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남
고성군 고성읍 보브모텔에서 이틀째 밤을 보내고
기상해
오늘의 일정을 살피고있다.
일정이 빠듯하여
일행들의 피로감이 누적되지않을까
우려 되기때문이다.
조식후
통영 동피랑문화마을로 이동하기위해
2대의 승용차에 탑승,
각기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하여 출발하고있다.
고성 읍에서 통영중앙시장 주차장 까지 23km 거리여서
25분 정도가 소요되지않을까 생각한다.
남성팀이 통영중앙시장 주차장에 도착하여
계단을 통해 시장안으로 들어가
기다리고 있는데
기다리는 것이 무료하여
팔자 걸음걸이로 동 피랑문화마을 정상을 향해 걸어가고있다.
정상을 정복하여 세상을 바라보니
이곳이 신선들 만이 살아가는 별유 천지같고
무릉도원 같다.
시간이 경과 되었지만
여성팀으로부터 소식이 없다.
혹시
변고가 발생하지않았나 걱정돼
초조해하고있는데
통영중앙시장 주차장에 당도 했다는 메시지가 뜬다.
남성팀은
동피랑문화마을 정상에서 통영중앙시장으로
되돌아와
여성팀에게 휴대폰 통화를 시도하였으나
연결되지않는다.
여인들은 두명만 모여도 살아가는 이야기부터
수다를 떨기시작해
남편과 자녀들이야기에서 화룡점정을 이룬다.
하물며 남편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망각한체
수다다삼매경에 빠져있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이번 여행에 여중, 여고 시절을 함께했던 4명이 만났으니
가가 대소와 너스레로 황금같은 순간을 그냥 넘길 수 없었을 것이다.
가정과 일상을 잠시 잊고 자연을 벗삼아 유유자적 하며
통영으로 이동하고있는데 파노라마 처럼 전경이 바퀴니
설레기도 했을 것이다.
그동안 집밖으로 선뜻 나설 수 없었던 것은
생활이 바쁜탓도 있지만
미팅을 위한 날자조정이 어려웠기때문이다.
각자가 사정이 있어
의견 조율이 어려웠고
한사람이라도 이견이 있으면 결론을 도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추진한 여행인지라
여행의 순간 순간을 소중하게 간직하기위하여
웃음과 이야기를 꽃피운 것은
현실을 망각할 수도있다.
부산 감천마을
통영은 경상남도 남부에 위치한 도시로
1995년 충무시와 통영 군을 묶어서
광역시로 재 탄생되었다.
임진왜란 때 한산도대첩 등 해상전투가 잦아
아직도 그때의 아물지않은 상처를 찾아볼 수있는 곳이며
삼한시대는 “변한과 진한”에 소속 되었다가
삼국시대 초기는 “가야”에 소속된다.
이후 고려시대,
여러 차례 행정제도의 개편을 거쳐 공양왕때
고성 현으로 승격된다.
임진왜란 중에는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등 3도 수군을 통제하는
삼도 수군통제사 영이 설치된 곳으로
3도 수군이 주둔했던 곳은 이곳이 유일하다.
여성팀과 함께
통영 동피랑문화마을로 이동하여 관람한 후
다시 부산 감천 문화마을로 이동하고 있다.
바다가 가시권에 들어오면서 주변 경관이 확대되어 다가오고
경관은 절정에 이른다.
하늘은 파랗고 화창한 가운데
가로수 잎들이 더위를 극복하기위해
몸을 한들한들 흔들어대니 아름다음이 절정에 이른다.
마을 앞에서 풀을 뜯는 염소와 주민들의 일상이
한데 엮이니
소박하고 평화스러워보여서
중국 남조시대 시인 “도연명”이 말하는 별유 천지 무릉도원은
이곳이 아닌가싶다.
승용차가 전방으로 이동 할수록
좌우의 환경이 화려하게 바뀌면서 동양의 정취를 간직한
우아함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호수처럼 고요하고 잔잔한 좌측 해상에 두둥실 떠있는 섬들이
캐나다 여행시 방문했던 천 섬이 아닌 가도 생각이 들어
자연의 조화를 넘어 신이 의도가 엿보인다.
신 거제대교를 경유
거제 시로 진입하여 14번 국도를 달리고 있는데
거제시 사등 면 성포리가 가까워지니
가조 도가 지척에 있는 것처럼 보이고
그너머 해상에 정박해있는 수많은 어선들이
종이배 마냥 바람에 나풀거린다.
성포리에서 다시 북상하니 경상남도 거제시 고현 동에 이른다.
이곳에 고현 항이 자리하고있는데
주변의 산야가 형형색색으로 채색되어있어
어릴적에 때때 옷을 입고 성묘 다녔던 정월 초하루
대 명절을 연상하게한다.
고현 항을 둘러보니 물동량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어
무역항일것이라고 추측 되며
크루즈 여객선이 정박해있는 것은
주변에 볼거리가 많다는 방증이다.
고현 항 부근에서 1018번 국도로 갈아타
좌측으로 이동해 올라가니
칠천도라는 이정표가 눈에 뛴다.
칠천 도가 역사 전면에
등장한 것은 1597년 정유재란 때다.
일본은 조명 연합군에 의해 북진이 좌절되자
명나라에 협상을 요청한다.
이에 명나라 사신 심 유경이 임진왜란 선봉장인 고니시유키나가의 도움을 받아
도일,
도요도미 히데요시(풍신수길)와 대좌한다.
하지만
일본의 요구가 워낙 강경하여 결론을 도출하지못하고
귀국길에 오른다.
이무렵 왜장
가토 기요 마사 등 14만 명이 진해 이남과
거제도 서쪽 해상으로 진격하여 침략의 기회를 엿보고있다.
이때 이순신 장군이 조선 3도 수군통제사직에서 파직 되었다는 첩보가
날아든다.
어느 시대나 왕권과 귀족들과 권력 관계는
반비례한다.
왕권이 강할때면
귀족들은 죽은 듯이 납작엎드리고 있다가
왕권이 약화되면 스멀스멀 일어나 기어나온다.
고려시대 김부식이 묘청의 난을 평정 하면서 부터
무신을 경시하는 풍조가 만연하더니
무신 들의 교육기관인 강예제를 폐지하고 군사지휘권을 박탈하여
무신 들을 허수아비로 만들어버린다.
의종은 전국각지에 이 궁과 정자를 지어 향락과 향연을 일삼는다.
보현원 행차 시 휴식중에 5병 수박희를 진행 중
대장군 이소웅이 문신 한뢰에게 뺨을 맞는 수모를 당한다.
이 광경을 목격한 정 중부는
머리에 갓을 쓰고있는 문신 들의 목을 치라고 부하들에게 명령한다.
이 사건이 고려시대 무신 정변의 시초다.
무신 들은 권력을 장악하여 국왕의 존폐는 물론
인사권까지 장악한다.
무신 들의 성격이 억세고 거친 것은
고려시대 뿐만아니라 조선시대도 마찬가지다.
원 균은 이순신장군과 공로 다툼을 하면서
선조에게 아첨하여 신의를 얻는대신
이순신장군 에게는 온갖 권모술수를 동원해 모함했다.
겉으로는 호탕하고
시원스럽게 적을 일격에 섬멸할 것처럼 큰소리를 쳤지만
실제로는 부족한 자신의 내면을 감추기위한 술수에 불과했다.
조선왕조 중종때
장경 왕후가 인종을 출산한지 산후 병으로 8일 만에 사망한다.
그녀의 아들 인종도 8개월만에 병사하고 문정왕후 소생 경원대원군이 즉위한다.
이가 명종이다.
하지만 아들 명종은 아들을 생산하지못하고 33세로 사망한다.
후계자 문제가 대두되어
중종의 후궁인 창빈 안씨 소생 영양 군과 하동부대부인과 사이에서 태어난
하성군이 즉위한다.
이가 선조이다.
선조는 원칙주의자인 3도수군통재사 이순신 장군을 파직하고
아첨과 아부의 대명사라 할 수있는 원 균에게 3도 수군통제사직을 제수한다.
왜구는 계속 바다를 선회하며 조선의 약점을 노리고있는데
선조가 이순신장군을 파직하는 실수를 범한 것이다.
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왜구는 이때다 생각하여 세끼부네 함선을 재배치하기시작하였다.
조선의 주력 군선인 “판옥선”은 바닥이 납작한 평저선으로 이중 돛 구조를 갖추고있다.
때문에 방향전환이 용이하여 역풍 에도 전진이 가능하다.
하지만 왜구의 주력함선인 세키부네는 조선 판옥선 보다 속도가 빠르다.
속도가 빠르다는 이점을 이용해 해상에서 순찰하고있던
원 균의 조선 순식간에 수군을 공격한다.
이 전쟁을 칠천량해전이라고 하며 조선 수군은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다.
왜군은 병선의 수적 우세를 앞세워 벌때처럼 공격하였다.
호탕하게 웃으며 세상을 구할 것처럼 행동했던 원 균은
당당한 모습은 사라지고 얼굴이 일그러지기시작한다.
그의 위세가 거짓이고 술수라는 것이 만천하에 들어나고있는 순간이다.
지휘자가 제대로된 통솔을 못하니
부하들은 전열이 흐트러지고 병선은 파괴되어갔다.
피로에 지친 58세 원균은 수군 지휘가
더이상 불가능하다고 판단,
부하들을 버리고 고성으로 퇴각한다.
선조는 함량미달의 군주다.
세자 책봉문제가 제기될때부터 능력의 한계를 드러냈다.
임진왜란 때 국가통수권자의 면모를 보여주지못했으며 이순신 장군이
순국 했음에도 나 몰라라 했던 무능력의 군주다.
영국 허레이쇼 넬슨제독은 프랑스와 에스파냐 연합함대 해군과 트라팔가 해전에서 격전,
프랑스 저격병으로 부터 총탄을 맞아 척추를 관통하고 폐에 꽂혔다.
그는 이미 사망자나 다름없었다.
그렇지만 함대의 지휘권을 끝까지 고수
부장이 자신에게 지휘권을 넘겨달라고 애원 했지만 넘기지않았다.
의지로 몸을 지탱하며 지휘를 하고있는데
밖에서 함성이 울렸다.
이어서 병사 한명이 함장실로 달려와 “우리가 승리했습니다”라고 상황을 보고하자
그때서야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했다며 사르르 눈을 감았다.
그의 시신은 세인트 폴 성당 지하에 안치돼있다.
그의 장례는 국가장으로 하고, 엘리자베드 1세 여왕이 직접 주제했다.
하지만 조선의 선조는 이순장군의 장례를 나몰라했다.
영국과 조선이 비교되는 대목이다.
영국 왕과 조선왕의 국가관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칠천 도에서 약간 서남쪽으로 내려가면 한산 도가 있다.
한산도는 이순신 장군이 학익진 전법으로
일본 수군을 격파하여 제해권을 장악한 곳이다.
고현 항을 뒤로하고 다시 58번 국도를 달리고 있다.
덕포 해수욕장과 오션블루거제휴게소를 경유하여
북상하다가 저도와 대죽도, 가덕도를 거쳐
부산 감천문화마을로 이동하고 있다.
부산 감천마을 입구
감천문화마을로 이동은 내비게이션이 안내해주어서 쉽게 주차장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주차장은 협소하고 주차해야 할 차량이 많아서
여행이 고행길이라는 것을 실감한다.
아침 일찍 감천문화마을로 이동한 것이 주효하여 협소한 주차장 이라도
그나마 주차할 수 있었다.
문화마을 입구는 관광객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다.
사람들과 부딪히며 좁은 공간을 비집고 골목길 안으로 이동하고있는데
고생을 사서하는 느낌이다.
빠른 걸음으로 이동 하여야만 아미산 중턱에 자리 잡고있는
산촌의 아기자기하고 오묘한 모양과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풍경 과의 조화를 감상할 수 있을 것 같다.
피난민들의 고된 일상이 부산시민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던 것은
김일성의 지령을 받은 인민군들이
낙동강을 도강하여 부산을 접수하려는 과정에서
만행을 보았기때문이다.
국민들은 대한민국 정부가
임시 수도인 부산을 버리고 선조의 전철을 밟지않을까 하는 우려와 의구심을
가지고있었던 것은 정부가 위기상황에 직면하면 언제라도 국민을 버리고
해외로 도망갈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했기때문이다.
한반도를 거의 점령한 북한군이
대한민국의 자존 이자 최후의 보루인 낙동강으로
질풍 노도처럼 질주하여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고있는데
전세가 도무지 호전될 기미가 없다.
그 와중에
미국 해병대가 낙동강 전투에 투입 되었다는 소식이 들린다.
태평양전투에서 미국과 일본은 제공권을 장악한 섬을 적절하게 우회 하면서
징검다리작전을 펼치며
세력을 확장시켰다.
하지만 미군이 건너뛴 섬에 남겨진 일본군은 보급이 끊겨서
대부분 자살하거나 굶주려 죽었다.
미국은 노르망디상륙작전을 주도해 징검다리작전의 실효성을 확인한다.
하지만
상륙작전 당일 일기가 고르지못해 바다에 높은 풍랑이 일었다.
작전 연기 설이 제기 되었지만 미국 아이젠하워장군은 고심끝에
1944년 6월 6일 새벽에 노르망디에 상륙한다.
인천 상륙작전은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연장선이다.
미군과 유엔군을 인천에 상륙시켜 한반도의 허리를 차단 함과 동시에
낙동강에서 진을 치고있는 국군과 미군을 북상하게하여
북한 괴뢰군을 일망 타진 하려는 계획이다.
미국이 주도 면밀하게 작전을 개시,
경험이 풍부한 맥아더 장군이 지휘하여 일사불란하게 상륙에 성공한다.
피난민들은 고향에 토지와 재산을 그대로 나둔체 몸만 빠져나왔다.
전쟁이 금방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기때문이다.
그것이 오늘날까지도 정전상태로 남아 전쟁이 끝나지않고 있다.
시간은 흘러가 머리가 희끗희끗해지고
정신도 희미 해져가고있으니 고향산천에 두고 온 가족들과 재산,
친지들이 눈에 밟힌다.
“코로나19” 때문에 마스크 한 장에 또 한 장을 덮어쓰고 아미산 중턱 등성이를
오르 내리락거고있는데
입 주변이 헐어서 쓰라리고있으니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감천문화마을 방문자가 천문학적으로 늘어나 인산인해를 이루고있다.
피난민 또한 친절과 배려를 아낌없이 베풀어서
인정이 넘치고 있는데 방문자가 한집 한집 방문해
사랑방은 물론 안방 까지도 살피고있으니 치부를 드러낸 것이 아닌가
수줍어한다.
골목길의 미로가 끝없이 이어지고있다.
하지만 모로코의 9천개가 넘는 골목길과 비교할 수 있을까?
수시로 변화해가고있는 부산시의 발전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우후죽순처럼 들어서는 고층빌딩이
하루가 다르게 솟아오르니
이것이 오늘날 부산시의 발전 상이고 부산시의 현재다.
부산의 발전상을 바라보고있는 관광객들은
감탄과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한국전쟁때 부산을 제외한 내륙은 초토화되어 공산화되었다.
부산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마지막 보루로 남아서
북한군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미국을 비롯한 16개 국가로 구성된 유엔군의 지원이 없었다면
아마도
지금은 공산화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정치적인 면에서 대한민국이 북한보다 훨씬 안정적이다.
경제적인 부분에서도 놀라운 정도로 도약하고있다.
G7을 넘어 초 강대국들 과도 경쟁하고있어서 미래가 밝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판자집에 콘크리트 슬레이트를 얹어
형형색색으로 도색 하니
그리스 산토리니 마을이나 이탈리아 친퀘테레 마을을 연상하게한다.
그래서인지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있다.
감천문화마을을 돌아보고 용두산 공원으로 이동하고 있다.
용두산 공원은
전에 다녀온 적이 있어서 살갑고 따뜻한 느낌이 든다.
용두 산은 용머리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일본인들이
신사를 지어 성역 화한 곳이다.
그러나
해방이 되면서 신사가 파괴되어 건물의 잔해가 땅바닥에 팽개쳐지는
수모를 당한다.
이곳으로 피난민들이 들어와 아지트로 삼으니 오늘날 용두산 공원이다.
감천 문화마을에서 용두산 공원까지 15분 거리다.
그러나 오후시간대이고 차들이 밀리는 때라
자동차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있으니 아찔하고 끔찍하다.
용두산공원은 부산을 상징하는 부산타워와
아름다운 꽃시계, 노천 카페가 있어 부산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다.
그 중에서
가장 사랑을 받고있는 곳은 “부산 타워”가 아닌가 싶다.
높이가 120미터로 부산 시가지를 한 눈에 바라볼 수있고
바다와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으며 현재 부산의 랜드 마크라고 할 수있는
상징적인 탑이다.
부산 타워로 올라가 바다와 시내를 조망하고 있는데 문득
고향 친구가 생각나 사색에 잠긴다.
친구는 초등학교 시절 단짝이다.
그와는 모든 면에서 소통하고있었던 소꿉친구다.
초등학교 졸업 후 두사람의 관계는 세월과 함께 잊혀져갔다.
내가
타지로 유학하여 진로개척을 위해 고심하고있을때
친구는 시골에 남아 소규모 농경 부터 시작하여
장족의 발전을 거듭한다.
그는 올곧고 정의로울 뿐만 아니라 도전을 두려워하지않는 차분 함과
침착성을 지녔다.
그의 초창기 농촌생활은 안타깝도록 애처로왔다.
생활고로 순수성도 잃어갔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전무 했기때문에 기댈데가 없어서일 것이다.
그러나 인생에서 기회를 잡는 경우는 노력의 정도에 따라 다르다.
또한 얼마나 진정성이 있었느냐에 따라서도 행운을 가른다.
티 하나 없이 밝고 순수했던 친구가
지금은 어느 위치에 있을까?
부산 타워 전망대서 어릴적 소꿉 친구와 추억이 아련하게 스쳐간다.
바다쪽에서 기러기 한쌍이 보금자리를 찾아 날아가고있는데
서로가 미소를 짓고 바라보며 사랑을 속삭이는 것이
친구 부부를 보는 것과 같고
미물에 불과하지만 기러기 부부가 나눈 교감이
인간보다 애틋해 보인다.
어느덧 태양이 뉘엿뉘엿 수평선사이로 기울고있다.
우리 일행도 휴식을 위해 숙소로 이동해야할 것 같다.
영도구 태종 로 65번 길에 위치하고 있는
베이하운드호텔로 들어가
가격을 흥정하고 있는데
품격때문인지 고가를 견지하고자 한다.
가격 흥정이 실패하여 서글프지만 용기를 발동해
다시 글랜스호텔로 들어갔다.
젊은 지배인이 웃으며 우리를 맞이하는데
친절하고 삭삭한 것이 요즘 드물게 보이는 인재같다.
더군다나 우리가 선호하는 가격대를 통쾌하게 수락하여
우리의 품위도 유지할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