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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 1일 한길교회 주일오전예배>
요한복음 강해(9)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예수님 (요 1:19-34)
(부제: 성령세례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
설교자: 손재익 목사 (한길교회 담임)
서론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입니다. 가족 중에서 저 혼자 교회를 다니던 때였기에, 어떻게 하면 부모님을 전도할까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당시에 유행했던 원종수 권사의 간증 테이프를 친구에게 빌렸습니다. (80년대 후반 이전에 신앙생활을 하셨던 분들은 아마 누구신지 아실 것입니다.) 부모님에게 들려드리기 전에 일단 내가 먼저 들어봐야겠다고 싶어서 들었습니다. 그런데 간증을 하는 중에 이런 말씀을 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아직도 방언을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 사람은 아직 신앙이 부족합니다. 그런 사람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정확한 워딩(wording)은 생각나지 않지만, 대충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그 내용을 들으면서 부모님께 들려드리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전도도 전도지만, 뭔가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 간증 테이프를 들려드릴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저는 중학생이었으니 신학이나 그런 것에 전혀 아는 게 없었습니다. 이상하다는 건 그냥 제 느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상하다고 판단한 나름의 이유가 하나 있었으니, 그건 “나는 예수님을 열심히 믿지만, 나는 방언 못하는데. 그러면 이 사람의 주장은 틀린 것 아닐까?” 였습니다.
그 이후 교회에서 자라면서 이와 관련한 가르침을 받아 본 적은 없습니다. 저도 그다지 궁금해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속한 교회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교인들이 방언을 하지 않았고, 방언을 하지 못하면 신앙이 좋지 않다거나 성령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없었고, 방언을 하는 사람이 간혹 있었지만, 새벽기도회 시간에 혼자 기도하면서 하는 분들이 대부분이었고, 그조차도 교회에서는 공적으로 장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학생이 되어 이런저런 신학서적들을 읽게 되면서 그 주제가 바로 ‘성령세례’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1] 오늘의 설교 주제입니다.
감리교 전통, 또는 흔히 ‘순복음’이라고 하는 오순절 전통에서 자란 사람들이 여전히 이런 주장을 많이 합니다.
반면, 장로교 전통에서 자란 사람들 중에는 이런 말을 전혀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앞서 제가 언급한 원종수 권사는 감리교회의 권사인데, 여자가 아니라 남자입니다. “왜 남자가 권사냐?” 이런 질문을 하시는 분들은 완전히 장로교 전통에서만 자란 분들입니다. 감리교에서는 권사가 남자인데, 장로교로 치면 집사에 해당합니다. 이걸 모르는 분들 중에는 아마 이런 주장을 들어보지 못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거듭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해도 아직 그 안에 성령님이 임하시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예수님을 믿어도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성령을 받아서 어떤 특별한 능력을 행해야 믿음이 좋은 것일까요?
이 이야기를 드리는 이유는 오늘 읽은 본문에 있는 말씀 중에 이 주제와 연관된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론
I. 본문 설명
세례 요한의 증언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세례요한을 찾아왔습니다. “네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1:19). 세례요한은 자기가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선지자도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서 세례요한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말할 뿐만 아니라 장차 오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누구가 아니라는 말과 더불어 예수님이 누구시라고 말하면서, ‘증언’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주제는 ‘세례요한이 누구인지’가 아니라 “세례요한의 예수님에 대한 증언”입니다.
그렇다면 세례요한이 증언한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세례요한에 의하면 예수님은 요한 뒤에 오시는 분입니다.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할 수 없는 분입니다(27).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29).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이
또한 세례요한은 33-3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33)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34)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신 일을 이야기하고, 그때 있었던 일을 이야기합니다. 하늘에서 성령이 내려서 예수님 위에 머물게 된 것이죠. 그러면서 예수님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다”[2]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입니다.[3]
II. 성령세례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자~ 그렇다면 여러분~!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신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세례요한의 말이 성취되는 사건들
1) 사도행전 1-2장
먼저, 사도행전 1장을 봅시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하늘로 올라가지 않으셨습니다. 40일 동안 이 세상에 잠시 계시면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셨습니다(행 1:3). 그리고 또 여러 가지 말씀을 남기셨으니 4-5절을 봅시다.
요한복음에 약속된 성령
4절에 보면 “내게서 들은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에 대해 예전에 말씀하신 적이 있다는 말이죠? 언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요한복음 14:16-17
“(16)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그는 진리의 영이라...”
요한복음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예수님은 이미 당신의 공생애 가운데 성령님에 대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세례요한의 말을 인용하시는 예수님
다음으로 사도행전 1장 5절을 보시면,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하시는데, 예수님의 이 말씀은 세례요한의 말을 염두에 두신 것이죠(마 3:11; 막 1:8; 눅 3:16; 요 1:33). 자~ 그렇다면, 5절의 약속이 언제 어떻게 되는지를 보면 세례요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통한 성취
이제 그 약속이 성취되어야 합니다. 언제 성취됩니까? 한참 뒤에 성취됩니까? 수백 년 뒤에 성취됩니까? 5절에서 “몇 날이 못 되어...”라고 했으니 이제 곧 이뤄질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어지는 사도행전 2장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입니다.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납니다(2:2).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2:4) 여기 ‘다른 언어들’이라고 번역된 말이 개역한글에는 ‘다른 방언’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6절과 8절에 보면 4절과 달리 ‘방언’이라고 번역되어 있죠. 여기에서의 ‘방언’은 “랄랄라”하는 식으로 하는 방언이 아닙니다. 외국어입니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니 12절을 보시면 사람들이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라고 합니다. 이에 14절 이하에서 베드로와 11명의 사도가 서서 설교를 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놀라지 않도록 이 현상이 무슨 일인지를 이해시키기 위해서죠. 베드로의 설교본문은 16절과 17절 첫 부분에 나와 있는 난외주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요엘서 2:28 이하입니다. 설교주제는 성령강림입니다. 베드로와 11명의 사도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구약의 선지자가 이미 예언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이렇게 17-21절에서 본문을 읽은 그들은 22절 이하에서 이 본문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33절에서 본문을 신약적 관점에서 해석합니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건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셔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성령님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일이라는 겁니다. 33절이 바로 베드로가 한 설교의 핵심 주제입니다. 그리고 36절에는 청중들이 해야 할 적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2장 14-36절까지를 보면 설교의 전형적인 모델이 나와 있습니다. 본문설명-해석-적용.
이렇게 설교를 들은 청중들이 37절에서 말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28절에서 베드로는 자신이 했던 설교에 근거해서 권면합니다. “회개하라. 죄사함을 받으라. 세례를 받으라. 성령의 선물을 받으라.” 그리고 41절에서 그들에게 물 세례를 베풉니다.
베드로와 11명의 사도가 설교를 통해 가르쳐 준 대로, 세례요한이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막 1:8)했던 그 예언이 드디어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이 “(4)...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4-5)라고 했던 약속이 드디어 성취되었습니다.
정리
이제 우리는 세례요한이 했던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하신 말씀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성령님을 이 세상에 보내 주실 것이며, 그렇게 임하신 성령님께서 각 사람에게 부어주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해 주실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바로 그 약속의 성취였습니다. 성령님께서 당신의 백성들 안에 내주하셨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성령세례’(baptism with the Holy Spirit)라고 합니다. 이 성령세례가 처음 임하는 때인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때 특별하게 방언, 즉 외국어를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4]
2) 베드로의 전도와 고넬료의 회심
이 성령세례 사건이 사도행전에서 몇 차례 더 이뤄집니다. 사도행전 10장을 봅시다.
가이사랴에 사는 고넬료 라는 사람과 베드로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어느 날 베드로에게 환상이 보였습니다(10-11). 이방인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환상입니다.
이 명령에 따라 34절 이하에서 베드로가 이방인인 고넬료의 집에 복음을 전합니다. 복음을 전하니 44절에서 성령이 임하십니다. 오순절날 임하셨던 성령님께서 지금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임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베드로가 그들에게 세례를 베풉니다. 성령세례에 근거하여 물 세례를 베풉니다.
사도행전 10:44-48
(44)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45)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46)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47)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 하고 (48)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하니라 그들이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기를 청하니라
이 일이 있은 후 11장에 보면 사람들이 베드로를 비난합니다. 무할례자, 즉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했다는 것입니다(3). 이에 대해 베드로가 설명을 합니다. 자기가 보았던 환상에 대해 설명하고, 자기가 복음을 전한 내용을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15절에서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라고 합니다. 바로 10:44에서 있었던 사건을 설명하는 것이죠. 그러면서 1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행전 11:16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고넬료 집안에 복음을 전할 때 성령이 임하여서 그곳에서 말씀을 듣는 각 사람에게 부어진 일은 바로 세례요한이 말했던, 그리고 예수님이 말했던 그 사건이라는 것이죠.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신다는 말의 의미
이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신다는 말의 의미는 분명해 졌습니다. 바로 성령님이 오실 것이라는 구속사에 대한 말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이 주님을 소개하면서 그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라고 한 것은 바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 제3위이신 성령님을 보내 주실 것을 가리킨 것입니다.[5]
이제 ‘성령세례’(Spirit Baptism)라는게 무슨 말인지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 하늘로 올라가셔서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성령을 이 땅에 보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해 성취되었습니다.
이날은 아주 특이한 날로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방언, 즉 외국어를 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렇게 오순절날 강림하신 성령님은 이제 계속해서 오시는게 아니라 한 번 오신 것에 근거해서 계속해서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단회적’이라고 합니다. 한 번 있는 일이라는 것이죠. 한 번 오셨는데, 자꾸 오시는게 아니라 한 번 오셔서 일하신다는 것이죠. 이 단회적인 사건 때에만 임시적으로 방언, 즉 외국어로 말하는 일이 일어났을 뿐, 그 이후 서신서에는 그런 내용이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이렇게 한 번 임하신 성령님은 이 세상에 계속 계시면서 구원 사역을 해 나가십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게 임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세례’입니다. 다른 말로 ‘성령의 내주하심’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임하신 성령님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중생)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회심), 의롭다 칭하여 주시고(칭의), 죄를 회개케 하시며(회개), 죄를 용서해 주시고(속죄), 성화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성령님은 우리가 거듭날 때,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임하십니다. 성령세례, 거듭남, 믿음, 이 일은 함께 일어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2:3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8:9는 말씀합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이 오늘 설교의 부제대로 성령세례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이니, 기독교회가 오랫동안 믿어왔던 진리입니다.
III. 성령세례에 대한 잘못된 견해의 등장
성령세례에 대한 다른 견해
그런데, 교회 역사에 보면 모든 주제가 그렇듯, 이 주제 역시 성경의 가르침과 달리 다른 견해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른바 ‘성령세례’를 다시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에 의하면 예수님을 믿었다 하더라도 아직 성령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거듭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아직 성령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은 이후에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사람들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입니까? 앞서 말한대로 아직 방언을 못하는 사람입니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그들에 의하면 외국어가 아닌 방언입니다. “랄랄라”입니다. 그리고 아직 뜨거운 체험이 없는 사람입니다. 기도를 해도 조용히 하는 사람입니다. 찬송을 불러도 열광적으로 부르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비록 예수님을 믿어도 아직 성령님이 그 사람에게 임하지 않았다고 가르칩니다.
성령세례를 오해하게 된 교회역사
이런 견해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2천년 교회 역사에서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주장을 1차적으로는 한 사람들은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와 그의 신학적 영향을 받은 찰스 피니(Charles Finney, 1792-1875), 피니의 후계자인 무디(Dwight L. Moody, 1837-1899)와 그의 동역자인 R. A. 토레이(Reuben A. Torrey)가 이끈 케직 사경회(Kewsick Movement)가 대표적입니다. 이들은 2차 체험을 강조했습니다. 이들은 방언이나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오순절주의자만큼은 아니었습니다만, 예수를 믿어도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같습니다.
정통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인이란 거듭나서 예수님을 믿고 회심한 뒤에 점진적으로 성화의 길을 걸아가는 것으로 봅니다. 반면 이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두 단계로 나눕니다. 1단계는 거듭남과 칭의, 회심하는 것이고, 2단계는 이후에 경험해야 할 2차적인 성령체험입니다. 이 두 번째 단계를 Second Blessing이라고 합니다. 이런 성령체험을 하면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되고, 그 사랑으로 온전해 진다고 주장합니다.
이 견해는 나중에 20세기 초에 더 ‘불’이 붙게 되는데, 20세기 초 미국 캔자스 주와 LA의 아주사(Azusa)라는 곳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1901년 1월 1일 밤, 캔자스 주 토피카에 있는 벧엘 성경대학(Bethel Bible College)에서 한 행사가 열렸습니다. 이 학교는 약 2달 전인 1900년 10월에 감리교 목사인 찰스 폭스 파럼(Charles Fox Parham, 1873-1929)이 설립한 곳이었습니다. 파럼은 원래부터 방언을 사모했는데요, 연습 삼아 학생들에게 성령이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서 지금도 계속 역사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신약의 증거들을 조사해볼 것을 요구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파럼의 요구를 부질없고 무의미하다고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파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따르고 있던 성결 전통에서는 은사를 받았을 때 나타나는 현상처럼 보이는 일들이 일어났다는 보고들이 떠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그는 자기 학생들에게 견해를 물었던 것입니다. 학생들은 성경을 곧이곧대로 읽으면 성령이 은사를 부어주시는 일이 지금도 가능하며, 은사를 받았는가는 방언을 말하느냐를 보고 판별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대답에 감동을 받은 파럼은 성경이 증언하는 성령의 은사가 다시 주어지기를 소망하며 학생들과 함께 철야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밤 11시, 파럼이 가르치던 여학생인 아그네스 오스만(Agnes Ozman)이 안수기도를 받고 방언을 말하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며칠 뒤에는 파럼 자신을 포함해 다른 학생들도 같은 체험을 했습니다. 파럼과 학생들은 이렇게 방언이라는 은사가 다시 주어지는 일이 분명하게 나타났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파럼이 세운 벧엘 성경대학에서 배운 사람 중에 아프리카계 미국인 설교자인 윌리엄 시모어(William J. Seymour, 1870-1922)가 있었습니다. 파럼의 강의에 감동한 시모어는 훗날 감리교 목사가 되고 1906년 4월, 로스앤젤레스 아주사 가(街) 312번지에 있는 한 낡은 교회에서 사도적 신앙 선교회(Apostolic Faith Mission)를 개척했습니다. 이곳에서 기도회를 인도하다가 방언을 하게 되는데, 그 이후 큰 부흥(?)이 일어납니다. 이 운동이 이후에 ‘오순절 주의(또는 오순절 운동, Pentecostalism)’로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한국에서는 ‘순복음’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오순절 신학, 오순절 운동’(Pentecostal Movement)입니다. 한국에서는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조용기 목사가 이 운동을 계승한 것입니다.[6]
오순절 운동의 역사는 2000년 교회 역사 가운데 불과 120년에 불과합니다.
오순절주의자들의 주장
오순절주의자들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과 성령세례를 받는 것은 다르다. 예수님을 믿어도 성령세례를 다시 받아야 한다.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은 방언이나 예언, 치유 같은 독특한 은사를 할 수 있다.”
IV. 왜 이들은 성령세례를 오해할까?
여러분~ 오순절주의자들의 주장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사람들의 말이 맞는 것 같습니까? 아니면 제가 앞서 설명드린 성경해석이 맞는 것 같습니까? 혹 그 사람들의 말이 맞지 않는 게 확실하다면, 왜 그들은 2000년이라는 긴 교회 역사에서 그런 주장은 불과 100여년 밖에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주장을 계속하는 것일까요?
크게 2가지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성경을 잘못 해석해서 그렇습니다. 또 하나는 성령에 대한 기본적인 오해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세례의 오해가 성경에서 비롯된 경우
첫째, 성경을 잘못 해석해서 그렇습니다.
사도행전 19:1-3
“(1)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2)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3)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바울이 에베소에 갔습니다. 어떤 제자들을 만나서 묻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그러니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그리고 나서
사도행전 19: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이 구절을 보면, 오순절주의자들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믿었는데, 아직 성령을 받지 못했으니, 믿고 나서도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죠. 성령을 받고 나서 방언을 하니, 분명 그들의 주장이 맞아 보입니다.
실제로 이 구절은 오순절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입장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주로 내세우는 구절입니다. 제가 대학시절에 방학 때가 되면 간혹 창원에서 서울에 올라와서 대형교회 탐방 같은 것을 했습니다. 어느 방학 때 수요기도회 시간에 여의도순복음교회에 갔습니다. 어느 목사님인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마침 이 구절로 설교를 하시더군요. 그러면서 “요즘 우리 순복음 교단에서 성령세례에 대한 강조가 약해지고 있다” 뭐 이런 이야기를 하시면서 이 구절로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구절을 잘 보아야 합니다. 2절에서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라고 질문을 하는데, 그 대답이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다시 묻죠. 3절에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입니다. 그랬더니 뭐라고 대답합니까?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이 대답을 보면 이들은 성령에 대해서만 듣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아직 예수님에 대해서도 제대로 듣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렇기에 요한의 세례를 받았을 뿐입니다.[7]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아직 안 믿은 것입니다. 2절에서 바울이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라고 물었던 것은 바울이 생각할 때 그들이 믿었던 것으로 안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라고 대답할 뿐만 아니라 “우리는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라고 대답하니, 그들은 아직 안 믿은 것이죠.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는 말은 아직까지 그리스도께 회심한 것이 아니라 요한에게 회심하였으며, 따라서 그들이 받았던 세례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도래하기 전에 세례요한이 베풀었던 ‘죄 사함을 위한 회개의 세례’였다는 의미입니다.[8]
이렇게 그들이 아직 안 믿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바울은 이들에게 다시 복음을 전합니다. 그게 4절이죠. 너희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고 했는데, 그 요한이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다. 그러니 그 뒤에 오시는 분은 예수다.” 라고 말이죠. 세례요한이 오늘 본문 요한복음 1:33에서 했던 말을 해 준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5절에서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으니, 이를 통해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시게 된 것이고, 이들이 방언과 예언을 하게 된 것은 사도행전 2장과 같은 사건입니다.
정리하면, 사도행전 19:1에 나오는 사람들은 성령만 안 받은 사람이 아니라 아직 믿지도 않은 사람이죠.[9] 얼핏 보기에는 그들이 믿은 후 2차적으로 성령을 받은 것 같지만, 문맥 속에서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6절에서 보듯이 성령이 임할 때에 비로소 믿게 된 것이죠. 2절의 상황은 아직 성령세례를 받지 않은 상황이고, 6절의 상황이 성령세례를 받은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오순절주의자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구절이 아니라 오히려 잘못되었음을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에베소에서의 사건은 옛 언약에 속한 세례요한의 물 세례를 받은 이들이 이제 새 언약에 속한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세례를 받는 전환점이 일어난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10] 예수님을 믿었어도 아직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11]
누가가 이 사건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을 믿은 이후에 성령을 받는다는 사실을 말하려 함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 새 시대가 도래했고 신약 교회가 탄생하였으나 아직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여전히 옛 것을 따르던 무리가 일부 남아 있었고, 마지막으로 신약 교회로 편입되는 특별한 의미를 띤 사건에 성령님이 어떻게 역사하시는가를 부각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본문을 조금만 주의 깊게 읽고 전후 문맥만 살펴보아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사실을 놓쳐 버리고, 믿은 후 2차적으로 성령을 받은 분명한 사례로 보는 것은 너무나 어설픈 성경 해석입니다.
성령세례에 대한 오해가 성령에 대한 기본적인 오해에서 비롯된 경우
성경이 명확하게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순절주의자들이 잘못된 주장을 하는 두 번째 이유는 성령에 대한 기본적인 오해를 하고 있고, 인간의 잘못된 종교적 욕구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이후에 성령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변화를 지나치게 독특한 것으로 생각하려고 합니다. 거듭난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신자답게 살아가며 하나님 나라와 주님의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산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12]
방언처럼 특이한 일을 하고, 기도를 해도 우리교회처럼 조용히 하면 기도가 아니라 생각하고, 눈물 콧물 흘리면서 기도를 해야 그게 은혜받은 것이고, 찬양을 불러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기에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해야 되고, 무엇보다도 병에 걸린 사람을 고치는 일 등을 해야 그래야 제대로 된 신앙이고, 그래야 성령님이 역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아주 심각한 부분을 놓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방언’이 오순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방언’이 아니라는 것이죠. 설교 내내 강조했듯이, 거기에 나오는 방언은 ‘외국어’입니다. ‘난 곳 방언’입니다.
결국 성경보다 사람의 체험,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을 더 위에 두기도 합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센세이셔널한 증거를 추구하는 신앙은 오히려 위험합니다. 빨리 뜨거워진 냄비는 빨리 식듯이, 열광주의는 조심해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인 성경보다는 사람의 체험을 중요하게 여기는 신앙을 조심해야 합니다.
코로나 19 시대에 우리는 이런 신앙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더욱 확신하게 됩니다. 소금을 뿌리면 코로나가 낫는다, 예배 시간에 하늘에서 신선한 공기가 내려오니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된다, 참된 신자는 코로나에 걸리지 않는다, 코로나 19에 걸려도 치유사역을 통해 낫게 할 수 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대개 그런 열광주의자들입니다. 코로나 시대에 왜 교회에서 많은 확진자가 발생합니까?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일반은총으로서의 도구인 의학을 믿지 않고, 마스크를 평소에 쓰지 않으며, 그 가운데서도 큰 소리로 찬양하고 목청껏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뭔가 답답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V. 성령세례에 대한 성경적 입장 정리
삼위일체의 관점에서
지금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이어지는 요한복음 강해의 해당본문인 요한복음 1장 33절 말씀을 통해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본문을 통해 성경 전체를 보면서, 구속사적 흐름을 보면서 성령세례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성령님의 내주하심을 분리시켜 버리는 오순절주의자의 주장이 성경의 가르침에 맞지 않다는 사실을 충분히 살펴보았습니다.
이 정도로만 해도 충분하지만, 한 가지를 덧붙이면, 모든 성경적 교리의 가장 근본적인 뼈대인 삼위일체의 관점에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오순절주의자들의 주장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예수님을 믿어도 아직 성령님이 내주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제2위이신 예수님과 제3위이신 성령님을 분리시키는 일이죠.
성령님이 하시는 가장 중요한 사역 중에 하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성령님이 임하시면 그 성령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거듭나고 지금까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부인하던 사람이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성령님과 예수님은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거듭나서 예수님은 믿지만 아직 성령세례를 받지 않았고, 그래서 성령세례를 받아야만 한다고 하는 주장은 삼위일체의 관점에서도 맞지 않는 것이죠.[13]
하나님의 영을 소유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영을 소유하고 있습니다(롬 8:14-15; 갈 4:6).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고 하나님의 영을 소유하거나, 하나님의 영을 소유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14]
“삼위일체 하나님의 밖으로의 사역은 나누어지지 않는다”(opera ad extra sunt indivisa)[15] 고대 교부들로부터 지금까지 우리가 믿는 바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따로 신자와 관계를 맺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릅니다. 이에 근거하여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물 세례를 받습니다.
세례요한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가리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라고 말할 때, 그 배경도 보면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분 위에 머물게 된 것과 관련됩니다(요 1:32). 이 부분은 삼위일체론을 다룰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근거구절입니다(마 3:13-17; 막 1:9-11; 눅 3:21-22). 세례 받으시는 예수님 위에 성령께서 임하신 일은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오순절에 성령께서 이 땅에 오실 일을 미리 보이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16]
그러니 오순절주의자의 주장은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주장이 될 수도 있는 위험한 주장입니다.
결론
이 짧은 시간에 20세기에 있었던 신학 논쟁 중에 가장 뜨거운 논쟁이었던 성령세례에 대해 다 다룰 수는 없지만, 여러분이 알아야 할 본문과 해석은 거의 다 다루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 기억하십시오. 성령세례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 단회적으로 일어난 일이 이제 우리 각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성령님께서 내주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논리적으로 모순입니다.[17]
그러니 혹여나 이상한 설교자들이 “아직도 방언을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성령을 아직 받지 못한 것입니다.”라는 식으로 여러분을 유혹하더라도 그 미혹에 속지 마십시오. 그런 유혹에 빠지지 마십시오. 그것은 결코 성령의 유혹이 아닙니다.
2,000년 교회 역사 속에서 단 120년에 불과한 기간 동안 존재했던 가르침을 따르지 마십시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성경에 일치하지 않을 뿐 아니라, 20세기 이전에 살았던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성령 없이 살았던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됩니다.
오순절주의자들이 말하는 성령세례를 사모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이미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여러분을 거듭나게 하시고 예수님을 믿게 하시고 의롭다 칭해 주신 그 힘에 힘입어 날마다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힘쓰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성령으로 하나되게 하신 교회를 위해 봉사하며 사십시오.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확신하지 않는다면,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어 주시기를 간절히 구하십시오. 아멘.
성령세례에 관한 개혁주의적 관점을 다룬 참고문헌
고재수, 『성령으로의 세례와 신자의 체험』(서울: 개혁주의 신행협회, 1989)
서철원, 『성령신학』(서울: 총신대학교 출판부, 1995)
김재성, 『개혁주의 성령론』(서울: CLC, 2012)
Donald Macleod(도날드 매크레오드), The Spirit of Promise (Christian Focus Publications), 지상우 옮김, 『성령세례와 개혁주의 성령론-로이드 죤즈의 ‘성령세례’와 비교하여』(서울: 여수룬, 1992, 2004).
John R. W. Stott(존 스토트), Baptism and Fullness: The Work of the Holy Spirit today (Leicester: IVP, 1964, 1975), 김현회 옮김, 『성령세례와 충만』(서울: IVP, 2002).
Richard B. Gaffin, Jr.(리처드 개핀), Perspectives on Pentecost (Phillipsburg: P&R, 1979), 『구속사와 오순절 성령 강림』, 김귀탁 옮김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0). (같은 책의 다른 번역으로 권성수, 『성령은사론』(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9)가 있다.
월터 카이저 외 4인 공저, 『성령세례란 무엇인가』, 이선숙 옮김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0).
설교를 이해하기 위한 질문
1. 요한복음 1:33에서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묘사합니까?
2. 사도행전 1:4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약속은 어디에 나옵니까?
3. 사도행전 1:5는 그 이전에 나온 어떤 본문과 연결되며, 그 이후에는 어떤 본문에서 어떻게 성취됩니까?
4. ‘성령세례’(Spirit Baptism or Baptism with the Holy Spirit)란 무엇입니까?
5. 오순절주의자(순복음 계통)들의 주장은 무엇이며, 그들의 오해는 무엇에서 비롯되었습니까? (2가지)
6. 삼위일체의 관점에서 성령세례에 대한 바른 이해는 무엇입니까?
7. 이 설교를 듣기 전에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은 없습니까?
어린이를 위한 질문
1. 거듭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해도 아직 그 안에 성령님이 임하시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2. 예수님을 믿어도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성령을 받아서 어떤 특별한 능력을 행해야 믿음이 좋은 것일까요?
3. 성령세례라는 말의 의미를 아는대로 적어보세요.
[1] 설교자가 대학교 3학년 때 읽고 충격을 받은 책은 Richard B. Gaffin, Jr.(리처드 개핀), Perspectives on Pentecost (Phillipsburg: P&R, 1979), 권성수 옮김, 『성령은사론』(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9)이다. 이 책은 이후 김귀탁 번역으로 『구속사와 오순절 성령 강림』(서울: 부흥과개혁사, 2010)라는 제목으로 새롭게 나왔다. 설교자는 이 설교를 준비를 마친 뒤에 새로운 번역을 다시 읽었고, 각주를 추가했다.
[2] Richard B. Gaffin, Jr.(리처드 개핀), Perspectives on Pentecost (Phillipsburg: P&R, 1979), 김귀탁 옮김, 『구속사와 오순절 성령 강림』, 21.
[3] 세례요한에 대한 이야기는 4개의 복음서 모두에 나오는데, 각각 조금씩 다르게 표현한다. 그런데 오늘 본문 33절에 나오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이’이라는 말은 4개의 복음서 모두에 나온다. 마태복음 3:11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마가복음 1: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누가복음 3: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요한복음 1:33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4] 리처드 개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례요한의 사명과 세례, 예수님이 친히 세례를 받으신 일, 그리고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의 긴밀한 연계성이 요한복음 1장 33절에 명백히 표현되어 있다.” 개핀, 『구속사와 오순절 성령 강림』, 23.
[5] 김재성, 『개혁주의 성령론』(서울: CLC, 2012), 154.
[6] Alister E. McGrath, Christianity’s Dangerous Idea (HarperOne, 2007), 박규태 옮김, 『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의 역사』(서울: 국제제자훈련원, 2009), 627-628; 김재성, 『개혁주의 성령론』(서울: CLC, 2012), 170-174.
[7] 이 사건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부분이다. 개핀, 『구속사와 오순절 성령 강림』, 37.
[8] Donald Macleod(도날드 매크레오드), The Spirit of Promise (Christian Focus Publications), 지상우 옮김, 『성령세례와 개혁주의 성령론-로이드 죤즈의 ‘성령세례’와 비교하여』(서울: 여수룬, 1992, 2004), 39-40; 개핀, 『구속사와 오순절 성령 강림』, 37.
[9] Stott, 『성령세례와 충만』, 40.
[10] 김재성, 『개혁주의 성령론』(서울: CLC, 2012), 161.
[11] 김재성, 『개혁주의 성령론』, 159.
[12] 김재성, 『개혁주의 성령론』, 166.
[13] 매크레오드, 『성령세례와 개혁주의 성령론』, 24.
[14] Stott, 『성령세례와 충만』, 20.
[15] 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para. 258, 267.
[16] 김성수,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79.
[17] 개핀, 『구속사와 오순절 성령 강림』,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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