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e:여호와의증인 형제자매 들에게(2번째) | |
번호 : 18 | 조회 : 427 스크랩 : 0 날짜 : 2006.08.15 23:02 |
앞의 글에 이어서 글을 올립니다.
내가 여호와의 증인을 그만둔 이유
오랜 세월 증인이었던 저는 이제 이 조직을 떠나 보통 평범한 사람이 되는 길로 걸어 가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수십년의 세월이 얼마나 편협되고 외곬수의 인생이었는지를 느낍니다. 누구나 나름의 동아리가 있고 집단내의 규율속에 자기를 발견하고 남을 인식하는것이 겠지만 이 특별한 증인조직에서의 나에겐 그러한 지성적 감정적 성장의 기회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사회인의 개연성을 잘 알고 있으며 집단적 구속 이 반드시 나쁜것만은 아니라는것을 열린마음으로 인정합니다. 하지만 나의 깊숙이에 형성한 자아의 기틀은, 옳고 그름의 잣대를 형성하여 주었고 그 것을 기준으로 하여 더이상 여호와의 증인으로 머문다는것은 허용할수 있는 임계수위를 넘어 섰다는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며 그들 조직의 문화를 받아 들이며 이해한다는것은 예외없이 시간이 필요한것이므로 기다릴 마음가짐은 변함이 없지만,많은 경우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는 상황이 반복되는것은 나의 인생을 긴장시키고 고유의 자아를 손상시키는 불쾌한 경험들이었습니다. 나의 인생에 무형의 통제가 드리어 지고 있다는 것은 결코 기분 좋은 것이 아닙니다. 결국 다다르게 되는 결론은 이들이 원하는것이 마인드 컨트롤 이었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두서 없는 글이 되지 않기 위하여 편의상 번호를 매기어 나의 견해를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신세계역 번역 판 과 같은 작업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저는 기꺼이 그 번역판을 거부감없이 읽을 용의가 있습니다.오히려 이들이 성서를 대하는 근본의 문제는, 성서를 도구로 하여 ,성서를 재료로 하여 자기들의 고유 사상을 만들어 가고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예를들자면 한권의 잡지를 골라 글자를 오려내어 의문의 편지를 써나가기 시작하는 협박범의 그것과 같은 상황입니다.온전히 그 잡지의 내용만을 사용했지만 그것은 다만 글자만을 차용하였을뿐 내용상의 연관성을 조사한다는것은 우스운 이야기 입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의 교리는, 성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방법으로 받아들이는것은 불가능 합니다. 우선 성서 66권의 모든 페이지를 어마어마하게 큰 한장의 종이에 프린트 하는 것입니다. 상암 월드컵 잔디장 만한 크기의 백지에 말입니다. 그다음 증인들이 침례받기전 연구하는 몇몇의 서적들,'원'책이나 '지식'책들에 첨부된 그들의 교리를 기승전결에 맞추어 성서 구절들을 하나씩 점을 찍으며 종이위에 선을 그어 보기 시작합시다. 매우 형이하학적인 엉망진창인 선이 그려질것입니다.구겨지고 뒤엉킨 실타래 처럼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본질입니다.이것이야말로 그들의 머리속에 있는 소위 '진리'에 대한 참모습입니다.
증인들이 사용하지 않는 '교우' 라는 표현, '같은 믿음을 가진 친구'들입니다. 좌충우돌하며 시행착오를 하더라도 이들이 나름의 믿음을 지키며 용기를 내고 있다는 그 자체에 의미를 둔다면 그것은 인정합니다.즉,워치타워의 1세기 남짓의 역사에 이러 저러한 교리상의 변경과 수정은 기꺼이 덮어 두고자 합니다.상기한 대로 어차피 이들이 믿는건 성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무엇을 믿으며 그것을 받아 들이기로 했다면 그것은 그들의 고유의 이상 이자 목표라고 이해하도록 하십시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상황은 묵과 될수 없습니다. 믿고 따르는 무리중 누군가가 기진하여 힘을 잃고 좌절하였을때,더 이상 그들과 함께 여행을 하여야 할 명분이나 목표를 상실하여 표류하고 있을때,그들에게 선택의 기로로 내모는것은 도덕적 죄악 입니다. 이러한 경우 그 조직의 spirit는 드러 납니다. 저는 그러한 도태된 무리를 대하는 이 조직의 영을 보며,깊은 배반감과 전율을 느끼었습니다. 돌아갈 쪽배도 집도 없는 이들에게 망망대해에서 하선할것을 명하는 파렴치한 선장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묵묵히 따라오는 무리의 이견과 의문은 사랑과 관심으로 감싸안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뭇 평교인들의 의견을 '배신행위'로 몰아가는 그들의 태도는...유치합니다. 이들 무리의 가운데ㅡ 하나님의 사랑의 영이 존재한다고 믿기가 너무나도 어렵고 도전이 되었습니다.
왕국회관을 포함한 광의적 의미의 교회는, 자신의 더러움을 하나님에게 고하고 죄를 뉘우치는 고백의 장소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예수의 대속희생에 기대어 자신의 죄를 씻어 줄것을 구하는 솔직함의 장소이어야 한다는 것이 저의 견해 입니다.저는 성서를 그렇게 읽었습니다. 하지만 증인들은 침례를 받은후,그들이 영적인 성숙함과 깨달음과 탈바꿈의 과정을 마치었다고 인정하게 만듭니다. 그들은 더이상 영적음식을 취하기만 해도 되는 어린아이가 아닙니다.매우 불편한 '성숙'입니다. 이러한 식의 급조된 '성숙'은 증인들 사이에 만연된 이중생활의 근본원인 입니다. 이들이 침례받은후, 왜 무엇때문에 가가호호 방문하며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야 합니까? 이들에게 진정 필요한것은 쉼이며 자신에대한 성찰이며 깨달음의 전진이어야 합니다. 그들중 일정한 시점이 지난후 뜻이 있다면,심사의 과정을 거친후 선교 활동을 하는것이 자연스러운것이 아닙니까? 아니,누구나 그러한 과정을 결국 지나야 하는것이라 하더라도 매우 오랜 기간 준비의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침례후에 말입니다.침례란 그 모든것의 시작이지 마침이 아닙니다!! 하지만 증인들은 어떠합니까? 야외봉사는 그들의 존재의 이유요,침례의 목표가 되고 있습니다. 아이러니 한것은,집회는 어떠한 이유로 빠져도 문제없지만 야외봉사 보고를 제출하지 않으면 그가 증인신분을 유지 하는것은 어렵습니다.이러한 의무 규정은 마치, 실적없는 사원에게 급여를 지급하지 않는 삭막한 세일즈맨 회사를 연상케 합니다. 실적과 결과를 수치화하여 기록하고 통계내며 그래프 화하는것은 부끄러운 행동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무엇을 기준하여 숫자를 대입한단 말입니까? 더군다나,이것은 이들 자신이 스스로를 돕는 성찰의 기회를 빼앗아 버리는 요구입니다. 이들이 워치타워에서 발행한 서적을 전하며 그것으로 연구를 유도하는 전과정에서 이들은 자연스럽게 조직에서 원하는 규격화된 교리에 얽매이고 자기주입되는 피드백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들이 진정 가꾸기 원하는 각자의 영성은 황폐되고,급기야 새사람은 커녕 사이보그로 재탄생 될 뿐입니다.
4) 영원한 생명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볼때,만약 첫인간이 잃어버린 생명의 선물을 회복시킬 하나님의 방법이, 증인들은 성경의 특정 영역 ,적어도 한페이지 이상의 이어지는 구절들을 통하여 그러나 상황은 어떠합니까? 워치타워는 왜 자신들의 진리를 ,이들 성서 연구가들이 자신들의 성서로, 스스로 추리하여, 그 대신,성서외에 별도로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 에 의한 '영감'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은 간단합니다. 그들은 성서에 일정영역을 단순히 읽어 내려가는 방법으로 그들의 교리를,특히 '지상낙원'을 증명할수 없습니다. 성서가 서술하는 문맥을 부정하고,그 단어가 가진 미시적 용법에 지나친 무게를 두어 일그러진 문장으로 변경시킵니다.
|
첫댓글 증인들 믿음의 과정에 '교우를 돌봄'부분이 약한건..그들 스스로 그 이름의 책을 출판했듯..그들의 믿음 그들의 구원은 생존..서바이벌 게임이기 때문입니다.
60억인류모두가 죽건 누가 자살하건 나만이라도 열심히 하여 승인받고 살아남자..이게 그들의 구원론 구조입니다.
천박한 경쟁적 구원론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