讓寧大君 (양녕대군) 3
고산(高山)추천 2조회 21024.01.05 11:37댓글 12북마크공유하기기능 더보기
사냥과 여색을 좋아한 세자
세자 시절 양녕대군에 관한기록은 그것이 정사이건, 야사이건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세자 양녕은 학문을 싫어하고 사냥이나 여색을 좋아했다는 것이다.
세자 양녕은 태종 11년(1411) 물의를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태종실록 12년 4월 기록에는
" 세자가 병을 핑계로 서연에 참석하려 하지 않자, 김문후가 눈물로 훈계하였다 "는
기사가 나오고, 그 해 11월에는 " 세자전의 매를 내보내도록 명하였다 "는 기록이 나온다.
태종 13년 2월에는 매를 놓아보냈다는 소식에 세자가 노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다음 달에는 평양 기생 "소앵"과 놀아나다가 김매경, 박수기 등이 대신 치죄당하는 기록이 나온다.
세자의 비행이 잇다르자,
사간원에서는 태종13년 4월 세자전을 대전 옆에 지을 것을 주장한다.
세자를 태종의 감시 아래 두자는 의도이었다.
그 해 9월 태종은 세자의 좌보덕 건우에게 세자의 학문과 행실이 바르게 된 후에야 만나보겠다며
세자 양녕대군에 대한 분노를 표시하고 있다.
세자가 일으킨 물의 중 가장 큰 것은 여자 문제이었다.
평양 기생 정향 이외에도 양녕은 태종 14년 1월 밤에 창기를 궁에 들인 문제로 논란을 일으켰다.
그해 6월에는 아들을 낳았는데도 ..
4개월 후에는 부마 청평군 이백강의 연회에서 기생과 방종하게 놀아 핀잔을 사더니, ...
다음 해 5월에는 기생 초궁장과 놀아나다 문제를 일으켰다.
초궁장과의 문제는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초궁장은 태종의 형이자 상왕인 정종(조선 2대 임금)의 여인이었기 때문이었다.
한때 큰아버지가 가까이 지내던 여자와 관계한 것이다.
이 사건은 .....
세자가 초궁장이 상왕의 여자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발뺌하면서 초궁장만 쫓겨나는 것으로 무마되었다.
심지어 양녕대군은 그 아들의 첩마저 빼앗아, ...
그 아들이 술에 취해 지내다가 죽었다는 실록의 기록도 있다..
4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