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통영을 흔히 ‘한국의 나폴리’라고 합니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꼭 가봐야할 장소가 있습니다. 통영 서포루(西鋪樓)입니다. 여기 서 있으면 앞으로는 한려해상 맑은 바다에 점점이 박힌 통영항의 전경을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을뿐 아니라 덤도 있지요. 뒤로는 세병관(洗兵館)과 산복도로의 실루엣을 또렷이 볼 수 있습니다. 서포루에 대해서는 잠시 설명이 필요합니다. 서포루는 1678년 축조된 통영성의 망루였습니다. 삼도수군통제사 윤천뢰(尹天賚)가 쌓은 성은 해발 174m, 둘레가 약 3.6㎞입니다.
통영과 통영성이라는 이름은 이곳이 해군 모항(母港)인 진해와 같은 역할을 했기에 붙은 것입니다. 이곳에 삼도수군통제영이 옮겨온 것은 1604년(선조 37년)입니다. 당시 지명은 거제현 두룡포(頭龍浦)였는데 통영성은 일제 때 철저하게 파괴됐지요. 통영성에는 동서남북 4대문과 동서북 3면에 포루가 있습니다. 동문은 신흥문(新興門)에서 춘생문(春生門)으로 이름이 변했으며, 서문은 금숙문(金肅門), 남문은 청남루(淸南樓)라 불렀고, 북문은 훗날 공북루(拱北樓) 혹은 의두문(依斗門)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3포루는 1694년 통제사 목림기(睦林奇)가 세운 것으로 장수가 여기서 군사들을 지휘하였기에 장대(將臺)라고도 불렸습니다. 북포루는 여황산 정상, 동포루는 동쪽 동피랑 정상에 있어 동장대, 서포루는 서쪽 서피랑 꼭대기에 있어 서장대라고도 했습니다. 서포루에서 세병관이 바라보이는 방면에 달동네 비슷한 마을이 형성돼 있습니다. 길이 좁고 비탈이 심한 이곳에서 1926년 10월28일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대문호가 탄생했지요. 바로 ‘토지’의 작가 고 박경리(朴景利•1926~2008)선생입니다.
당시 이 동네의 지명은 경남 통영군 통영읍 명정리로, 그의 부모는 박수영, 김용수씨였습니다. 맏딸이었던 박경리 선생의 본명은 금이(今伊)로, 어렸을 적부터 유달리 책을 좋아해 교과서 대신 소설책을 숨겨놓고 읽었다는 일화가 아직까지 전해집니다. 이 동네에 가면 박경리 선생이 태어난 곳이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담벼락에 타일을 붙인 집으로, 작은 명패가 박 선생의 생가임을 알려주는데 찾기 힘들면 지나가는 행인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아도 친절하게 대답해줍니다. 그만큼 고장의 자랑이라는 얘기겠지요.
박경리 선생의 평생을 취재해보면 그가 행복했던 시기는 진주여고를 졸업했을 때까지가 아니었을까 싶을만큼 불우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광복이 되던 해인 1945년 진주여고를 졸업한 뒤 통영 우체국에서 잠시 근무하다 김행도씨와 결혼했습니다. 그해 첫딸 김영주 강원도 원주 토지문화관 관장이 태어났습니다. 1948년 남편 김씨가 인천 전매국에 취직하자 박 선생은 남편을 따라 인천 금곡동으로 이사갔고 아들 김철수가 태어났습니다. 박 선생은 지금의 인천 배다리마을에서 헌책방을 열었지요. 아마 그때가 박 선생의 삶에서 가족애를 맛본 절정기가 아니었을까요. 박 선생은 1950년 수도여자사범대학을 졸업하고 황해도 연안여중 교사로 갔는데 그해 비극적인 6·25가 터졌습니다. 전쟁은 박 선생에게서 남편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남편을 잃고 아이 둘과 함께 고향 통영으로 돌아온 선생은 1954년 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한국상업은행에서 근무하며 습작에 힘썼습니다. 1954년 6월엔 은행 사보 ‘천일’에 ‘박금이’란 본명으로 장시(長詩) ‘바다와 하늘’을 발표했습니다. 은행에서 퇴사한 뒤인 1955년 10월에는 ‘박경리’라는 필명으로 소설 ‘전생록’을 게재했지요. 이때 선생은 서울 돈암동으로 이사와 식료품 가게를 운영했습니다. 그가 김동리(金東里) 선생과 만난 것은 동리 선생 집에 고향친구가 세들어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 인연으로 그는 김동리 선생의 지도를 받게됐는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 단편 ‘불안지대’가 ‘계산’이라는 제목으로 바뀌어 1955년 8월 현대문학에 추천됐습니다. 이듬해에는 단편 ‘흑흑백백’이 또다시 추천을 받아 마침내 등단의 꿈을 이룹니다.
여기서 잠깐 ‘박경리’라는 필명의 유래를 알아보고 갑니다. 이 필명은 김동리 선생이 지어준 것이라고 합니다. 본명과 필명이 다른 경우는 박경리 선생뿐 아니라 여럿 있습니다. 이문열의 본명은 이열인데 ‘글월 문(文)’자를 넣어 필명을 삼았습니다. 소설가 황석영 역시 본명은 황수영인데 젊은 시절 성명학에 관심있던 그가 ‘수영’이라는 이름이 불길하다고 ‘석영’으로 바꿨다지요. 현대문학에 따르면 지금도 황씨는 “비명횡사할 이름이었는데 그나마 이름바꿔 이만큼 산다”고 농담을 한다지요. 매년 노벨문학상 시즌이면 등장하는 시인 고은도 본명은 고은태이며 한때 승려가 돼 ‘일초(一超)’로 불리웠습니다. 시인 신경림은 신응식, 시인 김지하는 김영일, 시인 박노해는 박기평입니다. 김지하와 박경리 선생의 인연은 뒷부분에 나옵니다.
남편과 사별하고 문학가로 발돋움할 즈음 다른 불행이 다가옵니다. 아들이 병원에서 치료받던 중 사망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선생은 문학에 매진해 단편 ‘불신시대’로 제3회 현대문학상 신인상을 받고 1958년엔 첫 장편 ‘애가’를 내놓습니다. 1959년에는 장편소설 ‘표류도’로 제3회 내성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잇달아 장편 ‘성녀와 마녀’(1960년) ‘김약국의 딸들’(1962년), ‘파시’(1964년) ‘시장과 전장’(1965년)을 발표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제2회 한국여류문학상을 받지요. 1968년 월간문학 창간호에 발표한 중편 ‘약으로도 못고치는 병’은 훗날 ‘토지’의 모티브가 되는 소설이라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이 중편에 등장하는 강청댁, 용이, 월선이의 삼각관계가 ‘토지’에 등장하는 사건들과 흡사하다는 것입니다.
박경리 선생은 1969년 9월부터 필생의 역작인 ‘토지’ 1부를 현대문학에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집념이 강했던지 1971년 8월 유방암 수술을 받고 퇴원한 그날부터 가슴에 붕대를 감은 채 원고를 다시 쓰기 시작해 1부 연재를 무사히 마쳤지요. ‘토지’ 2부는 1972년 문학사상 창간호에 연재됐으며, 이듬해인 1973년 외동딸 김영주 관장이 시인 김지하와 결혼을 했습니다. 여기에 대해선 부연 설명이 필요합니다. 2009년 10월 저는 지금의 토지문화관에서 김지하씨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의 인터뷰 본문을 그대로 인용해 봅니다. 내용을 보면 제가 인터뷰를 애걸해 이뤄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가 요청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김지하씨는 처음부터 저를 혼내면서 ‘기선’을 제압하려 했지만 저도 당시엔 날이 시퍼랬습니다.
시인(詩人)은 화가 나 있었다. 얼마 전 스웨덴에 간 걸 두고 뒷얘기가 있었다. 노여움에 불을 지른 건 ‘노벨문학상을 노린다’는 해석이었다고 한다. 김지하(金芝河·68)의 스웨덴행(行)은 한·스웨덴 수교 50주년 강연 때문이었다. “내가 ○나 △같은 졸때기도 아니고, 문학을 상(賞) 타려고 해? 괴로워서 하는 거잖아! 전 이미 옥중(獄中)에서 제3세계의 노벨문학상이라는 로터스 특별상(1975년)을 탔어요. 상(賞)하고의 인연은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해요.”
인터뷰 이야기에 불쾌한 기억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친구 이야긴 묻지도 마. 정치 얘기도 안 할 거고.” 경망(輕妄)의 대표격인 한 인물을 결코 입에 올리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제야 흡족한 듯 그가 ‘숙제’를 냈다. “잡지에 글을 썼어요. 박경리(朴景利) 선생 평론인데 제목이 ‘흰그늘과 화엄(華嚴)’이야. 200자 원고지 400장짜린데 꽤 어려워. 다 읽고 오세요. 근데 (문기자의) 말투가 조폭(組暴) 같은데, 토건(土建)업자 냄새도 나고?”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토지(土地)문학관은 산속에 있었다. 자궁(子宮) 속 태아(胎兒) 같은 모습이었다. 앞은 황금빛 들판이었다. 내방객은 드물었다. 시인은 약속했던 낮 12시가 훨씬 지난 1시쯤 나타났다. 김지하는 기분이 좋은 듯했다. '흰그늘과 화엄'의 보충자료라며 육필(肉筆) 원고 복사본을 건넸다. "여기가 남에게 잘 안 보여주는 곳"이라며 방으로 안내했다. 목판 속에 새겨진 박경리가 사위와 기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