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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9장 6절: 영존하시는 아버지!(Everlasting Father)
여호와 라파! 만병의 의사가 되시고 치료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 주 예수님께서 영존하시는 아버지가 되심을 깨닫게 은총을 베풀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많은 글을 읽는 분들이 말씀을 통해서 위로받고 또 치료를 받고 새힘을 얻기를 바랍니다. 갈 길을 몰라서 방황하시는 분들이 길을 보고서 올바른 길로 방향을 전환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삼위 하나님께 세세토록 영광 충만하기를 빕니다.
샬롬! 새해가 또 바르게 지나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사야 9장 6절의 말씀을 보면서 의미를 생각하고 같이 은혜를 받기를 원합니다. 먼저 본문을 보시겠습니다. 3가지 버전으로 보시겠습니다.
사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5. 우리를 위하여 태어날 한 아기, 우리에게 주시는 아드님, 그 어깨에는 주권이 메어지겠고 그 이름은 탁월한 경륜가, 용사이신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 불릴 것입니다.
6. For to us a child is born, to us a son is given, and the government will be on his shoulders. And he will be called Wonderful Counselor, Mighty God, Everlasting Father, Prince of Peace.
공동 번역 성경에는 5절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NIV 본입니다. 이제 두 분의 글을 통해서 어떤 의미인지 알아보겠습니다. 한 분의 글은 간단하게 전체를 설명했고 또 다른 분은 말씀이신 예수님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을 했습니다. 저는 영존하시는 아버지 부분을 설명하겠습니다.
이사야 9장 6절
"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 개역 한글판 )
" 참으로 한 아이가 우리를 위하여 태어났다. 그가 한 아들을 우리를 위하여 주셨다.
그리고 그의 어깨 위에 그 통치권이 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 상담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고 사람이 부를 것이다 " ( 원문 직역 )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들에게 암울한 상황 가운데 소망을 주시기 위해 이사야 선지자를
가지시고 약 700년 이후에 메시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가르치고 계십니다.
" 전에 고통 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케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같이 그들이 주의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이는 그들의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의 갑옷과 피 묻은 복장이 불에 섶같이 살라지리니 "( 사 9 : 1 - 5 )
"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
( 마 4 : 12 - 16 )
이 세상에 거대한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첫째
신인 양성 일 인격을 지니신 분입니다.
"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 ( 사 9 : 6상 )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일 인격은 어떠한 경우에도 혼합되지 않고, 변화되지 않고, 분리되지 않고, 분단되지 않습니다.
둘째
머리 되시는 분입니다. "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 사 9 : 6상 )
"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 마 28 : 18 )
예수 그리스도는 천지의 대 주재로 엄위의 왕국인 세상 나라를 공의로 다스리시고 은혜의 왕국인 세상 나라를 은혜로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셋째
원상의 그리스도입니다.
" 그 이름은 기묘자라, " ( 사 9 : 6중 )
" 펠레 " (기묘자)라는 뜻은 모든 피조물들과는 절대적으로 구분되는 초월하시고 기이하신 분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자 하나님입니다. "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
( 골 1 : 15 - 17 )
넷째
영원한 말씀 되시는 분입니다.
" 모사라, " ( 사 9 : 6중 )
" 요에츠 " (모사)라는 뜻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상담자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말씀으로 계셨고 말씀하신 분입니다.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
( 요 1 : 1 - 4 )
다섯째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 ( 사 9 : 6중 )
" 엘 깁보르 "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은?
" 천지의 대 주재로 영원히 존재하시며 스스로 낮아지셔서
당신의 백성들과 거룩한 언약을 맺으시고 그 맺으신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지시고 역사하시는 분 "입니다.
여섯째
영존하시는 아버지 되시는 분입니다.
"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 ( 사 9 : 6하 )
" 아비 아드 "(영존하시는 아버지)라는 뜻은?
예수 그리스도는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영원한 부성적 사람을 가지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 너희가 나를 알았다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
( 요 14 : 7 - 9 )
일곱째
평강의 왕 되신 분입니다.
"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 사 9 : 6하 )
" 싸르 샬롬 "(평강의 왕)이라는 뜻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 사역 은총으로 주시는 해방론적 측면의 자유의 은총과 부활의 은총으로 주시는 특권론적 측면의 자유의 은총과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한 영육의 균형 잡힌
복의 은총을 주시는 왕 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영생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
( 요 17 : 3 )
그러므로 성삼위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최성환의 음악 산책에서 가져왔습니다.
다음은 이 인미 님의 글입니다.
작성자 이 인미
홈페이지 http://blog.naver.com/mindfirst
제목 육신이 된 말씀, 로고스 (2019년 12월 15일)
찬송 123장 저 들 밖에 한밤중에/ 564장 예수께서 오실 때에/
206장 주님의 귀한 말씀은/
성경 잠언 8:22-27, 요한복음 1:1-5
교독 116. 구주 강림 (2)
줄임 글
유대-기독교 전통이 이야기하는 그리스도론을 묵상합니다. 거의 동일한 주제의식이 동일한 구조에 담겨 전개되는 잠언 8장 본문과 요한복음 1장 본문을 신앙 전통의 눈으로 살핍니다. 잠언 8장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율법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지혜가 이 세상에서 살아 움직인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요한복음 1장은 율법을 완성하러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그분은 육신이 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론을 묵상하며, 이제 한 주일 앞으로 다가온 아기 예수 탄생을 간절히 고대합시다.
여는 글
이천여 년 전 유다 땅 베들레헴이라는 아주 작은 동네에 아주 작은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어른이 되어 활동할 때 그는 ‘나사렛 예수(Jesus of Nazareth)’로 알려졌습니다. 기독교 교회 전통에서 강림절(‘대림절, 대강절’이라고도 부름)은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대하며,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내 마음과 몸을 삼가며, 하나님의 거룩함을 받아 겸손히 묵상하는 기간입니다. 오늘은 (‘지혜’라는 주제를 고려해 교독문은 ‘구주 강림[2]’를 읽었지만) 강림절 세 번째 주일입니다. 예배당을 소유한 교회들은 대체로 오늘, 지지난 주일부터 마련해둔 강대상 위 네 개 촛불 중 세 개를 켜놓고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 예람교회 선생님들은 비록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촛불과 같은 상징물이 여기 없을지라도, 강림절 셋째 주일에, 하나님께서 언약하고 실행해주신 성탄을 고대하며, 지금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 너머의 세계를 체험하는 데에 상징물이 (있으면 좋지만) 반드시 필요한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강림절 세 번째 주일, 우리는 이른바 ‘그리스도론’을 토론하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의 모든 주제가 하나같이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내용을 이야기하지만, 그중 그리스도론은 한때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물질’ 인간 육체로 이 세상에서 살았던 분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라, 더 간단치 않은 면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대화할 때 각자에게 깨달음이 다가오리라 예견하며, 옆자리에 앉아있는 이웃을 존중하고 신뢰하며, 무엇보다 성령께서 우리 대화 가운데 함께하실 것이니, 포기하지 말고 과감히, 이 주제에 뛰어들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의인화
의인법(personification , 인격화, 人格化)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 아닌 것을 사람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의인화를 거치면 날짐승인 새가 사람처럼 노래를 부르고, 자연현상인 바람이 사람처럼 울부짖습니다. 초판 발행 때 영어와 불어로 동시 발표되었다고 알려져 있는 작품 <어린 왕자>에서는 예쁜 꽃도 작은 여우도 영어와 불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합니다. 그리고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싯구가 들어있는 윌리엄 워즈워드(William Wordsworth)의 영시(Ode: Intimations of Immortality)에서 의인화는 문학적으로 멋지게 활용되었습니다. “달이 즐거이(The Moon doth with delight)/ 주위를 둘러볼 때에 하늘은 해맑고(Look Round her when the heavens are bare)”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실존 인물 오스트리아 여왕을 여자 주인공으로 하는 뮤지컬 <엘리자벳(Elisabeth)>에서는 ‘죽음(Der Tod)’이라는 인물이 등장해, 대사도 치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춥니다. 공연 포스터에서 엘리자베스 여왕을 안고 있는 남자가 바로 ‘죽음’입니다. 또 프랑스 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에트>에도 ‘죽음(La Mort)’이라는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이 작품에서 ‘죽음’은 여성으로 형상화되어있는데, 상당히 인상 깊은 연기를 펼칩니다.
‘죽음’은 거의 항상 무대에 있으면서 여기저기 물 흐르듯 돌아다닙니다. 문득 ‘죽음’이 어떤 사람 곁으로 바짝 다가설 때가 있습니다. 곧 죽게 될 그 사람은 ‘죽음’이 곁에 있는지 눈치채지 못합니다. 한편 러시아 판 <로미오와 줄리에트>에서 ‘죽음’은 남자 무용수가 맡기도 했고, 어떤 헝가리 공연에서는 ‘죽음’이 아예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죽음’이라는 등장인물이 상징적인 데다 굉장한 볼거리로 기능하긴 하나, 사실상 줄거리 전개 자체에는 특별히 영향을 주지 않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실제로 ‘죽음’이란 등장인물 없이도 <로미오와 줄리에트> 전체 줄거리를 이해하는 데에는 아무 장애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전 성경공부 시간에 함께 읽었던 기독교 고전 <천로역정>에는, 줄거리 전개는 물론 작품의 주제의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의인화가 빈번히 사용되었습니다. 주인공이 언덕 아래 길가에서 만난, 쇠사슬에 묶여있던 세 사람은 단순, 나태, 그리고 거만이었습니다. 뷰티풀 저택(궁전) 안에 살고 있었던 네 자매는 각각 신중, 분별, 경건, 그리고 자애였습니다. 주인공의 ‘천로역정’에, 그들은 반드시 출현해야만 하는 ‘관념’들이었습니다. 이렇듯 의인화는 동식물, 무생물뿐 아니라 추상적 관념이나 철학적 개념들을 표현할 때에도 효과적으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
나는 지혜, 호크마
그래서 잠언 8장에서 ‘지혜’의 활약상을 대할 때 ‘아하! 의인화된 거군!’ 우선 가볍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잠언 8장에 나타난 ‘지혜’는 의인화처럼 보이긴 하나 단순한 의인화가 아닙니다. 이는 유대교의 장엄한 신앙고백입니다. ‘지혜’는 히브리어로 ‘호크마,’ 헬라어로는 ‘소피아,’ 영어로 ‘위즈덤(wisedom, 지혜)’입니다. 한편 같이 나오는 ‘명철’은 히브리어로 ‘빈’으로 발음하는데, 분별(discern), 이해(understanding)를 뜻합니다. 성서 곳곳에 이 동사가 쓰였는데, 그냥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한다기보다는, 사물과 진리에 대한 깊은 숙고를 통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명철 개념은 이 정도로 이야기하고, 유대교의 지혜 개념을 좀 더 풀이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유대교에서 지혜는 특별한 개념입니다. 우선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입니다(잠 9:10). 유대교에서 지혜는 똑똑함, 현명함을 간단히 표상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지혜는 하나님과 직접 관계 맺고 있으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합니다. 잠언 9장에서는 지혜가 일곱 기둥을 깎아 집을 짓습니다(잠 9:1). 짐승을 잡고 포도주를 빚어, 잔칫상을 차립니다(잠 9:2). 그런 다음, 자못 웅장하게 선언합니다.
나 지혜로 말미암아 네가 오래 살 것이요, 네 수명도 길어질 것이다. [잠 9:11]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창조’와 ‘생명’에 인간이 다가가 접촉할 수 있도록 이끕니다. 이 지혜가, 구약성서에서는, 하나님과 나란히 있으되 하나님과 마주 서있으며 하나님께서 창조한 세계에 무관심하지 않은 ‘인격적 존재’로 고백됩니다. 이 잠언 8장은 말하자면 지혜의 자소서(자기소개서)입니다. 그중 22절부터 27절까지가 단연 압권입니다.
주님께서 일을 시작하시던 그 태초에, 주님께서 모든 것을 지으시기 전에 이미 주님께서는 나를 데리고 계셨다. 영원 전, 아득한 그 옛날, 땅도 생기기 전에 나는 이미 세움을 받았다. 아직 깊은 바다가 생기기도 전에, 물이 가득한 샘이 생기기도 전에 나는 이미 태어났다. 아직 산의 기초가 생기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나는 이미 태어났다. 주님께서 아직 땅도 들도 만들지 않으시고, 세상의 첫 흙덩이도 만들지 않으신 때이다. 주님께서 하늘을 제자리에 두시며, 깊은 바다 둘레에 경계선을 그으실 때에도 내가 거기에 있었다. [잠 8:22-27]
여기서 ‘나’는 누구냐면, ‘지혜’입니다. 지혜는 우주론적 의미와 기능을 가지는 자기 정체를 당당히 밝힙니다. 여기 지혜의 정체는 (누구나 금세 알아차릴 수 있듯) 요한복음서의 첫 부분 1장 1절에서부터 5절에 나타난 ‘로고스’의 정체와 거의 겹칩니다. 달리 말하면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豫表) 한다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육신이 된 말씀, 로고스
잠언 8장의 ‘지혜’는 요한복음서 1장 ‘로고스’에 조응합니다. 헬라어 ‘로고스’는 주로 히브리어 ‘다바르’를 받은 것으로 (성서신학자들은) 보는데, ‘다바르’는 하나님의 말씀을 뜻합니다. ‘다바르’를 번역할 때 70인 역 성서(septuaginta)가 ‘로고스’를 많이 썼습니다. ‘포네’도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나, 좀 좁혀서 ‘하나님의 음성’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로고스’는 심오한 의미를 지닌 그리스 단어입니다. 영어로 워드(Word)지만 그냥 일상적 word는 아닙니다. ‘로고스’의 사전적 의미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생각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인간에게 계시됩니다. 그래서 ‘로고스’의 의미를 두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계시입니다. ‘로고스’는 예언자가 하나님께 계시 받은 말씀을 의미합니다. 예컨대 예레미야 1장 4절은, 새 번역 성서가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라고 번역했지만, 원문에 더 가까운 번역은 개역개정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The word of the Lord came to me)”입니다. 둘째, ‘로고스’는 천지창조를 환기합니다. 스토아학파에서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의 합리적 원리를 하나님의 ‘로고스’로 해석한 바 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하나님은 ‘말씀하심’으로써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다’의 히브리어는 ‘아마르’인데 이 단어는 성서 안에서 주로 동사형으로만 쓰였고 명사형으로는 쓰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아마르’를 명사형으로 이해하면 ‘다바르,’ 즉 ‘로고스’에 다름 아니게 됩니다. 요약하면 ‘로고스’는 계시와 창조를 아우르는 하나님의 뜻(생각)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약성서에서 ‘로고스’는 추상적 관념이거나 책에 글자로 인쇄된 말씀이 아니라, 말해지고 실현된 말씀을 가리킵니다. 즉 ‘로고스’는 인간 세상 안에서 활동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서는 이 ‘로고스’를 예수 그리스도로 고백합니다. 골로새서도 히브리서도 동일하게 고백합니다.
그 아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이십니다.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왕권이나 주권이나 권력이나 권세나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분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 [골 1:15-17]
하나님께서는 이 아들을 만물의 상속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를 통하여 온 세상을 지으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하나님의 본체대로의 모습이십니다. 그는 자기의 능력 있는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히 1:2-3]
‘로고스’가 육신이 되어 우리에게 왔다는 것이 요한복음서 1장 ‘여는 글’의 힘 있는 증언입니다. ‘로고스’는 유대교의 지혜(다른 말로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와 매우 흡사하지만, 요한복음서는 그것을 역사적으로 이 땅에 나타나 활동하신 ‘나사렛 예수’에 전적으로 동일시합니다. 요컨대 하나님의 말씀 ‘로고스’는 ‘역사적 예수’의 인생에서 분리되어서는 결코 알려질 수도 없고, 이해될 수도 없으며, 실천될 수도 없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닫는 글
하나님의 말씀 ‘로고스’가 인간 세상에 몸소 친히 나타나 행동하기 시작한 날, 그날이 성탄, 크리스마스(Christmas)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듯, 그리고 요한복음서가 제대로 고백하고 있듯, 그때 그 사람들은 ‘로고스’를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로고스’가 빛으로, 생명으로 이 땅에 태어났는데, 어둠 속에 앉아있으면서 생명에 무뎠던 사람들은 ‘로고스’를 몰라보았습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여기 모인 우리도 사실 그때 그 사람들에 비해 눈곱만큼도, 털끝만큼도 더 나을 것 없는 인간들입니다. 그런 수준에 놓여있는 우리가 ‘로고스’를 알아보고 인식하는 일을 과연 해낼 수 있을까? 결론만 단문으로 간단히 말하면, 해낼 수는 있습니다. 하나 단서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로고스’를 겸손하게 받아들일 때 ‘공동체 단위’에서 우리가 해낼 수 있습니다. 내가 직접 알아내야지, 하고 나서기보다, ‘로고스’가 우리 눈을 열어주시리라 믿으며, 잠잠히 기다려야 합니다. 히브리서 4장은 하나님의 말씀이 ‘알아서 다 하실 거다!’ 설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어서, 어떤 양날 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냅니다. 하나님 앞에는 아무 피조물도 숨겨진 것이 없고, 모든 것이 그의 눈앞에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앞에 모든 것을 드러내놓아야 합니다. [히 4:12-13]
그렇습니다. 우리한테는,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그 어떤 양날 칼보다도 더 날카로운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일밖에는, 딴 방법이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나는 어느 날부터인가 세상 기준 아닌 하나님 기준으로 살고 있었지”하며 자부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 시대에 ‘난 이미 지혜를 받아 가졌다고 자평한다, 난 로고스를 이만하면 좀 안다고 본다’며 으스댔던 어떤 사람(예를 들어 ‘바리새인’)들처럼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자기들 스스로는 의식하지도 성찰하지도 못했지만) 예수님을 몰라본 정도가 아니라 괴롭혔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 주역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다만 겸손히 머리 숙여 성령의 도움을 기도해야 합니다. 천지창조 때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수많은 예언자들에게 친히 찾아가 계시하셨던 ‘로고스’가 살과 피로 구성된 육신으로 오실 날을 기다리는 이 강림절 기간에, 우리가 할 일은, 그저 겸허한 기도뿐입니다. 어쩌면 진정으로 ‘로고스’를 알아보아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이라면, 대놓고 자랑하지 않을 것이며, 은근히 자부하지도 않을 것이며, 이미 그렇게 겸허히 기도하고 있을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성탄일이 다가옵니다. 곧 탄생하실 ‘로고스’ 예수님을 기다리는 기간 동안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까, 궁리합니다. 궁리 끝에 성령의 도움을 기도하는 것밖에 달리할 것 없음을 고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제 저는 마지막으로 영존하시는 아버지에 대해서 조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제 개인적인 체험을 통한 예수님 아버지를 만난 이야기입니다. 모든 분이 다 예수님을 아버지로 만나는 체험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될 줄로 믿습니다.
제 선친 즉 돌아가신 아버지께서는 어부셨습니다. 그리고 농부셨고 12명 가족의 가장이셨습니다. 두 분 할아버지 할머니를 효도로 잘 모시고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8남매를 낳아서 키우시고 돌보셨습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셔서 논과 밭일을 하시고 그리고 노 젓는 배로 남해 바다에서 그물로 고기를 잡으셨습니다. 저는 이런 환경에서 농사짓는 것도 다 보고 그리고 고기 잡는 것도 다 보면서 자랐습니다. 동네에 약 집집마다 자녀를 많이 낳아서 온 동네 인구가 천명은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참으로 평안하고 질서가 있었으며 바다는 풍족했고 논과 밭에서 대식구가 먹을 것을 아버지께서 열심히 일을 하셔서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제 선친은 말이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대부분 경상도 아버지와 같이 평생에 말이 없으시고 제게도 하루 종일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은행 시험에 합격을 해서 남해 대교를 건너서 오는데 아버지께서는 멀리서 저를 보시고 아무 말도 않으시고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누님이 주변의 이웃 동네로 시집을 가셨을 때도 시집간 날 누님이 떠나간 동네 쪽으로 조용히 걸으시다가 오시곤 또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늘 그랬습니다. 제가 지금의 제 아들에게 하루 종일 붙어있으면 잔소리를 하는 것과 달리 한 번도 공부해라는 말도 하지 않으시고 이래라저래라 간섭도 없으셨습니다. 우리 가정은 늘 평안했습니다. 대가족이 살아도 모두가 화목하게 살았는데 이렇게 아버지께서 조용히 사셔서 그런지 모를 일입니다. 그리고 어머니와 평생이 한 번도 다투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글을 모르셨습니다. 50년 전의 시골의 아버지가 대부분 그렇듯이 글을 모르셨습니다. 저는 학교에 다니면서 글을 배우고 공부를 조금 한다고 이런 글을 모르는 아버지를 별로 잘나지 않은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어머니도 그러셨는데 어머니께서 학교에 오시면 부끄럽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고기를 잡으시는 데는 주변에서 따를 사람이 없는 전문가 셨습니다. 그물과 노 젓는 배를 가지고서 삼촌과 같이 너무나 많은 고기를 잡으셨습니다. 상어도 2M쯤 되는 놈을 주낙으로 잡으시고 수많은 종류의 생선을 철마다 잡으셔서 이를 팔아서 논도 많이 사고 밭도 사고 그리고 온 동네 사람들이 나누어 먹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암으로 집에서 임종을 기다릴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다리를 주물어 주실 것을 부탁을 하셨습니다. 저는 이불을 걷고서 아버지의 다리를 주물어 드리려고 만졌을 때 뼈만 남은 다리를 만질 수가 없어서 주물어 드리지 못했습니다. 아버지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부탁을 들어드리지 못한 것입니다. 제게는 오랫동안 이런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고 여러 일들이 있어고 저도 결혼을 해서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결혼을 해서 아내와 아들과 작은 가정을 꾸려나가고 있습니다. 아내 완 늘 다투고 아들에게 늘 잔소리를 하고 그리고 어떤 때는 화를 참지 못하고 내기도 합니다. 이제는 아버지께서 얼마나 위대한 분이셨음을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해 드릴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참회하는 마음으로 어르신들을 뵈면 주저 않고 팔과 다리를 주물어 드리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님을 전합니다.
살아서 직접 곁에서 이렇게 일생을 사랑을 하신 분도 이해가 어려운데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아버지로 인정하는 일이 제게는 쉽지가 않았습니다. 비록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이제는 예수님을 저의 진정한 아버지로 인정을 합니다. 저는 제 선친께서 고등학교 때 돌아가시고 다른 아버지와 같이 살면서 아버지의 도움을 받는 분들을 보면서 우리 아버지가 살아계셨으면 나도 저렇게 도움을 받고 사랑을 받을 수가 있을 텐데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서 예수님을 믿으면서 그런 생각이 자주 들었습니다. 아버지들이 집도 사주고 차도 사주고 그리고 필요할 때 돈도 그 자녀에게 주는 것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사는 것이 제가 자주 이야기를 했지만 정말로 혹독하게 어려웠습니다. 은행에서 고시를 공부하고자 나온 후 지금까지 정말로 극심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직장에 다니고 돈을 벌려고 했지만 모든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 늘 궁핍한 삶을 살았습니다. 홀로 남으신 어머니께서 자신의 장례비용으로 준비해 두셨던 돈도 보내고 남동생이 참으로 크게 도왔고 그리고 교회와 온 교인이 도왔지만 저는 늘 궁핍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도 예수님께서도 돈을 잘 주시지 않았습니다. 저는 돈이 너무나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하나님께서는 그냥 그렇게 견뎌도 아무 걱정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이런 삶이 무려 35년이 넘게 지나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게 돈을 절대로 잘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래도 정말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굶거나 신발이 해어지거나 혹은 옷이 없어서 벗고 지내거나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주변에서 쌀도 주고 그리고 재활용일을 하면서 남이 버린 식기와 옷으로 이 부분은 늘 넉넉했습니다. 그리고 일천칠백으로 시작한 전세는 6천이 되었습니다. 아내가 시집와서 아들을 낳아주고 맹렬히 일을 해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늘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을 너에게 채워주겠다 고 말씀 하셨습니다. 아내는 이런 예수님을 말씀을 믿고서 아들을 키우며 제가 어쩌다 벌어주는 돈으로 참고 잘 살다가 이제는 예수님께서 언제 주시나 내가 벌겠다고 맹렬히 일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늘 말씀을 하셨습니다. 걱정 말아라 걱정 말아라 그러면 저는 어떤 걱정 할 일이 있어도 곧 마음을 다잡고 걱정을 내려놓습니다. 아내는 이런 저를 보면서 분개하고 태~연하다고 소리를 치기도 수도 없이 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경제문제로 싸우면서 살아오고 있습니다.
저는 제처와 재혼을 하기 전에 홀로 살았습니다. 불면과 우울로 소망이 모두가 끊어진 채 밤마다 두려운 밤을 맞이해야만 했고 하루에 정신과에서 지어주는 약을 세 번씩 틀림없이 먹어야만 했습니다. 잠도 못 자고 외롭고 그 외로움이 뼈가 시렸는데 이 외로움이 불면을 불러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늘 세상은 잿빛으로 물들어서 무기력이 저를 지배했습니다. 쉬는 날에도 하루 종일 방에서 그대로 앉은 채로 12시간 꼼짝도 하지 않고 그대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런 제게 예수님께서 하루는 공중에 오셨습니다. 지구를 보시면서 어떤 사람에게 복을 줄까 찾고 계셨습니다. 그렇게 제게 보여 주셨습니다. 저는 즉시 예수님 한국에는 제 짝이 없으니 그렇게 온 세상을 보시고 제 짝을 구해주세요라고 기도했습니다. 제게 신부를 주려고 그렇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 기도는 즉시 응답이 되었고 5천 킬로 떨어진 러시아 국적의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하시고 결혼을 시켜주셨습니다. 처녀에다가 키가 저보다 더 크고 정말로 한국에서 가장 잘난 여자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일 년 뒤엔 아들을 주셨는데 이런 일로 불면과 우울은 천리 만리로 도망을 갔습니다. 제 환경을 순식간에 바꾸어주시고 그리고 저를 감쌓던 어둠을 빛으로 쫓아내셨습니다. 당연히 약도 끊고 누우면 잠을 자는 시간이 벌써 14년이 넘었습니다. 그렇지만 돈은 늘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전기도 자주 끊어지고 수도도 자주 끊어지고 가스도 자주 끊어졌습니다. 반지하 곰팡이를 어린 아들과 제 아내와 그리고 제가 늘 마시고 먹었습니다. 그리고 신용불량자가 되고 집에는 공과금 독촉장이 우체통을 채워도 늘 돈을 잘 주시지 않으시고 또 언제나 그렇듯이 염려 말아라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채워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반지하에서 호텔과 같은 5층의 집으로 7년 전에 이사를 해고 지금까지 살고 있는데 너무나 좋은 집입니다. 집을 주실 때도 한 번에 보게 하시고 한 번에 구하게 하셨습니다. 가정과 집을 주시고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래도 큰돈은 주지 않으시니 늘 우체통엔 독촉장이 쌓이고 택배 하시는 분이 그것을 아시고 우리를 길에서 만나면 000호 아저씨! 그 돈 내지 않으면 안 돼요 하고 웃으면서 말을 하곤 했습니다. 지금도 핸드폰이 끊어졌습니다. 다행히 어제가 월급이라 해결을 할 것입니다. 온 제 가족은 모두가 잘 살고 평안하고 그리고 다 집이 있고 넉넉한데 특히 작은형님은 큰 부자인데 우리는 이렇게 살고 남동생이 약 30년을 저와 제 가정을 도왔습니다. 이런 와중에 성령께서는 늘 저를 전도를 하도록 이끌고 다니셨습니다. 직장에서도 전하고 그리고 잘리고, 길에서 차에서 지하철에서 수업을 할 때도 집에서 있다가 아내와 싸우게 하고 밖으로 내쫓아서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전하는 일은 쉽고 돈은 벌기가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가족에게 이웃에게 50명 전도가 동창 천명에게 전하게 되고 이제는 온 세상 약 50개국 10만 명이 넘었고 그리고 하루에 약 150명의 분들이 계속해서 오천만의 로마를 찾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백만 명 일억 명 전하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저도 그렇게 하고 싶고 그렇게 될 줄로 믿습니다. 처음 고시에 떨어지고 목사가 되겠다고 성경을 읽고 정리를 시작해서 20년이 넘었고 전도는 성령을 받고서 계속했으니 25년이 지났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의 삶 같은 삶을 살았는데 이렇게 말씀을 배워주셨습니다. 말씀은 배가 너무나 부르면 배우기 어렵고 돈이 많으면 절대로 배우기가 어렵습니다. 우선 돈을 믿게 되고 돈으로 무엇인가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기에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하게 하고 그리고 또 하나님께 바쳐야 할 시간을 돈으로 다른 일을 하게 되니 부자에게 돈을 다 나누어주고 예수님을 따라오도록 하신 것입니다. 저도 그렇게 되었는데 이는 제가 의도가 한 것도 아니고 제 아내가 원한 삶도 아니고 정말로 친 아버지께서 살아계셨고 부자셨다면(실제로 땅이 약 5천 평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짐) 제게 돈을 많이 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 이런 궁핍을 다 아시면서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성경을 배워주셨습니다. 성경을 배워주셨습니다. 아버지가 아니면 절대로 하실 수 없는 일을 제게 하셨습니다. 제가 성경의 가치를 알고 제 아들이 중학교 일학년이지만 아직도 강남에서 아무 과목도 과외를 시키지 않고 있는 것은 세상의 공부에 그렇게 매달리지 않고 어떻게든 성경을 가르치려는 아버지의 열망에서 비롯된 일이지만 저는 아직도 아들에게 잘 가르치지 못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제가 전하는 모든 말씀을 조금씩 순서에 맞게 가르쳐주셨습니다. 너무나 즐겁게 재미있게 순간순간 가르쳐주셨습니다. 절대로 인간이 이렇게 저를 가르칠 사람은 이 세상에 그 어느 누구도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약 30년 동안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을 직접 체험을 하고서 어떤 대기업에 스카우트가 되어서 교육과 훈련을 받는데 비교를 해보고 절대로 인간이 혹은 대기업이 예수님의 교육을 발꿈치도 못 쫓아간다고 한 것입니다. 제 글 속에는 이런 가르침에 대한 내용들이 많이 있고 이신칭의에 대한 가르침과 깨달음의 글들 그리고 모든 오천만의 코너에 있는 말씀이 다 그렇습니다. 저도 이렇게 쉬는 날이 있어서 글을 올릴 수가 있는 직장에 다니고 아내도 3곳에 일을 해서 살고 있는데 이런 과정을 통해서 너무나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일도 보이고 하지만 어떻게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할까에 여전히 초점 맞추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제가 30년 동안 겪은 기적과 체험과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고 베푸신 은혜를 어떻게 다 말로 표현이 불가하고 지면도 부족합니다. 인간은 좁은 눈으로 혹은 작은 지식과 지혜로 앞에 보이는 것을 쫓아서 분주하게 행동합니다. 그렇게 하면 어떤 결과가 날지 도무지 알지 못하고 눈에 이익이 된다고 판단이 되면 즉시 생명을 걸기를 주저하지 않고 형제도 부모도 친구도 버리기를 헌신짝 버리듯 하고 삽니다. 저도 틀림없이 그렇게 살았을 사람입니다. 돈이 주어졌다면 저도 좋은 집에서 여행도 다니고 타도 새 차를 찾기에 여념이 없고 좋은 음식집을 찾아서 골프를 치려고 옷을 사려고 바삐 움직였을 사람이 분명합니다. 아버지! 영존하시는 나의 아버지! 전능하신 나의 아버지! 나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피를 다 쏟으시고 십자가의 중한 고통과 죽으심을 통해서 나를 구원하신 구원자 되시는 아버지! 스스로 말씀이신 나의 기묘자 모사가 되시는 아버지께서 저를 이렇게 택하시고 구원하시고 교육과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제 아버지가 되고도 남음이 있는 분이십니다. 참된 제 아버지이십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 가장 귀한 것 가장 영원한 것 말씀을 주신 분이 예수님 제 아버지가 되시니 이분이 제 혼자만의 아버지가 아니시고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건져내시고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말씀으로 훈련을 시키시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분이시며 모든 믿는 분의 구주요, 모든 믿는 분의 말씀의 스승이며 모든 믿는 분을 사랑하시고 교육하시고 훈련시키시며 선한 길 풍성한 길로 인도하시는 우리 모두의 아버지가 되시며, 우리 모두는 그분의 피로 형제가 되었습니다. 육신의 형제보다 더 사랑을 해야 하는 예수님 안에서 그의 피로 한 몸과 한마음이 된 천국의 백성으로 형제가 되었으니 온 한국의 성도가 서로 친 형제와 같이 믿는 이들을 대해야 하고 그리고 온 세상의 모든 크리스천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각 교회도 각자가 사랑함이 옳으나 모든 교회의 머리이며 교회를 사랑하시는 예수님 안에서 한 형제가 된 모든 세상의 성도가 서로 사랑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는 너무나 많은 기적과 증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아계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아버지로 사랑하십니다. 이건희 회장이 한국에서 가장 돈이 많지만 이재용 부회장에게 돈을 어릴 때부터 달라고 주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자신의 것이 다 아들의 것이고 아들이 어릴 때 잘 배워서 그 사업을 물러 받기를 바랄 뿐만 아니라 더 키우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청년이 되도록 기업의 경영에 대해서 잘 배우기를, 이에 필요한 모든 학문에 열중하기를 간절히 바랐을 것입니다. 하물며 세상의 아버지가 이러할 찐데 온 세상을 온 우주를 모두 소유하시고 때가 되면 나누어 주실 수 있는 천지 만물의 주관자 인류 역사의 주관자 모든 인간과 국가의 흥망의 주관자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그 자녀를 어떻게 교육을 시키겠습니까?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구원하시고 교육과 훈련을 광야에서 40년을 말씀으로 사는 법을 배우게 하신 예수님께서 똑같이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오늘도 자신의 자녀들이 광야에서 주님과 같이 말씀을 배우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이스라엘의 인도자가 되시는 성령께서 우리의 인도자로 이제는 우리에게 오십니다. 반드시 성령을 선물로 받지 않고는 이런 위대한 온 세상의 구원의 놀라운 사역의 훈련에 동참하기 어렵습니다. 속히 반드시 회개를 하시고 성령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오늘도 삶이 어렵고 힘이 들고 그리고 일이 풀리지 않고 아내가 혹은 남편이 혹은 직장의 동료가 죽도로 괴롭히고 모욕하고 욕하고 힘들게 해도 주눅이 들지 말고 담대하게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걱정 말아라! 조금도 걱정 말아라!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을 채워주시리라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아버지! 우리의 진실한 친구가 되시는 그리고 전능하시고 언제나 우리를 높일 준비가 되신 하늘과 땅의 권세를 모두 가지신 전능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믿고서 또 오늘도 승리의 길로 힘차게 전진합시다. 영존하시는 예수님! 우리 아버지께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