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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돼지 (김우진)
민근홍 언어마을
* 해제
1926년 김우진 ( 金祐鎭 )이 지은 희곡. 3막. 1926년 봄부터 구상하여 출분 뒤 동경 ( 東京 )에서 8월에 탈고한 그의 자전적인 작품이다. 친구였던 조명희 ( 趙明熙 )의 시 〈봄잔디밭 위에〉라는 작품에서 영감을 얻었기 때문에 처음 제목은 ‘봄잔디밭 위에’였다.
산돼지는 시와 희곡의 조화를 꾀한 작품이면서 동시에 가장 자전적이며, 그가 쓴 희곡 5편 중 자살하기 직전에 쓴 마지막 작품이다. 낭만성이 짙은 이 작품은 본격적 표현주의 희곡으로서 사회개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식민지시대라는 상황에서 봉건적 인습의 고옥(古屋) 속에 유폐되어 몸부림치던 개화 초기 지식인의 좌절을 가장 절실하게 묘사하고 있다.
주인공 '최원봉'은 구국 전선에 나섰다가 죽은 동학군의 아들이다. 그러나 일상(日常)에 갇혀 있음으로 해서 아무 행동도 하지 못하는, '산돼지'가 '집돼지'로 길들여지고 있는 1920년대의 전형적인 지식인이다. 작가의 자전적 작품이며, 그가 쓴 5편의 희곡 중 자살하기 직전에 쓴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다.
< 산돼지>는 주인공 최원봉의 내면적 갈등과 그로 인한 극심한 정신적 갈등 장면을 나열식의 '드림 플레이' 기법을 통해 형상화한 희곡 작품이다. 김우진의 <산돼지>를 비롯한 근대적 희곡이 나오기 전까지의 한국 희곡들은 대부분 신파극조의 성격을 지닌 것들이었다. 이에 비해 김우진의 희곡들은 이러한 설화적 틀을 벗어나 인간 내면의 갈등과 의식 세계를 파고들면서 근대적 성격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개화기의 좌절된 한국 지식인의 임상 보고서라 할 수 있는 작품이다. 김우진은 조명희에게 이 작품의 주인공 최원봉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다.
"주인공 원봉이는 소극적 인물이요, 조선 현대 청년 중의 어떤 성격과 생명력을 추상(抽象)해 놓은 것이요, 그 성격 중에는 형(조명희)도 김복진 군도 일부분 든 것 같소이다."
이러한 편지 내용으로 보아, 김우진은 <산돼지>에서 암담한 현실에 대한 당대 젊은이들의 의식을 담아내고자 했던 것이다.
< 산돼지>의 등장 인물들을 주의 깊게 살펴 보면, 당대의 전형적 인물들이 설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원봉은 현실과 이상, 봉건적인 것과 진보적인 것, 개인과 사회 문제에 있어서 저항 의식을 내보이려 했으나 그것을 이겨 낼 만한 뚜렷한 방향이 제시되지 못한 현실의 울타리에 머물고 말았다.
< 산돼지>는 인물의 내면적 갈등을 부각시키기 위해 표현주의 형식을 상징적 수법으로 사용하였다. 이는 당시의 연극 풍토에서는 공연(公演)이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타성화된 기존 의식을 거부하고 새로운 근대극을 시도해 보려는 김우진의 실험 정신의 소산이었다. 따라서 김우진은 한국 근대 희곡 문학사상 인습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창조를 위해 노력한 작가였다고 할 수 있다.
< 산돼지>는 자신이 서 있는 위치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현실의 장벽에 부딪쳐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는 식민지 지식인의 저항과 좌절 의식을 그려낸 작품이다.
* 줄거리
제1막 : 주인공 최원봉이 차혁과 바둑을 두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원봉은 청년회 간부이면서 자신의 주관으로 연 바자회의 수익금 50원을 써 버리고 이러한 사실을 덮어 주려는 차혁과 싸운다. 이 내용에 이어 원봉의 애인인 정숙이 다른 남자와 일본으로 도망간 사실. 영순과 애인인 차혁과의 충돌, 그리고 원봉의 아버지는 동학군으로서 관군에게 잡혀 죽었다는 사실 등이 노출됨으로써 원봉이 겪고 있는 심리적·사회적 갈등이 '집안에 갇힌 산돼지'라는 데서 비롯됨을 시사한다.
제2막 : 원봉의 집 건넌방을 무대로 전개되는데, 원봉은 영순의 어머니(최주사댁)로부터 자신의 출생 비밀을 알게 된다. 원봉은 동학군이었던 박정식의 아들로 박정식이 관군에게 잡혀 죽자 부친과 같은 동학군이었던 최 주사가 그를 데려다 키운 것이다. 최주사는 딸 영순과 원봉을 결혼시키라고 유언했지만, 원봉은 정숙과, 영순은 차혁과 교제한다. 원봉은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으며, 원봉은 부모가 동학군으로 고난을 겪는 상황을 몽환 장면으로 보면서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동학 이념을 과제로 안고 고민하는 산돼지임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제3막 : 꿈의 장면에서 현실 세계로 돌아온다. 원봉의 애인이었던 정숙이 등장한다. 정숙은 원봉에게 실망하고 유학생 광은을 따라 일본 동경으로 떠났다가 돌아와 다시 원봉을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옛날로 돌아가고 싶은 정숙을 원봉은 거부한다. 정숙은 원봉에게 거절당하자, "원봉씨는 어디로 가겠소! 그것만 가르쳐 주면 그리로는 당초에 안 갈 테니까."라고 말한다. 원봉은 "내가 간다기로 지구 위밖에 더 내왕할까?"라고 대꾸한다. 그러나 정숙은 "아하, 그러면 나는 화성으로나 가야겠네. 내게 아까 그 시 읽어주. [최후의 오찬] 대신에 [최후의 애가(哀歌)]라고나 해 둘까."라고 한다. 이 작품은 원봉이 조명희의 시 <봄 잔디밭 위에>를 읊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서울에서 가까운 어느 군의 읍내. 최원봉은 정숙과 애인 사이였는데 정숙은 다른 남자, 즉 이광은의 꾐에 빠져 일본으로 도망쳐 버린다. 원봉은 청년회의 상무 간사인데, 바자회의 수입금 중 일부를 유용(流用)했다고 하여 청년회로부터 불신임을 당한다.
성장 과정이 순탄치 않은 원봉은 그의 별명 '산돼지'처럼 괴팍하고 저돌적인 면이 있다. 원봉의 친아버지는 동학 운동에 가담했던 동학군 박정식이었다. 원봉의 아버지는 관군(官軍)에게 잡혀 죽고, 또 어머니 역시 원봉을 낳자마자 죽는다. 그래서 원봉의 아버지와 같은 동학군이었던 최 주사가 원봉을 어릴 때부터 데려다 키운 것이다. 그러므로 누이동생 영순과는 친남매 사이가 아니다.
최 주사는 죽으면서 원봉과 자신의 딸 영순을 결혼시키라고 유언(遺言)을 남기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원봉은 정숙과, 영순은 차혁과 각각 교제를 한다. 원봉은 자신의 출생 비밀을 이미 알고 있으며, 이러한 여러 가지 갈등, 특히 죽은 부친의 유명(遺命)인 동학 이념을 실현하지 못한다는 좌절감으로 끝내 신경 쇠약증에 걸려 몽환병(夢幻病) 환자처럼 된다.
일본으로 도망갔던 정숙이 돌아오고, 초봄의 양지바른 들녘에서 원봉과 정숙이 다시 만나 서로의 나아갈 방향에 대하여 논의하면서 갈등이 해소된다.
원봉은 무한한 자유를 갈망하고 있으나, 혈연적이며 가정적인 일상생활의 테두리 속에 갇혀 있던 까닭에 아무 행동도 하지 못하는, 산돼지를 집돼지로 걸식시키게 하는 1920년대의 전형적인 지식인으로 그려져 있다.
이 작품은 작가 자신이 고백하였듯이, ‘자신의 생의 행진곡’으로서 개화기 지식인의 고뇌를 함축해놓은 희곡이다. 특히 자연주의·상징주의·표현주의의 방법을 광범위하게 차용하여 새로운 연극적 실험을 한 점은, 아직 신극 ( 新劇 )이 정립되지 않은 1920년대의 실정에서는 매우 선구적인 일이라 하겠다.
* 등장 인물
■ 최원봉 : 주인공. 동학군이었던 부친은 관군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그는 최 주사에 의해 양육됨
■ 차혁 : 원봉의 친구이자 영순의 애인
■ 최영순 : 최 주사의 딸로 원봉과 남매 사이가 됨
■ 정숙 : 원봉의 애인. 이광은과 동경으로 도망갔다가 돌아옴.
■ 이광은 : 원봉의 애인인 정숙을 꾀어 일본으로 건너감.
* 구성
■ 발단 : 청년회 상무 간사인 원봉이 바자회 수입금 유용 명목으로 청년회로부터 불신임을 당함.
■ 전개 : 최 주사의 유언에도 불구하구 원봉과 정숙, 영숙과 차혁이 각각 교제함.
■ 위기 : 원봉이 동학 이념을 실현하지 못해 안타까워함.
■ 절정 : 원봉이 신경 쇠약증에 걸림.
■ 대단원 : 정숙의 귀향.
* 개관
■ 갈래 : 희곡, 장막극, 사실주의극
■ 배경 : 1920년대 서울 근교 어느 읍내
■ 경향 : 사실주의
■ 표현 : 표현주의 수법의 부분적 원용
■ 의의 : 신파극에서 벗어나 현대극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서 있는 작품
■ 주제 : 1920년대 청년 지식인들의 새로운 삶에 대한 방향 모색과 좌절감
* 감상의 길잡이
김우진은 이 작품을 통해 1920년대 후반기를 살아가는 조선의 지식인 청년들에게 새로운 삶에 대한 방향 모색의 기회를 제공하고자 했다. 이 새로운 방향 모색의 한 대안으로 작가는 동학 이념을 실현하는 것을 내세우고 있다. 주인공인 최원봉의 부친이 동학 운동가였다는 상황 설정으로 미루어 보면, 작품의 저변에 깔려 있는 작가의 역사 의식을 느낄 수 있게 된다. 곧, 역사의 방향이 동학과 관련되어야 한다는 근거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3.1 운동이 실패로 끝난 후 조선의 지식인들은 허무와 나약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내일에 대한 꿈도, 현실을 살아갈 기력도 상실해 버렸기 때문이다. 좌절의 나락에서 헤어나기 위해 청년회(靑年會)와 같은 단체를 조직하여 힘을 모으려고 하였고, 이 단체들을 통해서 새로운 방향 모색의 발판을 삼으려고도 했다. 또,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3.1운동 이후 일본이 조선인을 유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표방했던 문화 정책과도 맞아떨어진 까닭이다. 그러나 20년대 후반에 들어오면서 이러한 단체 활동이 점점 어려워지게 되고, '죽을 때 죽더라도'라고 하는 강단을 가져야만 제대로 활동할 수 있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 작품 발단 부분에 원봉과 차혁이 바둑 두는 장면이 나오는 데 이 부분이 매우 상징적이다.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하는데 길이 막혀 있는 현실은 마치 바둑판에서 바둑알을 놓을 자리가 없는 것에 해당한다. 따라서, 없는 길을 찾으려다 보니 '죽을 때 죽더라도' 한번 해봐야 되지 않겠느냐는 맹목적 의지를 다질 수밖에 없다. 당시 지식인 청년들의 절망 의식을 엿볼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최원봉의 신경 쇠약증이라는 정신적 파탄도 개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사회적이고 시대적인 것이 원인임도 알 수 있게 된다. 반봉건의 기치를 내걸고 싸우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동학 이념을 실현하는 것이 자신에게 부여된 혈연적, 시대적 과제였는데 이를 실현하기엔 너무 열악한 조건 속에 놓여 있기에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산돼지'이지만 무기력하고 답답하게 지내다 신경 쇠약증에 걸린 '집돼지'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의 주인공인 원봉은 동학 농민 운동에 참여했다가 죽음을 당한 동학군의 후예이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신의 뜻을 받아 양반과 탐관 오리들을 무찌르고 원수를 갚아 주지 않으면 산돼지 탈을 벗겨 주지 않겠다는 유언을 남긴다. 주인공은 봉건 제도의 파괴라는 숙명을 지니고 있는 셈인데, '산돼지'라는 제목부터가 사회 개혁의 정신적 표징으로 보인다.
여기에 신여성의 방황과 고뇌, 여동생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깔려 작품의 심각한 분위기를 더해 주고 있다. 특히 여주인공 정숙은 김우진의 애인 윤심덕을 모델로 하고 있는 듯하다. 이 작품은 지은이의 인생관과 시대 정신을 동시에 성공적으로 그린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 원봉이 자신에게 부여된 현실 개혁의 사명감과 기존 질서 사이에서 심각한 갈등을 겪다가 결국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자아를 포기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등장 인물들 사이의 갈등을 현실에 대한 저항과 순응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순응에서 저항으로, 다시 저항에서 순응으로 이행하는 것이 "산돼지"의 전체적인 작품 구조라 할 수 있다.
* 산돼지의 갈등 구조
이 작품의 주된 갈등은 동학당이었던 아버지의 우명한 1920년대 청년 지식인인 원봉의 현실적 무력함 사이의 갈등이다. 아버지의 뜻을 이어 사회와 민족을 위해 나서야 할 원봉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좌절하는 상황은 20년대 우리나라 지식인이 처한 상황이기도 하다.
원봉과 청년회 사이의 갈등은 원봉이 공금을 유용했다는 데서 발단이 된다. 청년회의 성격은 불분명하나 1920년대의 청년 단체의 하나로 새로운 방향 모색이 요구되는 단체임을 알 수 있다.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는 원봉에게는 혁과 영순의 교제도 하나의 갈등이다. 최 주사는 영순과 원봉을 혼인시키라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다.
원봉의 애인인 정숙은 이광은과 함께 동경에 갔다가 돌아온다. 이 두 사람의 갈등은 봄 잔디밭에서 인생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것으로 해소된다.
* 극의 상징적 의미
극은 눈앞에 펼쳐지는 하나의 사건이지만, 그 사건은 사실이 아니라 여러 가지 뜻을 지닌 상징이 된다. '산돼지'라는 작품만 하더라도 제목부터가 상징적이다. 주인공의 별명이 산돼지라는 것은 이 점을 충분히 시사하고 있다. 야산에 있어야 할 산돼지가 집안에서, 여러 사람으로부터 받을 수밖에 없는 속박상태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고통이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초반의 '바둑두기' 역시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바둑은 이기는데 목적을 둔 놀이지만 거기에는 상대가 있다. 주인공은 막바지에 몰려 '넓은 세상'에서 '길'을 찾다가 '목 베인 항우'가 되고서도 '제 송장 꼴 보려고' 집을 세어 본다. 주인공의 깊은 좌절감과 동시에 끈질김을 암시하고 있다. 또, 바둑에서 졌듯이, 사실은 친동생이 아닌 동생 영순을 차혁에게 빼앗기게 될 것도 암시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사건 자체를 향한 암시보다 그것이 독자에게 주는 암시이다. '최원봉'과 같은 인물은 오늘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다. 인간에게 꿈이 있는 한 이러한 시련은 항상 있게 마련이다. 동학의 시련이나 일제 강점기의 속박은 옛날 일이지만, 그와 같은 일은 모든 인간에게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점에서 극은 상징적이다.
* 작품의 특징
이 작품은 사랑과 사회 개혁, 이상과 행동, 산돼지와 집돼지, 병과 건강의 공간을 주요 대립적 의미 체계로 활용하여 1920년대 식민지 지식인들의 현실 인식과 행동 유형을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사회 개혁의 이념을 동학군 박정식에게서 온 것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봉건·신분제 사회에 반기를 든 시민 사회적 역사 의식이라는 이념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이상주의와 행동주의의 갈등과 무기력한 사회적 행동의 결여를 '어머니-땅', '현실=이 곳=어머니=조선'에의 사랑으로, '시-예술로의 대체'라는 방법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결말의 의미는, 곧 식민지 사회에서 사회 개혁, 조선의 되찾음이라는 이상은 존재하되 행동의 방법은 찾지 못하였던 작자의 비극적 세계 인식인 동시에 시인-예술가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확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