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생기의 우리학교 VOL.17 「꽃송이」작문 콩쿠르
(글 이상영)
물려받아 이어지는 우리말 표현의 향연
<꽃송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재일 조선인학생 작문콩쿠르는 조선학교에 다니는 아동·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유일한 조선어작문 콩쿠르다. 얼마 전 한 번의 중단도 없이 올해 38회째를 맞았다.

- 작문 콩쿠르 입선작품이 수록된 작품집(현재 38집까지 발행) -
제1회는 1,104편이 응모
기념할만한 제1회 콩쿠르는 지금부터 38년 전인 1978년에 시작되었다. 주최 단체는 동포 신문사. 당시 콩쿠르의 정식 명칭은 ‘조선학생 문학작품 현상모집’이었다.(제3회부터 ‘재일(在日)’라는 두 글자가 붙음). 후원단체로서는 재일본조선인상공연합회, 재일본조선인중앙교육회, 재일본조선문학예술가동맹, 학우서방 등의 이름이 줄을 잇는다.
제1회 심사위원 리스트에는 이은직(李殷直), 박종상(朴鐘相), 김두권(金斗權), 정화흠(鄭和欽), 정화수(鄭華水) 등을 비롯해 당대 제일의 동포문학자들의 이름이 눈에 들어온다. 게다가 콩쿠르 초기 심사위원은 대부분이 1세였기 때문에 일본 태생의 아동·학생들이 모국어로 문장을 쓰는 것 자체에 감동해 어느 작품을 고를까 좀처럼 심사가 진척되지 않았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응모자격은 조선학교 초급부 2학년부터 고급부까지로, 작문 테마는 자유.
심사는 초급부 저학년부문, 초급부 고학년 산문 및 운문(시)부문, 중급부의 산문 및 운문부문, 고급부의 산문 및 운문부문으로 모두 7개 부문. 현재와 같이 학년별로 카테고리가 세분화되어있지 않았다.
제1회 응모작품은 총 1,104편. 그 가운데 53편이 입선 작품으로 뽑혔다. 제2회 응모작품은 821편(60편이 입선), 제3회는 725편(70편이 입선)으로 회를 거듭할수록 응모작품수는 감소했는데, 입선작은 증가했다. 이것은 점점 응모작품의 수준이 높아졌다는 증거라 하겠다.
일반적인 작품, 시를 비롯해 소설, 희곡, 수기, 수필, 가사, 동화, 동요 등 형태가 버라이어티하게 풍부해 진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특징이라 하겠다.
당시의 동포 언론 보도를 보면 콩쿠르를 계기로 교육현장에서 작문지도가 활발해진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기사에 ‘우리는 이렇게 작문지도를 했다’는 제목으로 학교에서의 경험담이 연재되어 있다. 예를 들면 히가시 오사카 조선제4초급학교(당시)에서는 아이들에게 일부러 긴 문장을 쓰도록 지도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저학년에서는 2,000자, 고학년에서는 4,000자 이상으로 요구도가 높아 흥미롭다.
작문에 쓰인 목표가 현실로.
작문에 그치지 않고 아이들의 표현활동은 남녀학생들이 속한 사회와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 되기도 했다. 초기 콩쿠르 입선작만 보아도 가족과 학교생활, 조국, 재일동포의 역사 등 지금과 다르지 않는 보편적인 테마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제1회에서는 평양학생소년예술단의 일본공연, 제3회(80년)에는 광주사건 등 동포사회에 충격을 주었던 사건을 테마로 한 작품이 콩쿠르를 장식했다.

- 조선학교 초급부 국어 수업(꽃송이 제12집) -
동포사회의 ‘현재’를 아이들의 눈으로도 읽어낸 그 시절 표현자들은 이제는 40~50대가 되었다. 도쿄조선제1초중급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이향임(54)씨는 교토 조선중고급학교 고급부 3학년 때에 제2회 콩쿠르(79년) 고급부 산문부문과 운문부문에서 각각 2등과 3등에 입선했다. 산문부문의 입선작은 <참된 삶의 길>. 가정을 돌보지 않고 아침부터 밤까지 업무로 뛰어다니는 열성적인 활동가인 아버지를 원망했던 필자는 돌연 과로로 쓰러진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의 가치 있는 생은 무엇인가 자문자답한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이 얕았음을 깨달은 필자는 조선학교의 교원이 되기로 결의를 다진다.
“국어 수업 시간에 쓴 작품이에요. 작문 콩쿠르에 응모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었는데, 며칠 후 선생님께 얘기를 듣고 글을 퇴고하게 되었습니다.”(이씨)
몇 번인가 손질한 작품은 그 후 콩쿠르 응모작이 되어 상을 받게 되었다.
“전교생이 모인 자리에서 단상에 올라가 표창을 수여했습니다. 교장선생님에게 상장을 받았고, 부상은 우리말 사전이었어요. 너무 기뻤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시가현의 동포 집단거주지역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우리말에 둘러싸여 자란 이씨는 자연히 국어과목을 좋아하게 되었다. “귀에 익은 말이 우리말이었어요. 집안에서 들어온 말과 학교에서 배운 글자가 연결되자 공부가 재밌어졌습니다.”
교토 조고를 졸업한 후 교원 단기 양성반을 수료하고, 모교인 시가 조선초중급학교에 배속되었다. 작품에 썼던 그대로 교원이 되겠다는 바람을 이룬 것이다. 이후 35년 가까이 민족교육의 교단에서 가르치고 있다. 지금까지 <꽃송이>콩쿠르에도 입선자를 몇 명이나 배출해왔다. 한편 자이니치 4세, 5세에 이르는 지금의 학교에서 우리말을 가르치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것을 느낀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만큼 보람도 크답니다.”

- 제2회 작품콩쿠르 표창장 수여식(1979. 10.12) -
아이들에게 경의와 응원을.
<꽃송이>란 이름은 원래 이 콩쿠르의 입선작품을 수록했던 작품집에 붙인 제목이다.
‘따듯한 햇볕을 잔뜩 받아 피어나는 꽃처럼 당당하게 자라는 자이니치의 아이들이 스스로의 재능을 힘껏 꽃피우길 바라는 기대와 바람’(제1집 ‘프롤로그’)을 담아 이름 붙여졌다. 콩쿠르의 정식명칭에 <꽃송이>란 이름이 붙게 된 것은 2002년인 제24회부터다. <꽃송이>란 이름이 이 콩쿠르를 상징하는 명칭으로 큰 영향력을 가지고 널리 퍼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세대가 여러 차례 바뀌어 콩쿠르의 모습도 변화하고 있지만, 조선학교의 아동·학생들이 모어(일본어)가 아닌 우리말로 표현하는 행위가 가지는 무게는 변하지 않는다.
20년 가까이 심사위원을 맡고 있는 시인 이방세(67)씨는 <꽃송이>의 작품을 심사하는 일은 ‘조선학교에서 공부한 우리말로 문장을 쓰는 아이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응원을 보내는 일’이라고 말한다.
“작품에 순위를 매기는 단순한 콩쿠르가 아닌, 우리가 아이들에게 배우는 장이기도 합니다. 작품을 통해 아이들과 만나는 일이 제게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쁨입니다.”
*월간 <이어> 6월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