게 되면 깊은 감회에 젖는다. 그토록 터질듯 감격스러웠던 해방의 달을 맞는 연륜(年輪)이 깊어만 갈수록 우리 한민족의 가슴마다에는 깊은 아픔만 더해 갈 뿐이다.
35년 동안의 아픔도 차마 못할 일 이어든 분단 반세기가 이 어인 일이란 말인가! 이 무슨 역사의 장난이란 말인가! 통일에 있어서 감상적인 것은 금물이라 하지만 우리는 이 깊은 감상의 늪에서 헤어날 길이 없다. 미국과 러시아는 한 핏줄의 부모·형제·친척을 갈라놓고도 반세기가 다 가도록 바라보고만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은원래 우리나라 하고 싸운 전쟁이 아니다.
미국과 러시아가 일본하고 싸운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우리는 그들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다. 미국과 러시아가 전쟁을 일으킨 일본하고 싸운 것이기 때문에 승전의 대가를 요구하고 전쟁피해의 보상을 받아 내려면 일본에게 요구할 일이요,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다. 우리는 오히려 같은 피해국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무 죄 없는 우리나라를갈라놓고, 반세기가 넘도록 바라보고만 있다. 이것은 분명히 우리나라를 35년 동안 강점했던 일본의 죄악에 버금가는 죄악이다. 분단상황이 그들 나라에 비록 유익하다 할지라도 점잖은 대국, 문화가 있는 나라라면 차마 할 일이 아니다.
미국과 러시아, 그리고 분단 원인의 원천적인 책임이 있는 일본은 똑바로 보라! 7천만 민족의 가슴마다에 서린 이 한을, 구천에 가서도 결코 잊지 못할 이 한을 언제까지 방치해 두고 보고만 있을 작정인가? 남의 나라를 두 동강 내, 이 민족의 부모·형제·친척을 갈라놓아 서로 원수처럼 혈투의 싸움을 붙여놓고, 뒤에서 구경이나 하며 언제까지 싸움판 물주 노릇만 하고 있을작정인가? 한반도가 분단이 되어 자기들의 국익에 어떤 보탬이 된단 말인가? 아니면 세계 평화에라도 도움이 된단 말인가?
오히려 한반도가 통일 되어야 동북아에 냉전기류가점진적으로 해빙기류로 전환되어, 드디어는 세계 평화에도 크게 기여 할 것이다. 그렇게 될 때만이 이 나라는어떤 나라와도 선린 외교관계의 우의를 도모해 갈 수있을 것이다. 이것은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의 북방외교의 몸부림이 이를 증명하고 있지 아니한가?
2. 피조물의 노예가 되지 말자
이념과 체제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이를 위해서는 민족 분열이나 부모·형제·자매라도 갈라서야 할 만큼 그렇게도 소중한 것이란 말인가? 이념이나 체제나 종교까지도 원래 우리 사람이 조금 더 잘 살아 보자고 만들어낸 이른바 <인간의 피조물>들이다. 어디까지나 사람이 주체요, 그 외는 객체요 소유격이다. 그럼에도 주와 객이 뒤바뀌어 사람이 이념이나 체제의 노예가 된 모습이 오늘의 분단 모습이다. 사상이니 체제니 하는 것들은 민족을 위하고 사람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수정 할 수 있어야 한다. 통일이 우리 민족의 활로를 열고 세계를 냉전 위기로부터의 구원일진대 이 통일을 위해서 무슨 일인들 못할 것인가. 이념 체제를 조금 수정하는 것쯤이야 가볍게 생각해야 한다. 체제 고집의 깊은 늪에서 헤어나야 한다. 헤어나고만 보면 7천만 민족 가슴마다에 서린 한이 시원스럽게 풀릴 것이요, 세계사와 민족사에 엄청난 선물을 안겨주는 것이 될 것이다.
이토록 분명하고 뻔한 사실을 앞에 놓고도 남북한 당국 최고 책임자들이 허심탄회하게 만나지 못할 이유가 있단 말인가. 아직도 그 체제나 이념의 우월성 때문에 더 양보할 수 없단 말인가? 아니면 그 권좌를 놓칠 수 없기 때문이란 말인가. 아무리 절대 권좌에서 생애의 영광을 만끽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통일의 저해요인이 된다면 역사는 반드시 그를 민족의 반역, 역사의 죄인으로 단죄할 것이다. 비록 야인이요, 평민으로 돌아갔을지라도 통일에 기여했다면 민족적 영광과 역사의 숭앙이 반드시 그에게 돌아갈 것이다. 사실은 이 땅위에 하나의 정권이 영원한 역사는 한번도 있지 않았다. 한때 절대적 권좌에서 천하를 호령했던 인물들도 그가 사라지기 바쁘게 호된 역사의 비판을 받았다. 그가 살고 간 사실 그대로 평가받기 마련이다. 집권연장을 통해서 호도될 문제가 아니다. 오직 이 엄연한 사실속에서 큰 깨침을 받아 미래를 가꾸어 가야한다.
이와 같이 어떠한 경우에도 정권은 유한(有限)하지만 민족은 영원하다. 한때 성쇠는 있을 수 있어도 민족은 영원할 수 있다. 그 민족의 지혜와 의지 따라서 영광된 영원을 보장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유한한 권좌가 우선되어 영원한 민족사를 잘못 이끌어가게 되면, 그것은 피차간에 엄청난 불행을 피할 길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모든 미련일랑 장부답게 훌훌 털어버리고 민족적 양심으로 돌아가자. 이 준엄한 역사의 소명을 깨닫자.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분명하게 비추며 엄명(嚴命)으로 지시하고 있지 않는가.
중국 소진장과 같은 외교적 천재도 아니요, 결정적 영향을 남기지도 못했으나 남북한 교체 방문을 통해서 어떤 실마리를 찾아보려고 노력했던 UN「 코르도베스」사무차장과「카터」전 미대통령의 시도에 대해 크게 감사한다. 지금 우리에게 남북 당사자들에게 상황 대처에 따른 이해득실을 분명히 이야기할 수 있는, 그리고 그들을 설득해 낼 소진장과 같은 대외교가는 없단 말인가. 만일 그러한 인물이 있다면 그는 우리 민족에게 유구한 역사를 통해서 받들어 모시는 인물, 감사한 분으로 기록될 것이다.
한 민족이여! 백의의 배달민족이여! 990여 번의 외침을 받아 곤욕을 치르면서도, 그 엄청난 시달림 속에서도 단 한 번도 남을 침략하지 않은 평화로운 한민족이여! 이제 자각할 때가 왔다. 이념과 체제는 어디까지나우리 인간 역사의 부산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우리 인간, 우리 민족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수정 보완할수 있어야 할 성질의 것이다. 신성불가침의 성역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 인간에 의해서 주조된 피조물들에게 노예가 되기를 즐겨한다. 우리 인간이 만들어 낸「이념의 노예」「조직의 노예」「물질의 노예」「권좌의 노예」「욕심의 노예」로부터 해방하자. 100년도 못사는 우리 인생이 얼마나그리 대단하다고, 이 엄청난 비극적인 분단 현실을 고집하려 드는가. 7천만 민족의 가슴마다에 서린 이 한을 모른체 해야 한단 말인가. 단군 할아버지의 한 핏줄이여! 이제 꿈속에서 깨어나자. 우리 손과 손을 마주잡고두리둥둥 어울려 살아 보자꾸나.
3. 大와 小가 함께 사는 길
“건국이 있은 후에야 주의도 있고, 평등도 있고, 자유도 있고, 권리도 있어서 우리의 행복을 우리 스스로 누릴 것이니, 소아(小我)를 놓고 대아(大我)를 주장하면소와 대가 한 가지 구원을 받을 것이나, 대아를 놓고 소아를 주장하면 소와 대가 한 가지 멸망되는 법이니라”고 한 정산종사법어에서 큰 깨달음을 찾자.
일찍이 세계대전 이후 우리나라와 비슷한 분단 상황에 있었던 나라가 있다. 지금은 스위스와 함께 영세중립국가로 자리를 굳히고 있는 중유럽의 오스트리아이다. 이 나라 역시 우리나라 건국초기와 같이 세계대전 후에 좌우익의 각 당이 난립하였고 미·러의 군대까지 들어와서 분담 주둔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나라는 좌우익 각 당이 연합, 단일정부를 수립하여 당당한 자주독립국가를 만들고 외국군의 철수를 끈질기게 요구하여 13년 만에 완전히 철수하게 되고 영세중립 국가를 표방하며 번영을 구가하고 있지 않은가. 당시 우리나라의 상황은 어떠했는가. 각종 군소정당이 난립하고 군웅이 할거하여 일제하에서 함께 그토록 설움 받던 같은 동포끼리 원수처럼 싸우지 않았는가. 내 동포끼리 손을 잡고 단일국가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강대국에 기대어 어떻게 하면 한 자리 차지해볼까 하며 권좌 굳히기에 여념이 없었던 결과 드디어 분단 현실이 고착되지 않았는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6·25전쟁이 발발해 가장 야만적인 동족상잔의 비극을 낳고 결국 어디에도 얼굴을 똑바로 들고 다닐 수 없을 만큼 수치스러운 민족사의 오점을 남기지 않았는가. 이 얼마나 수치스럽고 가증스러운 일인가. 그것은 나라 잃은 35년 동안의 수모와 억울함과 짓눌림의 한을 풀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 우리 마음대로 국운을 활짝 열어 갈 수 있었던 최고의 기회였다. 국민 모두가 그 동안 겪은 설움을 서로 위로하며, 손과 손을 굳게 잡고 내일을 다지며 희망찬 발걸음을 당당하게 걸어갈 수 있었던 기회, 이 절호의 기회, 활짝 열려 있는 이기회를 우리들의 옹졸함으로 바로 수용하지도 활용하지도 못하고 말았다. 우리는 이러한 민족 역량에 대하여 부끄러워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를빚은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진단하여 찾아내야 한다. 정확한 진단으로 집증(執證)해내야 하고 집증된 병맥에 따라서 치료를 서둘러야 한다. 치료해서 완치시켜야 한다. 병원(病源)을 치료하지 않은 채 방치해 둔다면 그 증상은 또 그러한 환경을 만나면 반드시 발작해 기승을부리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크게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통일의 결정적시기는 어느 때인가는 꼭 오고야 말 것이다. 온 겨레의 한결같은 이 소망은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시기는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나, 또다시 군웅할거, 군소 정당난립, 상호 비방, 테러 난무, 한 자리 지향주의 팽배 등 병리현상이 재발할 가능성은 없는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만일 이러한 증상이 재발한다면 통일이 되기도 전에 이 나라와 이 민족의 가슴은 또다시 난도질당하는 큰 불행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크게 경계해야 할 일이다. 이러한 병리현상의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이 제 일차적으로 강구되어야 할 문제이다. 따라서 건국 초기에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하도록 했던 당시 정치인들도 어느 때인가는 적당한 시기에 역사적 평가 대상이 되어 그들의 그 행위를 심판 받게 될 것이요, 통일에 대한 시국의 전개 따라서 부상되는 인물들도 반드시후일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정치인들도 아예 그러한 환상에서 벗어나 정치꾼들이 되지 않으려고 해야 할 것이요, 오직 국가와 민족을 위한희생적인 정치인, 국가 대의 앞에 하나의 조각돌이 되려고 하는 진실어린 정치인이 되려고 마음을 다져야 할 것이다.
우리 온 국민들도 건국 초기 겪었던 혼돈상황을 막기위해 스스로 파수꾼들이 되어야 한다. 이쪽저쪽 정치장단에 맞춰 날뛰지 말아야 한다. 중심을 굳게 잡고 그어떤 이데올로기나 누구에게 편착하지도, 사로잡히지도 않는 그 어떤 욕심도 없이 통일대의, 국가대의, 민족대의의‘축’을 바로 세우고 반석같이 튼튼히 다져가야 한다. 만일 이러한 대의정신이 흐린 이웃이 있다면 달래고, 타이르고, 꾸중하고, 호통을 쳐서라도 바루어 주어야 할 것이다. 이기적 야심이나, 착각, 편착으로 인하여 통일 환경의 조성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가정 아래 우리는 그러한 장난으로부터 통일대의를 수호하려는 파수꾼이 되어야 한다. ‘방관자는 동조자’라는 말이 있다. 방관정신은 민주시민정신이 아니다. 이기주의일 뿐이다.
현대에 있어서 생활환경은, 특히 현대 국제사회에 있어서 국가상황은 공동운명체적 상황이다. 국가가 지탱되는 모습이 바로 내 운명의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 운명을 좌우할 통일의 중요한 시기에 방관자적 태도를 가진다면 공동체 의식의 철부지이다. 이제 우리 국민도 성숙된 모습을 보일 때가 왔다. 아무 의미도 없는 말트집이나 잡으면서, 무조건 비방이나 하면서 우리의 소중한 정신낭비, 정력낭비, 국력낭비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철부지의 장난이나 응석도 모두 수용하면서 통일 여건을 조성해나가야 한다. 그리하여 통일 여건이 성숙된 결정적 시기에 도달하면 우리 온 겨레는「통일대의」를 향해 총진군해야 한다. 이때 방향을 잃어서는 안 된다. 분명한 우리의 방향은「통일대의」이다. 이「통일대의」를 향해 온 겨레가 응집되는 날, 그 어떤 통일을 방해하는 파랑(波浪)도 무난히 돌파하고 감격적인 통일지점에 골인 할 것이다. 만일「통일대의」가 아닌 그 어떤 이데올로기나 권좌,출세주의 등으로 우왕좌왕 한다면 그것은 엄청난 불행의 결과를 빚고 말 것이다.
바야흐로 시대의 대운은 하나의 세계가 되어야 할 시운에 처해 있는데, 한 핏줄이 하나가 되지 못한다면 이 얼마나 억울하고 어리석은 일인가? 온 인류가 한 가족이 되어야 할 시운에 처해 있는데 내 나라 내 동포도 한 가족이 되지 못한다면 말이 되는 일인가?
어리석었던 지난날에 입은 상처의 골이 너무나 깊기 때문에 선뜻 합할 수 없는 현실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이제는 지난날의 악몽은 지난 세월 속에 묻어버리고 희망의 새날을 통일로 맞이하자. 지난날의 상처는 긁으면 긁을수록 사독이 생겨서 더더욱 큰 아픈 상처가 될 뿐이다.
상처는 균의 침노만 막아 주고, 그냥 그대로 잊은 듯 내버려두면 상처는 아물고 새로운 생명력이 돋아난다. 이것이 평범하지만 생명의 법칙이요 신비다. 이 피할 수 없는 자연 섭리에서 시사를 받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통일을 향한 우리의 한이 아무리 극절(極切) 하더라도, 진리적 원리를 도외시한 통일 접근방법은 있을 수 없다. 통일 노력의 순리성이나 그 방법적 과정의 당위성을 외면한 발상은 금물이다. 오직 순리로, 정당한 방법, 지혜로운 방식을 찾아 합의를 도출해 내야 한다. 이 합의 도출을 위한 대전제는“건국이 있은 후에야 주의도 있고, 평등도 있고, 자유도 있고, 권리도 있어서, 우리의 행복을 우리 스스로 누릴 것이니 소아를 놓고 대아를 주장하면 소와 대가 한 가지 구원을 받을 것이나, 대아를 놓고 소아를 주장하면 소와 대가 한 가지 멸망되는 법이니라”한 정산종사법어에서 찾아야 할것이다. 이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토록 굳게굳게 닫혀 있던 영역까지 새 시대의 새 기운이 물밀듯 밀어닥치고 있지 않은가. 온 천지에 밀려오는 이 봄기운을 누가 막을 것인가. 이 새 기운을 빨리 수용해 소화시키면 보람이요 영광이지만 거부하거나 머뭇머뭇 망설이다 시간만 천연하면 재앙과 치욕의 앞날이 있을 뿐이다. 행여나 하는 어리석음에서 깨어나자.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속담이 있다. 설마 하는사이 재앙이 밀어닥치기 마련이다.
이제 우리 모두「통일대의」의 한마당에 모여 새 통일살림을 가꾸어 가자. 그저 한 뼘 웅덩이 안에서 네 몫 내 몫 따지며 티격태격하는 옹졸함에서 벗어나자. 지금태양이 중천에 올라 광활한 새 천지가 전개되고 있지 않은가.
4. 통일을 위한 동질성 구축
구약이 유태민족의 민족 신화임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비록 신화라 할지라도 유태민족들은 자기 민족의이 신화를 소중히 간직해 왔다.
아랍민족에게 둘러싸여 그 숱한 수난을 겪으면서도 그들은 자기 민족 신화를 소중히 간직했고, 급기야 국토를 잃고 무려 천년 가까이 세계 도처에 흩어져 유랑생활을 하면서도 민족 신화를 잃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한 이 민족 신화를 구심점으로 하여 민족혼을 응집시켜 왔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나라를 잃은 지 수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다시나라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이미 멸망해 오늘날 그 자취조차 찾아볼 수 없었을지 모른다.
어느 민족이던 그 민족형성 과정에는 신화가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그 신화는 일종의 문화이다. 문화민족일수록 신화가 풍성하고 신화가 빈곤한 민족일수록 문화도 빈곤한 사례에 비추어 볼 때 민족 형성사에서 이루어진 신화는 매우 소중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타민족의 조상이나 신화는 신앙적으로까지 절대시하면서 우리의 단군신화는 교과서에서 빼자느니 단군성전을 건축하자는 것이 우상숭배라느니 하는 일부의 주장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신앙이 다르다고 해서 우리 것은 모두 부정적으로만 보아야 하는 것인가 이것도 일종의‘우리 것 푸대접’이 아닌가. 더욱이 단군은 신화 속의 인물만도 아니다. 신화적 설화도 있지만 역사적 사실 속에서 존재했던 국조이심에 틀림없다. 역사의 한 과정에서 부각되었던 인물과는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이 나라 이 민족의 첫 개국조이시다. 역사 기록이 희미한 시대에 부각된 인물이라 할지라도 이 나라의 개국조로서 모셔온 인물이다.
그러므로 단군조는 마땅히 한민족의 혼을 응집시키는 구심점이 되어야 한다. 오히려 단군조에 대한 인식을 부각시키면 시킬수록 민족혼은 더욱 강인해 질 것이요, 공동체적 동질성은 더욱 확인이 되어서 통일의 대로도 빨리 열릴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일제는 단군조에 대한관심을 흐리게 하기 위하여 갖은 방법을 다 동원시켰다. 따라서 단군조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흐리게 하는일은 일제강점하에서나 할 일이요, 이제는 결코 할 일이 아니다.
통일이라고 하는 민족적 과제를 앞에 놓고 동질성 회복 운운하지만 과연 무엇으로 동질성을 회복할 것인가? 왜 남북은 통일되어야 한다고 할 것인가? 무엇보다 우리는 단군조의 같은 핏줄이라고 하는 호소력이 작용해 주어야 한다.
종교를 부정하는 그들에게 종교적으로 접근할 것인가? 사상적으로 접근할 것인가? 결국 민족적 동질성과민족양심에 호소해 가는 길밖에 없다. 치열한 국제경쟁사회 속에서 우리 배달민족이 하나가 되어 뭉치자, 그래야만 우리 민족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호소해야만 한다. 그리하여 누구에게나 단군조 후예라는 가족애를 통해 민족적 양심과 역사의 소명을 깨우쳐 허심탄회하게 응해올 수 있도록 해 나가야 한다.
삶의 현실은 다른 입장들이 있기 마련이다. 크게는 사상과 체제가 다르고, 종교가 다르고, 문벌이 다르고, 직업 직장이 다르고, 지역과 상황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 모든 것들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달릴 뿐 합일점을 찾지 못하면 분열의 혼란만 가중될 뿐이다. 종교 때문에 갈라진 나라도 있지 않은가.
합일점을 찾지 못하는 것은 지혜가 아니다. 오히려 무지일 뿐이다. 오늘날 한국의 이 다양한 현실을 궁극적으로 조화시켜 나갈 구심점은 어디서 찾을 것인가? 이는 오직 단군조일 수밖에 없다. 사실은 일제 35년의 긴 문화정책 때문에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국조에 대한 인식이 흐려져 있다. 한민족의 국조 사당이 16평이라니 어디 말이나 되는 말인가? 일찍이 단군성전이 거룩하게 이루어졌어야 하고, 또 성전을 중심으로 한 거국적 행사도 있었어야 한다. 그런데 늦게나마 단군성전을 조금 넓혀 보겠다고 하는데도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은 국조에 대한 우리 인식의 흐려져 있음이 그만큼 심각하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다.
단군조 모시는 일을 왜 신앙하고 결부시켜 생각하는가? 오히려 선교를 위해 어느 나라에 들어갔다면 그 나라 국조에 대한 예의를 깍듯이 갖추어야 한다. 그럴 때 그 종교의 설 땅도 거부감 없이 마련되리라 믿는다. 하물며 내 민족의 조상을 모시는데 우리 스스로 반대하다니 이는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 안 되는 일이다. 이는 신앙적 예를 하라는 요구가 아니다.
앞으로 통일을 한 후 구심력은 형성되지 않은 채 이질적 모습들만 난무하면서 어떠한 합의를 도출할 수 있는 지혜마저 찾지 못한다면 그 뒤에 오는 엄청난 비극적 결과에 대해서는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원심력과 구심력의 균형이 우주적 질서이며 존재유지(存在維持)의 제일의적 전제요건이다. 이것이 무너지고는 아무 것도 이뤄낼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남북 분단의 비극적 현실도 민족적 구심력이 이데올로기의 이질성(異質性)을 극복하지 못한 결과가 빚은 비극이다.
그러므로 도도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끝없이 일고 불어 닥칠 그 파란만장한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 민족의 생존이 보장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민족적 구심력을 형성하는 것뿐이다. 이것이 무너지고는 어느 바람에 날려 갈 것인지 예측을 할 수 없다. 이에 어떠한 명분도 국조를 중심으로 한 구심력 형성의 명분에 우선할 수 없다. 민족분단의 결정적 순간에서도 민족적 구심력이 좀더 우선할 수 있는 수준에서 작용해 주었더라면 외세나 이데올로기가 어찌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것들은 한민족이라는울안에서 수용이 되고 소화되었을 것이다. 민족이라는 개념이 이데올로기에 수용 당하는 결과는 빚지 않았을 것이다. 민족개념이 툭하면 어떤 이질적 요인들에 수용 당하기만 한다면 우리 민족은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후회를 거듭하고 말 것이다. 결국 해체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국조이신 단군사를 중심으로 확고부동한 거국적 구심력을 형성하는 일은 다른 어떤 명분보다도 우선해야 하며 유구한 역사 속에서 면면히 이어져야 한다.
앞으로 통일을 무리 없이 진행하기 위해서라도, 또 통일을 완전히 이룩한 후라도 단군국조의 한 핏줄 단일민족이라는 가족애가 우리 전체국민의 의식 속에 반석같이 다져져 있을 때 이 민족의 미래 운명도 활짝 열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소중한 우리 것은 푸대접하면서 남의 것에만 팔리는 것은 넋을 파는 것이요, 혼을 죽이는 일이다. 국토를 잃은 것은 되찾을 수 있어도 혼이 죽게 되면 살릴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