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상을 털면서 -아들의 혼인살(殺)
아들아이 결혼을 앞두고 아들아이도 홍대 근처 와우교 다리 아래로 빗길에 추락하여 사고를 당했다.
15 미터 아래 지하철 공사장에 H빔철제 쇠막대기가 하늘을 향해 여러개 박혀 있었지만 코란도 승용차는 공사장을 피해 뚝 가장자리 흙길에 떨어졌다.
결혼 할 처녀와 웨딩 사진을 찍고 밀린 회사 일을 처리하고 자정이 넘어 귀가 하는 길이었다.
그 날은 처녀 쪽에서 예단을 가져 오기로 한 날이기도 하였다.
차는 박살이 나고 아이는 119에 실려 세브란스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다.
마침 병원에는 파업 중이라 당직 의사만 있었다.
의사는 상처가 깊어 때에 따라서는 팔을 잘라 낼 수도 신경 마비로 팔 장애인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파업을 하지 않는 집 근처 세란 병원으로 옮겼다.
수술 날자가 잡혀지고 담당 의사는 세브란스병원에서 처럼 장애 가능성을 예기 했다.
나는 종교를 찾았다. 달리 방법이 없었기에 늘 다니며 불공을 드린 조계사를 찾았다.
결혼 할 처녀와 함께 촛 불을 켜고 향을 피우며 부처님께 기원을 드렸다.
'수술 의사에게 최대한의 지혜를 주십사고... 아들 아이 몸 상처에 상생 하는 인연을 심어 장애를 면하도록 지혜와 용기를 주십사고.....'
아들 아이는 수술이 잘 되어 회복의 기미가 보였고 팔 뼈도 관절이 아닌 팔꿈치 아래 쪽이라 천만 다행이 었다.
단골로 다니며 자문을 받던 분 한테 가서 점을 첬다. 결혼 날자를 받고 전세 아파트를 얻었을 때 그 분은 터에 한(恨)이 서려 있으니, 고추가루 쑥 왕소금을 태워 집안의 탁기를 몰아내고 터를 달래야지, 그렇지 않으면 처녀가 다칠 운이라 했기에 마음에 걸렸다. 그 분은 '여자가 다칠 줄 알았는데 어째 남자가 먼저 다첬네' 하며 이제라도 터에 혼인 살풀이를 해야 한다고 하였다.
아들아이 한테 그 분의 말을 전했다. '내가 다치는 것이 났지, 그럼 이제라도 어머니가 기도를 해 주세요'
아들도 처녀 한테 양해를 구하고 처녀와 같이 전세집에 가서 '경탑 다라니'로 21일 기도 입제를 하였다.
나는 다시 꿈을 꾸게 되었다. 흰 옷을 입은 남자가 웃고 있었다. 터에 살기가 풀어지는 좋은 징조라 생각 했다.
그러나 세상 일이란 그렇게 만만치만은 않았다.
아들아이로 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처녀아이가 감당 하기에 벅차다고 중단을 요구 하였다.
충분히 예기를 나누고 본인도 승락하고 진행 한 기도인데도 하루밤 사이에 마음이 달라진 것이다.
아들 말에 의하면 처녀가 속상해 하며 울었다고한다. 혼인살을 일으키는 어떤 기운이 처녀 아이한테 전이 되어 슬픈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다. 세상 일을 모르는 처녀 한테 막무가내로 밀어 부칠 수는 없는 일이므로 내가 사는 집으로 옮길 것을 요청 하였다. 웃는 모습의 남자가 꿈에 보였기에 괜찮을 줄 알았다.
'어머니 제가 하지 않아서 나중에라도 나쁜 일이 일어나면, 제가 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하실 것 않이예요'
이미 주사위는 던져 젔기에 되돌릴 수가 없는 일이다.
영혼 세계에서는 마음 으로 교류가 되므로 마음 따로 몸 따로 행동 하는 것을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예비 며늘아기를 다둑이며 괜찮을 거라고 했다.
아들아이 전세 아파트에서 '천도제 다라니 경탑'을 내가 사는 집으로 옮겨 놓고 기도를 하였다.
아이가 퇴원을 하고 미루어 둔 예단을 받았다.
다음날이 었다. 꿈 속에서 사람 몸 껍질을 벗겨 후라이 팬에 지저서 판매 하는 여인이 보였다. 여인의 손 놀림이 워낙 빨라 유심히 살폈다. 여인의 칼날에 껍질이 벗겨 진 사람들의 시신들이 여기저기 여나뭇 널부러져 있었다.
마치 마네킹에서 옷을 벗겨 놓은 것처럼...
예사로운 꿈이 아니므로 버릇처럼 지장경탑 다라니와 극락보탑 다라니에 마네킹처럼 살 껍질이 볏겨 진 사람들을 자시(子時)에 올렸다. 여인의 칼 끝에 잘려 진 사람 껍질로 후라이팬에 지저진 인연 영가를 쓰지 않아서 일까, 이튿 날 나는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다가 비눗물에 미끄러 지면서 사고를 당했다.
119에 실려 집 근처 세란 병원 응급실에 갔다. 당직 의사는 씨티 촬영 사진을 보고 척추 골절이라 했다.
입원실에서 간병인 한테 대소변을 받아내면서 투병생활을 했다
담당 의사는 척추 수술을 권했다. 그러나 함부로 척추에 칼을 댈 수는 없었다.
아들 아이 결혼식 날자가 다가 왔다.
병원 측에 부탁하여 최대한 강력한 진통제 주사를 맞고, 진통이 오면 먹을 강력 진통제 약을 갖이고, 허리를 앞 뒤로 고정 시킨 후 아들 결혼식장으로 갔다.
결혼식장에는 30 여년 전에 헤여 진 아이들 아비가 '아이들을 잘 키워 줘서 고맙다'고 했다. 긴긴 세월속에 아픈 편린들이 주마등 같이 떠 올랐다.
각기 다르게 따로 따로 폐백을 받으며 아들 결혼식을 마쳤다.
다시 병원 입원실로 왔다. 간병인 아주머니가 눈물을 글썽이며 나를 위로 해 주었다.
그 날 밤 꿈에는 손바닥 만한 큰 조개 껍질에 등잔처럼 기름 심지가 고요히 타고 있었다.
담당 의사는 척추 수술 할 것을 독촉 하였다.
거래처 고객들이 '천도제 다라니 경탑'을 가지려 병원으로 왔다가 천호동 우신향 한방 병원 이야기를 했다.
전화 상담을 해보니 가능성이 보이는 듯 했다.
한방병원에서 다시 사진을 찍고 세란병원에서 가져간 필름을 비교 해 본 의사는, 12번 척추는 전에 다쳤던 흔적이고 엉덩이뼈와 허리 인대 근육 타박상이라 했다.
침과 뜸 물리치료를 받고 십여일 만에 퇴원 하였다. 간병인이 없으니 음식을 만들거나 차릴 수가 없었다. 아파트상가 식당까지 겨우 지팡이를 의지하고 천천히 걸어가서 식당밥을 사 먹었다. 그리고 상가내 한방에서 침과 뜸 치료를 받았다.
며칠 몸을 추스리고 문경 서실로 가서 택시로 온천을 오가며 온천 치료를 십여일 했지만 허리를 고정시킨 의료기가 있어도 신통하지 않았다.
다시 서울로 왔다. 척추 관절을 추나요법과 그 윗단계로도 치료하였지만, 고관절이 찢어지는 듯 땅기며 아픈 통증으로, 앉을 수도 누울 수도 없었고 통증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다른 치료 방법을 찾아 나섰다. 이대로 병신이 될 수는 없기에 최선의 방법을 찾아 다녔다.
중국 침술에 조예가 깊은 선생 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이십여년 쯤 전에 함께 사주 공부를 하던 침술사 였다.
다쳤다는 소식을 들었노라고 고칠 수 있다고 했다. 만리동까지 택시로 오고가며 한약을 곁들여 치료를 하면서 온천과 척추 치료 때보다 더빠른 효과를 느끼게 되었다. 선생은 침 맞고 가면서 우황 청심환을 먹으면 더빨리 몸이 순환 된다고 했다.
침을 장기간 맞다보니 어지럼증이 일어나며 기운이나른하여 또 다른 병으로 이어지는 듯하였다.
많이 회복 되었지만 고관절이 땅기듯 아프고 다리가 저린 것은 여전 하였다. 그동안 아들 내외와 둘째 딸아이가 준 수백만원이 다 날아 가 버렸다. 더 이상 치료 받으려 다닐 돈도 없었거니와 다른 방법을 찾기로 하였다.
집에 있던 부황으로 통증이 있는 곳에 피를 2차 3차 4차 까지도 뺐다. 고관절에 극심한 통증이 사라지기 시작 했다.
다리가 저린 것은 여전 하였고 고관절이 아플 때 마다 부황 단지로 피를 빼며 우엉을 얇게 썰어 부쳤다.
우엉은 피를 맑게 하는 성질이 있어 절에서 옛날에 민간요법으로 썼다고한다.
레이저 치료기와 주물럭 맛사지 의료기구로 자가치료하면서, 날마다 날마다 우엉을 얇게 썰어 스타킹에 넣고 자루마냥 묶어 허리에도 다리에도 엉덩이에도 대고 생활하였다.
아직 완쾌는 되지 않았지만 통증 완화의 방법을 알게 되었으니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관 건은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건강하게 사는 것이라 함을 건강을 잃은 지금에야 깨닫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