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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말씀을 따라가는 십자가 길
시작기도
스승 예수님,
우리를 향한 사랑으로 타올랐던 당신 생애의 마지막 길은
십자가를 지고 오르셨던 골고타 언덕이었습니다.
이제 그 길을 따라 걸으며 기도합니다.
당신을 더 깊이 알고 사랑하고 따르고자 합니다.
이 묵상의 길을 통하여 당신이 지니셨던 마음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당신이 지니셨던 하늘 아버지에 대한 신뢰와 순종의 마음을 배우게 하시고,
당신이 지니셨던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마음을 닮을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우리 삶에도 우리가 져야 하는 십자가가 있음을 알게 하여주시고, 그것을 묵묵히 질 수 있는 용기를 주십시오.
당신이 걸으셨던 이 길이
당신이 하실 수 있었던 가장 좋은 선택이었으며
바로 그것이 구원의 길이었음을
가슴깊이 깨닫게 하여주십시오.
◎ 아버지께 청하오니 내 맘속에 주의 상처 깊이 새겨주소서.
제1처 예수, 게쎄마니에서 고뇌하심을 묵상합시다.
† 스승이시여, 당신은 부활생명의 가르침으로 우리를 구해주셨습니다.
◎ 당신과 함께 묻히고 당신과 함께 부활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들은 게쎄마니라는 곳에 이르렀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기도하는 동안 여기 앉아 있어라."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따로 데리고 가셨다. 그리고 공포와 번민에 싸여서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니 너희는 여기 남아서 깨어 있어라." 하시고는 조금 앞으로 나아가 땅에 엎드려 기도하셨다. 할 수만 있으면 수난의 시간을 겪지 않게 해달라고 하시며 "아버지, 나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나에게서 거두어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하고 말씀하셨다. (마르 14:32-36)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소서? '생명'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바가 '죽음'이라는 역설을, 우리는 어떻게 알아들어야 하는가. 죽음의 질곡을 거치지 않고 영원한 삶의 문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신비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묵묵히 그분의 고뇌를 바라보며 그 마음을 나의 마음에 포개어 아프게 느끼는 것 아니겠는가.
“당신 뜻대로 하소서!”라고 고백하는 것은 얼마나 쉬운가! 그러나, 이것만은 절대로 안 된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면서 비상금처럼 꼭꼭 숨겨둔 내 뜻의 보따리를 움켜잡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에게 두려움이 밀려올 때 그분께서도 우리처럼 무서워 떠시며 번민하셨다는 것을 기억하자. 우리도 혼자서는 모든 것을 할 수 없거니와 누군가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자. 그리고 “내 영혼이 근심에 싸여 죽을 지경”이라 토로하시는 그분과 함께 머물며 깨어 기도드리자. 제자들처럼 슬픔에 지쳐 잠들지 않도록 하자.
◎ 아버지께 청하오니 내 맘속에 주의 상처 깊이 새겨주소서.
제2처 예수, 유다에 의해 배반당하심을 묵상합시다.
† 스승이시여, 당신은 부활생명의 가르침으로 우리를 구해주셨습니다.
◎ 당신과 함께 묻히고 당신과 함께 부활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예수의 말씀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열두 제자의 하나인 유다가 나타났다. 그와 함께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이 보낸 무리가 칼과 몽둥이를 들고 떼지어 왔다. 그런데 배반자는 그들과 미리 암호를 짜고 "내가 입맞추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니 붙잡아서 놓치지 말고 끌고 가라." 하고 일러두었던 것이다. 그가 예수께 다가 와서 "선생님!" 하고 인사하면서 입을 맞추자 무리가 달려들어 예수를 붙잡았다. (마르 14:43-46)
입을 맞추며 부르는 선생님! 얼마나 존경과 사랑이 담겨있는 다정한 부름인가. 그러나 우리는 이 부름 뒤에 숨어있는 배신의 추악함을 읽는다.
사랑하는 제자에게서 받은 입맞춤이 죽음의 신호였다는 사실에 우리는 놀라는가?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 삶 속에서 수없이 되풀이되는 행동일 수 있다. 예수의 무한한 사랑을 배반의 쓴 잔으로 보답한 유다야말로 사랑하려 몸부림치면서도 어쩔수 없는 나약함으로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히고야 마는 우리들 모습인 것이다.
스승을 정권의 폭력굴레 속으로 넘기려는 제자와 그것을 알면서도 그의 입맞춤을 받아들이는 스승. 이 두 사람의 마음에 흐르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제자에 대한 예수의 한없는 연민과,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몰고가는 자신에 대한 유다의 허무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어떤 경우에도 절망하지 말자. 절망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마지막 보루를 무너뜨리는 것 아닌가. 상처 입힌 이의 아픔에 주목하노라면 사랑이 살아나고 거기에서 희망은 다시 싹튼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 아버지께 청하오니 내 맘속에 주의 상처 깊이 새겨주소서.
제3처 예수, 대사제들과 의회 원로들에 의해 심문받으심을 묵상합시다.
† 스승이시여, 당신은 부활생명의 가르침으로 우리를 구해주셨습니다.
◎ 당신과 함께 묻히고 당신과 함께 부활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대사제들과 온 의회는 예수를 사형에 처할 만한 증거를 찾고 있었으나 하나도 얻지 못하였다. 그 때에 대사제가 한가운데 나서서 예수께 "이 사람들이 그대에게 이토록 불리한 증언을 하는데 그대는 할 말이 없는가?" 하고 물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입을 다문 채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대사제는 다시 "그대가 과연 찬양을 받으실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인가?"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그렇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이 말을 듣고 대사제는 자기 옷을 찢으며 "이 이상 무슨 증거가 더 필요하겠소? 여러분은 방금 이 모독하는 말을 듣지 않았습니까? 자,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하고 묻자 사람들은 일제히 예수는 사형감이라고 단정하였다. (마르 14:55;60-64)
묵언. 침묵하는 예수. 묵언을 깨며 진실을 밝히시는 예수의 모습과 침묵이 흐른 뒤 웅성거리는 의회의 분위기.
진실을 눈앞에 보면서도 모르는 척 추악한 분노로 속옷을 찢는 대사제의 어리석음을 보라. 주님께서는 예언자 요엘을 통해 옷만 찢지 말고 심장을 찢으라고 하시지 않았던가!
예수께서 밝히시는 진리의 빛 앞에 찢어진 옷이 거짓을 가릴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사람들은 대사제의 찢어진 옷을 보면서 그의 거짓을 보지 못한다. 직위 높은 이의 연기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속고 있는가. 역설적이게도 진리의 빛에 사람들의 눈이 멀어버린 것일까?
가만히 가슴에 손을 얹고 자신을 돌아보자. 우리가 누군가에게 단죄의 옷을 찢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면, 그것은 어디에서 오는가. 내가 찢은 옷 속에 나의 편견과 무지가 슬며시 드러나고 있지는 않은가.
◎ 아버지께 청하오니 내 맘속에 주의 상처 깊이 새겨주소서.
제4처 베드로, 예수를 세 번 부인함을 묵상합시다.
† 스승이시여, 당신은 부활생명의 가르침으로 우리를 구해주셨습니다.
◎ 당신과 함께 묻히고 당신과 함께 부활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베드로가 불을 쬐고 앉아 있을 때 어떤 여종이 베드로를 유심히 들여다보며 "이 사람도 예수와 함께 있었어요." 하고 말하였다. 베드로는 그 말을 부인하면서 "여보시오, 나는 그런 사람을 모르오." 하였다.
얼마 뒤에 또 어떤 사람이 베드로를 보고 "당신도 그들과 한패요." 하고 말하자 베드로는 "여보시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오." 하고 잡아떼었다.
그 뒤 한 시간쯤 지나서 또 다른 사람이 "이 사람은 분명히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이오. 이 사람도 갈릴래아 사람이 아니오?" 하며 몰아세웠다. 베드로는 "여보시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하며 끝내 부인하였다. 베드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닭이 울었다.
그때에 주께서 몸을 돌려 베드로를 똑바로 바라보셨다. 그제서야 베드로는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주님의 말씀이 떠올라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
(루가 22:56-62)
삶에 대한 애착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이리라. 그토록 존경하고 사랑하던 스승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베드로에게 우리는 질타의 시선을 보낼 수 있는가. 끝내 스승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제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시는 예수. 스승의 눈을 바라보는 제자의 눈. 두 눈이 부딪치면서 무엇이 오고갔을까. 스승의 눈빛에서 자신에 대한 비난이 아닌 연민의 정을 느낀 베드로 마음은 어떠했을까. 밖으로 나가 슬피 우는 베드로에게서 우리는 무엇을 느끼는가.
우리의 일상 속에서 무시로 생명과 평화의 길을 부정하곤 하는 우리에게도 예수의 연민어린 시선이 머문다는 사실을 새기자.
◎ 아버지께 청하오니 내 맘속에 주의 상처 깊이 새겨주소서.
제5처 예수, 빌라도에 의해 사형선고 받으심을 묵상합시다.
† 스승이시여, 당신은 부활생명의 가르침으로 우리를 구해주셨습니다.
◎ 당신과 함께 묻히고 당신과 함께 부활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빌라도는 대사제들과 지도자들과 백성들을 불러모으고 예수를 놓아주고 싶어서 그들에게 다시 그 뜻을 밝혔으나 그들은 굽히지 않고 "십자가형이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하고 소리질렀다.
빌라도는 세 번째로 "도대체 이 사람이 무슨 죄를 지었단 말이냐? 나는 이 사람에게서 사형에 처할 죄를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러니 이 사람을 매질이나 해서 놓아줄 생각이다." 하고 말하였으나 무리들은 더욱 악을 써가며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고 소리질렀다. 마침내 그들의 고함소리가 걷잡을 수 없게 되자 빌라도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선언한 다음 폭동과 살인죄로 감옥에 갇혀 있던 바라빠는 그들의 요구대로 놓아주고 예수는 그들 마음대로 하라고 넘겨주었다. (루가 23:13;20-25)
빌라도, 그의 막강한 권력도 군중의 함성 앞에서 무력해지고 만다. 다중의 위세 앞에 정당한 길을 외면하고 마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느끼는가.
우리 역시 진리 앞에서 머뭇거리고 마는 나약한 존재 아닌가. 예수께서 지니고 계시는 모든 것, 그것은 참 진리의 빛이다. 빌라도는 영원한 것에의 목마름을 느꼈다. 그래서 물었다. 진리가 무엇이냐고. 예수는 다만 눈빛으로 답할 뿐이다. 삼척동자도 알만한 일을 왜 묻느냐고.
그러나 빌라도는 그 답을 받아들일 용기가 없었다. 그의 삶 깊숙한 곳으로 예수가 들어왔을 때, 정작 그가 갈구하고 있던 것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차버리고 만다. 그는 더 소중한 것을 위해 작은 것을, 영원한 것을 위해 잠시 지나가는 것을 포기할 용기가 없었다.
우리도 진리 앞에서 빌라도처럼 머뭇거린다. 우리의 삶은 진리 앞에서 사뭇 갈등한다. 그 갈등을 뛰어넘어 진리로 나아가는 사람은 아름답다.
그분은 침묵하셨다. 빌라도에게 속한 세상과 하느님께 속한 백성들 사이에서, 권력을 탐하는 무리들과 무력한 백성들 사이에서, 비열한 부자들과 가난한 백성들 사이에서, 그분은 땅에 발을 더 굳건히 딛기 위해 하늘을 더 오래 바라보셨다.
그분은 침묵하셨다. 유다의 사제들이 그분을 고발하고 로마의 권력자들이 사형선고를 내릴 때에도, 고요한 침묵 속에서 하느님의 본질만을 응시하셨다. 하늘의 기쁨, 땅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 그분은 외롭고 고달픈 길을 받아들이셨다.
◎ 아버지께 청하오니 내 맘속에 주의 상처 깊이 새겨주소서.
제6처 예수, 조롱받으심을 묵상합시다.
† 스승이시여, 당신은 부활생명의 가르침으로 우리를 구해주셨습니다.
◎ 당신과 함께 묻히고 당신과 함께 부활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병사들은 예수를 총독 관저 뜰 안으로 끌고 들어가서 전 부대원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예수께 자주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머리에 씌운 다음 "유다인의 왕 만세!" 하고 외치면서 경례하였다. 또 갈대로 예수의 머리를 치고 침을 뱉으며 무릎을 꿇고 경배하였다. 이렇게 희롱한 뒤에 그 자주색 옷을 벗기고 예수의 옷을 도로 입혀서 십자가에 못박으러 끌고 나갔다. (마르 15:16-20)
인간은 조롱을 받았을 때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피가 솟구치는 분노와 견딜 수 없는 굴욕감이 그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반응은 어느 쪽도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을 조롱하는 그들의 어리석음에 무한히 연민한다. 자신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조차 깨닫지 못하는 이들을 애처롭게 아파하신다.
우리도 저 우매한 군중처럼 때로 타인에 대한 이해보다는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면서 질타와 조롱을 퍼붓지는 않는가. 예수를 때리고 침 뱉고 조롱한 병사들이 특별히 사악한 사람들일까? 아니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의 아들’들이었다. 우리가 누군가를 조롱하고 싶을 때 그것이 우리의 몰이해에서 연유될 수 있는 것이다.
◎ 아버지께 청하오니 내 맘속에 주의 상처 깊이 새겨주소서.
제7처 예수, 십자가 지심을 묵상합시다.
† 스승이시여, 당신은 부활생명의 가르침으로 우리를 구해주셨습니다.
◎ 당신과 함께 묻히고 당신과 함께 부활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희롱한 뒤에 그 자주색 옷을 벗기고 예수의 옷을 도로 입혀서 십자가에 못 박으러 끌고 나갔다. (마르 15:20)
죽음의 형틀을 자신의 어깨에 걸머지고 언덕을 오르신다. 예수께서 느끼신 육신의 고통과 영혼의 번민이 주는 무게감 - 이 둘 중 과연 어느 것이 더 무거웠을까. 실제 고통을 체험해보지 않은 이는 육중한 십자가의 무게가 어깨뼈를 짓이길 때 느낄 육체적 고통을 상상하기 어렵다. 고통이 극에 달했을 때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번민은 차라리 빨리 끝장이 나기를 바라는 염원으로 바뀔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예수의 마음속을 흐르던 생각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분의 육체적 고통과 영혼의 고뇌를 우리는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그분은 그 모든 것을 견뎌내셨다. 고단한 삶의 무게가 우리의 어깨를 아프게 짓누를 때, 예수께서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신 저 고통의 무게를 가늠해보자. 그리고 우리도 삶의 고단함을 이겨나갈 수 있도록 당신의 힘을 주십사고 청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분은 목수의 아들이셨다. 나무의 향과 끌칼의 날카로움이 만나,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물건이 창조된다. 나무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고 그분 앞에선 금속성 끌칼도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모든 게 그분 손끝에 닿으면 일용한 양식이 된다. 그리고 당신이 곧 그 음식이 되어 우리에게 오셨다.
목수의 작업대를 거룩하게 만드시고 노동자들의 아픔을 가슴에 새기며 사셨던 나자렛 예수. 그분이 십자나무를 당신 등으로 떠받치고 당신의 손으로 어루만지신다. 그분에게 닿으면 죽음조차 거룩해진다.
◎ 아버지께 청하오니 내 맘속에 주의 상처 깊이 새겨주소서.
제8처 예수, 키레네 사람 시몬의 도움을 받으심을 묵상합시다.
† 스승이시여, 당신은 부활생명의 가르침으로 우리를 구해주셨습니다.
◎ 당신과 함께 묻히고 당신과 함께 부활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들은 예수를 끌고 나가다가 시골에서 성안으로 들어오고 있던 시몬이라는 키레네 사람을 붙들어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의 뒤를 따라가게 하였다. (루가 23:26)
시골에서 성안으로 들어오다 붙들렸던 시몬. 일견 운이 없는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가장 가까이서 예수의 고통을 나눌 수 있었으니까.
가장 필요할 때 예수께 도움을 드렸던 시몬은 우리 눈에 우연히 선택받은 사람처럼 보인다. 과연 우연이었을까? 아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 바로 그 자리, 현장에 있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가시던 고통의 길 한 모퉁이에서 조용히 함께 걷고 있었던 것이다.
이 세상의 고통받는 무수한 사람들,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때로 그들 곁에서 함께 걸어갈 용기를 지닌 사람만이 자신의 길에서 예수를 만날 수 있다.
우리 자신의 발자욱을 돌아보자. 우리는 지금 어느 곳을 걷고 있는가. 누구와 함께 걷고 있는가.
◎ 아버지께 청하오니 내 맘속에 주의 상처 깊이 새겨주소서.
제9처 예수, 예루살렘 여인들을 위로하심을 묵상합시다.
† 스승이시여, 당신은 부활생명의 가르침으로 우리를 구해주셨습니다.
◎ 당신과 함께 묻히고 당신과 함께 부활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백성과 여자들이 큰 무리를 이루어 예수를 따라가고 있었는데, 여자들은 그분을 위해 가슴을 치며 통곡하였다. 예수께서는 그 여자들을 돌아보시고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의 딸들이여, 나 때문에 울지 말고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식들 때문에 우시오.
(루가 23:27-28)
통곡하는 예루살렘의 여인들을 오히려 위로하시는 예수. 죽음을 향해 걸어가시는 그 순간까지 그분의 시선은 타인을 향해 열려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산을 오르고 있다. 생명의 길을 살아왔던 사람이 세상의 사형선고를 받고 죽음을 맞이하러 가는 길목에 함께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깔개를 깔고 나뭇가지를 흔들며 환호하던 사람들,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 외치더니 이제 예수의 죽음을 보기 위해 몰려간다. 갈대 같은 마음이다.
하지만 그들 중 어떤 여인들은 가슴을 치며 통곡한다. 아마도 예수에 대한 연민과 회한 탓이리라. 지금 우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신 예수께서는 우는 여인들의 마음을 위로하시며 정작 측은한 사람들은 우리 자신임을 상기시키신다. 그러나 군중 속의 여인들은 용감하다. 살기등등한 남자들을 의식하지 않는다. 그들의 통곡은 저항이다.
예수의 얼굴을 바라보며 우리 가슴 속에 눈물이 흐르고 있는지 느껴보자. 울어야 할 때 울 줄 안다는 것은 결코 약한 모습이 아니다. 오히려 이웃의 고통을 바라보면서도 아무 아픔을 느낄 수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비정상인 것이다.
◎ 아버지께 청하오니 내 맘속에 주의 상처 깊이 새겨주소서.
제10처 예수, 십자가에 못박히심을 묵상합시다.
† 스승이시여, 당신은 부활생명의 가르침으로 우리를 구해주셨습니다.
◎ 당신과 함께 묻히고 당신과 함께 부활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마침내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그리고 주사위를 던져 각자의 몫을 정하여 예수의 옷을 나누어 가졌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때는 아침 아홉 시였다. 예수의 죄목을 적은 명패에는 "유다인의 왕" 이라고 씌어 있었다. (마르 15:24-26)
‘마침내’의 함축적인 의미는 ‘결과는 그렇게 끝장나도록 예정되어 있었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 세상은 진리를 죽음에 붙이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세상을 짓고 섭리하는 진리를 피조물이 제거하려 한다는 아이러니를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는 진정 스승 예수를 따르려 하고 사모하고 있는가?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발을 멈추자. 그분의 죽음 앞에서 왜 죽으셔야 하느냐 여쭤보자. 이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냐고 여쭈어보자. 그리고 그분의 답을 들어보자.
우리시대에 교회가 무엇인가. 영혼의 복락을 약속해주는 증권거래소인가? 아니면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이만저만한 사랑을 나누는 싸롱인가? 고난이 많은 시대에 교회가 풍요를 누린다면, 이미 교회가 아니다. 슬픔이 많은 시대에 교회 안에만 웃음소리 낭자하다면, 이미 교회가 아니다. 세상의 권력자처럼 교회 역시 권력이 난무한다면, 이미 교회가 아니다. 제 땅에서 유배된 자들의 터전에 마천루 같은 빌딩을 짓고, 성채 같은 교회당을 올리느라 분주하다면, 이미 교회가 아니다.
교회는 세상 가운데 있지만, 세상과 다르게 존재해야 한다. 교회는 세상 깊숙이 파고들지만,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
우리가 세상과 흥정하고 거래할 때마다 우리는 예수를 한 번 더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다. 하느님이 거저 주시는 사랑, 예수님이 몸 바쳐 주시는 평화를 위해 교회는 먼저 나태한 자신을 못박을 준비를 해야 한다.
◎ 아버지께 청하오니 내 맘속에 주의 상처 깊이 새겨주소서.
제11처 예수, 회개하는 죄수에게 하느님 나라를 약속하심을 묵상합시다.
† 스승이시여, 당신은 부활생명의 가르침으로 우리를 구해주셨습니다.
◎ 당신과 함께 묻히고 당신과 함께 부활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죄수 중 하나도 예수를 모욕하면서 "당신은 그리스도가 아니오? 당신도 살리고 우리도 살려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다른 죄수는 "너도 저분과 같은 사형 선고를 받은 주제에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가 한 짓을 보아서 우리는 이런 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저분이야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이냐?" 하고 꾸짖고는 "예수님,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에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예수께서는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루가 23:39-43)
스승님 왼쪽에 매달려 있던 사나이를 생각해보자. 그는 같은 십자가형을 당하면서도 죽는 순간까지 남을 저주하고 모욕하고 있다. 참으로 불쌍한 영혼의 소유자다. 그는 어쩌면 이 세상에서 단 한 번도 따뜻한 사랑과 신뢰를 받아보지 못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타인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찬 불행을 겪고 있다. 반면 오른쪽에 매달려 있던 사내는 예수께 하느님 나라로 가실 때 저를 기억해 달라고 청한다. 진리에 기댈 줄 알거니와 겸손하고 따뜻한 심성을 지녔기에 가능한 일이다.
함께 죽어가는 이가 당신에게 조롱을 보내고 있지만, 당신은 하실 수만 있다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그의 어깨를 감싸안아 주셨겠지요. 상처투성이인 그이 몸과 마음을 포근히 안아주셨을 터입니다.
스승님, 우리가 누군가에게 조롱받을 때, 분노하지 않고 연민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그의 돌같이 굳어버린 마음속에는 소외로부터 오는 지독한 고독이 자리잡고 있음을 깨닫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스승님, 당신을 알아보고 당신께 의탁하는 사람의 아름다움을 우리도 닮게 해주십시오. 진리 앞에서는 나의 생명을 기꺼이 의탁할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을 주십시오.
◎ 아버지께 청하오니 내 맘속에 주의 상처 깊이 새겨주소서.
제12처 예수, 십자가 위에서 어머니와 그의 사랑하는 제자에게 말씀하심을 묵상합시다.
† 스승이시여, 당신은 부활생명의 가르침으로 우리를 구해주셨습니다.
◎ 당신과 함께 묻히고 당신과 함께 부활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예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서 있는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먼저 어머니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시고 그 제자에게는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때부터 그 제자는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
(요한 19:26-27)
이 순간은 죽음 직전에 하늘이 허락하시는 평화의 때일까? 예수는 평화 가운데 어머니를 생각한다. 가장 사랑하던 두 사람, 어머니와 제자를 하나로 묶어주신다.
아들의 말을 들으며 어머니의 가슴에 흐른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심장이 칼에 꿰뚫리듯하는 아픔을 안고 침묵으로 아들에게 건넨 말은 무엇이었을까.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모든 것을 아들에게 맡기는 것 뿐이었다. 우리도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뼈저리게 절감할 때가 있다.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늘에 모든 것을 의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이의 마음을 이어 생명을 사랑해내는 것일 터다.
◎ 아버지께 청하오니 내 맘속에 주의 상처 깊이 새겨주소서.
제13처 예수,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을 묵상합시다.
† 스승이시여, 당신은 부활생명의 가르침으로 우리를 구해주셨습니다.
◎ 당신과 함께 묻히고 당신과 함께 부활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세 시에 예수께서 큰소리로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하고 부르짖으셨다. 이 말씀은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이다. 거기에 서 있던 사람들 몇이 이 말을 듣고 "저것 봐!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르는구나." 하였다.
어떤 사람은 달려오더니 해면을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 끝에 꽂아 예수의 입에 대면서 "어디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주나 봅시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큰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셨다.
(마르 15:34-37)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 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으로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무슨 말을 해야 하는가. 아들의 죽음을 지켜보는 어머니 마리아에게 무슨 위로를 드릴 수 있는가. 곁에 있던 요한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예수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인간적 감상에만 젖어 진실을 보지 못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들은 죽음 너머의 빛을 이미 바라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느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로부터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슬픔을 뛰어넘어 영원을 바라볼 수 있는 힘이 솟아날 것이다.
우리도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바라보며 허무에 빠지지 않도록 하자. 죽음 그 너머의 밝아오는 빛을 바라보자. 그리고 오직 죽음만이 참된 삶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라는 스승의 가르침을 상기하자. 거짓된 것을 죽이는 곳에 참된 생명이 피어난다는 가르침을.
◎ 아버지께 청하오니 내 맘속에 주의 상처 깊이 새겨주소서.
제14처 예수, 무덤에 묻히심을 묵상합시다.
† 스승이시여, 당신은 부활생명의 가르침으로 우리를 구해주셨습니다.
◎ 당신과 함께 묻히고 당신과 함께 부활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요셉은 시체를 내려다가 미리 사가지고 온 고운 베로 싸서 바위를 파서 만든 무덤에 모신 다음, 큰 돌을 굴려 무덤 입구를 막아놓았다. (마르 15:46)
"이제 평화가 왔다"고 알리는 이의 발걸음이 그리도 빛나는 것은, "이제 우리가 사람이 되었다"고 선언하는 이의 발걸음이 그리도 아름다운 것은, 예수께서 세상의 평화를 그리도 간절히 원했던 탓이다. 예수처럼 우리도 참사람이 되라고 목타게 호소하셨던 까닭이다.
이제 그분은 당신의 몫을 다 하시고 내려오셨다. 고난의 십자가에서 우리가 손잡은 땅으로 낮게 내려 앉으셨다. 이제 우리가 마련한 집으로 그분을 모셔야 한다. 거기서 다정한 이야기 나누고, 서로가 네 덕분이다,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내딛는 발걸음마다 평화가 피어나고 우리가 건네는 말마디 마다 사랑이 묻어나게 해야 한다. 그분의 사랑을 우리가 나누고, 세상이 나누게 해야 한다.
이제 그분의 육신이 이 땅에 온전히 묻히셨다. 집 없이 떠돌던 그분이 이제 당신 집을 지으셨다. 이 산과 바다, 이 땅에 흐르는 강물 속에 그분이 계신다. 새들과 벗하고 물고기들과 친구하신다. 일렁이는 물결 속에 그분이 계시고 찰랑이는 파도 속에 그분이 계신다. 발바닥을 간질거리는 흙먼지 속에 그분이 계시고 싹트는 풀포기 사이에 그분 숨어 계신다.
죽으시고 묻히심으로써 이제 비로소 우주와 하나가 되신 스승님. 그분이 우리와 다함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신다. 그대, 어디 있느냐고, 우리를 찾고 계신다. 그렇다면 우리는 "저 여기 있습니다" 대답할 준비 되어있는가?
끝기도
스승님,
십자가 길을 마치며 당신께 감사를 드립니다.
내내 당신이 함께 걸으셨다는 것을 느낍니다.
당신이 우리 앞에 걸어가셨고 우리는 다만 따랐습니다.
당신의 모습을 보면서 당신의 마음을 느꼈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누구신지 더 가까이 알게 되었고
더 애틋한 사랑의 정을 품으며
더 깊이 따르고자 하는 열정에 사로잡힙니다.
당신의 사랑은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며
도도히 흐르는 강물이며
산을 울리는 메아리입니다.
스승님,
당신을 닮으려는 열망이 들불처럼 타올라
이웃으로 세상으로 번지게 해주십시오.
우리가 삶 안에서 고통과 시련을 겪게 될 때
당신이 먼저 그 십자가를 지고 가셨다는 것을 잊지 않게 하시고
우리의 고통이 누군가를 위한 십자가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