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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악의 제거와 선의 전유 그리고 진정한 용서에 대하여
스베덴보리 저서에서
- 악의 처리와 선의 전유 그리고 진정한 용서에 대하여
새 예루살렘과 그 천국의 가르침 / 천계비의
170 죄 또는 악에 관해서
- 무수한 종류의 악과 거짓이 있다.
- 거짓에서부터 나온 악이 있고 악에서 나온 거짓이 있고
또 악과 거짓이 거기서 다시 나오고 있다.
- 거짓에 속한 악의 본성과 특질
- 악에 속한 거짓의 본성과 특질
- 악질적인 악과 덜 악질적인 악에 관하여
- 이해에서 비롯된 악과 의지에서 비롯된 악에 관하여
- 허물과 사악과 종교적인 죄의 차이에 관하여
- 악은 모든 사람에게 밀착하고 있다.
- 악은 사람에게서 제거될 수 없고 다만 사람은 거기서
멀리 떨어져서 선 안에 머물러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 - - - - - - - - - - - - - - - - - - - -
- 악을 멀리하고 선 안에 남게 하는 것은
오직 주님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
천비
928
..
사람은 자신이
선을 위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이것은 큰 착오다.
그가 선을 행할 때
그것은 그 자신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의지에 속한 새로운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행한 것은 주님에게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참다운 것을 생각하고 말할 때
그것은 새로운 의지로부터 온 새로운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사람이 그 같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주님으로부터인 것이다.
왜냐하면 중생한 사람은
주님에 의해 형성된 전적으로 새로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람이 새로 지음을 받았다는 말의 의미다.
2406
..
2) 이러한 일에 대해
모든 사람은 어떤 예외도 없이,
그것도 사람이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아주 강력한 힘으로
주님에 의해 악에서 억제된다는 것을
거의 모르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그 사람이 태어나는 유전적인 것과
그리고 그 자신의 삶의 행동을 통해 습득된,
이 두 가지 이유로 부단히 악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만일 주께서 그와 같이 지키고 보호해주시지 않는다면
사람은 한 순간에 지옥의 맨 아랫목으로
저돌적으로 돌진해갈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자비는 매우 지대하기 때문에
매순간, 심지어 가장 작은 자비라고 할지라도 그를 일으켜 세워
그가 그곳으로 돌진하는 것으로부터 막고 있다.
이와 같은 경우는
인애와 믿음에 속한 삶에 따른 차이는 있지만
선한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주님은 사람과 더불어,
또 사람을 위해 계속해서 지옥과 싸우신다.
비록 그런 사실이 사람들에게
나타나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그렇다.
이러한 모든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주님은 나에게 많은 영적 체험을 주셨다.
그것이 어떠한지는
주님의 자비로 뒤에 적절한 곳에서 말씀드리겠다.
8206
출 14:22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를 육지로 걸어가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
.. 사람이 주님에 의해 선과 진리 안에 머물게 될 때
그때 거짓들과 악들은 제거되고
제거된 그것들은 마치 하나의 벽처럼 주위에 서 있게 되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선이나 진리가 존재하는 영역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주님의 현존(presence)이
악이나 거짓을 모든 면에서 쫓아내기 때문인데
선과 진리는 악과 거짓에 완전히 반대되는 것으로
따라서 하나가 다른 하나를 파괴하지 않고는
함께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2) 그러나 사실은 진리와 함께하는 선이
거짓과 함께하는 악들을 파괴 즉 제거하는 것이다.
이는 선과 진리는 신성한 것이고
따라서 모든 능력을 가지고 있으나
악과 거짓은 지옥적인 것이어서 아무 능력도 없기 때문이다.
전자는 내적인 것들로 말미암아 활동하고
후자는 외적인 것들로 말미암아 활동한다.
거짓들과 함께하는 악들이 사람 안에서 쫓겨났을 때
그것들은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하나의 벽처럼 주위에 서 있고
그리고 그것들은 안으로 돌진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지만
애쓰기만 할 뿐 그것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선과 진리 안에 계신 주님의 현존이
그것들을 보호하여 물리치기 때문이다.
.. 사람이 주님에 의해 선과 진리 안에 머물게 되는 것에 따라
악이나 거짓에게서 물러나게 된다는 것은
1581, 4564항을 참조하면 된다.
그러나 만일 사람이
이 세상에서 인애를 훈련하는 것에 의해
이 능력을 수용하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도 악에서 물러날 수 없고
선 안에 유지될 수도 없다.
이러한 일은 선에 속한 삶,
즉 믿음에 속한 진리에 일치하는 삶,
그러므로 선을 향한 애정이나
선에 속한 사랑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의 삶에 의해
사랑과 선의 애정을 취하는 사람은
선과 진리의 영기(sphere) 안에 있을 수 있으나
악에 속한 본성을 뒤집어 쓴 그의 삶에 의해서는
어느 누구도 결코 그 영기 안에 있을 수 없다.
참고)
1580
창 13:9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 여기서 속사람은 겉 사람에게, 더 정확히는
속사람에 일치하지 않는 겉 사람 안에 있는 것들에게 말하는데
이는 사람이 시험과 투쟁 중에 있을 때 그러하듯
그에게서 분리시키기를(separate, 떼어내기) 원하는 악들이
자신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할 때 항상 그렇게 하는 것과 같다.
시험과 투쟁을 겪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경험은
자신 안에 원치 않는 것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은 투쟁(갈등)이 계속되는 한 자신에게서
분리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부단히 그것의 분리를 원하여
종종 악에 분노하고
그것을 쫓아내기를 원할 정도로까지 한다.
이것이 여기서 뜻하는 내용이다.
1581
“따로 떨어져 살자(나를 떠나라)”
이 말씀은
속사람에 일치하지 않는 것이 사라지지 않는 한
결코 선이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바로 앞에서 설명한 것,
즉 속사람은 겉 사람 안에 있는 자신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
분리되기를 바란다는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분리되지 않으면
속사람으로부터 계속해서 유입되는,
즉 주님에게서 속사람을 통해 유입되는 선이
나타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리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은
그것은 분리가 아니라
휴면(quiescence, 무활동)이라는 것이다.
주님 외에 그 누구도
겉 사람 안에 있는 악을 분리시킬 수 없다.
사람이 일단 취득한 것은 무엇이든지 그에게 남는다.
그러나 그것이 휴면일 때
분리된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때 그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가 아니면
휴면이 되거나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 나타나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휴면에 들게 되면
그때 주님으로부터 선이 처음 유입되어
겉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
이것이 천사들의 상태인데
그들은 악이 그들로부터 분리되었다는 것 외에
달리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곳에는
다만 악에 대한 억제가 있고 따라서 휴면이 있고
그 결과 그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 보일 뿐이다.
결론적으로 이것은
하나의 외현(appearance, 겉모습)으로
천사들 역시 그 일을 깊이 생각할 때 아는 것과 같다.
4564
..
2) 여기의 경우는 이렇다.
중생과정에 있는 사람 안에 내재한 유전악이나 실제적인 악은
모두 소멸되거나 무가치하고 쓸모없을 만큼
근절되는 것이 아니고 다만 분리되는 것뿐이다.
그것은 주님의 처리에 의해 변방으로 배척되며(4551, 4552)
그 사람에게 있는 것처럼 영원까지 남는다.
그러나 그 사람은 주님에 의해
악으로부터 옮겨져 선 안에 머물게 된다.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게 되면
온갖 악들은 쫓겨난 것처럼 보이고
또 그 사람은 그것들에서 정화된 것처럼 보이기에
이것을 가리켜 ‘의롭게 되었다’(justified)라고 말한다. ..
4) 그러나 주님에게 있어서는 이와 전혀 다르다.
주님은 어머니에게서 비롯된 모든 유전악을
주님 자신에게서 멀리 옮기셨고 추방하셨고 내쫓아 버렸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비롯된 유전(inheritance)에 의한 악은
전혀 소유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주님께서는
‘어머니’에게서 온 것을 제외하면
여호와로 말미암아 잉태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이 차이점으로
또 이것은 바로 주님이 의가되심,
거룩한 존재 자체, 그리고 신성한 존재가
(the Holy itself, and the Divine) 되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참고)
4551
창 35:4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보석)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귀에 걸고 있는 귀고리’는
행동으로 실현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복종의 표징물(representative)로서의
‘귀고리’의 의미로부터 분명하다.
왜냐하면 ‘귀’는 복종을 의미하고
복종의 행위는 행동으로 실현되기 때문에
복종은 행동으로 나타남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행동으로 실현되어진 것’이라는 표현은
쫓겨나야할(거부되어야할) 거짓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 있어서 이 부분의 주제가 되는
거짓들을 쫓아내는 일과
또 그것이 행동으로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
간단히 부연하려 한다.
사람은 주님에 의한 중생을 통해 선에 이르고
또 그 선에 감동되어 참된 것을 행한다.
그러나 그런 상태에 이르기 전에는
진리들과 뒤섞인 수많은 거짓들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는
믿음의 진리를 수단으로 중생에 들어가게 되지만
인생 초기의 그것은
유아기와 어린 시절에 배운 개념 이상의 것을
전혀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념들은
세상의 외적인 것들이나
육체적 감각의 경험으로부터 형성되는데
그러므로 그것들은 결코 허구가 될 수 없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거짓들 역시 행동으로 실현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것이 거짓일지라도 자신이)
믿는 바를 실행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거짓들이다.
이러한 것들은 사람이 중생할 때까지
즉 그가 선으로 말미암아 행동할 때까지
그대로 그에게 남아있다.
그리고 그 뒤 주님은 선 즉 선을 수단으로
그가 그때까지 배운 진리에 질서를 부여하시고
이것이 이루어지는 동안
거짓은 진리에서 분리되어 제거된다.
2) 이런 모든 일에 관해
사람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의 생애 초기부터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거기 거짓들에 대한 제거와 거부가 계속되는데
이는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나
특히 중생되는 사람에게서 그러하다.
그러나 중생한 사람과 중생하지 못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중생한 사람은
믿음에 속한 선이나 인애에 일치하지 않는 것들을
자신이 멀리 제거해야할 것으로 여기지만
중생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서 얻는 기쁨과 일치하지 않는 것들을
제거해야 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므로 후자 곧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 대부분은
거짓들을 진리로, 진리들을 거짓으로 여긴다. ..
4552
“..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이 말씀은 (거짓들의) 영원한 거부를 뜻한다.
이는 제거(쫓아냄)로서의 숨김과 죽음으로서의 매장,
그리고 영원을 가리키는 상수리나무 밑이라는
말의 의미로 보아 분명하다.
왜냐하면 상수리나무는 아주 오래 사는 나무이기 때문에
어떤 것이 그 나무 아래 묻혔다는 것은
영원한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 나무는 또한 뒤얽혀진 것을 의미하고
나아가 거짓들이나 허위들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자연에 속한 가장 낮은 차원의 것은
육신의 감각적인 것들 따라서 거짓된 것들로부터
자신의 지식과 기쁨을 취하기에
상대적으로 뒤얽히고 그릇되기 때문이다. ..
2) 더욱이 그 거짓들이
중생한 사람에게서 제거될(removed) 때
자연에 속한 가장 낮은 부분으로 쫓겨난다.(rejected)
이러한 이유로
누구든지 판단과 명석함이 성숙해졌을 때,
특히 그가 총명하고 현명해졌을 때
자연적인 것 안의 그러한 것들은
그가 가지고 있는 내면적 시각에서 멀리 제거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중생한 사람에게 있어서
진리들은 그의 자연에 속한 것의 가장 안쪽에 있는데
그곳에는 마치 작은 태양과 같은 선이
그 진리들 가까이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진리들에 종속되는 다른 종류의 진리들은,
말하자면 선에 대한 그들의 관계나 친밀감 정도에 따라
그곳으로부터 떨어져 있다.
기만적인 진리들은 더 바깥쪽 변방에 존재하고
거짓들은 가장 바깥쪽으로 쫓겨난다.
후자 곧 거짓들은
영원히 그 사람과 함께 남아 있다가
사람이 주님께 이끌리기를 스스로 허락할 때
방금 말한 이 질서 안으로 배열된다.
왜냐하면 이 질서가 천국적 질서고
천국 자체는 이와 같은 질서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이 주님께 인도받는 대신
악에 인도받는 것을 선호한다면
그때 이러한 것은 정반대의 질서에 있고
그의 경우에 있어서 거짓과 함께 악이 그 중심이다.
그때 진리들은 모두 변방으로 쫓겨나고
최고로 신성한 진리들은 가장 바깥의 변방으로 쫓겨나는데
이 질서가 지옥적 질서다.
왜냐하면 지옥은 이런 질서 가운데 존재하고
가장 바깥의 변방들은
자연적인 것에 속한 가장 낮은 것이기 때문이다.
- 악은 주님의 임재를 막는다.
5696
창 43:30-31 “요셉이 아우를(베냐민) 사랑하는 마음이 복받쳐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
얼굴을 씻고 ‘나와서’ 그 정을 억제하고 음식을 차리라 하매”
.. 가장 높은 뜻으로
요셉은 주님을 표징하고
이스라엘의 열 아들들은 중생과정에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자연적인 것 안에 있는 진리들이나 선’들을
표징하는 반면
베냐민은 (주님과 그들 사이) 매개적인 것을 표징한다.
그 매개적인 것에는
사랑에서 비롯된 자비가 있는데
이는 아래에 있는 것들 즉 자연적인 것 안에 있는 것들은
매개적인 것에 의해 중생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이나 자비는
매개적인 것을 통한 결합이 이루어지기까지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그들이 나타나지 않도록
배치(arranged, 배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만일 그것들이 나타난다면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매개적인 것을 통한 결합 없이 나타난다면)
중생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배치는(사랑과 자비가 나타나지 않도록 하는)
제거나 감춤을(removal and concealment) 통해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주님은 결코
자비를 제거하거나 감추지 않으시지만
그러나 중생과정에 있는 사람들이 온갖 악들에 빠지게 되면
그것은 그에게 주님이 멀리하고 숨는 것처럼 보인다.
(악은 주님의 임재를 막는다.)
마치 짙은 구름들이
우리와 태양 사이에 끼어들어 가로막듯이
온갖 악들은 그런 결과를 만들어낸다.
이것이 바로
그에게 사라지고 감추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본문(요셉이 .. ‘나와서’)이 뜻하는 것이
바로 그런 숨김과 제거다.
-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선을 받기 위해 악을 끊어야 한다.
10109
출 29:33
개역성경 “그들은 속죄물 곧 그들을 위임하며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데 쓰는 것을 먹되..”
새교회 성경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손을 채우고,
그들을 거룩하게 하기 위한 속죄물들을 먹어라. ..”
And they shall eat those things wherein expiation was made,
to··fill their hand, to sanctify them;
‘속죄물들을 먹어라.’ 라는 말씀은
온갖 악들이나 거기서 나온 온갖 거짓들로부터
정화된 자들(속죄가 이루어진 자들)에 의해
선이 그들 자신에 속하게 되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말하는 선의 전유는
선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는 것을 뜻한다.
선을 자기 것으로 가져야
진리를 또한 수용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손을 채우기’ 위한,
즉 ‘신성한 진리를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기’ 위한
속죄물을 먹어 선을 자기 것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이는 전유를 가리키는 먹는다는 말의 뜻에서,
그리고 온갖 악이나 거짓으로부터 정화된 것을 가리키는
속죄(expiation)라는 말의 뜻에서 잘 알 수 있다.
악들로부터, 그리고 결과적으로 거짓들로부터
정화된다는 말이 언급된 이유는
악으로 다스려지는 자들 뿐 아니라
선으로 통치되는 자들에게도
진리와 마찬가지로 거짓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 안에 있는 자들에게 있는 거짓은
악에 속한 거짓이고
그들에게 있는 진리는 생명이 없는 거짓된 진리인 반면,
선 안에 있는 자들에게 있는 거짓은
진리로 받아들여지는데
왜냐하면 그 거짓들은 선에 의해 온순하게 되고
선하고 유용한 목적을 위해 사용되기 때문이며
그들에게 있는 진리들은 살아있는 선에 속한 진리들이다. ..
2) 본문에서 “속죄가 이루어진 것들을 먹어라”는 말이
온갖 악들, 그리고 그것에서 나온 거짓들로부터
정화된 자들에게 있는 선의 전유를 뜻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든 깨끗하지 않은 사람은
그것들을 먹지 말 것을 강하게 금하고 있다. ..
여기서의 경우는 사람이 온갖 악들과
그것에서 나온 거짓들 안에 빠져 있는 한
그 어떤 선도 그에게 전유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악은 지옥에서 올라오고
선은 천국에서 내려오는데
지옥과 천국은 정반대이기에
지옥이 있는 곳에 천국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국이, 다시 말해 천국에서 비롯된 선이
자리(space, 여지)를 가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옥이, 다시 말해 지옥에서 비롯된 악이
제거되어야 한다.
이상에서 우리가 밝히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이 악 안에 빠져있는 한
사람에게 선이 전유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선의 전유는
선이 의지 안에 심겨지는(implantation)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의 의지에 속한 것이 될 때까지
그 사람에게 선이 전유되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사람의 의지는 그 사람 자신이고,
그의 이해는 이것이 그의 의지와
함께 하는 것에 비례해서 그 사람이 되고,
의지에 속한 것은
그 사람의 사랑에 속하고
이것으로 인해 그의 생명에 속하기 때문이다.
또 이것은
사람은 그가 의지하는 것을 사랑하고 선으로 부르며
나아가 그것이 행해질 때 그것을 선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일은
그들에게 다만 이해에 속한 것으로만 있을 뿐
동시에 의지에 속한 것이 아닐 때에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여기서 주지해야할 것은
사람에게 있는 선의 전유는
(사람이 선을 그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단지 주님으로부터 선을 받을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고
이 능력을 그는 중생을 통해 부여받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에게 있는 선은 사람의 것이 아니고
다만 그와 함께하는 주님의 것이다.
그리고 그가 온갖 악들에게서 스스로 억제하는 만큼
그는 그 안에 머물게 된다.
그 사람이 악에 빠져있는 한 선이 전유될 수 없기 때문에,
다시 말해 선이 그에게 전해질 수 없기 때문에
어느 누구든 불결한 사람이
희생제물의 고기나 빵을 먹는 것을
강력히 금하고 있는 것이다. ..
3) 불결한 사람이 죽음의 형벌 아래
성별된(sanctify) 것을 먹는 것이 금지되었다는 것은
모세의 글에서 명확하다.
레 7:19-21 “그 고기가 부정한 물건에 접촉되었으면
먹지 말고 불사를 것이라
그 고기는 깨끗한 자만 먹을 것이니
만일 몸이 부정한 자가 여호와께 속한 화목제물의 고기를 먹으면
그 사람은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요.. ”
모든 외적인 불결함은 내적인 불결함을 표징하는데
그것들은 사람에게 속한 악들을 가리키고
그리고 이런 부류들은
그의 의지에 속한 것으로
실제적인 삶을 통해 전유되는 것들이다. ..
- 선과 진리는 사람이 악을 멀리하는 것에 비례해서 입류한다.
2388
..
2) 믿음에 속한 진리 안에 있는 자들은
만일 그들이 악에서 물러난다면 구원을 받게 되는데
이것에 관한 경우는 이러하다.
믿음에 속한 진리들은
바로 선을 수용하는 그릇이고
그 진리들은 그 사람이 악에서 격리되는 만큼 선을 받는다.
왜냐하면 선은 주님으로부터 계속 입류되지만
악한 삶은
사람의 기억 또는 지식을 통해 그 사람과 함께 하는 진리 안에
그 선이 수용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악에서부터 멀리 떨어지는 정도에 비례해서
선은 들어와서 그의 진리에 적용되고
그러면 그와 함께하는 믿음에 속한 진리는
믿음에 속한 선이 된다.
사실 사람은 진리를 알 수 있고
또 몇몇의 세상적 원인에 의한 자극 하에
그것을 고백할 수도 있으며
심지어는 그것이 참이라고 설득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 진리는
사람이 악한 삶 안에 있는 한 오래 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잎이 있으나 열매는 없는 나무와 같기 때문이다.
그의 진리는 열이 없는 빛과 같아서
겨울에는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다.
그러나 그 안에 열이 있을 때,
빛은 모든 것이 성장할 봄의 때와 같이 된다. ..
이와 같은 것은
인애에 속한 선이 함께하지 않는 믿음에 속한 진리가
무엇인지를 간명하게 보여준다. ..
- 악을 멀리하고 선 안에 머무르는 것이 죄 용서를 이룬다.
9014
..
3)교회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은
죄악들의 용서가
불결한 것들이 물에 씻겨 지듯이
죄악에 속한 것들이 닦아지고 씻겨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용서를 받은 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이 깨끗하고 순결하게 된다고 믿는다.
이러한 주장이나 견해는
구원의 모든 것을 ‘오직 믿음’에 귀속시키는 자에게
널리 만연되어 있다.
그러나 주지해야 할 것은
죄악의 용서는 그 경우와 아주 다르다는 것이다.
주님은
그 누구의 죄악도 용서하신다.
그 이유로 주님은 자비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진지하게 회개를 성취하고,
온갖 악들에서 물러나고,
그 뒤에 믿음에 속한 삶이나 인애의 삶을 살고,
그리고 이러한 일이 그의 생애 마지막까지 계속되지 않는다면
그것에 의해 용서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수행될 때 그 사람은
이른바 새로운 생명이라 불리는 영적 생명을
주님으로부터 받는다.
그가 이 새로운 생명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예전의 삶에 속한 온갖 악들을 명확하게 보고,
그리고 그런 악들로부터 떠나고,
그런 것들을 혐오스러운 것들로 여기게 된다면
그때 그의 악들은 처음으로 용서된다.
왜냐하면 그때 그 사람은 온갖 죄악에서 물러나
주님에 의해 진리들이나 선들 안에 사로잡히게 되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볼 때
온갖 죄악에 속한 진정한 용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한 시간이나 또는 일 년 안에
주어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 수 있겠다.
이러한 내용이 사실이라는 것을 교회는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성만찬에 나오는 자들에게
만일 그들이 악한 삶을 단절하고 그것들을 혐오하여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한다면
그들의 죄악들이 용서된다고 선포되기 때문이다. ..
9444
사람이 저지른 죄들은
그의 생명에 뿌리를 박고 있다.
그리고 그의 생명을 이루어 간다.
그러므로 만일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을 받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도 죄들로부터 자유하지 못한다.
그와 같은 자유와 해방은 중생에 의해 이루어진다.
9445
어느 누구든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 자기 스스로는
선한 것을 행할 수도, 또 참된 것을 생각할 수도 없다.
이것은 요한복음서에서 잘 알 수 있다.
요한 3:27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요한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이렇게 볼 때 분명한 것은
사람은 그 누구도
어떤 이를 죄들로부터 물러나게 할 수 없고
즉 오직 주님만이 그들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9446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사랑에 속한 선과 믿음에 속한 진리를 가지고
사람에게 입류하신다.
이것들은 사람마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다양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중생된 사람들에게는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중생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사람들은 반감을 갖게 된다.
9447
중생한 사람들은
믿음에 속한 선이나 사랑에 속한 선 안에
주님에 의해 계속 보존되고
동시에 온갖 악들이나 거짓들로부터 억제된다.
그리고 주님에 의해 중생되기를
그 자신에 허락하지 않는 자들 역시
악으로부터 억제되고 선 안에 보존된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에게는 주님으로부터 온 선과 진리가
끊임없이 흘러들기(입류)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 안에 있는
지옥적 사랑들, 곧 자기사랑이나 세상사랑이 그 길을 가로막아
선의 입류를 악으로, 진리의 입류를 거짓으로 바꾼다.
9448
이렇게 볼 때
죄악의 용서가 무엇인지 잘 알 수 있겠다.
주님에 의해
사랑에 속한 선과 믿음에 속한 진리들 안에 보존될 수 있고
또 온갖 악들이나 거짓들에게서 억제될 수 있는 것이
온갖 죄악들의 용서고
동시에 악이나 거짓을 멀리 피하여
그것들에 대한 혐오를 느끼는 것은 회개를 구성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중생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을 수용한 자들에게만 가능하다.
그 이유는 이런 것들은
새로운 생명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
9451
온갖 죄악들이 용서될 때
그것들이 씻어질 것으로 믿게 되는데
물로 더러운 것이 씻어지듯이 그것들이 씻어진다고 믿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죄악들은 그 사람 안에 그대로 남아 있다.
“모두 씻어졌다.”고 하는 그들의 말은
그 사람이 죄악들에게서 억제될 때
그런 겉모습(外現)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9452
주님은
신성한 자비로 사람을 중생시키신다.
이러한 일은 이 세상에서 어려서부터
그의 생애의 마지막까지 행해지고 그리고 그 뒤 영원히 이어진다.
따라서 주님은 사람을
온갖 악들이나 거짓들로부터 물러나게 하시고
그리고 그를 믿음에 속한 진리들이나
사랑에 속한 선들에게로 인도하시고
그 뒤에는 이런 상태에 그를 보존하신다.
이런 일이 있은 뒤
주님께서는 신성한 자비로 그 사람을
천국에 있는 주님 자신에게로 올리시고
그리고 그를 행복하게 하신다.
이런 모든 것이
자비로 인한 온갖 죄악의 용서가 뜻하는 내용이고
그 밖의 다른 방법으로 죄악들이 용서받는다고 믿는 자들은
아주 큰 과오들을 범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그것이 다른 방법으로 행해질 수 있다면
지옥에서 사람들의 무리를 보거나 그들을 구원하지 못하는 것은
자비의 부재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자비 자체이시기에
어느 누구도 죽지 않고 살기를 원하신다.
9453
결과적으로 자기 자신이 중생되기를,
따라서 온갖 악들이나 거짓들에게서 스스로 물러나기를
선호하지 않는 자들은
스스로 이와 같은 주님의 자비들을
제거하고 내동댕이친다.
그러므로 만일 그가 구원받을 수 없다면
그가 바로 과오에 빠져 있는 사람이다.
9454
이러한 일련의 내용이 요한복음서에서 뜻하는 것이다.
요한 1:12,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여기서 ‘혈통으로’ 라는 말은
믿음에 속한 선들이나 인애에 속한 선들에
정반대가 되는 자들을 뜻하고
‘육정으로’라는 말은
자기사랑이나 세상사랑에서 비롯된
온갖 악들 가운데 있는 자들을 뜻하고
‘사람의 욕망으로’라는 말은
그것에서 파생된 온갖 거짓들 안에 있는 자들을 뜻한다.
‘하나님께로부터 났다’는 말은
중생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만약에 중생되지 않았다면
어느 누구라도 천국에 들어갈 자가 없다는 것을
요한복음서에서 이와 같이 가르친다.
요 3:3,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위로부터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영)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여기서 ‘물로 난다’는 말은
믿음에 속한 진리에 의하는(through) 것을 뜻하고
‘영으로 난다’는 말은
사랑에 속한 선에 의하는 것을 뜻한다.
이상의 모든 것에서 볼 때
그의 온갖 죄악들이 용서되었다는 자들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 수 있겠고
그리고 온갖 죄악을 용서받지 못한 자들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 수 있겠다.
- 죄가 용서되었는지 아닌지의 증표들(signs)
9449
죄악들이 용서되었다는 증표들은 다음과 같다.
그들은 하나님을 목적한 하나님 예배에서 기쁨을 느끼고
이웃을 위한 이웃의 섬김에서 기쁨을 느끼고
따라서 선을 목적한 선한 것의 실천이나
진리를 목적한 진리를 믿는 것에서 기쁨이나 즐거움을 느낀다.
여기에는 인애나 믿음의 그 어떤 것에 의한
반대급부적인 보상에 대한 그 어떤 바람도 없다.
온갖 악들, 예컨대 증오, 복수심, 무자비함, 불의 따위들,
한마디로 하나님에 대하여 대항하고 저항하는,
그리고 이웃에게 거스르는 모든 것들을
멀리 기피하고 증오 안에 둔다.
9450
그러나 온갖 죄악이 용서받지 못하였다는 증표들은 다음과 같다.
그들은 하나님을 목적해서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이웃을 목적해서 이웃을 섬기지 않는다.
따라서 선이 선을 위해 행해지지 않고
진리가 진리를 위해 언급되지 않고
오로지 자기 자신이나 세상을 위해 그런 일을 행하고 언급한다.
거기에는 자기 자신의 행위에 의한
공덕을 얻으려는 열망만 있다.
자기 자신과 비교하여 다른 자들은 경멸될 뿐이다.
그들은 온갖 악들 가운데서 쾌락을 만끽하는데
예를 들면 그런 것들은
온갖 증오들, 미움, 복수, 잔인, 음란 등이 되겠다.
그들은 교회에 속한 거룩한 것들은 경멸의 상태에 놓고
마음으로 그것들을 부정한다.
- 어떠한 사물을 선에서(선의 관점으로) 보고
악에서(악의 관점으로) 보지 않는 것이 죄 용서의 결과다.
7697
출 10:17 “바라건대 이번만 나의 죄를 용서하고..”
이 말씀이 뜻하는 것은
불순종을 무시해주기를 그들에게 호소하는 것이다.
이것은 (불순종을)무시하는 것을 가리키는
용서의 의미로 보아 분명한데
왜냐하면 용서는 어떤 사람을 악의 관점이 아니라
선의 관점으로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순종을 가리키는 죄의 의미로 잘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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