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여전사(女戰士)와 고려의 설죽화(雪竹花) 이야기
아들아, 그리스 신화 속에는 아마조네스라는 용맹한 여전사 부족의 이야기가 있으며
프랑스에는 영국과의 백년전쟁에서 활약하며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했던
잔다르크(Jeanne d'Arc,1412~1431)가 있었고,
인도에는 세계 최강의 영국의 침공에 맞서 독립과 자유를 위해 싸웠던 여전사,
라니 락슈미바이(Rani Lakshmibai, 1835~1858)가 있었으며
중국에는 노쇠한 아버지를 대신하여 남장하고 전쟁에 참전해 전공을 세웠다는
화목란(花木蘭)의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단다.
인도의 독립전쟁 영웅, 라니 락슈미바이
아들아, 이들은 모두 남성 못지않게 전장에서 용맹을 떨치며 역사에 이름을 남긴
강인한 여성들이지. 우리 역사 속에도 이런 여전사가 있었을까?
정답은 있었단다. 그런 사례가 여럿 있었는데..이번에는 우리 역사 속의 여전사들
이야기를 한번 해볼까 해.
진주에서 가까운 김해는 옛 금관가야(金官伽倻)의 왕도였지.
금관가야는 가야연맹의 맹주였으며, 철을 다루는 뛰어난 기술과
해상무역의 중심으로 강력한 나라를 건설했지.
우리는 가야를 백제와 신라 사이에 낀 작고 약한 나라로 생각해왔는데..
가야는 신라보다 약하지 않았고, 때로는 오히려 신라를 압박하던 강한 나라였단다.
대성동 고분 57호분 발굴
김해에는 금관가야의 대표적인 유적인 대성동 고분군이 있는데, 그중 57호분을
발굴했는데 그 속에 순장된 것으로 보이는 3명의 인골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단다.
갑옷과 투구로 무장하였고 철제무기가 함께 출토되어 무덤 주인을 지키는
호위무사로 주인이 죽은 후 따라 죽어 함께 묻히는 순장(殉葬)된 사람들..
놀랍게도 이들은 인골 분석결과 모두 여자로 밝혀졌단다.
가야 여전사들
20대 여자 두명, 30대 여자 1명, 세명 모두 출산경험이 있었고, 다리의 종아리부근
가자미근선이 발달한 것으로 보아 일반 여성과는 달리, 다리 근육을 많이 써야 하는
환경에 있는 사람이고 갑옷과 투구로 무장하고 철제무기를 다룬다면..바로 이들이
금관가야의 여전사가 아닐까 하는 강한 확신을 가지게 만들었지.
또 김해 예안리의 고분을 발굴한 결과 주인은 여자인데..부장물이 기마병의 말갖춤새,
검과 창, 화살촉 등이 함께 출토되었고 고분 주인의 부장물 중 검을 보면 그녀가 아마도
상당한 지위에 있는 지휘관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한단다.
아들아, 흥미롭다고 해야할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금관가야의 대성동 고분군
축조가 갑작스럽게 단절된 시점이..바로 5세기 초였단다.
강성하던 금관가야의 국운이 결정적으로 기울기 시작했던 그 시기인데..
바로 고구려의 광개토태왕께서 가야와 왜의 침공으로 위기에 몰린 신라를 구원하고자
5만의 보기군을 파병하여 이들을 대파하고 추격하여 가야의 항복을 받았다는
서기 400년의 일을 전하는 광개토태왕비의 비문의 기사와 그 시기가 겹친다.
광개토태왕의 남정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것이 바로 금관가야였지.
그 시기에 신라에 대항하고, 나라의 위기를 타개하고자 금관가야는 고구려와의 전쟁을
거울삼아 무기를 개량하고, 고구려의 개마기병 전술 등을 도입하며 나라를 지키고자
몸부림쳤지만, 작은 영토와 적은 인구로 한계가 있었지 않겠느냐.
그래서 여자들도 기울어가는 나라를 지키고자 창검들고 나서야 했을 것이고..
가야 여전사의 출현은 그런 금관가야의 절박했던 상황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아들아, 대성동 고분 57호분의 순장된 여전사 3명은 또 가야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영토의 크기와 인구수는 지금도 그렇지만 옛날에도 나라의 강성과
생존을 위한 중요한 요소였지.
가야 여전사 얼굴 복원
그런데..작은 영토와 적은 인구로 힘든 가야가, 나라를 지킬 병력이 부족해서 여자까지
무장시키고 전투하게 한 나라가 그 소중한 자산인 인명을, 그것도 나라를 지키는데
쓰여야 할 전사를 이렇게 순장으로 허무하게 희생시켰다는 것은 문제가 많아.
물론 순장이란 것이 그 시대 고대국가들의 보편적인 풍습이긴 했지만, 가야의 상황은
나라의 장래를 생각한다면 그 순장이란 풍습의 금지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받아들여야
했겠는데 .....
가야 뿐만아니라 고려에도 뛰어난 여전사의 이야기가 전해져오고 있지.
고려의 여전사, 설죽화(雪竹花)의 이야기란다.
우리보다는 북한쪽에 더 잘알려져 있는 전설인데..배경은 고려 현종 때,
고려와 북방 유목민족인 거란이 세운 요와의 전쟁때다.
설죽화 캐릭터
설죽화는 이관(李寬)이라는 평민의 딸이었는데, 이관이 요나라와의 전쟁에 참전해서
전쟁의 영웅인 양규 장군(楊規, ?~1011)의 휘하에서 싸우다 전사했단다.
여요전쟁의 영웅, 고려 명장 양규(드라마 천추태후 中)
전사한 이관의 품에는
‘이 땅에 침략 무리 천만 번 쳐들어와도
고려의 자식들 미동도 하지 않는다네
후손들도 나같이 죽음을 무릅쓴 채 싸우리라 믿으며
나 긴 칼 치켜세우고, 이 한 몸 바쳐 내달릴 뿐이네'
이 싯구가 적힌 종이가 있었고, 이 시가 그의 아내와 딸인 설죽화에게 전해졌지.
거란족
설죽화는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서,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잇기위해 무예를 연마하며
때를 기다리다가, 또다시 요의 소배압이 10만 대군으로 고려를 침공해오자 남장하고
고려의 상원수인 강감찬 장군을 찾아가 자원입대 하였지.
처음엔 설죽화가 어리고 체격이 여리다하여 거절했지만 설죽화의 강한 의지와
빼어난 무예실력을 보고 결국은 입대를 허락했다고 하는구나.
강감찬 장군 휘하에서 설죽화는 앞장서서 용맹하게 싸우며 소년장수로 유명해졌는데,
강감찬 장군이 승전을 거듭하여 결국 소배압은 철군할 수 밖에 없었단다.
철군하는 요의 소배압을 고려군이 추격하여 퇴로를 끊고, 귀주의 벌판에서 고려와
거란의 대군이 혈전을 벌였고, 전투는 고려군의 대승으로 끝났단다.
귀주대첩 민족기록화
10만의 거란군 중 살아서 압록강 건너 후퇴한 자는 겨우 수천에 지나지 않았단다
이 전투가 바로 그 유명한 귀주대첩(龜州大捷,1019년)이다.
설죽화도 귀주의 벌판에서 벌어진 그 전투에서 활약했단다. 그날도 앞장서서
용맹하게 싸웠는데 거란군이 설죽화를 둘러싸고 집중공격하여 맞서 싸우다가
힘이 다하여 화살을 맞고 결국 전사하고 말았단다.
강감찬 장군이 후에 설죽화가 남장 소녀임을 알고 놀라고, 설죽화의 시신에서 나온
앞서 거란과의 전쟁에서 양규 장군과 함께 싸우다 전사했던 아버지의 이관의 시를
읽으며 그녀의 죽음을 모두 크게 슬퍼했다고 해.
거란을 추격하는 고려군
설죽화와 그의 아버지 이관의 일화를 보면, 작은 고려가 중국 북방을 제패한 거란족이
세운 강력한 제국, 요와의 전쟁에서 살아남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백성 한사람 한사람이 이런 마음으로 단결해서 싸우는데, 승리는 당연한 것이
아니겠느냐. 전쟁도 결국은 사람들의 강한 의지에 달린 것이라 하겠다.
아들아 우리 역사 속 여전사의 전통은 이후로도 계속해서 이어졌단다.
구한말 강무경 의병장의 부인으로 몸소 화승총을 들고 싸운 여성 의병 양방매 여사와
최초의 여성 의병 지도자였던 윤희순 의병장도
약산 김원봉 장군의 부인으로 조선의용대의 여전사로 활약했던 박차정 의사도
그 전통을 잇는 훌륭한 분들이었다.
아들아 나라가 위태로울 때, 나라를 위해 싸우는데는 남녀노소가 없을 것이다.
우리의 5천년 역사 속 9백여회의 외침에 맞서 싸우며, 우리의 역사가 계속 이어지도록
희생했던 그 선조들 속에는 이런 훌륭한 여전사들도 있었음을 기억하거라.
작성자:방랑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