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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연민 해독제
“한국과 계절이 반대인 뉴질랜드라. 여기 7월은 겨울이네. 그것도 한 겨울이라 요즘엔 새벽 운전이 좀 부담스럽기도 하고.”
민재가 평상시처럼 새벽 4시에 눈을 떴다. 기와지붕 위에 내리퍼붓는 빗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세수하고 간단히 우유와 토스트를 들었다.
을씨년스러운 날씨를 맞이하면서도 한주가 시작되는 월요일이라 이른 아침부터 바삐 움직여야 했다.
민재가 개인적으로 맺어둔 택시 단골손님이 예약한 공항 잡, 먼저 토비 집으로 향했다.
호주 시드니로 출장 가는 IT기술자 토비는 전도가 유망한 공학도였다. 첨단 미래를 준비하는 그를 보면 뉴질랜드도 달리 느껴졌다.
마이랑이 베이, 바닷가 집에 다다랐는데 몰아붙이는 파도 소리가 집을 삼킬 듯 거세었다. 토비 집 앞에서 차에 히터를 켜고 한참 기다렸다.
11월 여름철이면 최상의 뉴질랜드를 즐길 수 있는 바닷가 별장 집. 한겨울에 폭풍우 몰아치고 바닷가 파도소리가 울어대면 고독한 성채였다.
토비 집 현관문이 열렸다. 민재가 재빨리 우산을 받쳐 들고 나가 토비를 맞이했다. 캐리어를 받아들고 그에게 우산을 씌운 채, 택시로 안내했다.
“고마워요. 존. 새벽부터 웬 폭풍우가 몰아치는지. 뉴질랜드 겨울은 못 말려.”
“그러게요. 지금은 거세게 쏟아지지만, 한낮이 되면 햇살 내리쬐는 날씨로 둔갑하겠지요. 우선은 공항까지 안전운전이 급선무네요.”
토비를 태우고 마이랑이 베이 동네를 빠져나왔다. 쏟아지는 빗속에 새벽 거리는 한산했다. 민재 차만 경쾌한 엔진소리를 내며 빗속을 헤쳐 달렸다.
도열한 가로등이 말없이 불빛을 발했다. 어둠 속에서도 주어진 자기 소임을 다하는 숨은 일꾼 같았다. 옆에 선 다른 가로등 불과 연대를 이루었다.
그런 불빛들이 온 동네를 지키고 있었다. 토비가 뉴질랜드 기술 한 축을 밝히는 것처럼. 로토루아 레드우드 숲 뿌리가 땅속에서 얽혀 대지를 지키듯이.
‘민재 당신도 그런 일을 돕는 숨은 등불이야. 남 말하지 말고 운전에 집중!’
내면에서 들려오는 중얼거림에 민재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운전대를 더 꽉 잡았다. 멀리 하버브리지가 들어왔다.
바다에서 휘몰아치는 폭풍우가 앞서가는 냉동 탑차를 거세게 밀어붙였다. 그 큰 트럭이 휘청했다. 안쪽 차선으로 갈지자(之)처럼 밀려갔다.
옆에 탄 토비가 안전띠를 꽉 움켜잡았다. 민재가 트럭과 거리를 두며 속도를 조심스레 줄여갔다. 엉금엉금 살얼음판을 기어가듯 하버브리지를 통과했다.
모터 웨이를 빠져나와 엡섬부터 공항까지는 다행히 폭풍우가 꺾였다. 심하게 떼쓰며 발버둥 치던 아이가 사탕 하나 받아들고 울음이 잦아들 듯이.
토비를 국제선 청사에 늦지 않게 내려주었다. 오후 퇴근 길 픽업을 부탁받았다. 토비가 건네준 비행기 도착 시간과 항공 번호 메모 쪽지를 챙겼다.
토비가 택시 시작과 끝을 선점해 주니, 민재로선 그 중간 택시 일은 무척 여유로울 수밖에. 그런 VIP 고객을 위해서 민재도 나름 준비한 게 있었다.
트렁크에는 한국초코 쿠키파이 박스를 싣고 다녔다. 퇴근 시에 토비에게도 줄 선물 한 박스. 택시 요금 100달러에 쿠키파이 2달러. 2%는 보답 인사다.
토비 아내나 아이 선물로 주면 토비도 가장으로서 어깨에 힘이 실릴 것이다.
세상은 주고받고 사는, 그렇게 인연을 맺고 사는, 하나의 공동체라는 생각에.
토비가 시작을 잘 끊어 준 덕분이었다. 민재는 아침부터 택시 손님을 태우고 몇 번 공항을 드나들었다. 샐리의 법칙이 녹색 신호등처럼 계속 켜졌다.
11시를 넘어섰는데도 국제선과 국내선 택시 승하차 장에 활기가 넘쳐났다. 인구 100만 도시, 오클랜드 공항이 뉴질랜드를 대표하는 관문답게 분주했다.
습한 기운에 비바람까지 몰아쳤다. 밤새 세차게 쏟아진 소낙비에 도로는 물청소해놓은 듯 말끔했다. 그 도로 위를 달리는 기분이 사뭇 가벼웠다.
뉴질랜드 겨울의 뒷자락에서 성급하게 피었다 진 자목련 꽃잎이 비바람에 흩날렸다. 허공에서 소용돌이치다가 땅바닥에 배를 깔고 납작하게 누웠다.
민재의 시야에 그런저런 사물과 풍경이 수채화처럼 채색되었다. 민재가 세 번째 공항을 빠져나오다 근처 주유소에 들러 택시에 연료를 가득 채웠다.
민재 배에서 꼬르륵하는 신호음이 울려 나왔다. 운전하는 사람도 좀 생각해 달라는 귀여운 아우성이었다. 스스로에게 고용된 몸은 누가 챙겨주나.
마음 씀씀이가 잠시 쉬었다 가자고 보챘다. 민재가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택시를 주유소 한쪽에 주차했다. 우리도 쉬어가자. 택시와 택시 운전사도.
우유가 많이 들어간 라떼 커피 한잔을 사 들고서 창가에 앉았다. 내리던 비가 그치고 선명한 무지개가 공항 활주로에서 뻗쳐 나오고 있었다.
옆 테이블에서 민재처럼 쉬고 있던 동료 운전기사가 커피를 들며 빙그레 웃었다. 창밖 풍경을 보며 생각에 잠긴 초로의 택시 운전사.
오클랜드 택시의 전설. 택시 업계에선 대 원로 격인 폴(Paul) 할아버지였다.
“폴. 무슨 생각을 하시고 계세요?”
민재가 다가가 그 테이블에 앉으며 반갑게 인사말을 건넸다.
“존. 이번 주말이 아홉 번째 증손 돌이야. 무슨 선물을 사줄까 생각 중이야.”
“아홉 번째 손자(Great Son)라고요?”
“아니. 손자가 아니라 증손자(Great grandson)!”
민재가 잘 못 들었나, 귀를 의심하며 재차 물었다. 대답은 똑같았다.
“그냥 손자가 아니야. 손주는 15명으로 이미 다 장성했어. 아들 딸은 5명이지. 그 손주가 15명이고. 이어진 뿌리, 증손이 9명이라니까.”
민재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Great grandson! 어마어마하다. 실례인 줄 알면서도 궁금해서 다시 물었다. 민재가 먼저 자신의 나이를 밝혔다. 28세라고.
폴이 민재에게 다가와 어깨를 다정하게 두드렸다. 인자로운 미소를 띤 외할아버지처럼.
“존. 마치 우리 열두 번째 손자 에릭 같네. 세상 호기심도 많고 자기 하고 싶은 일에 푹 빠져 지내는 손자. 딱 28세야. Ace Milk에서 근무 중 이지.”
민재가 일어서서 폴에게 90도로 정중하게 배꼽 인사를 했다.
“폴. 증조할아버지. 증손자가 이제야 돌아왔습니다.”
“하하하!”
폴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자애로운 눈길로 그윽이 민재를 바라봤다. 큰 바위 얼굴 바위산이 민재 앞에 딱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진한 장미향이 감돌았다.
“존. 내 나이 이제 84세야.”
원 세상에나 평소 그렇게 안 봤는데. 민재가 놀라운 표정으로 이어지는 폴 할아버지의 인생 여정을 들었다.
폴 할아버지. 택시 운전 이력이 엄청났다. 26세 나이로 택시 운전대를 처음 잡았단다.
20년을 택시 운전하다 47세에 직업을 바꿨다고. 잔디깎이 기계 만드는 회사 기술자로 60세까지 근무하고 정년퇴직을 했는데.
은퇴하고 쉬면서 그냥 생활하기에는 무기력한 것 같아 다시 택시 운전을 시작했단다. 그렇게 일하다 보니, 24년이 흘러 84세에 이른 것이란다.
택시 운전 경력 44년! 84세? 아직도 정정해 보이는데, 안경을 쓰지 않고도 운전이 가능한 상태였다.
요즘도 아침 일찍 5시에 시작해 점심때 집에 들러 쉬고. 오후 5시쯤에 일을 마친다고.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주 5일. 규칙적인 생활로 택시 운전 중.
폴의 택시 인생 이력을 들으며 민재는 큰 바위 얼굴, 전설을 인터뷰하는 느낌이었다. 신기한 듯 묻는 게 기특했는지 폴이 민재 등을 두드려 줬다.
나이로 봐도 민재는 새까만 후배요. 택시 운전 경력으로 봐도 폴은 하늘같은 선배다. 어디 감히 견주기나 할 군번인가?
폴 주변 친구들은 모두 저세상으로 먼저 돌아갔다고 한다. 이유를 물으니 노후에 자기 몸에 맞는 꾸준한 일거리가 없어서였을 거란다.
예상도 못 한 민재는 특종을 만난 듯 신들린 모습으로 인터뷰를 계속했다.
“폴. 택시를 그렇게 오래 하면서 좋다고 느끼는 점은 뭐가 있어요?”
“응. 매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세상을 구경 할 수 있는 점이야. 이젠 생존 수단의 택시 운전이 아니라 생활의 길잡이로 여겨져.
별별 사람, 참 안쓰러운 모습, 온갖 일들을 만나다 보니 좋을 때도 있지만, 가끔은 일말의 연민(憐憫) 같은 것도 일어나.
자기 연민의 해독제는 바로 감사하는 마음이야!
땀 흘려 일한 후, 적당한 수입이 있어 좋지. 가족들이나 종친 모임, 교회에서 역할을 할 수 있어서 보람을 느끼기도 하지.
아직도 눈이 정정해 여러 책도 읽고, 하늘을 우러러보는 시간이 많아서 괜찮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일을 마치고 쉴 수 있어 자유롭지. 편안해. 내 마음대로 사니까. 해마다 한 달씩은 아내와 여행도 다녀. 감사하지.“
폴 할아버지가 손목시계를 보더니 일어섰다. 한 시간 뒤 예약 손님, 양로병원에서 은퇴 빌리지로 가는 할머니 환자를 태우러 가신다고.
민재도 일어났다. 폴 할아버지에게 다시 정중하게 인사를 드렸다. 떠나가는 폴의 택시가 안 보일 때까지 서서 멀거니 바라봤다.
민재의 가슴에 엔돌핀 감동이 밀려왔다. 큰 바위 얼굴 전설은 다이 돌핀 감동까지 몰고 와 민재를 그 속에 푹 빠뜨렸다.
자기 처한 환경에서. 마음 붙이고 할 일이 있는 것 자체가 행복이고 축복이라는 그 마지막 말씀. 폴 할아버지가 남기고 간 인생 조언이 찡했다.
“파랑새를 찾으러 온 세상을 돌아다니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서야 그토록 찾아다닌 파랑새를 만난 느낌이네.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닌 현실에서.”
너무 한가하면 딴마음이 생기기 쉽고, 생활 리듬이 깨지게 마련이라고. 자족할 줄 아는 것. 가진 것을 귀히 여기라고. 원하는 것은 조절하라고.
“잔잔한 행복과 생활 만족은 가진 것을 원하는 것으로 나눈 값이라고. 분자 가진 것은 유한인데, 분모 원하는 것이 무한이면 평생 행복하지 못하다고.”
자기 분수를 아는 것, 가진 것을 나눌 줄 아는 것, 그걸 감사할 줄 알면 행복이지 뭐 다른 게 행복이겠냐고.
언제 은퇴를 할지 여쭈니, 손님의 안전을 최우선 책임져야 되는 일이라는 걸 분명히 밝혔다.
택시 운전 면허증 갱신에 따른 건강에 문제가 없다면, 여건이 허락하는 한 계속 일하겠다고. 자신은 택시 운전이 천직이라며.
84세에도 현역으로 일한다? 아직껏 땀 흘려 일할 수 있고, 세금도 내며 건강도 따라줘서 고맙다는 온화한 얼굴이 비에 씻긴 나뭇잎 같았다.
말간 잎이 햇살에 반짝거리듯 폴 얼굴에서 빛이 났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게 있다면요?”
“가족과 건강 그리고 감사면 다가 아닌가? ”
폴이 빙긋 웃었다. 저녁 무렵 동네를 걸으며 그날 일을 생각해보고 신체 건강도 다진단다.
오랫동안 안전 운전을 한 비결은 흐름 운전에 따르는 것. 길을 알면 흐름에 맡기고. 자연스러운 운전이 된다고. 마무리 말로 맺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세 가지가 있다고 들었던 게 마침 생각났다. 그 하나가 곤충의 눈이고, 그다음이 새의 눈이고, 마지막이 물고기의 눈이라고.
곤충의 눈은 바로 눈앞만 바라보는 좁은 시야라면, 새의 눈은 멀리 넓게 볼 수 있는 것이라고.
물고기의 눈은 세상 흐름을 파악 할 수 있는 통찰력까지 가진 상태라고.
폴. 할아버지야말로 이 세 가지 눈을 가진 분이라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들수록 입은 닫고 귀는 열고 주머니는 내어주라는 옛말처럼, 생활 속에서 그대로 살아가고 계신 분이다.
겸손하게 낮은 자리에서 묵묵히 듣는 마음으로 세상을 대하니, 하늘 소리도 듣고 땅의 소리도 들으며 천수를 누리는 것 같다.
민재가 큰 바위 얼굴 전설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오자, 선명한 무지개 옆에 또 한 줄기 무지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쌍무지개였다.
긴 여운의 짧은 글, 폴 할아버지 말씀. 한 자락이 아름다운 쌍무지개 위에 걸려 있었다.
"존. 자기 연민 해독제는 바로 감사하는 마음이야." *
32화 끝(5,566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