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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보좌로부터흐르는생명수 원문보기 글쓴이: 하늘산소
갈3:21-29, 율법의 한계와 그리스도안에서 완성.
지난주에 바울은 갈 3장 19-20절에서 율법의 목적은 죄를 드러내기 위함이었고, 이 목적도 오로지 한정적인 기간 동안만이라는 진리를 명백하게 설명했습니다. 이제 21절, 그는 다른 각도에서 율법과 약속의 관계에 대하여 질문합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바울의 대답은 간단합니다,"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하지만 유대주의자들은 바울의 이 간단한 질문과 대답에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21절의 질문에 대한 답과, 그 답에 대한 설명이 21절부터 25절의 본문입니다.
율법으로는 결코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이것은 율법은 생명을 가져올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진리를 선포합니다. 다시 말해서 생명과 구원에 관한 한 율법은 무능력합니다. 무능력할 뿐 아니라 율법을 지키며 그 안에서 사는 자들에게 저주를 가져다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10절) 그런가하면 롬7"10절에는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다시 말하면 율법을 어기는 사람들에게 율법은 사망을 선고하고 그뿐 아니라 롬7:7절에서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고 하신 것처럼 죄의 세력을 날카롭게 날을 세워 사람들로 경험하게 하고, 또 죽었다고 선고받은 사람들에게는 더이상 생명을 줄수 없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살펴 보았듯이 율법은 죄를 드러내주고 깨닫게하는데 목적이 있을뿐 생명을 주기 위해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은 생명을 줄수 있는 그 무엇이 없기 때문에 그 무능력을 깨닫고 약속의 자손이 오시기까지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을 절감하고 율법을 통해 그리스도께로 나아가기를 소망하라는 의도인 것입니다.
22절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여기서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는 율법의 기능을 말합니다. 이 본문에 '성경’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그라페 graphe인데, 이것은 ’기록된 것‘을 의미, 즉 ‘기록된 율법’을 가리킵니다. 22절 '기록된 율법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는 율법이 유죄를 인정하는 죄인들을 감옥에 가두기 위하여 주어졌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은 ‘모든 것’, 즉 온 세상 사람들을 죄의 감옥 안에 가두어 둡니다. 율법적인 신앙은 죄의 감옥 안에서 사는 삶입니다. 왜그럴까요? 율법은 생명을 줄수 없기 때문에 죽음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2절 하반절에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이말씀을 통해 주시는 메세지는 율법이 모든 사람을 죄의 감옥 안에 가두어 둔 이유는,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것, 그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기 위함이다"라는 것입니다. 행13:39절을 보면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하셨습니다.
23절과 24절을 보면
23절"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19절에서는 '이 율법은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로 말씀했는데 23절에는 믿음으로, 19절에서 범법함으로가
23절에서는 매인 봐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단어는 미완료형으로 되어 있어 믿음이 오기전까지 계속해서 인간은 율법의 감시를 받으며 속박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오실 그리스도때까지, 이 말씀은 지금도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는 율법의 감시를 받고 매여서 갇혔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믿음'의 단어는 원문을보면 텐의 정관사를 붙여서 그 믿음의 때, 즉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져다 주는 그 예수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자신을 살펴 보아야 하는데 기독교의 옷을 입었다고 하고는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죄인으로서 감옥에 갇혀 살고 있지는않는지,
24절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전에 성경은 몽학선생이라고 번역 항ㅆ는데 우리의 개념으로 초등교사는 오역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것은 헬라어 파이다고고스 paidagogos 의 번역어입니다. 파이다 paida 는 어린아이를 뜻하고 고고스 gogos 는 '데리고 다는 자'를 뜻합니다. 그래서 파이다고고스 는 아이들을 학교로 데리고 갔다 데리고 오는 일을 하고, 또 아이들의 행동을 지켜 보는 일을 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일은 주로 그 집의 ‘노예’가 맡아 했습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사람은 ‘교사’ 또는 ‘선생’이 아니라, 그 집의 사는 '종' '파이다고고스'는 아이가 자랄때 까지 한시적 으로 가두거나 묶거나 가르쳤습니다. 아이가 성장 할 때까지, 성장 한 후에는 그는 더 이상 파이다고고스 아래 있지 않습니다. 참고로'교사'는 헬라어로 디다스칼로스 didaskalos입니다.
다 성장했음에도 '파이다고고스' 아래 있다면 그는 쟁애인일 것입니다. 갈4: 2-3절에는 파이다고고스 아래 있는 것을 종노릇하는 어린 아이 시절로 묘사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은 우리가 종의 신분으로 살 때에 우리를 가두고 매는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했던 또 다른 노예입니다. 우리가 장성하면 더 이상 파이다고고스 아래 있지 않은 것처럼,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받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율법이라는 파이다고고스 아래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을 받은 후에도 계속해서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받으려고 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영적인 ‘어른 아이’이며, 영적인 ‘장애인’이며, 영적인 ‘노예’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질문이 될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을 안지켜도 되잖아, 우린는?
어떤 죄수가 감옥에서 석방되었습니다. 아 난 자유다, 그리고 자기가 하고픈 대로 행동합니다. 남의 집에 들어가서 남의 물건을 집어 들고 나옵니다. 그는 다시 잡혀서 감옥에 가게 됩니다. 감옥에서의 규율을 잘지켜서 모범이 되면 가석방을 받게 되는데 감옥밖에서는 감옥안에서의 규율이 아닌, 지켜야 할 규율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간음하지 말라 했지만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마음에 음욕을 품은 자는 이미 간음을 했느니라,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25절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그리스도의 시대가 옴으로써 율법의 시대는 갔고. 그리스도의 빛이 오니 율법의 어둠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율법은 범죄 행위를 지적하는 제한적인 목적이 있었으며,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이라는 한정적인 기간 동안만 유효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파이다고고스라는 노예의 감시을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분의 변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26절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아주 친한 사이,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는 관계를 말합니다. 우리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써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성경을 꼼꼼히 들여다 보면 구약성서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곳이 없습니다. 율법은 파이다고고스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파이다고고스의 지배아래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젠 그리스도의 후사로서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롬6장입니다."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18절)
세례의 진정한 의미는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입니다.
27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합하는 것'과 '세례'와 '그리스도로 옷입는 것'을 같은 개념으로 표현했는데요. 세례를 받는 것은 그리스도와 합하는 것, 즉 연합이며.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라는 옷을 입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으로 세례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 아들과 딸이 되는 것을 바울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례는 단순한 물세례가 아닌 성령세례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세례를 받으면 신변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시 옷 입었다는 의미를 살펴보면 그사람의 덕목들을 취하여 그사람같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관계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새로운 사람을 입었다는 의미이고 새로운 본성에 참여했다는 것입니다. 엡4:23,24절에서 말씀합니다.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또한 골3:10절에도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새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이기때문에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안에서 그의 형상을 따라 새롭게 창조되어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세례란 무엇입니까?
세례를 받음으로 이제부터 그리스도를 따라 의로운 삶을 살것을 다짐하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닮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자신을 돌아 보세요,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옷 입었는지, 그리스도의 성품에 참여하고 있는지,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3,14)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세례 받을 때 강물에 완전히 들어갔다가 나온 후 하얀 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이것은 죄의 옷을 벗고 그리스도의 옷으로 갈아입는 것을 상징화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평등하게 하는 종교입니다.
28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종과 문화의 장벽이 허물어지고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종이나 자유인이나" 는 그리스도 안에서 계급과 지위의 장벽이 허물어지고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남자나 여자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 차별의 장벽이 허물어지고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것이 회복되어지는 것입니다.
29절"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바울은 이제 결론을 맺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약속되어진 자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아브라함의 약속된 자손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약속된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약속을 유산으로 받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결단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십시오. 여러분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인 아들, 딸이 되었기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의정부 등대지기 하늘산소.
첫댓글 감사
감사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