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승강장으로 내려올 때는 청량리행 전동차가 떠난 뒤였다. 그때 시각은 5시 3분. 앞으로 3분 후에 다음 차량이 도착할 것이다. 장갑과 마스크로 완전무장을 하는 도중, 안내방송과 함께 반대편에서 디젤기관차 구동음이 들려왔다. 디젤기관차 2량이 끄는 무궁화호가 상행선으로 먼저 지나갔고, 1분 후 중련 새마을호가 하행선으로 지나갔다. 두 열차 모두 열차풍이 엄청나다. 5시 6분에 정확히 청량리행 전동차가 들어왔다. 이번에는 조금 지루하게 달릴 것이다. 안양, 석수, 명학, 시흥, 관악, 가리봉 등 수도권에 위치한 역을 지나, 또 다시 한참을 달려 서울역과 시청, 종각, 동대문, 종로 등 서울의 도심까지 통과해서 가야 한다. 그 많은 역을 지나는 동안, 난 슬슬 졸음이 몰려왔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가는 동안, 전동차는 어느새 서울역을 훨씬 지나 있었다.
난 멍한 머리를 흔들면서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몇 개의 역을 더 통과한 전동차는 어느새 청량리역에 당도했다. 시간은 6시를 넘기고 있었다. 열차 출발시간이 9시니까…. 일단은 저녁부터 먹어야겠다. 밖으로 나온 내 눈에 조명이 켜진 청량리역 역명판이 보였다. 청량리역이 저렇게 생겼구나. 하지만 지금은 바깥 정취에 취해 있을 시간이 아니다. 광장에는 밤 승객을 태우기 위해 택시들이 대기 중이었다. 이에프 쏘나타에서 옵티마, 매그너스까지…. 차량들도 다양하다. 한참을 걷던 도중, 차도로 상진운수 47번 소속 글로벌900이 지나가는 게 보였다. 이왕 여기까지 온 이상, 버스구경이라도 잠깐 하고 가기로 했다. 대원여객 55번 로얄시티와 대원교통 765-1번 스틸바디 116 고급좌석, 진아교통 38-2번 에어로 시티, 상진운수 48번 에어로 시티, 흥안운수의 117번과 슈퍼에어로 NGV, 진아교통의 그린버스와 블루 버스까지…. 그야말로 다양한 버스들이 정차한다.
특히 서울시에서 새로 개발한 4가지 도안 중 2개를 여기서 보았다는 생각에 절로 뿌듯해졌다. 레드, 옐로우, 그린, 블루… 짧은 버스감상을 끝내고, 난 다시 음식점을 찾아 나섰다. 인도에 위치한 상가를 유심히 바라보며 걷던 내 눈에, 비빔밥과 만두 등을 파는 집이 들어왔다. 값도 3,500원에서 5,000원 사이로 저렴하다. 메뉴판을 보면서 이것저것 고른 끝에, 카레라이스로 최종 결정을 내리고 들어갔다. 주문을 하고 자리에 앉으니 신문이 놓여 있다. 이것저것 들춰보는 사이 내가 주문한 카레라이스가 나왔고, 그것을 전부 비우고 돈을 지불한 후 음식점을 나왔다. 속이 어느 정도 든든해지는 것 같다. 다시 청량리역으로 돌아오니, 주차장에는 청량리역과 인천공항을 연결하는 리무진버스가 막 출발을 하고 있었다. 하루에 몇 대나 운행하는 차일까? 궁금증이 생겼다.
대합실로 들어와도 딱히 할 일은 없고, TV만 보면서 시간을 보내기에는 너무 무료하다 싶어서 매표창구로 다가가 보았다. 여기서 내가 제일 관심 있게 본 것은 춘천행 열차시간표와 요금. 무궁화호는 5,600원. 통일호는 2,700원이다. 그리고 소요시간은 2시간이 족히 걸린다. 춘천에 가면 뭐가 있을까?
대합실 한가운데에는 큰 분수대가 놓여 있었다. 다가가 보니, 그 분수 안에는 동전들이 모여 있었다. 분수대에 놓인 비문을 읽어보니, 여기 모인 동전들은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해 쓴다고 한다. 분수대를 한 바퀴 돌면서, 나도 주머니에 놓인 600원을 꺼내 그 분수대 안으로 던져 넣었다. 그런데 이 많은 동전들은 언제 한번씩 수거해 가는 걸까? 저렇게 있다가는 녹슬지도 모르는데...
7시 넘어서 춘천행 무궁화호의 개표가 시작되었고, 그 후에는 지하철에서 내리는 승객과 중앙선 밤차를 타고 온 승객들이 역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2시간 후인 8시 50분쯤에 부산행 무궁화호 #509열차의 개표도 시작되었다. 승강장에는 산뜻한 신조무궁화호 객차가 승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난 객차에 오르기에 앞서 제일 먼저 기관차가 연결된 곳으로 가 보았다. 혹시라도 전기기관차가 견인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가 보았지만, 정작 본 기관차는 7218호 디젤기관차였다.--;; 가까이 다가가려는 찰나, 안에서 기관사아저씨가 경적을 울렸다. 가까이 오면 위험하다고 울렸나 보다.
왼편 승강장에는 춘천으로 떠나는 또 다른 무궁화호가 정차해 있었고, 오른쪽에는 입환을 기다리는 객차들이 보였다. 8000호대 4량이 중련으로 입환 하는 모습도 보였다. 사진으로만 보다가 저렇게 실제로 보니 엄청 커 보였다. 1970년대 중앙선과 태백선 개통 이후 전기기관차는 여객과 화물수송에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그리고 지금은 8100호대와 8200호대 등 신형 전기기관차도 개발되어 중앙선과 태백선을 뛰고 있다.
#509열차는 디젤기관차 바로 뒤에 발전차가 연결되어 있었고, 발전차 뒤로 6호차-5호차-4호차-3호차-2호차-1호차 순으로 객차가 편성되어 있었다. 난 6호차부터 올라타서 천천히 뒤편 객차로 나아갔다. 신조무궁화호에는 객차마다 음이온 청정기와 TV가 설치되어 있었고, 조명도 화사하게 바뀌었다. 그리고 서비스 룸이라 불리는 복도도 더 넓어졌다. 복도로 나가는 문도 기존의 철문에서 유리문으로 개방감을 더했다.
3호차를 지나가던 도중, 난 객차 제일 뒤에 놓인 1인석 의자를 보고 잠시 의아해 했다. 이 의자는 뭐지? 알고 보니 그 의자는 장애인석이었다. 3호차가 장애인차구나. 내가 탈 객차는 2호차 21번석이었다. 이번에는 오른쪽 창가다. 아까 #210은 왼쪽이라서 무지 심심했고, 눈 내릴 때 풍경도 오른쪽이 더 좋았다. 흑…. 아마 그때 느낌은 지루했다고 할 수 있겠다. 햇빛도 정면으로 비춰서 들어왔고…. 이번에는 밤차니까 덥다거나 그런 느낌은 없겠지. 어쨌거나 창가로 앉는데, 어떤 여자 분이 내 옆으로 오신다. 그분도 내 옆에 앉으셨다. 그분이 핸드백에서 표를 꺼내 살펴보는데…. 헉!! 표가 새로 나온 표다. 게다가 노란색…. 그분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 표를 받아 살펴보았다.‘KORAIL’마크도 찍혀 있고…. 나도 청량리역에서 직접 구입했다면 이 승차권을 받았을 텐데…. ㅜ.ㅜ 아쉬움을 뒤로 하고, #509열차는 청량리역을 서서히 빠져나간다.
그 무렵, 오른쪽에 무궁화호가 들어왔다. 그런데 그 열차 행선지판에 적힌 건 다름 아닌‘환상선 눈꽃 순환열차’였다. 정확한 노선은 청량리-추전-승부-청량리…. 잠깐, 추전역이면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다는 역이 아닌가? 예전에 TV로 본 적이 있는데…. 그런데 객차에 구형객차가 일부 보인다. 시트도 유선형에 쓰던 시트 그대로고…. 탕엥만 아니면 타 보고 싶다.(탕엥은 진동이 심하거든요;; 그것도 보통 진동이 아닌 객차 자체가 부르르르~떨리는 그런 진동…--;;)
열차는 얼마 못가 양평역에서 처음으로 멈춰 섰다. 처음에는 신호정리관계로 정차한다고 방송이 나오더니, 나중에는 반대편 열차를 먼저 보내기 위해 정차한다고 말씀하신다. 잠시 후 강릉-청량리 무궁화호가 통과했고, 이 열차 역시 구형객차가 섞여 있었다. 중간에 연결된 카페객차에는 주홍색 조명이 켜져 있었다. 그 후에도 정차와 교행이 계속되다가, 그 후에는 정차만 이루어지고 더 이상의 교행은 없었다. 용문역에 다다를 때쯤 난 어머니로부터 안부전화를 받았고, 어머니는 조심해서 내려오라고 말씀하셨다. 승객들은 대부분 잠이 든 상태였다. 난 잠이 오지 않아 그냥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내린 시골, 어둠을 비추는 가로등…. 가로등 불빛에 비친 모습이 정겨웠다.
아까 내 옆에 앉으셨던 아가씨는 건너편 좌석으로 혼자 건너갔다. 그러고 보니 제천 지나고 나서부터 빈 좌석이 군데군데 눈에 띈다. 물론 다음 역에서 탑승할 사람들을 위해 남겨 둔 좌석도 있겠지만…. 11시 36분. 열차는 제천역에 들어왔고, 그 아가씨는 제천에서 내리셨다. 난 열차에서 내려 음료수를 뽑아 다시 차에 올랐다. 아주 잠깐 나간 것 같은데, 바깥 공기가 상당히 차다. 그런데 내 좌석에 어떤 할머니가 앉아 계시다. 내 짐은 그 옆에 할머니가 들어다 놓으셨고... 자리를 바꿀까 하다가, 그냥 그 좌석에 앉기로 합의했다. 어차피 바깥 구경은 많이 했으니까.^^
도담을 지나 단양에 이르렀을 때는 12시가 넘어 있었다. 난 할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주를 지나서 난 서서히 잠이 들었고, 경주에서 잠시 깼다. 그런데 할머니는 내리셨는지, 아님 다른 곳으로 가셨는지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가신 걸까? 이제 열차는 동해남부선을 타고 내려올 것이다. 울산과 좌천, 기장…. 아, 맞다. 아까 그 할머니 기장에서 내린다고 하시던데…. 해운대를 지나 부전역에 다다르니 웬 통일호가 서 있다. 행선지판은 부전-청량리로 되어 있고…. 그랬다. 그 통일호는 전날 청량리에서 출발해 부전으로 내려온 #1221이었고, 지금은 #1222로 다시 올라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부산진역을 마지막으로 통과한 열차는 9시간의 길고 긴 여행을 마치고 드디어 종착역인 부산역으로 들어왔다. 슬슬 배가 고파왔다. 그리고 졸음도 막 몰려온다. 경부선을 타고 올라가 다시 지하철로 청량리까지 이동. 또 거기서 부산까지 중앙선과 동해남부선을 타고 내려온 대장정. 몸은 피곤했지만 참으로 느낀 게 많았던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