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챙'하는 소리와 함께 민영의 가운데 손가락에 걸려 살짝살짝 흔들리면서 빛을 내고 있는 목걸이 하나. 알 수 없는 미소를 입가에 퍼뜨리며 자신의 목에 가져다 건다. 화려하지 않은 디자인의 목걸이가 민영과 어울리지 않지만 목에 건 목걸이의 펜던트를 만지작거리며 흥미로워 하는 민영. 4년 전 대웅이 민영에게 고백을 하던 날. 민영에게 건넸던 물건. 지금 민영의 목에서 반짝이고 있는 목걸이다. 한참동안 화장대 서랍에 담겨있던 물건을 꺼내들고 처음으로 목에 건 민영.
'이제 시작이야. 두고 봐.'
정신없는 사람들 틈에서 나란히 침대위에 누워있는 대웅과 영혁. 휴대폰을 붙들고 연신 걸려오는 전화로 통화하느라 여념이 없는 매니저에게 다가가는 채호. 입모양으로 '대웅이 폰이요' 라고 지어보이고 휴대폰을 들고 있던 손 반대편 주머니를 가리키는 매니저. 매니저 곁으로 바짝 다가서서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고 들어있던 휴대폰을 꺼내드는 채호. 눈짓으로 인사 아닌 인사를 슬쩍하고 한쪽 귀퉁이로 걸어 나와 대웅의 휴대폰 연락처를 뒤적인다. '우리은예'라고 저장되어있는 이름을 누르고 메시지를 보낸다.
'안녕하세요, 대웅이의 동료 정채호라고 합니다. 지금 대웅이가 촬영 중에 조금 다쳐서 병원 응급실에 와 있습니다. 가능하다면 이쪽으로 좀 와주셨으면 합니다. 혹시라도 은예씨가 와서 깨어나진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실례를 무릅쓰고 연락드립니다.'
둘 중 누구라도 빨리 정신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채호가 선택한 방법이다. 이유를 불문하고 대웅이 최근 들어 가장 행복해보이게 만들었던 사람이 곁을 지키고 있으면 깨어날 것만 같은 허황된 기대를 해보는 채호.
메시지를 받은 은예는 불안함에 발을 동동 구른다. 아직 끝나지 않은 학교 수업으로 어찌할 바를 몰라 한다. 쉬는 시간에 은예의 반으로 놀러온 서준이 창백해져가는 은예의 낯빛을 보고 걱정스레 묻는다.
"너 무슨 일 있어?"
"어떡하지? 아무도 내말 안 믿어 주겠지? 뭐라고 해야 조퇴를 할 수 있을까?"
"왜?"
"어떡해... 나 병원 가봐야 돼. 응급실..."
너무 놀란 은예는 떨리는 음성으로 서준에게 말을 했고, 자초지종은 듣지도 않고 은예를 돕는다. 서준덕에 조퇴를 받은 은예는 고맙단 말을 전하고 가방을 챙겨 황급히 학교를 빠져나간다. 교복차림으로 병원에 가서 공공연하게 알려진 대웅을 만나러 가는 건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생각된 은예는 가던 길을 집으로 돌린다.
다다다 달려와서 도착한 아파트 건물 앞.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달리던 걸음을 잠시 멈춘 은예. 은예 앞으로 이젠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구두소리를 내며 다가서는 민영. 숙이고 있던 몸을 세워 민영을 똑바로 응시하는 은예.
"제법이네. 내가 이제 낯설지 않나보네."
"......."
"미리 알려주려고 왔어. 어린학생 마음의 상처 받지 말라고."
"......?"
"나 곧 대웅이랑 약혼해."
"뭐요?"
"약혼. 요즘 애들은 똑똑해서 말귀를 잘 알아먹는 줄 알았더니... 그런 것도 아닌가보네. 김대웅이랑 채민영이 조만간 약혼한다고."
"혼자만의 착각은 아니구요?"
"뭐? 이 계집애가?!!"
흥분한 민영은 은예의 뺨을 세게 때린다.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는 은예의 뺨. 얼얼한 느낌이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 은예는 한쪽 손을 뺨에 갖다 대며 민영을 올려다보며 지지 않으려 눈도 꿈쩍이지 않는다.
"똑똑히 들어. 내가 분명히 전에도 한번 말한 적이 있지 아마. 어른들 사이에 어린애가 함부로 끼어드는 거 아니라고. 약혼의 증표로 주고받은 물건도 있고, 미성년자 앞에서 이런 말 하기 뭐하지만 대웅이랑 나 사이엔 이미 애도 생겼거든. 그러니까 정신 차리고 알아서 좀 빠져달라고. 응?"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은예는. 하지만 그럴 수 있을거란 가능성을 말해주는 기간들이 너무 많았다 대웅과 은예 사이에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 달 남짓 연락을 안한 적도 있었고, 만나기 위해서는 항상 대웅의 스케줄에 은예가 맞춰야 하는 게 당연시 되어온 만남이었기에 불안함을 감출수가 없었다.
"그... 근데요... 약혼할 남자가 지금... 촬...영중에 다쳐서 응급실에 있다는데... 이 상황에 굳이 나한테 와서...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뭐에요?!"
"뭐, 뭐..?!!"
은예의 말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민영이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한다. 그리고는 대충 둘러대고 대웅이 있는 응급실이 어딘지 알아내서 병원을 찾아가는 민영. 분주하게 움직이는 전문의와 간호사들 사이로 모르고 왔더라도 알아볼법한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는 자리를 보게 되는 민영. 아직까지 깨어나지 못한 대웅의 침대 곁으로 다가가는 민영.
"대웅아!!"
"누구... 아!! 얼마 전 F/W컬렉션 디자이너 채민영씨 아니에요?"
"아... 네..."
"근데 여긴... 어머! 그럼 그 기사가 진짜였어요? 두 분 잘 어울리시네요. 김대웅씨가 빨리 회복하셔야 될 텐데 어떡해요."
"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금방 일어 날거에요, 우리 대웅이."
"어머, 우리 대웅이래..."
민영의 말 한마디에 쑥덕이던 간호사들은 다른 위급한 환자 쪽으로 달려가 제 할일을 한다. 채호는 갑작스레 들이닥친 민영의 모습에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분명 자신이 연락을 했던 건 대웅이 마음에 품고 있는 정은예임이 틀림없었는데, 생뚱맞게 다른 사람이 찾아온 격이니 말이다. 조금 전에 대웅의 휴대폰을 꺼내어갔던 채호를 보며 매니저가 어떻게 된 거냐는 눈짓을 준다. 채호는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 양팔을 접어들고 어깨를 들썩여 보인다.
"컥! 콜록.. 으음..."
"대웅아!! 정신이 들어?"
대웅은 눈을 뜨자마자 자신의 앞에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듯한 얼굴로 보고 선 민영이 보인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어찌된 상황인지 물으려 사람을 찾는 듯 보이는 대웅의 시선. 채호가 다가서고, 매니저가 대웅의 손을 잡으며 말을 뱉는다.
"다행이다. 그래도 다행이야 대웅아."
"어떻게 된 거야? 내가 왜...?"
"수중 신 촬영 중에 문제가 있었어. 그 바람에 네가 정신을 잃었고..."
"아... 크읍... 나 물 좀..."
"어, 어. 여기."
다급하게 자신이 들고 있던 생수병을 대웅에게 건네는 촬영감독. 대웅이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한시름 놓는 촬영감독은 한껏 풀린 편안한 얼굴로 대웅을 본다. 물을 한 모금 머금었다 꿀떡 삼키던 대웅이 주변을 둘러보다 옆에 호흡기를 쓰고 누워있는 영혁을 보게 된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장영혁이 왜 저기 누워있어?"
"너 병원이란 소리 듣고 달려왔다가 호흡곤란으로 쓰러졌어."
"언제부터?!!"
"좀 됐어."
"주치의 어딨어? 어? 당장 불러줘."
"김대웅... 왜. 왜 이렇게까지 난린데?"
"장영혁 급성 심부전증 있어."
"뭐?!"
대웅의 말에 놀란 민영이 대웅을 말리던 손길을 풀어버린다. 그 틈에 대웅은 침대에서 내려가 영혁에게로 다가선다. 상태를 알 수 없자 지나다니는 의사 아무나 붙들고 묻는다.
"장영혁. 괜찮은 거죠?"
"쇼크로 잠시 호흡곤란이 왔는데, 지금은 안정을 찾은 상태니 걱정 마세요. 잠든 거 같으니까요."
"감사합니다."
자리로 돌아와 다시 침대에 올라앉는 대웅. 대웅이 정신을 차리자 어느덧 남아있는 촬영 분을 소화해야 되서 양해를 구하고 하나둘 자리를 뜨는 촬영 스태프들. 그리고 이제 대웅의 촬영이 끝남과 동시에 채호의 촬영분이 본격화되기 때문에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리는 채호. 매니저는 오늘일로 인해서 이래저래 틀어진 스케줄 조율을 위해 회사에 들어가 봐야 겠다며 민영과 단둘만 두고 가는 것을 못내 불안해하다 자리를 벗어났다.
어색한 침묵만이 감도는 민영과 대웅사이의 기운. 대웅에게 보여주기 식으로 대놓고 목에 걸어둔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는 민영. 멍하게 앉아있던 대웅이 잠시 민영 쪽으로 고개를 돌리다 익숙한 물건을 보고 눈이 번뜩인다.
"기억나?"
"...기억나지 그럼."
"나 단 한순간도 내 몸에서 이걸 떼어놓은 적이 없어."
"거짓말 하네... 그거 순금도 아니고 꼴랑 14K인데 그런걸 화려한 채민영이 계속 몸에 지니고 있었다고?"
"진짜야, 김대웅. 나 너한테 진심이라니까? 아직도 모르겠어?"
민영의 한마디에 오래도록 잊고 있던 첫사랑의 설레는 감정이 다시 꿈틀대는 기분인 대웅. 은예의 존재는 까마득히 잊기라도 한 듯 일렁이는 감정을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듯한 표정이다. 민영은 찌푸려지는 대웅의 표정이 나쁜 의미는 아닌 듯 보여 입 꼬리가 씰룩 올라간다. 대웅의 팔을 살며시 잡으며 그윽한 눈빛으로 보는 민영. 민영의 그런 시선이 오히려 더 자극이 되는 듯 피하는 대웅.
"그만 가봐. 나 이제 깨났으니까."
"아니, 지금 너 혼자 나가면 집에 가기 힘들껄?! 그나마 나라도 있는걸 다행으로 생각해."
"......"
대웅이 맞고 있는 링거가 다 될때 까지만 눈을 붙이라며 눕히는 민영. 민영의 손길에 자연스레 순한 양이 되어 침대에 몸을 눕히는 대웅. 이런 다정스러운 둘을 멀찌감치 떨어진 거리에서 보게 되는 은예. 민영이 내뱉고 갔던 모든 말이 사실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게 해주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걱정돼서 달려왔던 은예는 몸을 돌려 느린 걸음으로 병원을 빠져나간다.
'그래. 내가 너무 어렸던 거야. 그래서 그 말을 그대로 의심도 않고 믿었던 거야. 진실은 저 둘. 저 둘이 진짜였던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