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록(同門錄)
김 길 영
겨울 감기가 기승을 부리고 있을 때, 우체국 택배원 손에서 작은 책자 하나를 받아들었다. 포장지를 뜯고 보니 고등학교 동창회명부였다. 우리 연안김씨 문중의 대동보 크기의 반 정도 분량이다. 질량보다 훨씬 가볍게 느껴진 것은 웬일인지 모르겠다.
나에게 늘 배달되는 책자란 문학잡지 이외에는 거의 없었다. 책자가 택배로 오는 경우도 드물어서 예감도 별로 좋지 않았다. 더구나 검은 표지가 눈에 거슬렸다. 다만 흐려진 과거에로의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기대감만은 있었다. 그리움의 못물이 작은 파장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어느덧 반세기를 훌쩍 지났다. 그동안 내 삶이 바쁘다는 핑계로 동문들은 관심 밖에 있었다. 동문이라 해도 학창시절에 소원했던 친구들도 있기 마련이어서 생소하게 느껴지는 이름도 있었다. 동문록에 연락처가 제대로 기록된 동문들이 많지 않은 것이 의외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로 다른 대학으로 진학을 했다. 나는 대학재학 중에 군대를 다녀오고, 바쁜 생업 때문에 동문들을 챙길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런저런 이유들로 동창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적었던 게 사실이다. 동문들의 이름 석 자를 짚고서도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지도 모른다.
친구의 간곡한 권유도 있고 해서 나는 일찍 직장생활을 접었다. 예전부터 증권가에서 취급하던 상품이긴 하지만 활성화 되지 않았다. 국가, 지방자치단체, 각 기업체에서 자금이 얻기 위한 방편으로 국민들로부터 장기 저리로 빌리는 증권을 할인하는 업이다.
아내의 고향인 낯선 대구에서 출발한 것이다. 처음 계획대로라면 5년 내에 다시 서울로 갔어야 했다. 계획은 계획일 뿐, 내 생의 절반인 35년이란 세월을 대구에서 살고 말았다. 다시 서울로 갈 수 없게 된 나는 서울에서 갖는 동창모임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는 평소에 다른 사람보다 재능이 뛰어나다고 생각해 본 일이 없다. 다만 한 가지 내세울 수 있다면 사람들의 이름을 잘 외우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동문록에 기록되어 있는 이름들이 낯설게 느껴지는 이름이 많았다. 우선 나를 기억할만한 친구들부터 전화를 걸어 보았다. 반갑게 받아주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더러는 기억을 되살리지 못하고 전화기를 놓는 친구도 있었다. 내 말귀를 못 알아듣는 친구는 몹시 슬펐다.
동문록에 이름만 있고 주소나 연락처가 없는 것은 수취인 불명일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생사를 분류하지 못한 빈 공간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주소나 연락처를 대신 해서 ‘작고(作故)’라는 칸들이 시냇가 징검돌 놓이듯 총총했다. 언제, 왜 그 많은 친구들이 유명(幽冥)을 달리했는지 가슴이 먹먹해졌다.
작고한 친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그들의 인상을 더듬어 보았다. 오래된 필름처럼 중간 중간 끊기고 흐려서 연결이 잘 되지 않았다. 6.25 전쟁의 화마가 스쳐간 폐허의 서울의 거리엔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또한 언제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는 긴박한 정국이었다. 그래도 배움만이 살길인 것처럼 희망과 열정을 품고 전국에서 모여든 불꽃들이었다.
전국의 사투리가 교실마다 왁자지껄했다. 작은 국토에서 억양이 다르고 알아듣지 못하는 사투리가 그렇게 많은 줄 미처 몰랐다. 그래도 우리들은 통역사 없이 마음이 잘도 통했다. 정든 고향을 떠나온 친구들은 정이 무척 그리울 때였다. 서로를 위로하며 전우애보다 더 끈끈한 정으로 사귀었을 뿐, 언어의 색깔이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요즘의 학생들처럼 낭만이나 사랑노름 같은 것은 사치품에 불과했던 시절이었다. 몇몇 부유한 친구를 빼놓고는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일을 해야 했다. 학비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떤 일이든 부끄러울 게 없었다. 등록금을 대지 못해 중퇴를 하고, 졸업을 하기까지 몇 년씩 걸리는 친구도 있었다.
친구란, 같은 음식을 나눠먹고 잠자리를 같이 해본 친구라야 진정한 친구다. 음식만 나눠먹었던 친구와 잠자리까지 같이 한 친구는 분명히 달랐다. 반세기가 흐른 오늘에 와서 생각해 보니 기억에 남는 친구가 몇 명 없는 것이다. 나는 작고한 동창들의 이름을 짚어보며 그리움에 젖는다.
명부(名簿)인지 명부(冥府)인지 모를 동문록을 읽어가면서 그 시절에서 한참을 헤맸다. 작고한 친구들의 운명처럼 나도 언젠가는 동문록에 간편하게 ‘작고’라고 남길 것이다.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행세하고 있지만, 인간의 수명이란 한계가 있는 것이어서 장담할 수 없다. 태어나고 죽는 것, 자연의 법칙이요 순리인 것을 어찌 거스를 수 있을 것인가.
철이 바뀌면 또 친구들의 부음이 전해 올 것이다. 예전 같으면 ‘고려장’을 치르고도 남을 만큼 나도 이승에서 살았다. 나는 슬퍼할 여유마저 갖지 못하고 살아왔다. 내가 살아온 지난날들이 부끄러운 단어들로 행을 채우고도 남는다. 동문록이나 대동보의 내 이름자를 짚으면서 사람들은 뭐라고 수군댈지 모르는 일이다.
나는 요즘 먼 데서 걸려오는 벨소리가 싫다. 거의 대부분 부음이나 슬픈 소식이 전해오기 때문이다. 그런 슬픔을 같이 하지 못하고 멀리서 지켜볼 때는 쥐구멍이라도 찾아 숨고 싶을 때가 있다. 참석 못하는 변명이야 맘대로 둘러대지만, 죄책감 때문에 내 연락처를 감추고 싶어진다. 동문록에 미리 ‘작고’라고 쓸 순 없어도 내 연락처가 바뀌었다고 전할까. (원고지 14. 매)
첫댓글 전국에서 모여든 불꽃들이
작고(作故) 징검돌로 놓인 동창회 명부
고요한 못물에 파문을 일으킬 우리 모두의 내일
---휑한 바람 한 줄기 가슴을 관통합니다.
아직은 더 퇴고해야 합니다. 몸져 누워서 숙제로 써 놓고 퇴고를 많이 못했습니다. 그보다 먼저 '먼 데서 오는 벨소리'라는 시를 썼지요. 읽어주셔서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