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작(傑作) / 폭군(暴君)의 재발견
뛰어난 작품, 훌륭한 작품을 뜻하는 걸작 (傑作)이란 말이 본래는 폭군의 대명사로 널리 알려진 걸임금과 관계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하(夏)나라 말기의 걸이라고 하면 은 (殷)나라 말기의 주 (紂)와 함께 폭군의 대명사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들의 방탕한 생활은 주지육림 (酒池肉林)으로 대표되고, 극도의 호화사치한 생활은 걸 (桀)이 지은 고대궁실(高大宮室)의 기와집(瓦室, 와실)과 주 (紂)가 지은 상아로 만든 복도 (象郞=象廊, 상랑)라는 뜻의 와실상랑 (瓦室象郞)으로 대표된다 .
그런데 폭군을 난폭한 군주라는 호오 (好惡)시각으로만 보지 말고 생활의 발전과 관련지어 사실적인 측면에서 다시 한 번 살펴보자. 옛날 역사책을 살펴보면 고대 국가인 하 (夏)나라 때 곤오 (昆吾)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기와(瓦를 만들었다(古史考, 夏時昆吾氏作瓦)고 한다.
사마천(司 馬遷)은 이 기와를 활용하여 집을 지은 것은 걸 (桀)이라고 말한다 (桀爲瓦室, 『史記』 龜策列傳에서) .

갈대나 집, 나무껍질 등으로 지붕을 만들었던 시절에 기와를 구워 집을 지었다는 것은 가히 집의 혁명이라고 할 만하다. 매년 지붕을 헤이는 번거로움도 없을뿐더러, 새가 지붕에 둥지를 틀 일도 없어 현대적인 눈으로 보자면 그만큼 위생적이고 실용적인 집이다.
하지만 그 많은 기와를 굽기 위해서는 노동력과 시간 투자가 만만치가 않았다. 어디 그 뿐이겠는가. 무거운 지붕을 지탱하기 위해 기둥 등의 구조물이 그만큼 튼튼해야 하기 때문에 이전보다 훨씬 고도의 기술을 요했을 것이다.
이엉을 엮어 며칠 일이면 될 것을 몇 달에 걸쳐 집을 지어야 했으니 그 원망이 오죽했을까?
“이 날은 언제나 망할고, 내 너와 더불어 함께 망하리라! (時日은 害喪고 予及女로 偕亡이라 )”하며 백성들이 원수같이 여기던 왕이었기에 아무리 좋은 집이라도 곱게 보일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하니 서진 (西晉) 때의 학자인 장화 (張華, 232~300)가 쓴 「박물기 (博物記)」에 “걸이 기와집을 지었으니 결국 이것은 곤오가 걸을 위하여 만든 것이 되었다 (桀作瓦,蓋是昆吾爲桀作也)”고 편치 못한 마음을 담아 냈다.
여기에서 ‘桀作’이란 말이 나왔는데 폭군 桀을 그대로 쓸 수 없어 앞에 人 하나를 더 붙여 ‘傑作’이란 말로 보편화 시켰다고 볼 수 있다. 桀이나 傑이나 ‘뛰어나다, 탁월하다’는 뜻은 같다. 다만 ‘사람 인
(人)’자가 없는 桀의 본래 뜻은 닭장에 쳐놓은 횃대를 가리킨다.
닭장 속의 횃대는 도드라진 물건이기에 여기에서 전화 (轉化)하여 ‘뛰어나다’ 는 뜻이 파생되었고, 人을 붙여서 ‘뛰어난 사람’이란 뜻으로 쓰인다.
사실 폭군은 아무나 폭군이 될 수가 없다. 반드시 그만한 공 (功)과 업적이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
그런 뒤에 오만방자해지면 그것이 폭군이 된다. 다시 말해 능력이 없으면 폭군 될 자질도 없는 것이다. 한갓 ‘개망나니’일 뿐이다 .
다시 돌아가, 만약 桀이 탕임금과 같이 성인이었다면 傑作이 그대로 ‘桀作’으로 쓰여졌을 것이고, 궁실공사는 축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을 텐데 덕 (德)없는 인물이 시대를 앞서서 행하다가 그만 패망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아무튼 그 집은 걸작 중의 걸작이었기에 이후로 어떤 왕이든 고대광실 (高臺廣室)의 기와집은 당연한 것이 되었고, ‘꿩이 나는 것 같이(如翬斯飛, 여휘사비, 『시경』 小雅, 祈父之什 중 斯干편에서)’ 집을 지어야 왕의 권위를 드러내는 것처럼 여겼다.
걸주(桀紂)의 주지육림은 오늘날 각종의 파티 상차림으로 널리 보편화되었음을 볼 수 있는데 각종 안주를 매달아놓은 나무 장식 요리가 바로 이것이다.
<출처 : 「왜 주역이고 공자인가」 2010년 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