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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2202.2023.7.30)
욥22:21-30
할렐루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임재하셔서 우리 예배를 받으십니다. 오늘도 주의 전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혹시라도 삶의 현장에서 상처와 상한 마음을 가지고 오셨으면 말씀 듣다가 위로와 치유함을 받으시고 질병과 싸우는 중이라면 여호와 라파 치료의 하나님을 만나서 치료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삶이 힘들고 지쳐서 오셨다면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새 힘을 얻으시기를 축복합니다. 무엇인가 계획하고 기도중에 있는 것이 있다면 응답받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삶이 해결되고 성령이 충만하여 기쁨과 감사와 웃음이 넘쳐나는 유쾌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 안에서 좋은 일들만 있기를 바라지만, 들려오는 소식들은 좋은 일들보다는 나쁜 일들만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코로나 19은 잠잠해지는 것 같은데 여러 가지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저 멀리 떨어진 우크라이나에서는 벌써 1년이 넘도록 전쟁 중에 있습니다. 미사일이 발사되고, 건물들이 파괴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는 일들이, 지구 한 편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에, 6.25전쟁을 경험한 우리나라임에도 불구하고, 그 아픔, 그 처참함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평화를 원하지만 진정한 평화가 없습니다. 주님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모든 나라들이 평화를 누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우스 땅에 살고 있던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순간에 자녀들도, 재물도, 모든 것이 무너졌습니다. 분노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을 원망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욥1:21절‘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않습니다.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서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던 욥에게 욥2:10절‘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하는 아내의 말에도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라고 하면서 욥은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했습니다.
그후 욥이 큰 재앙을 당하였다는 말을 듣고, 욥을 위문하고 위로하려 찾아왔던 그의 세 친구들은, 알아보기 힘든 욥을 보자, 일제히 소리 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밤낮 칠 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너무 심함을 보므로, 친구들은 욥에게, 말 한 마디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욥의 세 친구들은 욥에게 욥3:26절‘이 모든 일들이 너가 범한 죄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라고 몰아붙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욥은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한 순간에, 모든 것이 다 무너졌는데, 어찌 욥에게, 평온이 있고, 안일이 있고, 휴식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도대체 무슨 일 때문일까’욥에게 불안만이 가득할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의 여정이 이와 같습니다. 코로나19라는 질병 때문에 삶이 무너지기도 하고 하나님과 멀어지기도 하고 마음에 평안도 없고 코로나 걸리지는 않을까 불안해 했던 시기입니다. 그래서 삼남연회 연합부흥성회 총 주제를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고 정했습니다. 코로나19 때문에 하나님과 멀어졌다면 돌아오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욥기서를 읽다 보면 길고 지루한 논쟁이 이어집니다. 도저히 참지 못하고, 성경책을 덮어버리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 읽다 보면 뜻하지 않게 아주 귀하고 귀한 말씀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21절‘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욥의 말이 아닙니다. 그의 친구인 데만 사람 엘리바스의 말입니다. 욥22:5절을 보면 엘리바스는 욥에게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끝이 없느니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 ‘자네가 저지른 죄는 너무나도 많아, 이루 다 셀 수 없지 않은가’라고, 엘리바스는 욥을 몰아붙이면서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고 말했습니다. 엘리바스는 욥이 큰 재앙을 당하였다는 말을 듣고, 욥을 위로하려고 찾아왔던 친구였습니다. 그런 엘리바스가 욥에게‘네가 저지른 죄악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아 지금 이 재앙이 너에게 임한 것이다’라고 매몰차게 말했습니다.
욥4:7-9절을 보면, 엘리바스는 욥에게‘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다 하나님의 입 기운에 멸망하고 그의 콧김에 사라지느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엘리바스의 입을 통하여 귀하고 귀한 말씀이 흘러나옵니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누구의 잘못인가’를 따지기 좋아합니다. 어쩌면 아무 의미없는 작은 일일지도 모른데‘누구랑 연관되어 있는 것인가? 누구랑 엮어서 말하면 좋을까?”라고’일을 점점 더 크게 부풀어 말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물론 처음부터 잘못된 일이었고, 그 불법한 일에 이런 저런 사람들이 관련되어 있었던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만, 무슨 일이 터질 때마다‘무슨 사정이 있겠지. 그럴 수도 있지’라고 쉽게 이해해주고, ‘그럴 사람이 아니야’라고, 덮어주고‘그 사람 나쁜 사람 아니야. 실수한거야’라고 용서해 주는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상대방을 끌어내리고, 산산조각으로, 박살내야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현실 속에서 우리들이 지금 살아가고 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불안하고 두려운 일입니까?
여러분! 어떤 드라마를 보면서‘이것은 진짜 막장 드라마이다’라고 말하면서도 욕을 하면서도 그것을 끝까지 챙겨보는 것은 어떤 마음일까요? 악플을 싫어한다고 하면서도 그 악플을 하나하나 찾아 읽어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우리 안에도 그런 나쁜 마음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야고보는 약3:8절‘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라고 말했습니다.
엘리바스는 욥에게‘오히려 네 죄가 많고 네 죄악이 끝이 없으니 하나님이 너를 심판하신 것이 아니냐’라고 해서는 안될 말을 내뱉었습니다. 그러나 그 입술로‘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고 말했습니다. 약3:9-10절‘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우리의 입술로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아픔을 주는 말을 하기보다는 위로하고, 격려하고, 칭찬하고, 축복하는 말을 많이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 중에 모든 사람들은 창12:2절‘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라는 말씀을 좋아하고, 그 말씀을 기억합니다만 바로 그 말씀에 이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창12:3절‘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우리들은 다른 사람을 시기하고, 저주하며 살기보다는 축복하며 기도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1.사도 바울은 두 가지 ‘화목’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화목입니다. 고후5:20절‘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말했습니다. 둘째는 모든 사람과의 화목입니다. 롬12:18절‘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고 말했습니다. 죄악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어떻게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을까요? 생각이 다르고, 행동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 화목할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엡2:16-17절‘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과 화목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십자가’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멀어졌던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고, 관계가 틀어졌던 다른 사람들과도 화목할 수가 있습니다. 십자가의 피로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만이 예수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14:27절‘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16:33절‘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금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눅6:27-28절‘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원수일지라도 사랑하며, 나를 미워하는 자라고 할지라도 잘 대해주고, 나를 저주하는 자라고 할지라도 축복하며, 나를 모욕하는 자라고 할지라도 기도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사람들로서 그렇게 살아가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나님 안에서 평안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2.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22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강조하신 말씀이 무엇일까요? 신6:4-9절까지에 나와 있는 쉐마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이 쉐마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바로 온 맘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고, 말씀을 항상 삶 가운데 품고 사는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내면과 삶을 비추어 주는 거울입니다. 말씀은 우리의 삶을 가리키는 나침반입니다. 말씀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말씀은 우리를 치료하고 회복시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어두운 인생길을 밝혀주는 등불이요 네비게이션과 같습니다. 말씀의 등불이 꺼지면 그 인생은 캄캄한 어둠속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사모하십시오. 날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십시오. 그리고 지켜 행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루는 지름길입니다.
우리들이 하루의 삶 속에서 얼마나 많은 말을 하고, 얼마나 많은 소리를 듣습니까? 그런데 정작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얼마나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을 가까이 합니까? 절대로 ‘후탁교인’ 되지 마십시오. 주일 날 예배드리고 집에 돌아와 다음 주 주일 날 아침 성경책을 보면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을 들고 ‘후후’ 분 다음에 손으로 ‘탁탁’치고 오는 성도가 바로 ‘후탁교인’입니다. 어떻게 그런 분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하나님의 능력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시고, 말씀을 사모하십시오. 설교를 들을 때도 데살로니가 교인들처럼 사람의 말로 듣지 마시고, 내게 주시는 생명의 말씀으로 들으십시오. 고후1:20절‘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말미암아 우리가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바울은 권면합니다. 말씀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말씀 속에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 선포됩니다. 말씀 가운데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임합니다.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 큰 군대가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말씀을 가까이 함으로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어 약속하신 말씀의 복을 모두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안개와 구름이 가득한 것과 같은 캄캄한 앞날을 어찌 헤쳐 나갈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과 화목하는 길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였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길이 없었습니다. 참다못한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시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롬5:10절‘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엡2:14절‘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엡2:15절‘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2:16절‘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여러분은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셨습니까?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는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로 화목을 이루는 것입니다. 십자가로 화목을 이룬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과의 화목의 관계를 정상적으로 유지할 수 있을까요? 욥22:22절‘청컨대 너는 그 입에서 교훈을 받고 그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 하나님과의 화목을 유지하는 길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하나님과 화목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시119:105절‘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발걸음을 비추어 주어야 합니다. 시119:11절‘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범죄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시119:28절‘나의 영혼이 눌림으로 말미암아 녹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말했습니다. ‘나의 영혼이 괴로워 잠 못 이루오니 말씀하신 대로 나를 일으켜주소서’ 영혼이 누릴 때 괴로워 잠 못 이루는 밤이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면 우리에게 새 힘을 주고 우리를 다시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시119:165절‘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그들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그 말씀을 사랑할 때, 평안을 누리게 되고, 장애물도 넉넉하게 헤쳐나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가짜 뉴스, 막말 등이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가짜 뉴스, 막말, 악플 등에 끌려다녀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환난의 때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지금은 바로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입니다. 진정한 회개가 무엇입니까?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감은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말뿐이 아니고 진실 되이 실행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은 어떻게 실행되어야 합니까? 하나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데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에게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하므로 실행됩니다.
‘장막에서 불의’는 가정의 죄악을 말하는 것입니다. 밖에 나가서는 점잖은 듯한 사람이 가정에 들어가서는 마귀 노릇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됩니까? 그 이유는 그들이 가정에서는 허물이 가려지는 줄 알고 조심 없이 행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스스로 속은 생각에서 연출한 행동입니다. 사람은 그 가정에서 옳게 행해야 그 자신도 잘되고 발전합니다. 가정은 사람의 생활의 근거점입니다. 자녀 된 자들도 그 가정에서 바로 행해야 그 앞길이 형통하게 됩니다.
잠30:17절‘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자녀로서 부모에게 순종치 않는 자들의 불행을 가리킵니다. 사랑하는 부모에게 순종치 않는 자녀는 결국 집을 망케 하니 집 없는 사람처럼 됩니다. 그런 사람은 어느 사회에서도 생활 근거를 얻지 못하고 방랑 생활을 하다가 패망하게 됩니다.
욥 22:23절‘불의를 멀리 버리라’는 말씀은 귀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화목케 하는 비결은 날마다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구체적인 행위를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더러운 그릇에는 음식을 담을 수 없듯이, 더러워진 우리의 심령 속에 하늘의 복을 담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자신의 마음을 정결케 해야 합니다. 내 삶 속에 있는 불의함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복을 누리는 비결입니다.
우리의 죄를 정결하게 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입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아무 피나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날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우리의 죄를 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사람이 죄를 가까이 하면 범죄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죄는 사람의 마음을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시1:1절‘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고 하였습니다.
3.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보화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가 축복 받는 길, 다시 흥하는 길이 무엇입니까? 전능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전능자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회개하는 것을 말합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품을 떠나 허랑 방탕하다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탕자가 언제 돌아왔습니까? 자신이 가진 것을 다 허비하고 굶주렸을 때입니다. 환난은 자신을 돌아보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은 자신을 돌이켜 보라는 것입니다. 건강할 때, 부요할 때 하나님을 찾기가 쉽습니까 아니면 병들었을 때, 물질적으로 궁핍할 때 하나님을 찾기가 쉽습니까? 바로 우리가 환난 당하고 어려울 때, 질고로 고통 당할 때 하나님을 찾기가 쉬운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그때 우리의 영적인 눈이 열리고 영적인 귀가 열리며 영적인 마음의 활짝 열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에서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말씀 하십니다.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 가까이 계실 때가 언제입니까? 그때가 바로 고난 당할 때입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입니다. 결코 평안할 때가 아닙니다. 평안한데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 보셨습니까? 어려움이 있어야 기도하는 것입니다. 환난 날에 부르짖게 되어 있습니다.
전 7:14절‘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지금 우리는 환난의 때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지금은 바로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입니다.
24-26절‘네 보화를 티끌로 여기고 오빌의 금을 계곡의 돌로 여기라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화가 되시며 네게 고귀한 은이 되시리니 이에 네가 전능자를 기뻐하여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 것이라’,‘전능자가 네 보화가 되신다’
우리의 보화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보화, 보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마6:21절‘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머무는 곳, 우리의 심장이 뛰는 곳, 그것이 무엇입니까? 벧전2:4절‘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자’고 했습니다. 사도 베드로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바로 ‘보배’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고후4:7절‘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처럼,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보배이어야 합니다.여기저기 ‘내가 보배다’라고 외치는 이들이 있지만 그들은 진짜 보배가 아니라, 가짜에 불과합니다. 볼품없는 모조품에 불과합니다. 명품이 아니라 짝퉁에 불과합니다. 모조품이나 짝퉁에 열광하는 자들이 있으나 그들은 속고 있는 것입니다. 진짜 보배를 모르기 때문에 모조품에 불과한 짝퉁에 속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예수님께로 속히 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하고, 또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찬94장 가사를 보면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이 세상 명예와 바꿀 수 없네.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라고 했습니다. 이 찬송가 가사가 바로 우리의 고백이어야 합니다. 이 세상 부귀를 위해서, 이 세상 명예를 위해서, 이 세상 행복을 위해서, 그것을 붙잡기 위하여, 예수님을 버려서는 안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이 세상 부귀, 이 세상 명예, 이 세상 행복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기쁨이요, 우리의 영원한 보배가 되어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네 보배를 진토에 버리고 오빌의 금을 강가의 돌에 버리라 "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보배롭게 여기는 잘못된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우리는 그런 생각을 버려야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것들이라도 진토나 돌 같이 버리고 그것들에게 애착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보배롭게 여기던 물질을 하나님께 바치는 때에도 그것을 아까워하는 마음으로 바치면 안됩니다. 그것을 바친 후에 진토처럼 잊어버려야 됩니다. 물론 이렇게 실행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가 보배를 진토에 버리고 오빌의 금을 강가의 돌에 버려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배가 되시며 네게 귀한 은이 되시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이에 네가 전능자를 기뻐하여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 것이라’ 기쁨의 원천은 오직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버리고, 하나님 아닌 것을 포기하며 하나님이 기쁨의 근원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다시 흥하게 하십니다.
4.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서는 전능자께 도움을 요청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27-28절‘너는 그에게 기도하겠고 그는 들으실 것이며 너의 서원을 네가 갚으리라 네가 무엇을 결정하면 이루어질 것이요 네 길에 빛이 비치리라’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신다고 하는 귀한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전능자를 기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어야 합니다. ‘너는 그에게 기도하겠고 그는 들으실 것이며 너의 서원한 것을 네가 갚으리라’ 아버지를 속여 축복을 받았던 야곱은 고향을 떠나 하란으로 도망가다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말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야곱은 여기에서 서원 기도를 드렸습니다. 창28:20-22‘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에게 엄청난 복을 주셨습니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올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는 거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서원한 것을 바로 갚지 못했습니다. 벧엘로 올라가야 했던 야곱은 세겜으로 방향을 돌렸고 디나의 사건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후에야 그가 벧엘로 올라가서 서원한 것을 갚았습니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서원을 잘합니다. ‘이렇게 이렇게 해주시면 앞으로 이렇게 하겠습니다’그런데 사람들은 그 서원한 것을 쉽게 잊어버립니다. 언제 서원했는지도 모릅니다. 어던 분이 직장이 없어 매일 철야하면서 직장을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셨는지 직장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처음에는 그런 대로 예배에 빠지지 않고 열심을 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예배 시간을 빼먹기 시작하였습니다. 수요예배 빠지더니, 주일 저녁예배도 빠지고 나중에는 주일도 성수하지 못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갚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다시 흥하게 하십니다.
렘33:3절‘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마7:7-8절‘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요14:14절‘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게 되면,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이 주시는 응답을 받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멀어지면, 기도를 안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아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 가까워지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좋아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5.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서는 겸손해야 합니다.
29-30절‘사람들이 너를 낮추거든 너는 교만했노라고 말하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리라 죄 없는 자가 아니라도 건지시리니 네 손이 깨끗함으로 말미암아 건지심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생명 있음도, 우리가 자연스럽게 호흡할 수 있는 것도, 우리가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도,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이 진정 하나님의 복 받기를 소원하십니까? 다시 흥하는 축복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과 화목하십시오. 전능자에게로 돌아가십시오. 전능자에게 도움을 구하십시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겸손하게 도움을 구하셔서 다시 흥하시는 축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나 항상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하나님을 보화로 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나 겸손하게 살아감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의 삶을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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