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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6장 5-8, 16-18절
하늘 아버지 앞에서 : 기도, 금식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자들의 방향과 목적이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한 방향(마5:48)이라 할 때 마태복음 6장 1절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보이려고 행하는 의란 사람을 의식한 의요, 사람을 의식한다는 것은 의를 행한다고 할 때 그것이 외형화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가 바로 그러한 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식하는 자들이었고, 또 하나님의 칭찬보다는 사람의 칭찬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물론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하나님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고 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분명 하나님을 의식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비유로 하자면 세리만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 역시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상 그들은 누구의 눈치를 살피느냐? 하나님보다 사람의 눈치를 살피는 자들이요, 하나님의 평가보다 사람의 평가에 귀를 기울이는 자들이었습니다.
때문에 그러한 자들을 주의하고, 또 너희도 그렇게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시는 것이 지난주 우리가 살폈던 내용입니다. 특히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시면서 구체적으로 세 가지 주제로서 말씀을 하시는데, 지난 시간 구제에 대해 잠시 살폈고 오늘은 기도와 금식에 대해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구제와 기도, 금식을 좀 비교해서 보자면 구제의 경우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돕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습니다. 비록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말씀하시지만, 구제의 대상은 분명 사람입니다. 그러나 기도와 금식은 좀 다릅니다. 즉 기도와 금식은 그 대상에 있어 결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 금식하는 것입니다. 혹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한다 할지라도 기도의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금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제를 통해 외식하는 자처럼 사람의 영광을 구하지 말라고 하셨다면, 또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다면, 기도와 금식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러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기도와 금식이 오직 하나님만을 그 대상으로 하지만, 그것을 통해서도 외식하는 자들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서 구제만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하고 또 하나님 앞에서 금식하는 것을 통해서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행하는 바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기도에 대한 사람들의 시각을 보면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방편이 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기도 자체가 이미 사람의 공로인 것처럼 비춰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기독교 안에서 종교적 열심이라 할 때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전도와 더불어 기도인데, 기도를 많이 하는 것 그리고 기도를 오래하는 것이 마치 영적으로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말까지 하느냐? 기도를 강조할 때 기도가 만사를 변화시킨다는 말까지 합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까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도가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불변성을 파괴할 수 있는가? 또한 그런 불변성으로서 작정하신 바를 바꿀 수 있는가? 없습니다. 우리가 작정하신 바를 모르기 때문에 변화가 있는 듯 보이고, 또 성경 자체도 그런 기록의 형식을 취할 때가 많지만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바를 변경시킬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물론 기도에 대한 강조로서 만사를 변화시킨다고 할 때 대부분은 하나님의 속성까지 파괴시킨다는 의미에서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말 자체의 뉘앙스는 하나님의 뜻까지 변경할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속성 중 불변성을 파괴시키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고, 또한 하나님 지식에 있어 연약한 자들은 충분히 오해하고도 남을만하기 때문에 이런 말들을 매우 주의를 해야 합니다.
금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보면 금식을 오래한 사람 또 많이 한 사람에 대해 영적으로 뛰어난 사람일 것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40일 금식을 했다고 하면 대단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고, 또 그것 때문인지 어떤 목회자들은 자신의 프로필에 40일 금식을 했다는 것을 내세우는 사람도 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것이 마치 공로라도 되는 것처럼, 그것이 자기 자신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사람들 앞에 내세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구제와 마찬가지로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십니다. 기도할 때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요, 금식을 할 때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의식한 모든 것은 비록 그것이 종교적 형태요, 경건으로서 자리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광과는 상관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 무엇과 관련이 있는가? 사람에게 자신의 의를 보이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영광과 관련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 5절로 오시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일단 기도란 무엇인가 할 때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98문에서는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감사드리며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우리의 바램들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이시고, 기도의 내용으로서는 죄의 고백, 긍휼에 대한 감사,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으로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구한다는 것은 뭐냐? 역으로 우리에게는 없다고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셔야지 만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결핍을 인식할 뿐만 아니라, 마치 우리가 없을 무(無)와 같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이미 기도의 자세로 있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기도란 하나님의 채우심이 없으면 항상 결핍된 자로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기도에 대해 외식하는 자와 같이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한다는 것은 이미 기도의 본질과 자세에서부터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예수님 당시 서서 기도하는 것이나(막11:25), 회당과 성전에 서서 기도하는 것은 사람들의 관행이었다(눅18:13)고 합니다(매튜 풀). 그렇기 때문에 그것 자체가 불법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하여 자신을 더욱 드러내는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 다시 말해 그 마음에 자기 영광을 위하여 그런 방식을 사용하는 것을 잘못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공적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 앞에서 기도한다고 해서 무조건 잘못되었다는 것이 본문의 의도는 아닙니다. 그러나 기도의 본질과 자세에 있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목적으로 있다면 그것은 곧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기도를 통해 사람을 의식하는 것은 기도가 무엇인지도,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도 그리고 그런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란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사람의 영광을 구하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존재라는 것을 모르는 것과 같고, 또한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자와 같습니다.
이런 부분은 어디까지 생각해 볼 수 있는가? 서두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누가복음 18장에서 비유로 말씀하신 바리새인의 기도까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거기 보면 세리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 역시 기도하는 자로 있습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뭐냐? 조금 전에 말한 것처럼 자신에게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바리새인의 기도 내용을 보면 이렇게 기도합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눅18:11-12) 특히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감사하다고 말하는 것은 바리새인도 그것을 받아서 행하고 있다는 의미로서 볼 수 있습니다. 죄와 상관없이 살 수 있는 것도 은혜이며, 좀 더 경건하게 살 수 있는 것도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예전이 이 본문을 두고 설교하면서 이런 식으로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 없이 그 스스로가 의롭게 되었다, 경건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무언의 고백과도 같다. 심지어 바리새인의 기도를 보면 비록 그 내용에 있어 다른 사람과 비교를 하지만, 비교를 통해 감사한다는 것은 그가 그 스스로, 하나님 없이도 감사의 내용을 이룰 수 있는 자는 아니란 것을 드러내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의 기도를 거절하신 것은 받은바 그것으로 자기 의를 삼고 그것으로 자기의 경건으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영광을 구하더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받았다고 할 때 분명 받은바 된 것들은 다 우리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믿음을 주셨다면 내 믿음이라 할 수 있고, 또한 물질의 복을 주셨으면 그 물질 또한 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 주셨지만 내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 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받은바 된 자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 것이라고 말하는 부분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 감사하거나 혹은 간구하는 것은 이런 사실을 명백히 드러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도 기도하는 것으로 나를 나타내고, 내 영광을 구하고자 한다면 과연 올바른 신앙의 내용이라 할 수 있는가? 없다고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오늘날 보면 기도의 많은 부분이 이런 형태라는 겁니다. 기도 많이 한다는 것이 자랑이 되고 있고, 또 기도에 대해 많이 응답 받은 것이 공로인 것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사람을 높이고 있을 뿐 기도를 들으시고 실제로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이 주목되지 않습니다. 기도를 통해 내가 받는 자라는 것을 안다면 기도를 많이 하면 많이 할수록 겸손해질 수밖에 없어야 하는데, 겸손이 아니라 기도 많이 함으로 교만해지는 방향으로 있는 것이 일부 한국 교회의 모습으로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은 그런 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사람의 박수와 사람의 칭찬, 사람으로부터 영광을 받으려고 했기 때문에 그런 박수와 칭찬을 받은 것 자체가 이미 그들에게는 상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상을 이미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고, 오히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로만 있다면 결국 천국과 상관없는, 영원한 저주만이 주어질 수밖에 없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어떻게 하라고 하시느냐? 6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도하라고 하니까 모든 기도에 있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본문은 공적 기도를 부정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예배 가운데 기도가 있고, 그런 기도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따라서 본문은 사적 기도, 공적 기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어떠하든지 은밀하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가 되어선 안 된다는 것이고, 사람을 의식하면서 사람의 칭찬을 바라는 그런 기도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핵심은 사적인 기도든, 공적인 기도든 하나님을 의식하라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할 때 혼자 있거나 여럿이 있거나, 취할 태도는 마치 골방에서처럼 하나님만을 우리의 증인으로 생각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하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고 말씀하시는데, 지난주 맥락과 같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앞서 기도에 대하여 하나님께 구하는 것, 그것은 우리에게는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기도 자체가 공로가 될 수 없음은 분명합니다. 기도가 공로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은밀한 기도 역시 공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에서 뭐라고 말씀하시느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빚을 진 것처럼 갚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기도 자체만 해도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고, 또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면 하나님의 뜻 안에서 받아 누리는 자가 바로 우리들입니다. 아니 좀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기도하지 않은 것조차 우리는 받아 누리고 있습니다. 기도해서 응답받은 것보다 기도하지 않고 응답받은 것이 더 많다고 하면 결코 과한 표현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은혜 가운데서도 은밀한 기도에 대하여 상까지 더해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매튜 풀 주석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그 어떤 공로도 될 수 없지만(우리의 기도에 무슨 공로가 있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보시고, 그가 자신들의 기도를 들으시도록 그의 얼굴을 구하는 자들에게는 상을 주시겠다고 전에 여러 번 약속하신 것을 따라 상을 주시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까 공로에 대한 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상,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상일뿐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보신다고 했는데, 순종도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로서 생각한다면 기도를 통해서도 우리는 무엇을 보게 되는가? 은혜 위에 은혜라는 사실을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은혜 외에는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기도 자체를 마치 공로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생각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공로 이상으로 하나님의 뜻도 바꿀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감히 말씀드리지만 신성모독입니다. 매우 주의하셔야 합니다.
7절도 보시면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여기 보면 중언부언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칼빈에 의하면 필요 없는 말의 지루한 반복을 의미하는 단어라고 합니다. 아무런 의미 없이 그저 늘어놓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마치 주문과 같은 성격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언부언하는 이유가 뭐냐? 기도를 많이 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렇게 해야지만 하나님께서 들으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가톨릭의 경우 합당한 기도를 한 번도 생각한 일이 없는 것보다 무의미한 말을 길게 중얼거리지 않는 것이 더 큰 죄라고 합니다(기독교강요, 1559, 4권 10장 10). 저들은 말을 많이 중얼거릴수록 그만큼 기도를 많이 한 것으로 간주하며, 또한 그런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중언부언, 그리고 무의미한 말을 많이 하는 기도를 금하고 계십니다. 중언부언하는 것, 무의미한 말을 많이 하는 것은 마치 이방인의 기도와 다를 바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럼 이방인의 기도란 뭐냐? 열왕기상에 보면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가 대결하는 장면이 있는데, 거기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열왕기상 18장 26절부터 보시면 “그들이 받은 송아지를 가져다가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이르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그들이 그 쌓은 제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정오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여 이르되 큰 소리로 부르라 그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은 그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그가 길을 행하는지 혹은 그가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이에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그들의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더라 이같이 하여 정오가 지났고 그들이 미친 듯이 떠들어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르렀으나 아무 소리도 없고 응답하는 자나 돌아보는 자가 아무도 없더라”(왕상18:26-29) 여기 보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도하지만 기도의 응답이 전혀 없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신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지극정성을 다합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자 큰 소리로 부르기도 하고 또 규례를 따라 자기 몸의 피를 흘려가면서까지 그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의 기도란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근본적으로 자기가 믿는 신을 향한 일방적인 호소요, 그리하여 원칙적으로 독백이요 대화가 아니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기도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는 기도하는 자의 정성입니다.”(김성수)
지금 예수님께서는 그런 기도를 금하고 계십니다. 대상은 분명 하나님이지만 하나님을 향하여 일방적인 호소도 금하고 계시며, 또한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식의 기도도 금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이방인의 기도이지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 사이의 기도는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문은 한 마디로 지극정성 외에는 없습니다. 주문을 듣는 대상도 없지만 주문하듯이 하는 모든 이면에서 인간의 열심이 최우선인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에 대해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먼저 기도의 대상이 하나님이라고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정성만 다하면 하나님께서 무조건 들어주시는 분이 아니라, 그분은 그분의 뜻대로만 들어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른 채, 또 하나님의 뜻을 모른 채 기도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무의미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오늘 본문 이후에 주님께서는 기도의 모범이라 할 수 있는 소위 주기도라는 내용을 가르쳐주시는가? 바로 이런 측면에서인 겁니다.
혹 이렇게 질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다 하신다면 굳이 기도할 필요가 있는가? 그러나 여러분, 우리 편에서는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 길이 없습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시기는 하지만, 우리의 본성은 그분의 뜻만을 따르는 데 점과 흠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따라서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우리를 굴복시키며, 또한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는 방편이라는 차원에서 명령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결코 무익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분명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라고 하셨다면, 심지어 기도의 내용과 방향까지 말씀하시면서 명하셨다면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인 줄 알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에스겔 36장에서는 어떻게까지 말씀하시느냐?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겔36:37) 앞서 어떤 내용이 나오느냐 하면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그 가운데 우리가 잘 아는 말씀도 언급하십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36:26-27) 하나님께서 하시겠다, 그것도 내 영을 너희 마음에 주어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셔서 그렇게 하시겠다고 하시지만 기도해야지만 그렇게 할 것이란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내용 때문에 기도가 앞선다고 생각하시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시지만 기도를 통해 이루신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의 일에 우리를 동참시킨다는 의미이지,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것도 하실 수 없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기도는 기도의 대상을 알아야 하고, 또 그가 무슨 뜻을 가지고 계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아무 뜻 없이 기도하는 것은 이방인의 기도와 같습니다. 가톨릭 안에는 오늘 본문 이하에 나오는 주기도를 가지고도 마치 주문식으로 외운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가톨릭만 그러느냐? 예전에 저와 매우 가까운 어떤 분도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로서 마치 주문화해서 외웠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렇게 하면 악한 마귀가 틈타지도 않으며, 또한 세상적인 복도 받는다는 식의 소리를 들었는데, 사람의 생각이란 것이 얼마나 미신적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것으로도 미신을 만들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주기도는 결코 주문이 아닙니다. 아무런 뜻 없이, 아무런 의미 없이 맹목적으로 외운다고 해서 유익이 있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결코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도는 아버지와 자녀와의 관계 속에서 인격적으로 주고받는 내용이 있음을 분명 인식해야 합니다. 또한 지극정성이면 하늘도 감동을 받는다가 아니라 아버지로서 자녀의 유익을 위해 응답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 하나님 앞에 우리는 마땅히 마음을 쏟는 자로서 기도할 뿐입니다.
오늘 본문 8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이방인의 기도를 본받지 말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하나님은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아시기 때문에 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많은 말로 기도해야지만 하나님은 들으시는 분이 아니란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로서 자녀의 기도는 언제라도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특히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로서 자녀들의 유익만을 위해서 일하신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의 기도가 무조건 우리 뜻대로만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철저히 버리셔야 합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이것이 아닌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은 우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것을 통하여 선을 이끌어 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야지만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시는 분이 아니라, 듣기 전에 아시며 또한 아시기 때문에 그런 방향으로서만 이끌기 원하십니다. 물론 그 과정 속에서는 여러 가지 모습을 만나게 됩니다. 기쁨이 있을 수도 있고, 때로는 슬픔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평안이 있는가 하면 환난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겠지만, 많은 부분 원하지 않는 일들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 가운데 변함없는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란 사실과,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자녀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한다고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내 뜻을 꺾어야 합니다. 내 뜻대로 되기를 원한다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한다가 최종적인 자리여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주께서 주시는 믿음이 동원되어야 합니다. 주의 뜻이 가장 선하다. 그리고 주의 뜻이 가장 자녀를 위한 것이다.
실제로 우리의 모범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가 그러했고, 또한 그러한 기도처럼 그의 삶도 그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서 기도하실 때 이런 기도를 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그러므로 여러분, 내 뜻과 다른 일이 일어날 때 그 부분에 있어 잘 훈련하셔야 합니다. 마음을 지켜 주십사 기도해야 하고, 주의 뜻을 따를 수 있는 은혜와 힘을 주시도록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아도 주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기뻐할 때까지 우리의 마음을 돌아보면서 주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이제 넘어와 금식에 대한 부분인데, 사실 전반적인 틀은 구제에 대한 말씀이나 기도에 대한 말씀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우선 16절을 보시면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일단 금식이란 무엇인가 할 때 일정 기간 동안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래 사람은 음식을 먹어야지만 육체로서의 생명을 유지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음식을 끊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생명을 걸어야 할 만큼 중요한 일에 대하여 행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자주 행했던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의 기도를 보면 이레에 두 번씩 금식했다는 말이 나오는데, 그만큼 자주 그리고 규칙적으로 행했던 것이 저들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례 요한과 그의 제자들 역시 규칙적으로 금식을 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마9:14).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먹어야지만 생명을 유지하는 음식에 대하여 그것을 끊음으로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과 도우심 없이는 할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금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종종 금식과 함께 기도를 같이 말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다는 의미요,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다는 것을 외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기도와 금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금식을 가지고도 마치 그것이 내 경건을 나타내는 것처럼 슬픈 기색을 보이고, 또 금식한다는 것을 나타내면서 마치 금식하는 것이 경건의 능력이라도 되는 것처럼 한다면 그것은 금식의 참된 의미를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금식한다는 것은 기도와 마찬가지로 내가 할 수 없다는 고백과 같기 때문에 내가 나타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금식의 올바른 방향이라고 할 것 같으면 더욱 더 겸손해지는 것이 맞습니다. 내가 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해 주시기를 바라면서 금식하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만 드러나야 할 것이 바로 금식인 겁니다.
이렇게 볼 때 다른 사람을 의식한 금식, 자기 영광을 구하는 금식은 외식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외식하는 자들은 이미 다른 사람을 의식하는 것 자체로, 자기 영광을 구하는 것 자체로 자기 상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17절과18절을 보시면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쉽게 말하자면 금식하는 티를 사람들에게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금식이 자기 자랑이 되지 못하도록 하라는 것이고, 금식을 통해 자기를 증명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마태복음 6장은 구제와 기도, 금식을 말하고 있지만 모든 종교적인 경건 내용이 2절과 5절, 16절의 경고를 받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행하지 말라. 만약 사람에게 보이려고 행한다면 그것은 이미 자기 상을 받은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구제와 기도와 금식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는 것 같고 또 자신의 무능을 인정하는 것 같지만, 실상 그것을 통해서도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경고를 하시는 겁니다. 종교적인 모든 경건의 내용이 그럴 수 있고, 나아가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자기 의를 버리지 못하는지 교회 역사를 보면 끊임없이 인간, 인간, 인간을 외치는 역사입니다. 그래서 김영규 교수님이라는 분은 그의 책 한 부분에서 “참된 종교개혁정신이란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에 대한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유롭고 무조건적인 은혜를 파괴하는 우리 안에 있는 아르미니우스주의와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아마 ‘코람데오’(coram Deo)라는 말을 들어 보셨을 텐데, 라틴어로 ‘하나님 앞에서’라는 뜻입니다. 지난주 살핀 말씀과 오늘 우리가 살핀 말씀을 요약하자면 이 말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코람데오’(coram Deo)
그러나 이렇게 간단히 요약할 수 있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이 말이 가지고 있는 내용과 실제적인 삶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안에 있는 아르미니우스주의와의 싸움이 우리 평생에 따라 다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성은 신론 중심이 아니라 지극히 인간론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마6:1)는 말씀을 다시금 되새겨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영광을 위한 모든 외식을 버리셔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되 내가 사라지면 사라질수록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구제를 할 때도 그렇고, 기도를 할 때도 그렇고, 금식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종교적인 일에 있어 그러해야 합니다. 아니 종교적인 일이 아니더라도, 혹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아닌 삶의 방향은 외식이요, 위선을 불과합니다. 부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자녀답게 주의 영광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