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29. 엘로라 석굴 ②
육감적 보살상…뜨거운 법열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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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로라 석굴 제12굴 3층에 있는 과거7불> |
2002년 3월9일 어제에 이어 다시 엘로라 석굴을 찾았다. 한 번만 보고 가기엔 왠지 안타깝고 서운했다. 3월8일 낮에 본 엘로라 석굴을 밤새 떠올렸다. 결혼을 앞둔 신랑·신부가 서로 상대방만 생각하듯 엘로라 석굴을 떠올리며 그렇게 하루 밤을 보냈다. 1굴에서 본 보살상, 2굴에 봉안된 불상, 대표적 차이탸굴인 10굴에 안치된 거대한 불상 등등. 잠을 뒤척이다 9일 아침 일찍 아우랑가바드 메도우 리조트호텔을 출발해 엘로라 석굴로 갔다. 엘로라 석굴이 사라지기라도 할까봐 마음이 급했다.
아침이라 공기는 뜨겁지 않고 산뜻했다. 도로엔 사람들도 붐비지 않았다. 어제 온 갈림길이 - 석굴로 곧바로 가는 길, 돌아서 가는 길이 있는 곳 - 나왔다. 오늘은 석굴 밑으로 곧장 가는 길을 걷고 싶었다. 돌아가는 길로 차를 보내고 걸어갔다. 앞에 석굴이 보였다. 어제 본 1굴부터 12굴까지 한 눈에 들어왔다. 쳐다보며 걸어가는데 이런 저런 생각들이 떠올랐다. “맨 처음 석굴을 조성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누가 석굴 조성에 원력을 내고 재물을 보시했을까, 왜 하필 이곳에 석굴을 조성했을까.”
불상들 애정표현 매우 노골적
마침내 1굴에 도착했다. 어제 본 것이지만 다시 굴 안에 들어갔다. 어두웠다. 한 참을 기다리니 서서히 사방의 벽들이 보였다. 벽 면 가득 조각된 불·보살상들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좀 더 기다리자 어둠에 눈이 보다 익숙해졌다. 조각상들이 바로 눈앞에 있을 만큼 가까이 다가섰다. 황홀했다. 거대하면서도 정교하고, 정교하면서도 육감적인 조각들이 저마다 자신의 몸매를 뽐내고 있었다. 가장 ‘성(聖)’스러운 종교예술품이 가장 ‘성(性)’스럽게 여겨졌다. “남녀의 육감적 애정 표현이 힌두교 조각엔 미치지 못하지만 우리나라 불상 조각과 비교할 때 매우 자극적이다”는 생각이 들었다. 굴곡이 확실한 몸매, 목·허리·무릎 등 세 곳을 구부린 교태적인 포즈, 봉긋 솟은 가슴, 두툼한 입술 등 확실히 ‘동적(動的)인 조각’이었다.
밖으로 나와 2·3·4굴을 계속 지나갔다. 이어 5굴에 들어갔다. 석굴 안은 광장 같았다. 직사각형 홀 안 양쪽 옆엔 각각 10개씩의 돌기둥이 서 있다. 기둥 아래 부분은 정사각형인데, 천장과 맞닿은 윗부분엔 모양을 낸 조각이 붙어있다. 기둥을 기준으로 중앙 홀과 측랑(側廊)이 구분되는 모양새였다. 좌우 측랑을 따라 몇 개의 소규모 승방과 로비가 만들어져 있다. 승방과 로비를 따라 가니 부처님이 봉안된 불당(佛堂)이 나왔다. 불당이 있는 곳은 제5굴 입구 맞은편 정면 벽인데, 그 안엔 부처님이 봉안돼 있다. 입구 좌우 벽면엔 ‘육감적인’ 협시보살이 우리를 맞이했다.
아름다운 협시보살을 손으로 만졌다. 차가운 기운이 손에 감돌았다. 떨어져 볼 땐 아름다운 보살이었는데, 직접 만져보니 차가움만 느껴졌다. 그래도 보살상에 손 대고 가만히 있었다. 그 옛날 보살상을 조각한 장인의 숨결을 느껴보기라도 할 요량으로, 아니 천상에 사는 보살의 몸의 촉감을 느끼고 싶어 가만히 있었다. 한 참을 그렇게 있다 손을 떼고 돌아섰다. 중앙 홀 바닥에 뭔가 불룩한 것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직사각형의 돌출부가 좌우의 기둥과 평행으로 돋을새김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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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로라 석굴의 육감적인 불보살상 조각들> |
이것은 무엇일까. 학자들에 의하면 엘로라 석굴 제5굴 중앙 홀에 있는 돌출부는 비구들이 공부할 때 사용한 책상이다. 돌출부를 따라 양편에 앉아 경전을 보고 있는 스님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학자들의 주장이 옳다면 제5굴엔 엄청나게 많은 스님들이 살았다는 것이 된다. 아니 수많은 스님들이 엘로라 석굴에 거주하며 교리를 연마했다는 결론에 이른다. 상념을 추스르고 6·7·8·9굴을 샅샅이 훑었다. 10굴에 도착했다. 어제 본 모습과 똑 같다.
인도 석굴 사원을 대표하는 차이탸굴 중 한 곳. 입구 정면에서 본 석굴은 호화로움의 극치다. 거대한 암벽 사이에 조성된 10굴 정면은 2층인데 1층엔 기둥들이, 2층엔 다양한 불·보살상들의 조각이 있다. 2층엔 발코니가 마련돼 있고, 2층 문과 창문을 통해 빛이 석굴 내부로 들어가는 구조. 1층에 들어갔다. 어제 본 그 부처님이 정좌하고 있었다. 두드러지게 돌출된 스투파 전면에 앉아있는 부처님. 한 줄기 빛에 전신이 드러난 부처님은 정말 성스러웠다.
사실 스투파는 무(無)불상시대에 예배 대상으로 만들어졌다. 산치 대탑에서 이미 보았듯, 부처님이 있어야 할 자리엔 보리수나 불(佛)족적 등이 있는 시대가 있었다. 미술사에서는 이 시기를 무불상시대로 표현하는데, 초기 석굴의 차이탸굴엔 스투파만 있지 불상은 없다. 완전한 인간이자 인천(人天)의 스승인 부처님을 감히 조각으로 묘사하는 것이 불경스럽다는 것이 주된 이유 중 하나였다. 무불상시대엔 스투파가 주된 숭배대상이었는데, 스님들과 재가자들은 점차 스투파를 대신할 예배대상을 찾았고, 결국 1세기를 전후해 불상이 탄생됐다.
불상의 탄생 이후 예배 대상은 스투파에서 불상으로 대체돼 갔다. 학자들에 의하면 불상이 출현한 뒤 우리나라·중앙아시아·중국·일본 등 북전불교계통에서는 불상이 점차 탑의 숭배를 대치(代置)했다. 탑 자체는 계속 존속됐지만, 봉헌스투파의 기능이 강했다. 반면 인도엔 탑 숭배가 불상탄생 이후에도 나름대로 존속·정착됐고, 남방불교계도 이를 받아들여 불상과 불탑 양자의 숭배를 계승하게 됐다. 지금도 미얀마(양곤의 쉐다곤 파고다 등) 등 남방불교계에서 불탑 숭배가 여전히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수많은 스님들이 토론 했던 곳
결국 데칸고원 서부지역에선 ‘불탑의 숭배’와 ‘불상의 탄생’이 결합, 탑의 전면(前面)에 감실을 만들어 불상을 봉안하기 시작했다. 불상과 탑이 한자리에 있게 된 것. 엘로라 석굴 제10굴에 있는, 스투파 전면에 크게 돌출된 불상은 이런 역사적 흐름 속에서 나타난 것으로 학자들은 분석한다. 기둥에 의해 중앙 홀과 구분된 측랑을 따라 시계방향으로 천천히 돌았다. 측랑을 다 돌면서 돌기둥 위에 조각된, 코끼리나 말을 탄 미트나상(한 쌍의 남녀 상)을 보았다. 그것 역시 정교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하나의 실수도 없이 기둥 위에서 아름다운 자세를 잡고 있다. 측랑을 다 돌고 난 뒤, 스투파 전면에 앉아있는 부처님 앞으로 나아갔다.
설법하는 손 모양을 하고 있는 부처님 좌우엔 보살이 협시하고 있고, 부처님 등에 맞붙은 광배 같은 부분엔 천신(天神)들이 새겨져 있다. 얼마나 보고 싶었던 부처님인가. 돌바닥에 전신을 던져 삼배를 올렸다. 조성된 이래 지금까지 갖은 역사의 굴곡을 이겨낸 부처님 아닌가. 힌두교도들의 보이지 않는 질시를 이겨내고 오늘도 이 자리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니, 진리는 결국 영원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일어나 발바닥을 만졌다. 차츰 올라가 무릎을 만졌고, 이내 설법하는 모양의 손을 잡았다. 부처님의 첫 설법이 있었기에 불교는 세상에 알려졌고, 부처님의 45년간 전도가 있었기에 불교는 한국에 전해져 오늘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설법인(說法印)을 취한 손은 그래서 더욱 절실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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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에서 본 엘로라 석굴 제12굴 모습> |
10굴을 나와 3층으로 된 11굴에 들어갔다. 사방 벽면에 불상·관음상·여신상 등이 빽빽하게 양각돼 있다.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감탄을 연발하며, 석굴의 승원(僧院)유적 가운데 가장 발달된 제12굴 앞에 섰다.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이었다. 가장 발달된 승원이라는 평가가 그냥 나온 것이 아님을 실감했다. 1층과 2층은 스님들이 거주하며 공부한 곳 같았다. 입구를 제외한 3면에 승방들이 가지런히 만들어져 있고, 정면 맞은편 중앙 안쪽의 깊숙한 벽면 배후에 거대한 부처님이 안치돼 있다.
3층은 1·2층 보다 훨씬 장엄(莊嚴)이 잘 돼 있다. 기둥들이 정연하게 세워져 있는 중앙 홀, 중앙 벽면의 깊숙한 곳엔 전실(前室)과 불당(佛堂)이 있는 것은 다른 층과 비슷했다. 그러나 전실과 거기서 홀로 나온 부분의 좌우벽면엔, 과거7불을 포함한 가지각색의 불·보살상들이 새겨져 장관을 연출하고 있는 점이 다른 층과 달랐다. 조각으로 그려진 거대한 화랑(畵廊)을 연상시켰다. 조각으로 된 그림, 이보다 더 정교하고 감동을 주는 ‘조각 그림’이 있을 수 있을까. 벅찬 감동이 가슴에 물밀 듯이 몰려들어왔다. 영국의 저명한 불교학자 리스 데이비스 교수가 말한 ‘불교 인도’가 거짓이 아니었다. 이렇게 거대하면서 정교한 조각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은 당시 승단의 체계가 그만큼 튼튼하고 완벽했다는 반증(反證)아닌가.
거대한 조각 화랑 연상시켜
벽면에 조각된 과거7불에 차례로 예배드리고, 12굴을 빠져나왔다. 벌써 정오가 돼 있었다. 태양이 뜨겁게 대지와 공기를 달구고 있었다. 아침 일찍 들어왔는데, 참배하는 사이 시간이 흐른 것이다. 12굴 앞에 있는 나무 아래 만들어진 의자에 앉았다. 생수(生水)를 마시며 과거 엘로라의 영광을 생각했다. “언젠가는 다시 이곳에 불교가 살아 숨쉬는 날이 오겠지” 생각하며, 상념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도불교’에서 ‘불교인도’로, 다시 ‘인도불교’로 변한 역사를 넘어 ‘불교인도’가 올 것을 기대하며, 아쉬움을 가득 안은 채 엘로라를 떠났다.
인도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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