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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통 -
우리가 몸을 통해 물질적인 세계와 교통하듯이 영을 통해 우리는 영적인 세계와 교통한다. 이 영적인 세계와의 교통은 생각이나 감정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영을 사용하고 영의 직감을 사용하는 것이다. 우리가 직감의 기능을 이해한 후에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이 교통하는 성질을 자연히 이해하게 된다. 사람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과 교통하려면 반드시 하나님과 동일한 성질을 가진 어떤 것이 있어야만 한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서로 다른 성질은 결코 서로 교통할 수 없다. 그러므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 - 영이 살아나지 않은 자 - 이나 거듭났지만 아직 영으로 경배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과 긴밀한 교통을 가질 수 없다. 비록 그가 많은 좋은 감정과 강렬한 사랑이 있다 하더라도 영적인 실재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과 개인적인 교통을 가질 수 없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교통은 우리 온 존재의 가장 깊은 곳, 즉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보다 더 깊은 곳의 직감으로 이루어진다. 고린도전서 2장 9절 부터 3장 2절까지의 단락의 말씀은 사람이 영의 직감으로 하나님과 교통하고 하나님의 일을 이해하는 것에 대해 아주 분명히 언급한다. 이제 이것을 자세히 살펴보겠다.
- 사람의 마음 -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고전 2:9). 여기서 말한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이다. 그분의 모든 일은 사람의 육신(눈과 귀)으로 보지 못하고 듣지도 못한 것이고, 또한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한 것이다. 이 ‘사람의 마음’은 바로 사람의 이해와 생각과 지력을 말한다. 사람의 사상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는다. 하나님의 일은 사람의 사상보다 뛰어나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하나님과 교통하려는 사람은 결코 사상만으로 하나님에게 도달할 수 없다.
- 성령 -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0). 성령께서 모든 것을 통달하시는 것이지 결코 영이 생각을 사용하여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을 아신다. 사람이 알지 못한 것을 그분은 아신다. 그분은 직감을 통해 모든 것을 통달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이 생각지 못한 것을 우리에게 나타내신다. 이것은 일종의 ‘나타남’이지 결코 생각을 사용한 후 얻는 이해가 아니다. 이것이 우리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해 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제 다시 사상으로 생각해 낼 필요가 없다. 지금 이것은 ‘나타남'이요 계시이다. 우리에게 알리고자 하는 것을 하나님은 우리의 사상의 도움이나 우리의 귀와 눈과 생각을 사용하여 나타내시지 않으신다.
- 사람의 영 -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11-12). 오직 사람의 영만이 사람의 사정을 (이해하거나 깨닫는 것이 아니라) 안다. 또 오직 성령만이 하나님의 일을 안다. 사람의 영과 성령은 추론이나 조사를 통해 사정을 아는 것이 아니라 모두 직접적으로 사정을 안다. 그러므로 이 둘은 모두(생각이 아닌) 직감을 통해 아는 것이다.
오직 성령만이 하나님의 일을 알기 때문에 우리가 성령을 받아야만 하나님의 일을 알 수 있다. 세상의 영은 하나님과 교통이 끊어진 영으로서 영은 영이나 이미 죽은 것이기 때문에, 세상의 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교통케 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성령은 하나님의 일을 알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영 안에서 성령께서 직감을 통해 알게 하신 것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도 하나님의 일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이것을 알 수 있는가? 11절은 우리가 우리의 영을 통해 아는 것임을 알려 준다. 그러므로 이것은 확실하다. 성령은 직감 안에서 알게 된 모든 것을 우리의 영에 계시해 주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영의 직감을 통해 성령께서 나타내신 것들을 아는 것이다. 또한 성령께서 하나님께 속한 일을 우리에게 나타내실 때에도 우리의 영 안에 나타내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보실 때 사람의 영 외에 사람 속에 사람의 사정을 알 만한 다른 기관이 없기 때문에, 성령은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우리의 생각 안에서 깨닫게 하지 않으신다. 생각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속한 것들을 아는 기관이 아니다. 생각은 무엇을 상상하고 많은 것들을 상상해 낼 수 있겠지만 생각 자체가 그것들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이는 사람의 영 외에 사람의 사정을 알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을 얼마나 중요시하는지를 볼 수 있다.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영은 죽은 것이므로 하나님은 하나님께 속한 사정을 그에게 나타내 보여 줄 길이 없다. 비상한 머리를 갖고 있는 사정에 대하여는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하나님과 사람의 교통,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경배가 이루어지는 곳은 오직 거듭난 영 안이다. 이 거듭난 영이 없다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간격이 있게 되어, 그분은 사람에게 올 수 없고 사람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게 된다. 이것은 사람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 외에 사람의 직감이 여전히 죽어 있어서 성령의 뜻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성령의 계시를 깨달을 길이 없는 것이다. 영이 먼저 살아나는 것이 하나님과 사람과의 교통의 첫걸음이다.
사람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어서 자기 일을 결정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죄인이 거듭나서 믿는 이가 된 후에도 여전히 많은 시험을 받게 된다. 미련함 혹은 선입관 때문에 많은 믿는 이들은 자기의 영과 직감에게 합당한 지위를 내어 주지 않는다. 하나님은 이 영을 그분과 사람이 교통하는 유일한 장소로 보시고, 사람이 그분을 경배하고 왕래하는 유일한 장소로 보신다. 그러나 믿는 이는 자기의 생각이나 감정을 좇아 행하므로 많은 때에 직감의 소리를 상관하지 않는다. 그가 일하는 원칙은 그가 일리 있고 선하고 좋아하며 흥미 있게 보이는 것들을 좇아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고자 하는 갈망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대개가 심중의 돌발적인 사상 혹은 비교적 일리 있는 사상을 하나님의 뜻으로 여겨서 행할 뿐이며, 자기가 좇아 행해야 할 것이 자신의 사상이 아닌 직감에 의해 표현된 영의 뜻인 줄을 모른다. 또 때로 직감의 소리를 듣기 원할지라도 자기의 감정을 잠잠한 위치에 두지 못하므로, 마음이 오르락내리락 하게 하여 직감의 소리를 혼란시킨다. 그러므로 영을 좇아 행하는 것은 믿는 이의 생활에서 우발적인 일이 되고 일상생활의 항구적인 체험이 되지 못한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초보적인 이해가 이렇기 때문에 더 심오한 계시를 얻지 못함은 당연한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이 시대 끝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영적 전쟁의 실재와 성령의 심오한 진리를 영 안에 참되게 아는 것도 자연히 불가능한 일이 된다. 또한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에서도 자기 생각에 좋은 것이나 일시적인 감정의 작용을 좇아 행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직감 안에서 주와 교통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필수적인 것이다.
믿는 이는 오직 성령만이 하나님의 사정을 알고 또 하나님의 사정을 아는 법이 사상이 아난 직감을 통한 것이기 때문에, 아직 성령만이 이 지식을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 지식을 받는 사람은 이 지식을 받도록 정한 그분의 방법대로 받아야만 한다. 이 뜻은 우리도 성령께서 직감을 통해 알게 하신 것을 직감에 의해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두 직감의 연합이 바로 사람이 하나님의 사정을 아는 비결이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 2:13). 이 말씀은 우리가 영 안의 직감으로 알게 된 하나님의 사정을 사람에게 들려주는 길에 대해 말한다. 하나님의 사정은 이미 영 안에 알려졌으므로 이제 책임은 이 사정을 전파하는 것이다. 사도는 영 안에 알게 된 것들을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전파 하지 아니하였다’고 말했다. 사람의 지혜는 사람의 생각에 속한 것이고 인간의 두뇌의 소산물이다. 사도는 자기가 생각 안에서 생각해 낸 말로 영 안에서 깨달은 하나님의 사정을 전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사도 바울의 지혜는 본래 남보다 뛰어났다. 그는 많은 신기한 말을 생각해 낼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어떻게 전파해야 하고 어떤 비유를 써야 하며, 어떻게 단락을 구분할 수 있는가와 타고난 구변을 이용하여 청중이 그의 뜻을 완전히 이해하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의 지혜로부터 온 지혜의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정을 아는 데 있어서 사람의 생각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심지어 영적인 지헤를 말할 때에도 사람의 생각은 가장 주된 용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영이 가르치는 말로” 전파했다. 이것이 바로 직감 안에서 얻은 성령의 가르침이다. 믿는 이의 생활에서 영 안에 있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없다. 영적인 지식을 말할 때에도 영적인 말을 사용해야 한다. 직감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계시해 준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 줄 뿐 아니라. 또한 성령께서 나타낸 것들을 말하도록 우리에게 가르쳐준 말을 알게 한다. 많은 때에 믿는 이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하나님께 속한 일을 안 후에, 자기가 그것에 대해 매우 분명하게 알고 있는 것처럼 그것을 사람에게 전달한다. 그러나 어떻게 표현하든지 이렇게 저렇게 말해도 뜻을 전달하지 못한다고 느낀다. 이것은 영 안의 말씀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믿는 이가 주님 앞에서 기다릴 때에 그의 심중에 무언가가 떠오르는 경우가 있다. 그것이 때로는 몇 단어일 수도 있다. 그 몇 단어를 통해 그는 집회에서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것을 완전히 말해 내게 된다. 이때 그는 하나님께서 진실로 자기를 증인으로 삼은 것을 보게 된다.
이러한 체험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변‘의 중요성을 말해 준다. 구변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우리의 타고난 구변이고, 또 하나는 우리의 영 안에서 성령께서 주신 구변이다. 사도행전 2장 4절의 ’구변‘은 영적인 일에서 불가결한 것이다. 타고난 구변이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사정을 말해 내지는 못한다. 자기 스스로 좋다고 말하는 것도 성령의 뜻을 전달하지 못한다. 오직 영적인 - 영 안에서 얻은 - 말씀만이 영적인 지식을 말해 낼 수 있다. 때로 우리에게 영 안에서 주님께서 주신 메시지가 있다. 그 메시지는 우리 속을 누르는 부담으로 느낄 정도로 우리를 압박하고 불사르며 어떤 것으로도 그것을 제거할 수 없다. 이때 부담을 내려 놓고 영 안의 메시지를 전파하기 위하여 우리는 성령께서 주신 ’구변‘을 기다린다. 만일 우리가 직감 안에서 성령께서 주신 말씀을 얻지 못하고 그것을 사람의 지혜의 말로 대치한다면, 우리는 모든 영적인 유용성을 잃게 됨을 볼 것이다. 그러한 말들은 사람들에게 당신이 전한 사상이 참으로 좋은 것이라는 느낌을 줄 뿐이다. 때때로 우리에게 많은 영적인 체험이 있는데 그것을 표현할 줄 모른다. 하지만 다른 믿는 이가 말한 짧은 몇 마디가 종종 우리의 구름을 거둬가고 주님께서 아직 영 안에서 분명한 말씀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지 않았던 과거의 체험이 어떤 의미였는지 알게 한다. 어떤 이는 가장 간단한 몇 마디로 우리의 과거 체험들을 우리에게 열어 보여 줄 수 있다.
‘영적인 일‘은 반드시 ’영적인 말‘로 해석해야 한다. 우리는 영적인 방법으로 영적인 목표에 도달해야 한다. 이것이 오늘날 주님께서 특별히 힘써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바이다. 목적이 영적인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방법과 수단도 영적인 것이어야 한다. 육에 속한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영적인 것을 이룰 수 없다. 우리가 우리의 생각과 감정으로 영적인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는 것은 쓴물의 근원에서 단물을 내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든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는 것이든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것이든, 하나님과 교통하는 가운데 행해져야만 유용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사상과 천부적인 재능과 자기의 사용한다면 우리의 행한 모든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다 죽은 것이다.
13절의 뒷부분은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다.
- 혼에 속함과 영에 속함 -
"혼(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알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
혼에 속한 사람은 거듭나지 않고 새 영이 없는 사람이다. 그들에게는 직감이 없고 모든 것이 혼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일 뿐이다. 그는 이유를 생각해 내고 이성에 따라 판단하며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 낼 수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들은 거듭난 영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못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직감 안에서 그분의 일을 사람에게 나타내 알게 하신다. 혼에 속한 사람은 생각하고 관찰할 줄 알지만 이 직감의 본능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타내신 것을 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본래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을 본다. 비록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이 많으나 그중 어떤 것도 직감의 작용을 대치할 수 없다. 사람이 거듭날 때에 하나님께서 주신 사람의 영과 이 영의 직감은 본래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보다 뛰어나다.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사람의 영은 확실히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 자신과 그분께 속한 일을 사람에게 전달할 수 없으시다. 사람 속에는 하나님의 일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기관이 없다. 혼에 속한 사람에게 포함된 것 중에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도 없다. 사람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생각과 지혜와 이성도 사람의 정욕 등과 똑같이 부패하여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사상에 의해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한 일이다. 이미 거듭난 믿는 이라 할지라도 그의 거듭난 영으로 하나님과 교통하지 않고, 자기의 사상과 관찰로 하나님께 속한 일을 이해하려는 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다. 설령 거듭난 후일지라도 우리에게 속한 모든 것의 그 기능은 변하지 않는다. 사상은 여전히 사상이고 결단은 여전히 결단으로써 결코 하나님과 교통하는 기관으로 변할 수 없다.
혼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받지 못할 뿐더러 오히려 그것을 미련한 것으로 여긴다. 이것 또한 사람의 생각에 대해 말한다. 그의 생각에 의하면 직감으로 알게 된 일들은 모두 미련한 것들이다. 왜냐하면 직감으로 알게 된 것들은 이치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감정 밖의 것들이며 세상의 이성과 상반되며 심지어는 일반인의 상식에도 어긋나기 때문이다.
생각은 논리적이고 분석할 만한 것과 자신의 천연적인 심리와 부합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모든 행위는 사람의 법칙에 따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다. 이 장(章)에서 말한 미련함은 주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가리켜 말한다. 이 십자가의 도는 대신 죽으신 구주를 말해 줄 뿐 아니라 또한 함께 죽은 믿는 이들을 말해 준다. 무릇 믿는 이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은 마땅히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해야 한다. 만일 이것이 단순히 의식에 불과하다면 생각은 그것을 받아들이지만, 그것을 실행에 옮기려 한다면 생각은 그것을 거절한다.
혼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받는 것’이 먼저이고 ‘아는 것’은 나중의 일이다. 받을 수 있는가 없는가는 그 사람에게 영이 있는가 없는가를 시험한다. 있는 가의 여부는 그 사람에게 직감이 있는가의 여부를 나타낸다. 먼저 영이 있어야 그 다음에 하나님의 일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영이 있고 하나님의 일을 받을 수 있다면 직감은 하나님의 일을 아는 기회를 갖게 된다. 사람의 영 외에 사람의 일을 아는 것이 없다. 혼에 속한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모르는 이유는 바로 그에게 (새)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일을 알게 하는 직감도 없는 것이다.
그 다음에 사도는 혼에 속한 사람이 ‘받을 수 없는’ 두 가지 이유를 말한다.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이 부분에서 여러분은 계속적으로 사람의 영이 하나님의 영과 교통하는 기관임을 주의한 것을 보았는가” 이 단락의 중심은 다름이 아닌 바로 사람의 영으로써 하나님의 영과 더불어 교통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나타내며 설명하는 것이다. 이것 외에는 하나님의 일의 근본을 알 수 있는 다른 길이 없다.
모든 것이 각각의 용도가 있는데 영의 용도는 바로 하나님의 일을 통달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과 의지를 말살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도 나름대로의 용도가 있다. 단지 이것들은 이차적인 위치에 있고 다스리는 위치가 아닌 통제받는 위치에 두어야 한다. 생각은 마땅히 영의 통제 하에 있어야 하고 직감이 깨달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해야 한다. 생각은 사람의 온 존재가 따르도록 스스로 사상을 꾸며내서는 안 된다. 감정도 마땅히 영의 인도하심을 순종해야 한다. 감정의 모든 사상과 증오는 영의 원함을 따라야 하며 자기 뜻대로 행해서는 안 된다. 의지 또한 직감 안에서 하나님께서 나타내신 뜻을 청종해야 한다. 의지는 직감이 깨달은 하나님의 뜻을 돌보지 않고 다른 뜻을 가질 수 없다. 만일 사람이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이차적인 위치에 놓여 있다면, 믿는 이는 영적 노정에서 아주 신속히 전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정반대로 사람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주가 된다면 영의 위치는 소멸당할 것이다. 이로 인해 영적 생활과 영적 용도가 상실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영은 반드시 제 위치에 놓여 있어야 하고 믿는 이는 반드시 영 안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기다려야 한다. 영이 높이 들려지지 않은 사람은 결코 영으로만 통찰하는 일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바로 윗 구절은 신령한 일은 신령한 사람에게 전해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오직 영이 예리한 사람만이 영 안의 일을 할 수 있다.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전 1: 15).
영에 속한 사람은 영을 주로 삼는 사람으로서 그의 영의 직감은 매우 예리하다. 혼에 속한 생각과 감정과 의지는 영의 고요함을 방해하지 못한다. 그의 영은 그의 직무를 집행할 수 있다. 왜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가? 이는 직감은 오직 성령을 의지하여 그 지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왜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는가?” 이는 성령께서 어떻게 그의 직감을 감동케 하고 그의 직감이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믿는 이의 지식이 자기의 지혜에 의한 것이라면 지능이 높은 사람 외에는 모든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게 된다. 그렇다면 학문과 세상적인 지식과 교육은 불가결한 것이 된다. 그 결과 다른 사람도 그를 판단하게 된다. 그와 같은 사람 혹은 그보다 더 똑똑한 사람도 그의 사상을 좇아서 추종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적인 지식은 영의 직감을 근본으로 삼는다. 만일 사람이 영적이고 예리한 직감을 가졌다면 그의 지식은 아주 무한한 것이다. 비록 그의 생각이 아주 둔하다 하더라도 성령은 영적인 실재 안으로 그를 인도할 것이고 그의 영도 그의 생각을 비출 것이다. 성령의 이러한 계시는 실로 사람의 상상을 초월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 1:16). 이 말씀은 일종의 물음이다. 세상엔 주의 마음을 알아서 그를 가르칠 사람은 하나도 없다. 이는 모든 사람이 혼에 속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는 방법은 오직 직감을 통해서이다. 영을 모르는 사람 중에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이 있겠는가? 이 질문은 위 구절 마지막 문구를 증명한다. 왜 신령한 자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는가?” 주의 마음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물론 혼에 속한 사람을 가리켜 말한다. 영에 속한 사람은 예리한 직감을 가졌기 때문에 주의 마음을 안다. 그러나 혼에 속한 사람은 직감이 없기 때문에 주의 마음을 모른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과 교통하지 못한다. 혼에 속한 사람은 주의 마음을 모르기 때문에 온전히 주님의 마음을 순종하는 영에 속한 사람을 알 수 없다. 이것이 여기서 뜻하는 의미이다.
“그러나 우리가” - 이는 우리가 혼에 속한 사람들과 구분이 있다는 말이다. 이 ‘우리’라는 말은 구원받은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것이지만 그 안에는 많은 육에 속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 1:16). 어린 자이든 성숙한 자이든 거듭난 사람이라면 모두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고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있는 뜻을 안다. 이는 우리 모두가 부활한 직감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장래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예비하셨는지를 알 수 있다(9절). 혼에 속한 사람은 이것을 알 수 없지만 거듭난 우리는 알 수 있다. 차이는 바로 영이 있는가 없는가에 있다(유 19절).
- 영에 속함과 육에 속함 -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애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헌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고전 3:1-2). 이 몇 마디는 위의 문구와 긴밀히 연결된다. 또한 여기의 가르침은 위의 문구와 일관성이 있다. 모두가 사람의 영의 문제를 다루었다. 우리가 알듯이 성경의 장(章)과 단락은 편의를 위해 후세 사람이 나눈 것일 뿐 성령께서 그렇게 계시하신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 몇 마디는 앞 장의 말씀과 연결하여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이 두 구절의 의미를 말하기 전에 먼저 사도 바울의 영적 지각이 얼마나 분명한지를 보기로 하자. 그는 수신자가 어떤 부류 곧 그들이 영적인지 육적인지, 완전히 영의 통제 하에 있는지 육체의 다스림 하에 있는지를 알았다, 그는 자기 말이 다 영적 인 것애 대해 논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의 말을 듣는 사람이 받을 수 있는가의 여부에 상관 없이 임의로 그들에게 부어주지 않았다. 그는 영에 속한 사람에게 영적인 일을 알려 주었다. 그가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듣는 그들이 얼마나 받을 수 있는가에 있다. 그의 말에는 자기의 지식을 자랑 하고자 하는 뜻이 조금도 들어 있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가 어떻게 영 안에서 그가 마땅히 해야 할 말을 얻었는지를 본다. 그는 영적 지식만이 아닌 영적인 말도 있었기 때문에 수준이 다른 믿는 이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를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인 말이나 성령께서 가르치신 말들을 들어야 한다. 영적인 말들이 반드시 하나님의 성령의 깊은 것들을 충만히 담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영적인 말은 영 안에서 성령께서 계시해 주신 말씀이다. 그 말은 아주 높고 깊은 말이 아닌 전혀 특별한 것이 없는 아주 일반적인 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말들이 직감으로부터 알게 된 성령께서 가르치신 말이기에 그것은 영적인 말일 것이다. 그런 말은 영적인 효과를 낳는다.
위 문장에서 사도는 직감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교통하며 하나님의 일을 아는 유일한 기괸인 것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그는 또한 모든 거듭난 영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음을 말한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것들과 장래 어떻게 될 것인가를 이해한다는 뜻이다. 이제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모든 그리스도인을 두 부류 즉 영적인 직감의 감지 능력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우리에게 알려 준다.이 두 구절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다음의 의문을 풀어 준다. 즉 사람의 영이 사람의 사정을 알고 영에 속한 사람이 모든 것을 분별(통찰)헐 수 있다면, 왜 거듭난 영을 가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에게 영이 있음을 느끼지 못하고 이 영에 의해 하나님께 속한 깊은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는 의문이다.
이러한 의문에 답하기 위해 사도는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통찰)하나” 라고 말했다. 비록 그리스도인은 다 거듭난 영을 가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 영적인 것은 아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육에 속한 자이다. 비록 사람의 직감이 살아났다 할지라도 직감에게 지위를 양보하고 직감이 활동할 기회를 제공해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직감은 압박을 받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알리고자 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게 된다.
여기의 ‘신령한’ 믿는 이라는 뜻은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좇아 행동하지 않고 이것들을 십자가에 올려놓고 복종하는 위치에 서게 하며, 직감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완전한 자유를 부여하고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그 직감을 좇아 행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육에 속한’ 믿는 이는 그렇지 않다. 설령 이들도 거듭나고 그들의 직감이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어서 영에 속한 믿는 이가 될 기회가 있지만 그들은 육체에 매인다. 그들의 육체의 정욕은 여전히 강하고 힘이 있어서 그들을 범죄하도록 압제한다.
육체의 생각도 역시 많은 방탕한 사상과 이유와 계획을 가지고 있고, 그 감정도 많은 육신의 취미와 애호와 취향을 가지고 있으며, 그 의지도 많은 세상적인 판단과 결정과 의견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볼 때 하루종일 육체를 좇아 행하는 데 바쁜 사람이 어찌 직감의 음성을 들을 여유가 있겠는가? 거기다가 영의 음성은 아주 미세하므로 만일 믿는 이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전심으로 귀 기울인다고 해도 듣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물며 육체의 각 부분은 온종일 활발히 움직이는데 직감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겠는가? 믿는 이가 육체의 지배를 받고 육체의 여러가지 영향을 너무 많이 받기 때문에 그들의 영은 점점 마비되어 단단한 음식을 받을 수 없게 된다.
성경은 갓 거듭난 믿는 이를 갓난이이로 비유하였다. 이는 영 안에서 그가 얻은 생명이 육신의 갓난아이같아 미약하기 때문이다. 믿는 이가 한동안 갓난아이로 남아 있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이는 성인도 갓난아이 상태로 남아 있다면 즉 그의 영이 거듭날 때나 몇 년이 지난 후에도 똑같다면 합당치 않은 것이다. 사람의 영은 성장하는 법이다. 이 영 안의 직감도 더 강건하게 성장할 수 있다.
갓 태어난 갓난아이는 아직 ‘자각(自覺)’이라는 것이 없고 아직 그의 신경은 나약하고 모든 면에서 어리다. 갓 거듭난 믿는 이도 이와 똑같다. 그의 영적 생명은 마치 작은 불꽃과 같다. 그의 직감도 아주 나약해서 어떤 작용이 없다. 그러나 갓난아이는 매일 자라야 한다. 훈련과 연습과 성장을 통해 그의 지식이 날아 갈수록 더해지고, 완전한 ‘자기의식’에 이르며 그의 지각(知覺)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믿는 이도 이와 같다. 거듭난 후에 그는 마땅히 자신의 직감을 훈련하고 사용해야 한다. 한 번 더 직감을 사용할 때 한 번의 체험과 지식과 성장을 갖게 된다.
사람의 지각이 태어날 때부터 예리한 것이 아니듯 믿는 이의 직감 역시 거듭날 때 즉시 예리해 지는 것이 아니다.
육에 속한 믿는 이는 오랫동안 자라지 않고 어린아이로 남아 있는 자이다. 이는 그가 이러한 기간에 외적으로 죄를 극복하는 노력이 없다는 말이 아니고, 성경에 대한 지식이 증가하지 않고 주를 위해 힘써 일하지 않았거나 성령의 은사를 얻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고린도의 믿는 이들은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모든 일 곧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모든 은사에”(고전 1:5,7) 부족함이 없었다. 사람의 시야로 볼 때 이것들은 자란 것이 아닌가? 그들은 구변이 있고 지식이 늘었고 은사가 많았다. 그러나 사도는 그들이 갓난아이요, 육에 속한 자라고 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구변과 지식과 은사의 중가가 성장이라고 할 수 없단 말인가? 여기서 우리는 가장 중요한 사실 곧 고린도의 믿는 이들이 다른 모든 면에서는 자랐지만, 그들의 영이 자라지 않았고 영 안의 직감도 더 강건케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본다.
설교의 구변이 좋아지고 성경 지식이 증가하며 성령의 은사라 증가하는 것이 곧 영적 생명의 증가가 아니다. 만일 믿는 이의 영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데 있어서 더 강건케 되지 않고 더 예리해지지 않았다면, 하나님 눈에 보시기에 우리는 조금도 성장하지 않은 것이다. 오늘날 성장하는 방향이 잘못된 믿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구원받은 후에 구해야 할 것은 더 높은 성경 지식과 더 좋은 설교의 구변 혹은 성령의 은사라고 생각하고, 성장과 하나님과의 교통을 잊어버린 믿는 이가 얼마나 많은지! 구변과 지식과 은사는 외적인 것들에 불과하고 직감은 내적인 것이다. 오늘날 가장 안타까운 것은 자기의 영을 갓난아이 상태로 방치해 두고, 그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 속에 구변과 지식과 은사로 충만한 상태로 내버려두는 것이다. 비록 이것들이 귀한 것들이지만 이것들은 영의 지위와 비교할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새로 지으신 것이 바로 이 영(영적 생명이라고도 함)이고 성장해야 할 것도 이 영이다. 만일 우리가 잘못 생각하여 하나님과 그분께 속한 일을 더 알고 그분과 교통하기 위해 이 영적 생명과 직감의 성장을 추구하지 않고 혼의 생명이 더 풍성해지기를 추구한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는 조금도 진보하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 눈에서 볼 때 우리의 영은 만유를 포함한다. 그분이 돌아보시는 것은 바로 이 영의 성장이다. 그분이 보시기에 생각과 감정과 의지에 아무리 많은 구변과 지식과 은사가 증가한다 하더라도 영의 성장이 없다면 영적 세계에서 이것들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들이다.
날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더 큰 능력과 더 많은 지식과 더 큰 은사일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이것들을 얻는 것을 우리 영적인 생명이 성장하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영적 생명은 한 치의 성장도 없이 변함없을 수가 있다. 사도는 고린도인들에게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고 말했다. 무엇을 감당치 못한다는 것인가? 그들이 직감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고, 직감으로 하나님을 깊이 알 수 없으며,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수 없다는 말이다.
고린도에 믿는 이들은 시종 이렇게 하지 못했다.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더니"는 그들이 갓 주님을 믿을 때에 감당치 못했음을 말하고 지금도 못하리라는 주님을 믿은지 몇 해가 지난 지금에 와서도 구변과 지식과 은사가 많아졌지만 감당치 못한다는 말이다. '지금도' 라는 문구로 보아 사도의 뜻은 그들이 구변과 지식과 의사가 충만하지만 그들의 영적 생명은 여전히 구변과 지식이 없었던 과거와 조금도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참된 성장은 영과 직감의 성장에 기준을 둔다. 기타 모든 것은 모두 육에 속한 것들이다. 이 몇 마디는 우리 마음 판에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믿는 이들이 모든 면에서는 자라고 있으나 하나님과 교통하기 위한 그들의 영은 여전히 자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 중에는 주님을 믿은 지 수년이 되었는데도 “내게 영이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사상은 얼마나 다른지! 우리는 항상 고린도인같이 생각이 지혜로 소위 많은 ‘영적인 지식’ 추구한다. 또 우리는 그런 지식을 많이 얻었다. 그러나 생각의 성장은 직감의 성장을 대치할 수 없다.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는 여전히 변한 것이 없다. 오늘 이후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성장은 우리의 지식과 은사와 구변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그분은 오직 우리의 영과 영적 생명과 영의 직감이 성장하기를 원하신다. 그분이 바라는 것은 우리가 거듭날 때에 영접한 새 생명이 자라는 것이다. 옛 창조를 완전히 거절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분은 우리가 구변과 지식과 은사가 많아도 여전히 육에 속하고 어린아이이며 영적 생명이 조금도 진보하지 않는 이라고 하실 것이다.
믿는 이가 너무 육체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그는 단단한 음식을 먹는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참되게 심오한 진리를 알고 예민한 직감을 가지며 하나님과 끊임없이 교통하는 자만이 영에 속한 직감을 가지며 하나님과 끊임없이 교통하는 자만이 영에 속한 사람이 될 수 있다. 만일 직감이 여전히 나약하다면 젖먹는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사람들은 어머니가 음식을 소화하여 생긴 것이 젖이라고 말한다. 육에 속한 믿는 이는 직감으로 하나님과 분명한 교통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 하나님의 일을 알려줄 수 있는, 그들보다 더 노련한 믿는 이들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노련한 믿는 이들이 직감을 사용하여 하나님과 교통한 것을 영적인 젖으로 변화시켜 육에 속한 믿는 이들에게 주는 것이다. 어린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초기 단계에서 주님은 이러한 일을 허락하신다. 그러나 주님은 그분의 자녀가 아무 감정이 없이 그분과 직접 교통하지 못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젖을 먹는댜는 말은 다름이 아니라, 직접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고 다른 사람의 전달을 통해야 한다는 것이다. 장성한 사람이란 바로 직감의 훈련이 연단되어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다.
만일 우리가 직감으로 하나님과 왕래할 줄 모른 채 하나님의 사정을 안다면, 설령 많은 이상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고린도의 믿는 이는 많은 구변과 지식과 은사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의 영은 살아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회는 육에 속한 교회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직 생각 안에 저장된 것만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오늘날의 믿는 이들이 고린도의 믿는 이들과 같이 많은 잘못을 범하고 있음을 본다. 그들은 침착한 두뇌로 신학을 연구하고 성경의 감춰진 의미를 알아내서 가장 좋은 해석을 얻으려고 한다. 주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나, 그들은 영과 생명으로 말씀을 영접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자기들의 ‘지식의 욕구’를 채우고 자기들의 얻은 것들을 책으로 쓰거나 말로써 남들에게 들려주기를 원한다. 비록 이러한 뜻과 이론과 요지는 아주 좋은 것이고 가장 ‘영적인 것’ 같으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죽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들은 한 사람의 생각에서 다른 사람의 생각으로 전해지는 것일 뿐 영 안에 무엇을 얻게 하지 못한다. 그의 말을 듣고 그의 책을 읽는 사람도 그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말하겠지만 그 도움은 대체 어떤 도움인가? 사람의 생각에 또 한 종류의 사상을 더해 줄 뿐이다. 이외에 다른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 이러한 지식은 영적인 효과가 없다. 오직 영에서 나온 것만이 사람의 영 안에 들어갈 수 있고, 생각에서 나온 것은 사람의 생각에 들어갈 뿐이다.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가서 오직 성령으로 나온 것만이 우리의 영 안에 들어올 수 있고, 셩령께서 우리의 영을 통해 나온 것만이 다른 사람의 영 안에 들어갈 수 있다.
- 지혜와 계시의 영 -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할 때에 지혜와 계시는 필수적인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엡 1:17). 비록 우리가 거듭날 때에 새 영을 얻었지만 이 영의 기능은 아직 많은 부분에서 나타나지 않은 채 영 안에 잠재되어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사도는 이미 거듭난 에베소의 믿는 이들이 지혜와 계시의 영을 얻어 직감으로 하나님을 참되게 알 수 있도록 간구하고 있다. 이 지혜와 계시의 영이 믿는 이의 영 안에 잠재되어 있어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빛 비추시는 것이든, 믿는 이의 영 안에 성령께서 더해지심으로 새로이 지혜와 계시를 얻는 것이든, 이 지혜와 계시의 영은 믿는 이의 하나님과의 교통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다. 이 영을 얻는 것은 믿는 이의 간구에 달려 있다.
비록 우리의 직감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지만 직감은 지혜와 계시가 필요하다,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과 자신에게서 나온 것을 구분하기 위해서도 우리에게는 지혜가 필요하다. 사람을 다루기 위해서도 우리에게는 지혜가 필요하다. 수천 가지의 일에서 우리가 오류에 빠지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하다. 우리는 얼마나 어리석은 자이며, 범사에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지!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혜를 주신다. 지혜를 우리의 두뇌에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의 영을 우리에게 주사 영 안에서 지혜를 알게 하시고 직감을 통해 지혜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우리의 생각이 여전히 우둔할지라도 직감 안에는 큰 지혜가 있을 수 있다. 우리의 지혜가 무용하게 될 때 우리 안에서 지혜를 알게 하는 어떤 느낌이 점점 생기는 것을 경험한다. 지혜와 계시는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이 모든 계시는 다 지혜에 속한 계시인 것이다. 만일 우리가 천연적인 것에 의해 산다면 하나님깨 속한 어떤 것도 생각해 낼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육신 안에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인지를 막론하고 다 흑암이다. 하나님과 그분께 속한 모든 것은 우리의 생각으로 얻거나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이 살아 있을 때에도 만일 우리가 성령의 계시를 갖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전히 흑암 가운데 살 수도 있다. 이것들도 다 흑암에 있는 것들이다. 우리 영이 살아 있다는 것은 영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지, 결코 영 자체가 독립적으로 어떤 것을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교통에서 하나님은 늘 우리에게 계시를 주신다. 우리도 항상 하나님께 계시를 구해야 한다. 그러므로 ‘지혜와 계시의 영’이라는 단어는 하나님께서 어디에서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를 주시는지를 알게 한다. 돌발적인 사상은 계시의 영이 아니다. 계시의 영이란 곧 우리의 영 안에서 하나님께서 운행하사 우리가 직감으로 그분의 뜻을 알게 하는 그것이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모든 교통은 다른 곳이 아닌 우리의 영 안에서 이루어진다.
지혜와 계시의 영을 얻는 목적은 우리가 ‘참으로 그를 알게 하는 것이다.‘ 오직 영 안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얻어야만 참으로 그를 알 수 있다. 다른 말들은 모두 피상적이고 상상에 속하며 얕은 것이기 때문에 다 거짓된 것이다. 우리는 자주 하나님의 거룩과 공의와 자비와 인애와 그분의 모든 덕성에 대해 말한다. 사람의 사상으로도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가를 생각해 내고 알 수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은 단지 안경을 끼고 물체를 보는 것 만이 아니라 돌벽을 끼고 바라보는 것이다.
믿는 이가 하나님의 계시를 얻어서 그분의 거룩하심을 알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와 천연적인 사람이 가까이할 수 없는 빛 가운데 거하시는 줄을 알게 된다. 이때 비로소 자기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자신이 조금도 깨끗함이 없이 더러운 자임을 알게 된다. 우리가 계시를 얻은 후에 우리 마음속에 생각하는 하나님의 성결이, 계시를 얻지 못한 사람이 얻은 하나님의 성결과 어떻게 다른지를 비교해 보라. 물론 말은 서로 같을 수 있을지 모르나, 아마도 말을 하고 있는 동안 우리가 하는 말이 다른 사람보다 몇 배나 강할 것이다. 우리의 온 존재를 다 사용하여 말하는 것 같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계시의 영이다. 오직 영 안에서 얻은 계시만이 참되게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많은 성경의 가르침도 이와 같다. 많은 때에 우리는 생각 안에서 어떤 교리를 이해하고 또 그것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한 동안 지난 후에야 하나님께서 그 교리를 그의 영 안에 계시해 준다. 그 후에 다시 그 교리를 전할 때에 우리는 달라질 것이다. 오직 계시로 아는 것만이 참된 앎이고 다른 것은 생각의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얻은 하나님에 관한 많은 것이 계시로 얻은 것이 아닌 추구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들은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주지 못한다. 오직 영 안의 계시만이 영적인 가치가 있다.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교통은 영 안에서 그분의 계시를 얻게 한다. 하나님의 계시가 많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얼마나 자주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를 기다리고 구하는가? 왜 계시를 쫓아 행하지 않고 종일 수고만 하는가? 사실상 우리가 하나님께 기회를 드린다면 계시는 우리의 것이 된다. 사도의 생활은 바로 이것을 증명해준다.
- 영적인 이해력 -
지혜는 혼에 속한 지혜와 영에 속한 지혜가 있다. 혼에 속한 지혜는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지만 영에 속한 지혜는 영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육에 속한 사람의 이해력이 안 좋은 것은 곧 그의 지혜가 부족한 것이다. 비록 이 부족함을 교육으로 보완할 수 있지만 결코 사람의 타고난 본성이 바뀔 수는 없다. 그러나 영적인 지혜는 이와 다르다. 이는 믿음으로 구하여 얻는 것이다(약 1:5). 하나님의 구속 방법에서 그분이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신다”(행:34)는 것을 기억해 두어야 한다.
그분은 사람이 지혜롭고 우둔하든 모든 죄인을 동등한 위치에 두셨다. 무엇에 관한 것이든 그들은 동일한 위치를 가지고 있다. 지혜로운 자의 온 존재가 타락했듯이 어리석은 자도 타락한 것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지혜로운 자의 생각과 어리석은자의 생각은 똑같이 무용하다.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는 동일하게 성령의 거듭나게 하심을 얻을 수 있다. 거듭난 후일지라도 지혜로운 자라고 해서 어리석은 자보다 더 쉽게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아주 어리석은 사람을 찾아서 그로 하나님을 알게 알게 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 중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를 찾아서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도 똑같이 어려운 것이다 . 이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다. 비록 그들의 생각이 서로 다를지라도 그들의 영이 죽은 것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그러므로 똑같이 어리석은 사람인 것이다. 사람의 타고난 지혜는 하나님과 그분의 진리를 더 쉽게 이해하지 못하게 한다. 지혜로운 자가 어리석은 자보다 더 쉽게 알아 듣고 이해하는 것은 사실이나, 이것은 생각의 한계일 뿐 직감으로 ‘모르는 것’에 있어서는 똑같은 것이다. 그들은 영의 부활이 필요하다.
영이 살아난 후에도 우리는 결코 지혜로운 자가 더 빨리 이해하므로 그의 진보가 어리석은 자보다 더 신속하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의 충성과 순종이 같다면 그들의 생각의 이해에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그들의 영 안의 직감과 지식은 여전히 똑같은 것이다. 사람의 옛 창조는 영영 새 창조의 근원이 될 수 없다. 진보하는 속도는 얼마나 충성을 다하고 순종하는가에 달려 있다. 천부적인 재간은 영적 노정에서 사람을 우수하게 만들지 못한다.
육신적으로는 사람의 재간이 남보다 뛰어날 때 우선적인 권리를 획득하게 된다. 그러나 영적 체험에서는 모든 사람이 동일한 장소에서 시작하고 동일한 과정을 거쳐야 하며 동일한 결과를 낳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듭난 믿는 이들 중에 뛰어나게 남보다 특별히 총명한 자도 영적인 이해가 있어야만 하나님과 정상적인 왕래를 가질 수 있다. 어떤 것으로도 이것을 대치할 수 없다.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가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골 1:9-10). 이것은 골로새의 믿는 이들을 위한 사도의 기도이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는 영적인 이해력이 있고 그다음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임을 본다. 하나님의 뜻을 안 후에는, (1)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2)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3)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자랄 수 있다.
사람의 이해력이 아무리 월등해도 하나님의 뜻을 알기에는 부족하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과 교통하기 위해서는 영적인 이해력이 필요하다. 영 안의 이해력이 영적 세계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한다. 육신적인 이해력도 어떤 진리를 이해할 수 있겠지만 이 진리들은 사람의 생각에 머문 것일 뿐 생명을 흘려 보내지 못한다. 영적인 이해력은 영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그 이해한 것을 생명으로 화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말한 ‘아는 것’은 하나님과 연관이 있다. 참된 지식 치고 영에서 비롯되지 않은 것이 없댜. 계시의 영과 영적인 이해력 이 두 가지는 서로 상호 보완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고 또한 우리에게 영적인 이해력을 통해서만 그 계시의 의미를 알 수 있다. 계시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얻은 것이고 이해력(깨달음)은 하나님에게서 얻은 계시를 이해하는 것이다. 영적인 이해력은 영 안에서의 모든 움직임이 무슨 뜻인지 알려 주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한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교통은 바로 영에 의해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것이고, 영의 직감으로써는 그 계시가 있음을 느낄 수 있고 영적인 이해력으로는 그 계시의 의미를 아는 것이다. 우리의 이해력이 무엇을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이 이해력에 빛 비출 때에 하나님의 감동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알게 된다.
이 두 구절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열매를 맺으려면 영 안에서 그분의 뜻을 알아야 함을 본다. 영 안에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고 우리로 열매를 맺게 하는 근거이다. 가장 공허한 것은 믿는 이가 한 면으로 혼을 좇아 행하면서 다른 한 면으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다름이 아닌 그분 자신의 뜻이다. 다른 어떤 것도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바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법이 더 많은 사상과 상고와 감정에 따른 판단이 아니라 영적인 이해력임을 알려 준다. 오직 사람의 영만이 영 안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탐색할 수 있다. 이는 오직 영의 직감만이 하나님의 일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직감의 이해력을 통해 믿는 이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
믿는 이가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될 때에 그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게 된다.” 이는 믿는 이가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이 점점 자란다는 뜻이다. 이것도 역시 영에 대해 말한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범사에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면 그 결과는 하나님을 더 아는 것이다. 이러기 위해서는 우리 영의 직감은 무한한 성장이 필요하다. 직감은 성장하는 것이다. 직감의 성장은 믿는 이의 영적 생명 전체의 성장을 말해 준다. 매번 하나님과의 참된 교통은 다 열매가 있는 것이다. 이는 곧 항상 우리로 하여금 다음에 하나님과 교통하는 법을 더 알게 하는 것이다. 믿는 이가 거듭나서 직감으로 하나님과 교통하고 있다면, 마땅히 완전 하기를 추구하고 하나님을 더 알도록 모든 기회를 사용하여 자기의 영을 훈련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분을 참으로 아는 것이다. 즉 그분은 우리가 온 존재의 가장 깊은 속에서 그분을 알기를 원하신다. 많은 경우 우리는 그분의 뜻을 참되게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간과 환경이 변한 후에는 어떤 것을 잘못 인식했던 것으로 증명된다. 참되게 그분을 알고 그분의 뜻을 아는 이것이 우리 모든 사람의 필요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인 이해에 있어서 충만히 그분을 알도록 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