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낡은 종교는 역사의 박물관에 걸어라!
 
 
 
카페 게시글
뿌리깊은 편견과 고정관념들(정강길) 스크랩 왜 예수인가
발람의 나귀 추천 0 조회 89 14.01.17 12:1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왜 예수인가

 
- 다른 고대 신화와 종교에는 없었던 <예수와 성서>에 대한 진정한 고유 의미
 
  
(* 조금 긴 글이지만 정독해서 차분하게 읽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여기서는 예수사건 곧 예수운동의 의미 그 중에서도 대속의 의미를 보다 상세하게 풀어보고자 한다. 물론 기존의 보수 기독교 신학이 말하는 주술적 의미의 대속론을 주장하기 위함은 결코  아니며, 오히려 나의 경우는 진화론적이고 인류학적인 분석을 통해 가능할 수 있는 새로운 기독교의 대속론을 언급하고자 함이다. 다시 말해 예수에 관한 교리 혹은 예수의 보혈을 믿으면 먹물보다도 더 검은 내 죄가 눈처럼 사해진다는 식의 그런 유치한 대속론이 아니라 그보다는 좀 더 심오하다고 생각되는 대속론적 예수사건을 언급하기 위함이다.

이때 나 자신이 이론적 전거로 삼는 것들은 기본적인 신구약성서의 내용들 외에도 특별히 인류학자 르네 지라르(Rene Girard)의 이론과 탁월한 성서학자 윌터 윙크(Walter Wink)의 분석 그리고 민중신학적 성찰에 많은 빚을 진 것임을 밝혀두고자 한다. 또한 이 글은 대략적인 <나의 예수론>이자 그에 대한 개인적 신앙고백까지 포함된 것이기도 하다. 여튼 이 글을 통해서 몸학에서 보는 예수를 좀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
 
 
 
 
 

폭력의 기원, 폭력과 전쟁의 유전자를 타고나다

우리가 <왜 예수인가>를 얘기하기 위해서는 어쩌면 역사 이전의 선사 시대의 사회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내가 보는 예수사건은 인류사에서도 본성적으로 작동되고 있는 뿌리 깊은 폭력의 문제와 근원적으로 맞물려 있는 것인데, 그 폭력이 역사적으로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는 그 기원을 확증할 수 없을 만큼 매우 오래된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태고적에는 매우 평화로웠는데 농경사회 곧 정착 문화가 시작되면서 잉여생산물의 편중 그리고 남성의 지배적 권력이 형성되면서 폭력의 문화가 형성되었다고 보는 이들도 꽤 있다. 그러나 이는 마치 마르크스 원시공산사회를 상정하는 것과 흡사하게 태고적의 낭만적인 선성(先性)을 강조하는 바라 개인적으로는 이를 반대하는 입장이다.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도 밝혔듯이 제노사이드 같은 사건들은 옛날로 갈수록 더욱 빈번하였다(http://freeview.org/bbs/tb.php/g003/387 참조).

또한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 아주 원시적인 돌도끼 사회에선 돌로 치는 투석(投石)의 경우들이 더 많았을 거라는 점도 충분히 고려할 필요가 있겠다. 왜냐하면 돌로 치는 가장 원시적인 처형으로서의 투석은 그 폭력의 흔적이 나중에는 명확하게 남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로 치는 사례들은 오늘날까지도 후진국의 풍습들에선 여전히 빈번하게 일어날 만큼 가장 대표적으로 손쉽게 자행되는 폭력사태들 가운데 하나이다.
 
투석 외에 높은 낭떠러지에서 뛰어내리게 하는 형벌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본다. 르네 지라르는 투석과 허공에 뛰어내리게 하는 것은 가장 널리 퍼져 있던 제의적 살해 형태라고 말한다. 분명한 건 진화론적으로 볼 때도, 폭력은 본능처럼 일상처럼 풍토병처럼 우리 안에 이미 있는 그러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데이비드 바래시(David P. Barash)와 주디스 이브 립턴 (Judith Eve Lipton)의 연구에 따르면, 복수와 화풀이 본능은 일찍이 동물 사회에서도 볼 수 있는 그러한 이라고 말한다. 게다가 행동내분비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생명체는 고통을 다른 개체에게 떠넘김으로써 자신에게 고통을 유발하는 스트레스를 경감시켜왔던 점이 있다고 한다. 이때 인간의 경우 이런 고통의 전가는 조직사회나 집단에서 희생양 만들기, 약한 사람 괴롭히기 같은 왕따 집단따돌림, 아동이나 동물 학대, 잔인한 부족 의식, 대내외 전쟁, 마녀 사냥, 증오 범죄 등등 이러한 사례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것이다.
 
사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폭력을 저지를 경우, 우리 몸의 생물학적 반응은 일종의 습관적 쾌감 혹은 쾌락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습관적 쾌감과 쾌락이 한시적이라고 하더라도 그러한 폭력의 유혹은 달콤한 마시멜로우보다도 훨씬 더 강력하다. 인간 몸의 생리는 동물만큼이나 본능적으로 분풀이로서의 폭력들을 곧잘 쓰게 되어 있다. 그럼으로써 폭력은 우리 안에 관습화 곧 <몸화> 되어진다. 따라서 폭력이 내 안에 내재화된다는 점에서 그것은 그 자신이 따르고 있는 <무의식적 종교>라고 볼 수 있다.
 
<넘치는 힘에 대한 숭배와 동경>은 이미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다. 이때 폭력이란 '과도한 힘'을 의미하며 이를 꼭 물리적 폭력에만 한정지을 필요는 없을 이다. 이미 타자를 강압적으로 지배하고 권력화하는 것 역시 폭력에 해당한다. 중요한 점은 <힘의 균등한 성장과 발전>보다는 <넘치는 힘에 대한 숭배와 동경>을 훨씬 더 자연적으로 몸의 본성처럼 습득해왔었다사실이다.

물론 진화에는 폭력의 흐름도 있지만 협력의 흐름도 함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은 생존 본능에 따른 폭력이 모든 사안을 정당해주었듯이 우리는 폭력의 유전자를 타고 났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이는 우리 안에 <전쟁에 대한 끔찍한 사랑>(James Hillman이 쓴 책 제목)이 왜 생겨났는지에 대한 답변이기도 하다. 어떤 면에서 인정하기 싫겠지만, 우리 모두는 복수와 화풀이 혹은 폭력과 전쟁을 너무나 끔찍하게 본능처럼 지녀 왔던 그러한 존재였다.
 
 
 

신화의 시대, 본격적인 <희생양 메커니즘>이 작동되다

그러다가 인류는 언제부터가 신화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신화의 발생이 폭력과 뿌리 깊은 연관성이 있다고 본 대표적인 학자가 바로 인류학자인 르네 지라르(Rene Girard)이다. 그에 따르면 존재는 타자를 모방하면서 점차로 자기화되는 것인데, 이러한 <모방 욕망>은 일종의 경쟁 체제로도 이어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서로 같은 것을 모방적으로 욕망할 경우 한정된 자원에서 이를 쟁취하기 위한 경쟁과 갈등 역시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지라르가 보기에 프로이드가 말한 외디푸스 이론도 오히려 모방 이론으로 설명할 경우 훨씬 더 깔끔하게 설명되어진다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모방 욕방에 의한 서로 간의 경쟁의 과열될 경우 극심한 갈등과 분열이 일어나게 되며 그로 인해 그 집단은 붕괴에 처하는 위기를 맞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붕괴를 피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희생양이 필요하다. 그 희생양은 그 집단에서 주변부로 밀려난 힘없는 약자들(병든 불구자, 떠돌이, 장애인, 여자, 아이 등등) 중에 선택되는 경우가 많으며, 이들이 죽든 추방되든 간에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될만한 그런 사람들이 주로 선택된다.
 
그리고 이들이 대리 희생을 치룬 후에는 그 집단은 붕괴의 위기를 모면하고 다시 결속된 화해를 치룬다는 것이다. 그 집단이 희생양에 대한 살해를 치를 때 여기에는 만장일치의 죽음으로 참여한다. 그런 점에서 되도록이면 희생양에는 죽어도 신경쓰지 않을 사람들이 주로 선택되어진다는 것이며, 집단의 결속과 화해를 위해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한 방식으로 진행되어진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투석과 허공에서 뛰어내리는 처형의 경우에도 이것은 매우 원시적인 방식이지만 모든 사람들이 처형에 관여하면서도 그 누구에게도 책임이 없는 그러한 처형방식에 속한다. 지라르에 따르면 이것은 만장일치로 참여한 폭력적 살해로서, 분쟁을 일으키는 모방을 막는 중앙집권 권력이나 재판제도가 없었던 아주 원시적인 시절에는 공동체를 하나로 통합시킬 수 있는 아주 좋은 처형방식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정착 농경 사회로 접어들게 되면서 이에 대한 반복적 행태들은 구조화로 이어지게 될만큼 매우 강력한 제의적 결속을 갖는 형태로 나아가게 된다. 이러한 화해는 희생자들을 기념하는 반복적 제의를 통해 집단의 결속력을 강화하는 모양새를 띠며, 그 희생의 정당화를 위해 신의 대리자, 혹은 구세주, 종교적 숭배의 인물로 그려지기도 한다. 그럴 경우 고대의 신화나 설화들은 이러한 원시적 폭력들을 정당화하는 기능을 갖는다.
 
이것이 지라르가 말한 고대 신화가 은폐하고 있는 내밀한 기원이자 희생양 메커니즘의 골자다. 즉, 지라르가 보기에 초기 인류 문화의 기원과 발생에 이러한 희생양 메커니즘이 있다는 것이며, 대부분의 고대 신화에는 바로 이러한 폭력의 문화가 은폐되어 있다는 것이다.
 
신화는 폭력으로 희생된 희생양을 신의 피의 굶주림으로 끌어와서 이를 정당화한 것이자 신 존재 또는 그와 맞먹는 초자연적인 대상물에게 이를 투사한 고대인들의 형이상학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희생물을 죽이는 폭력 자체를 신성화하여 거룩한 의식을 치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제의를 치룰 때마다 그 집단 전체에는 상호 결속력과 화해를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신화와 연관된 종교 제의 문화들은 전적으로 가해자의 입장에서 얻어지는 것들이다. 즉, 만장일치의 죽음에 참여한 가해자들 혹은 살아남은 자들의 입장을 대변해주는 것이라는 점에서, 살해된 사람들 중에는 당연히 힘없는 약자들, 억울하게 죽은 희생자들이 매우 많았을 걸로 본다. 그런 점에서 살해되고 희생된 피해자의 눈과 귀는 여전히 묻혀져 있었다. 대부분의 고대 신화는 가해자를 대변할 뿐 피해자를 대변해주진 않았던 것이다.

구약 시대, 폭력과 폭로의 신화가 함께 작동하다

구약의 히브리 성경에는 명백한 폭력성을 보여주고 있는 성서 본문들이 많다. 이는 앞서 말한 그러한 폭력과 희생양 메커니즘의 문화가 구약 시대에도 예외 없이 일어난 것임을 반증한다. 아이를 제물로 바치는 인신 제사의 흔적도 분명하게 나온다. 야훼(여호와)를 추종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질투를 신(God)에게 투사하여 전쟁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지라르에 따르면, 고대의 신화와 달리 구약성서에 담긴 내용들 중에는 앞서 말한 희생양 메커니즘을 폭로하는 신화의 출현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요셉의 이야기가 그러하다. 여기에는 가해자가 아닌 희생자의 관점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요셉을 희생시켰던 형제들(가해자들)이 오히려 잘못된 것으로 그려지고 있는데 이는 은폐된 폭력에 대한 폭로성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구약성서에는 종종 앞서 말한 폭력 체제에서 희생양으로 간택되기 쉬운 사회적 약자들을 오히려 야훼가 나서서 보호하려는 흐름들이 있다는 것이다. 가난한 자와 고아와 떠돌이, 과부 등등 이들에게도 야훼의 사랑을 선포하고 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본래 히브리 노예였음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전적으로 가해자가 아닌 희생자의 관점에서 보려는 신화를 작동시켰다는 것이다. 심지어 탈출한 히브리 노예들은 야훼와 계약 관계를 체결할 정도로까지 격상된다.

그러나 구약의 왕조 시대에 접어들면서 야훼와의 계약관계는 다시 <왕조 이데올로기>로 변질되어 왕권 강화의 목적으로 야훼 신앙이 전승되어진다. 이러한 왕조 지배체제의 흐름에 맞서 열왕들을 비판하는 예언자 그룹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사회적 약자들 곧 희생자의 관점을 옹호하는 흐름을 잇게 된다. 그러면서 야훼 하나님의 법도와 사랑과 정의를 실현하지 않는 왕들에게는 매우 맞서 있다.
 
구약에선 왕조 전승과 예언자 전승은 뚜렷한 대비를 이루고 있으며, 예언자들은 거의 대부분 열왕들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예언자들의 눈물 어린 호소와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정의를 부르짖는 외침에도 이스라엘은 여전히 반성하지 않았으며 그럼으로써 이스라엘의 역사는 매우 혹독한 시련을 치르고 만다.

이처럼 구약성서에는 폭력적 하나님과 희생자를 위한 하나님의 모습이 함께 기록되어 있는데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폭력으로 희생된 희생자들과 하나님이 서로 일체감을 보이기 시작한 기록들이 나오곤 한 것이다(예컨대, 출애굽 전승, 시편 51, 이사야 19:19-25, 이사야 53장, 미가서4:2-4 등등).
 
그럼에도 구약시대는 흠 없는 양이나 비둘기를 죽이는 피의 희생 제사 문화를 여전히 시행했었다. 피의 희생 제사가 인신 제사의 인간에서 다시 동물로 옮겨 온 것이긴 하나 그 폭력적 관습만은 여전히 유지된 것에 속한다.
 
 

 

 

신약 시대, 예수사건에서 그 절정을 보다

그런데 이것이 신약시대 즉 예수사건에 이르면 그 절정을 이룰 정도로 관습적 폭력 문화가 양산하는 희생양 메커니즘이 낱낱이 폭로되어진다.

일반적으로 죄인이란 표현에는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겠는데, 첫 번째는 그 사람 스스로가 수행한 자범죄를 지은 이를 뜻하는가 하면, 반면에 그 집단 조직사회가 그 어떤 대상을 희생시키고자 딱지처럼 붙여 놓은 사회학적 의미의 죄인이 있을 수 있다. 예컨대, 유대교 율법사회에서는 안식일에도 일을 해야만 먹고 살 수 있는 가난한 자들 그리고 정결법에 저촉된다고 여겨진 병든 환자들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죄인으로 전락되어진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그 사회가 그들을 죄인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오늘날 조직사회 문화 속에서도 종종 볼 수 있다. 예컨대, 우리 가운데 밉살스러운 사람, 껄끄러운 사람이 있을 경우 어떻게 해서든지 조직의 규정을 어긴 이들로 만들어서 조직에서 축출하는 경우들을 들 수 있겠다. 남한 사회에서는 주로 반공주의나 국가안보를 위해 많은 민주화 운동가들과 통일 운동가들을 용공혐의와 간첩조작으로 몰아가서 감옥에 가두거나 심지어 사형에 처하기도 했었다. 이러한 국가의 폭력에는 많은 사람들이 눈을 감기도 한다. 불의를 알고도 침묵한다면 암묵적 동조자가 될 수 있다. 살아남은 자들은 적어도 이들의 희생에 빚을 지게 되는 것이다.

희생양 메커니즘은 신화의 시대를 거치면서 종교로 정착되었는데, 예수사건은 독특하게도 그러한 종교(당시로선 유대교)가 지녔던 희생양 메커니즘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임을 폭로한 아주 특별한 사건에 속한다. 마가복음은 바로 이를 정형화한 것이다. 복음서가 기록하고 있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 사건에서 그 희생양은 죄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당시 로마 지배체제와 당시의 유대교 사제계급들 심지어 유대 백성들까지도 모두 합심해서 예수를 희생양으로 처형시킨다. 복음서는 바로 그 예수를 죽인 판결은 잘못된 판결이며, 예수야말로 우리를 구원한 메시아임을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그 희생양은 전례 없이 신과 일체감을 이룬다. 하나님은 철저히 희생자의 편에 서 있으며, 심지어 하나님 자신이 십자가에서 처형당하고 있음을 복음서는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지라르에 따르면 그때까지 구원하는 폭력의 신화를 숭배해왔던 시대에서 희생양 메커니즘을 철저하게 폭로한 것은 복음서가 거의 유일한 것으로 보고 있다. 복음서를 보면 알겠지만, 예수는 폭력과의 연관 고리를 찾아볼 수가 없다. 그는 너무나도 순순히 죽임을 당하고 있다.
 
마가복음은 바로 이 같은 예수사건을 증언함으로써 그러한 폭력 문화를 더 이상 끝장내야 한다는 점을 담고자 했었다. 유대교 예루살렘 멸망을 목도했던 마가공동체로서는 이들이 보기에 그러한 폭력의 희생양을 만드는 체제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까지 판단한 것이다.

마가복음을 보면 예수를 죽이는 사건에 어느 누구하나 연루되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로 모두가 관여되어 있다. 지배체제 권력자들과 사제계급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잘못된 판결에 침묵하는 대다수 군중들 등등 심지어 도망간 제자들까지도 모두 포함하여 여기에는 누구 하나 걸려 넘어지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다. 그 예수를 누가 죽였는가? 바로 우리 모두였다!
 
그것은 분명히 죄 없는 자를 죽인 부당한 판결이었다. 그런 점에서 복음서는 철저히 희생된 약자의 관점에서 그려진 내용들이다. 지배체제의 권력자들과 사제계급들 그리고 군중들까지 우리 모두는 죄 없는 이를 죽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죽임을 당한 그분이야말로 우리를 구원할 진정한 메시아요, 심지어 하나님과 본체가 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초대 기독교인들이 “예수 외에 다른 이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행 4:12)고 고백했을 때 이는 어떤 의미에서 거의 문자적 뜻에 가까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로선 예수사건을 통해서만이 그 희생제물의 기제가 폭로되고 피의 굶주림을 행사했던 그 폭력의 순환 고리가 끊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구원이란 용어의 의미도 신학 이전에 이미 인간학적 용어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폭력의 고리를 끊어내는 것이기에 인간에 대한 실질적 구원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를 대신해서 피 흘려 돌아가신 주님”이라는 고백과 “죄 없으신 분”이라는 고백이 어찌 나오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이로써 많은 이들이 예수로부터 빚진 자가 된 것이다. 살해당한 그 분이야말로 진정한 메시아였다고 고백한 사건은 그야말로 존재론적 인식 자체를 뒤바꾸는 엄청난 일대 사건이었다. 더 놀라운 점은 희생된 그 주님이야말로 진정한 승리자로 고백되어진다는 점이다. 잘못된 판결로 인해 무참하게 살해된 그 희생양을 승리자 그리스도로 볼 경우 당시 폭력을 일삼는 지배체제의 입장에서 볼 때는 너무나도 이것이 불온시 될 수밖에 없다.

이처럼 본래의 예수운동에는 분명한 급진성이 있다. 그러나 나중에 기독교가 제국의 종교가 되면서 이 같은 예수사건의 급진성은 온데간데 없이 말랑말랑해지거나 관념화되고 만다. 여기에는 그리스 로마 문화에 적응하고자 했던 기독교 종파의 생존적 흐름과도 함께 맞물려 있다.

 


예수사건 이후, 예수사건의 혁명적 의미를 다시 흐려놓다

안타깝게도 예수사건 이후의 기독교는 이러한 예수사건의 의미를 점차로 흐려놓게 된다. 그 과정에서 바울의 신학은 거의 중간점에 놓여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월터 윙크에 따르면, 바울은 그리스도가 희생제사의 끝이며 희생양 기제를 폭로하는 분으로 그리기는 했으나 바울 또한 예수를 다시 마지막 속죄 제물로 설정함으로써 그 희생양 기제를 적어도 형식상으로는 물려받고 있는 점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와 바울 사이에 느껴지는 간격과 긴장 역시 감지해볼 수 있다.

예수의 하나님은 엄격한 유대교 율법에 따른 피의 희생양을 원하는 그런 분이 아니었고, 오히려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친밀한 아버지이자 서로 간의 빚진 것들을 한없이 용서하시는 그러한 사랑의 하나님일 뿐인데, 당시의 유대교 율법 체제는 신을 폭력적 하나님으로 그려놓았고 예수는 이와 극명하게 다른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을 설파했었다. 쉽게 말해 애초 신은 희생양을 원하지도 않았으며 원한 적도 없다. 희생양 기제를 만든 인간들이 신의 피의 굶주림으로 투사한 것이다.

이때 예수운동은 그 십자가 처형을 통해 이에 대한 완전한 끝장을 보고자 했던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그러한 피 흘림의 제사를 원했다는 것부터가 실은 완전한 구라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행태를 잘 살펴보면, 언제나 그 사회에서 죄인으로 취급받는 이들을 우선적으로 끌어안을 만큼 이들과 늘상 함께 붙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반면 <희생양 메커니즘>이 작동되는 사회에서는 이들이 죄인 취급 되는 것뿐만 아니라 종종 이들의 생명까지도 무참하게 살해되기도 하며, 혹은 사회 바깥으로 영구히 격리 축출되기도 한다. 하지만 예수운동의 메커니즘에서는 오히려 약자인 이들이야말로 하나님나라의 주인으로까지 선포된다(누가 6:10). 여기에는 강자와 약자에 대한 계급적 전복의 의미마저 깃들어 있다. 
 
따라서 이 같은 예수운동의 급진성이 성숙한 사회가 아닌 한 이를 소화하기 매우 힘들었을 것이며, 그런 점에서 크게 오래가진 못했을 거라는 점 또한 충분히 짐작할만하다.
 
결국 예수운동의 본래적 급진성은 바울에 이르면서 조금씩 그 온전한 의미가 상쇄되어졌던 것이다(여기에는 이미 말씀드렸던 내용인 ‘바울이 역사적 예수에 대해선 몰랐었다’는 필자의 글도 참조하길 바란다). 필자가 생각하기로는 바울의 기독론은 당시 그리스 로마 시대가 소화할 수 있는 가장 최대치가 아니었을까 싶다. 보다 첨예하게 역사적 예수운동을 따랐던 이들은 그 시대와 엄청난 시대적 불화를 겪었을 걸로 본다. 물론 바울의 기독교 공동체에도 핍박은 있었다. 내가 볼 때 그것이 바로 바울신학 공동체의 최대치이자 한계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보다 결정적으로는 기독교가 <제국의 종교>가 되면서 희생양 메커니즘을 폭로했던 본래의 예수사건의 의미는 이제 오히려 제국을 보호하고 유지하는 종교 안으로 포섭됨으로서 그 의미 또한 변질되고 만다. 속죄는 이제 추상적 차원의 하나님과 개인이 일대일로 하는 관념적 차원으로 전락되고, 본래의 예수사건이 지니고 있던 급진성, 곧 힘을 숭배하는 인간 본성에 대한 단절과 비폭력적 승화 그리고 강력한 사회적 비판 혹은 사회 고발로서의 의미는 탈각되게 된다.

이후의 기독교가 얼마나 변질된 관념적 종교로서의 길을 걷게 된 것인지는 이제 새삼 말하지 않아도 잘 알 것으로 본다. 결국 기독교는 오히려 지배체제에 봉사하는 아편적 성격을 띠고 만다. 이천 년이 지난 지금도 대부분의 교회가 믿는 예수, 죄의 고백, 대속 교리들은 애초 복음서가 예수사건을 통해 증언하고 폭로했던 바들을 거의 대부분 사상시킨 것들이다. 윌터 윙크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이를 잘 정리해주고 있다.

“기독교는 전체적으로 이제까지 인간의 종교의 중심에 있는 폭력의 가면을 벗겨버리는 일에서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성공하지 못했다. 즉 기독교는 정당한 전쟁(just war)이라는 무한히 유연한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정치권력에 적응하였고, 피의 속죄론을 위하여 승리자 그리스도나 속죄의 사회적 이론을 포기하였고, 하나님나라를 사후 세계나 먼 미래에 투사하였다. 이 모든 것들이 교회 메시지의 가장 혁명적인 요소들을 깡그리  파괴했다. 결과적으로 예수는 다른 많은 대리 희생자들처럼 신이 되었고, 미사(Mass)는 모든 희생제도의 필요를 끝장내기보다는 오히려 영원히 존속하는 희생제도가 되었으며,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였다는 이유로 억울한 희생양이 되어, 또다시 그 폭력적 모방의 과정을 다시 거듭하게 되었다”
- 월터 윙크,『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中 
 
 
 
 
 

 

“현재의 기독교 신앙은 믿기 힘든 것이 되었고, 믿기에도 너무 나쁜 것이 되었다”
- 샐리 맥훼이그 (생태여성신학자)
 
“기성종교는 그대로 화석이 되어 역사의 지층 속에 남고 말 것이다. 그들은 돌같이 굳어진 신조만을 주장하고 경전의 해석은 기계적으로 되어 생명을 자라나게는 못하고 도리어 얽매는 줄이 된다. 돌 같은지라 생활 체험이 들어갈 수 없고, 기계적인지라 전체적 · 생장적인 역사 파악을 하지 못하고 도리어 그것을 이단시해버린다.”
- 함석헌,『뜻으로 본 한국역사』中
 
 
 

20세기 민중신학, 예수사건의 본래적 의미를 구현하다

내가 아는 바로 민중신학 특히 그 중에서도 1세대 민중신학은 정말 탁월한 통찰이 아닐 수 없다. 앞서 지라르가 말한 희생양 메커니즘에서 폭력이 가해졌던 희생양을 민중으로 형상화해서 증언하고 있는 신학이 바로 우리나라의 민중신학이다. 민중신학은 철저히 <약자우선성의 원리> 곧 모든 사건들을 약자인 희생자의 관점으로 볼 것을 제안하는 신학이다. 왜냐하면 가해자들의 관점은 종종 이들이 저지른 폭력을 알게 모르게 은폐시켜 놓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한 지금까지 그 어떤 서구신학도 이러한 희생자(민중)의 관점을 극명하게 신학화 한 것은 보질 못했었다. 심지어 비슷한 부류로 여겨지는 남미의 해방신학조차도 한국의 민중신학 만큼 명확하게 희생자의 관점을 신학적 중심으로서 설정해놓진 않았었다. 단지 마르크스주의와 비슷하게 경제적 착취와 소외의 문제를 기독교 신학의 지평 안으로 끌어왔을 뿐이다.
 
약자우선성의 신학이라는 점에선 공통되지만, 우리의 민중신학은 한층 더 나아가 희생자의 관점을 <민중의 눈>으로 명명하면서 <민중의 눈으로 읽는 성서>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물론 기존 신학자들 중에는 '민중의 눈'에 대한 비판이 있긴 하나 이것이 <약자우선성의 원리>라는 관점 자체를 무력화시킨 비판은 전혀 못된다. 필자가 보는 기존 민중신학에 대한 비판과 대안은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신학>책 참조).

민중신학에서는 가해자의 폭력이 저질러진 공간, 지배체제의 부조리에 맞서 해방사건이 일어난 공간을 <현장>이라고 말하며 여기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 현장을 고발하는 것을 <증언>이라고 표현한다. 이는 앞서 말한 <폭로>와도 유사한 의미다. 그 증언의 내용은 바로 그 사건 현장에 예수 그리스도가 현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안병무는 말하길,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요한 1:29)는 성서 구절에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란 다름 아닌 <민중>Minjung을 말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독일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은 예수와 민중은 동일시 될 수 없다면서 극명하게 반대를 표명한다. 민중신학에서는 정치 경제 사회의 모순을 지고 가는 이들을 민중으로 보면서 이들이야말로 세상 죄를 가는 것이라는 해석을 내린다. '죄'라는 것이 단순히 종교적인 의미만이 아닌 그 시대의 지배체제가 희생양을 만들기 위해 붙여놓은 일종의 불온한 딱지 같은 것이라는 얘기다.

오히려 죄는 지배체제가 저지르는 폭력을 보고 있으며, 그러한 지배체제의 죄는 약자들에게 <한>Han을 파생시킨다고 말한다. 기존 보수 기독교가 <죄>sin에 대한 교리를 강조하는 만큼이나 민중신학은 <한>Han에 대한 내용을 강조한다. 예수는 억울하게 죽은 민중들의 한을 풀어주는 <한의 사제>를 대표한다는 것이다. 민중신학은 희생양의 정서인 한을 신학화한 신학이다. 한을 풀지 않는 한 진정한 죄사함이란 것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 사회가 발전할 때마다 일종의 희생양을 필요로 한다는 것 정도는 익히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기층 민중의 희생은 그 점에서 희생양의 대표격이 될 만하다. 지난 한국사회의 근대화 과정을 예로 들어보자. 만일 6-70년대 그리고 80년대에 이르는 기층 민중의 희생이 없었다면 어쩌면 오늘날의 우리 사회가 이 정도까지 이르진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분명한 사실은, 6-80년대 군사독재정권 하에 시행된 경제개발은 분명하게도 남한 사회의 기층 민중의 희생을 담보로 해왔었다는 점이다.

그 기층 민중의 희생이란, 예를 들어 전태일 사건을 통해서도 드러난 바 있듯이, 환풍도 되지 않는 열악한 공장 작업실 안에서 거의 하루 종일 꼬박 노동력을 착취당하면서도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했던 그 어린 나이의 공장노동자들의 희생들을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겠다. 우리나라 근대화의 산업 제조 공장이 가동될 수 있었던 그 이면에는 바로 이들 기층 민중의 희생들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근로기준법은 아무런 힘도 쓰질 못했었기에 우리는 전태일 사건을 통해 그 희생양 기제가 정면으로 폭로된 것임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이후의 남한사회 노동운동은 전태일 사건을 분기점으로 할 만큼 그 희생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지속적으로 폭로하는 흐름을 형성한다.
 
그리고 희생된 그들에 의해 우리 집단사회가 구원의 경험을 한다는 사실, 바로 이것이 민중신학이 말한 <민중 구원론>에 해당한다. 안병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의 수난은 개인의 수난이 아니고 민중의 수난입니다. 넓게 보면 인류 전체가 당하는 수난입니다. 그것은 낡은 시대와 새로운 시대의 충돌에 의해 일어난 사건입니다”(『민중신학이야기』305).

민중신학은 예수는 누구인가 라고 했을 때 예수는 사건이며 바로 시대와의 불화로 인해 희생된 자들을 가리키고 있다고 증언한다. 이들의 비폭력적 희생사건들이 시대의 진보를 가져오며 진정한 구원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내가 민중신학의 성과들을 이토록 흡수하고자 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민중신학을 통해 받은 그 충격에 있다.

 

 
 
 
 

 

나는 본인의 졸저인 <기독교 대전환>에서 마가복음을 해석할 때 이미 그 <예수>라는 이름 자체가 단 한 명의 예수만이 아닌 당대의 여러 예언자 운동 메시아 운동이 함께 결합되어 형상화된
<다중예수>multi-Jesus임을 설명한 바 있다. 물론 게 중에 역사적인 나사렛 예수가 중심이었을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마가복음서에 서술된 그 예수는 단 한 명의 인물 예수만을 놓고 쓰진 않았다는 얘기다. 마가복음에 서술된 수난설화는 당대의 민중사건, 예언자운동, 메시아운동을 역사적 배경으로 하는 가운데 어떤 면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통찰을 문학적으로 담고 있는 그러한 복음서라고 할 만하다.

나 자신이 민중신학을 통해 가장 어마어마하게 느꼈던 충격은 다름 아닌 성서에 나타난 그 예수사건이 단지 이천 년 전에 일어난 그 옛날의 사건이 아니라 지난 조선의 역사에서 그리고 지금 오늘날 우리 사회 속에서도 때로는 매체와 신문 지면상에서도 이천 년 전 성서에 나타난 예수사건을 여실히 목도한다는 점에 있다. 그래서 예수사건은 유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며 <화산맥>처럼 터지는 그러한 사건이라는 얘기다.

그 예수사건은 예수가 태어나기 이전 구약시대에도 있었으며, 신약시대에도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천 년 동안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희생된 모든 무명보살의 사건들 속에서 볼 수 있었던 바로 그러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예수는 이 땅에서 모든 억울하게 죽은 희생자들을 대표할 뿐만 아니라 폭력과의 연관 고리를 단숨에 끊는 방법을 알려준, 그야말로 실질적인 몸 구원의 진정한 메시아다.

그 같은 메시아적 사건은 이천 년 전에 단 한 번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인류 역사의 온갖 수난과 비극적 사건들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바로 그러한 성격의 것이다. 문명은 온갖 수난에 의해 진보할 수 있다봤던 화이트헤드의 입장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가 <오류>와 <비극>에 끊임없이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통찰적 진리가 바로 거기에서부터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우리 모두는 바로 이러한 숱한 예수사건들에 빚진 자들이다.

 


성서, 비폭력적 예수운동을 증언하고 있는 책

이제 내게 있어 <왜 예수인가>에 대한 답을 결론적으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앞서 말했듯이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사건은 지배체제의 폭력이 저지른 희생양 메커니즘을 극명하게 폭로하고 있는 사건이며, 그 희생양이야말로 죄 없는 의로운 자임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는 솔직히 지라르의 주장처럼 희생양 기제를 폭로하고 폭력을 비판한 신화가 꼭 신구약성서 외에는 아예 없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어딘가 찾아보면 분명히 세계 곳곳에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월터 윙크의 경우도 인디언의 신화를 들기도 한다.

따라서 몇몇 아주 드물지만 다양한 고대 신화들 가운데도 비범한 통찰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구원하는 폭력의 신화가 갖고 있는 희생양 메커니즘을 고발하고 그 폭력적인 지배체제에 맞선 비폭력적 사건이라는 점에서 이를 드러내는 하나의 정형화된 모델로서는 성서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사건만큼 매우 뚜렷한 경우를 찾기란 힘들다는 사실이다.

유교나 불교 같은 다른 고등종교 경전들의 경우 기독교 성경에 비하면 너무나 고상한 얘기들을 잘 담아놓고 있기에 고대 현자의 지혜를 잘 들려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성서의 경우, 이 책에서 현자의 지혜 구절만을 찾으려 한다면 오히려 이는 내가 볼 때 성서의 진정한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것이라 판단된다. 실제로도 누군가 그랬는데(아마도 오쇼 라즈니쉬가 한 말인 듯 싶은데 정확히는 기억 안남), 성서는 예수가 말한 산상수훈의 황금률 말씀 구절만 제외하면 나머지 내용들은 별다른 가치가 없다고까지 평했을 정도다. 종교 경전의 가치를 고상한 현자의 지혜의 구절로서만 평가하고 찾는다면 성서는 그렇게 평가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성서는 그동안 기존 기독교의 체제와 문화로 인해 그 진정한 뜻이 가리워져 왔었지만, 그 껍질의 눈을 벗고 좀 더 정면으로 깊숙이 들여다보면 예수운동이 인류의 정신사에 정확히 어떠한 의미를 지니게 되는지를 극명하게 맛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수운동은 우리 안의 본성처럼 달라붙어 있는 폭력과 전쟁의 유전자를 끝장내는 가장 효율적 방법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일종의 예수운동 밈(Meme)이라고 볼 수 있다.

역사 이전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폭력의 기원과 발생은 앞서 말했듯이 우리 가운데 희생양 제도를 정당화해왔고 습관화해왔으며 나중에는 이를 종교화할 정도로 이미 몸화되어 있다. 가장 오인할 수 있는 지점은 폭력에 맞서는 폭력을 정당화 하는 경우이다. 폭력의 발생은 힘에 대한 숭배와 동경과 근원적으로 맞물려 있다. 이는 지라르가 말한 모방적 욕망이 또다시 죄로 이어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예수사건은 어떤 의미에서 돌연변이에 가깝다. 우리 몸 안의 폭력과 전쟁의 유전자에 대한 새로운 면역 유전자 혹은 그 치료 백신이 생겨난 것이다. 예수사건은 폭력과 전쟁의 유전자를 비폭력과 사랑의 유전자로 승화한 것이다. 그는 폭력과 죽임의 지배체제와 문화에 대해 당당하게 맞서며 적극적으로 <죽어주기>까지 했었다. 예수의 희생은 마지못해 하는 수동적 희생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희생당해주기>에 속한다. 이 두 차원 역시 구분하지 못할 경우 <전후 혼동의 오류>에 속할 것이다.
 
즉, 1) 수동적 희생 - 2) 폭력적 대응으로서의 저항 - 3) 비폭력적 저항으로서의 적극적 희생 이라는 단계에 있어, 1)단계와 3)단계는 어찌보면 유사하게 보일 수 있을지 모르나 실은 전혀 다른 차원이라는 얘기다. 예수는 그 자신이 폭력을 쓸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폭력의 의지를 꺽고 순수히 죽임을 당하러 간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죽였던 죽임을 당한 그 희생양은 실은 아무런 죄가 없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뒤늦게야 알게 된다. 그리고선 부활사건이 일어난다.
 
 

 

예수의 라이프스타일, 그 불편한 존재를 신앙하기

이러한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건 일종의 불편함이다. 오늘날에 교회에서 믿는 예수는 참으로 믿기 편한 예수다. 예수에 관한 교리를 믿으면 구원받고 아니면 지옥간다는 식의 믿음은 보수적인 교리 기독교가 전하는 왜곡된 예수요 잘못된 결과일 뿐이다. 물론 기존의 보수 기독교인들 중에는 그조차도 믿기 힘들다면서 주일예배는 물론이거니와 수요예배 철야기도 매일매일 새벽기도 등등 여러 가지 신앙의 은사받기를 주시옵소서 하며 울부짖기도 한다. 아마도 이들의 입장은 예수 믿기 쉽지 않다고 할 것이지만, 이는 내가 볼 때 예수를 믿는 신앙과는 전적으로 무관하다.

진실로 믿는 예수신앙은 많은 것들을 포기한 채 새로운 인간 유형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안된다. 복음서에는 예수를 따르는 것이 왜 불편한지를 알려주는 기록이 있다.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는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킨 사람을 만나는데 그는 예수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자,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너가 가진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면 하늘에서 복을 내리실 것이라고 말하자, 그 사람은 울상을 지으며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한다.

복음서의 예수운동을 보면 이전 삶에 대한 전적인 포기를 예수는 원하고 있음을 종종 볼 수 있다. 크게는 <물질적 재산 및 소유욕>과 <혈연가족주의>에 대한 포기를 원한다. 우리는 내가 벌어놓은 재산을 포기할 수 있는가? 혈연가족주의를 포기할 수 있는가? 우리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운동을 잘 살펴보면 거기에는 예수의 행적을 끝까지 따라다녔던 자발적 후원 조직이 그림자처럼 함께 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여기에는 예수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특히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러 여인들 역시 예수운동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였음을 밝히고 있다(누가8:1-3). 예수운동 역시 이들의 물심양면적인 후원에 의해 수행된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의 실행에 있어 우리는 자칫 잘못 적용된 <전후 혼동 오류>의 사례를 목격하기도 한다. 무슨 얘기인고 하니, 예컨대 자신의 재산을 자기가 믿는 교회나 기도원에 죄다 갖다 바치는 경우와 가족과의 인연을 끊고서 교회나 기도원에서 생활하는 이들을 우리는 ‘그것이 알고 싶다’ 같은 사회고발 프로그램을 통해 종종 목격하기도 한다는 얘기다. 이런 사례는 주로 사이비 교주나 혹은 대형교회를 추구하는 이들에게서 종종 발생되는 일들이다.

물론 내가 말하고자 하는 예수운동은 그런 사이비 수준의 차원이 전적으로 아니다. 오히려 예수운동은 기존의 지배체제와 지배문화에 길들여진 잘못된 신앙을 끊는 대안운동에 속하며, 진정한 치유 및 몸살림과 관계되어 있다. 예수운동은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문화 등등 전방위적인 모든 몸삶의 차원에 있어 약자우선성의 새로운 삶의 시스템을 확립하기 위한 비폭력적 운동에 맞춰져 있다. 요컨대, 이를 위해서는 전적으로 삶의 모든 것을 올인하라는 것이다. 즉, 재산이든 가족이든 뭐든 간에 자기 삶의 가장 우선성을 그러한 예수운동에 죄다 갖다 바쳐야 한다고 본 것이 핵심이다.

만일 동학의 최제우가 자신의 재산과 가족만을 위해 헌신하고 살았다면 진정한 동학운동이 나올 수 있었겠는가? 전태일이 자신의 어머니를 생각해서 자기 몸을 불사르는 것을 단념했다면 한국노동사에 한 휙을 그을 수 있었겠는가? 함석헌이 자신의 가족을 위해 살았다면 그의 예언자적 삶과 정신이 어찌 나올 수 있었겠는가? 이들은 물질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삶의 전부를 헌신하고자 한 것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예수운동에 속하는 삶의 차원과 앞서 말한 사이비의 차원을 혼동하는 것은 신앙 발달과정에 있어서의 <전후 혼동 오류>를 범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그 정도의 경지에 꼭 올라야만 한다는 것인가? 그 같은 예수신앙을 체득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만 하는 것인가? 오늘날 소박한 소시민적 삶을 살아가는 일반인이 어찌 그런 경지에 오를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질문을 할 수 있겠다. 사실 본인의 <몸학>은 바로 이러한 점을 위해 마련된 것이기도 하다.

몸학에서는 현재 대부분의 인류가 4단계와 5단계에 속한 사람들이 가장 많다고 보고 있다. 4단계는 미성숙한 집단의 이념을 위해 자기 삶을 헌신하는 사람을 떠올리면 될 것이며, 5단계는 개인과 가족을 위해 자신의 삶이 맞춰져 있는 사람이다(보다 상세하게는 http://kosmomm.tistory.com/14 참조 바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삶의 스타일이 바뀌어야 한 단계씩 올라갈 수 있다는 점이다. 라이프스타일이 바뀌지 않은 채로 예수의 영성을 확보할 순 없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오해하지 않아야 할 점은 예수는 사람들 저마다 각자의 위치와 달란트가 다르다고 해도 현재 서 있는 자리에서 가능한 최선을 다하는 가운데 점차로 경지에 오를 것을 바랬던 것이지 그런 과정을 생략하고 모두가 똑같이 일률적으로 최고 경지에 올라가야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는 보질 않았었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나(예수)처럼 십자기를 지고 따르라”는 것에 있긴 하다.

그러나 이것은 그래도 어느 정도 예수운동을 위해 마음의 준비를 했던 제자들에게 한 말씀이었던 것처럼 몇 가지 몸삶의 단계를 거쳐야만 이를 수 있는 차원에 속한다. 따라서 나는 현재의 기독교가 실질적인 몸의 삶 자체의 변혁을 추구하는 <몸의 기독교>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보고 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현재의 가능한 출발에서 시작하여 궁극적인 삶의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상향적으로 나아가도록 계속적인 노력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의 라이프스타일>에 끊임없이 맞추고자 하는 노력이라는 얘기다.

예수운동, 모든 지배체제와 지배문화에 맞서 대안적인 한 판 삶을 살기

 

 

 

나는 현재의 정치 경제 종교 문화를 지배하고 있는 지배체제에 대한 대안세력으로서의 예수운동에 가능한 많은 분들이 함께 할 수 있기를 희망할 따름이다.
 
지배체제의 폭력 문화들은 우리 안에 깊숙이 뿌리 내려져 있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예수를 신앙하는 기독교에 대한 근본적인 재정비가 필요하다. 앞서 말했듯이 폭력은 꼭 물리적 폭력만을 일컫지 않는다. 사회의 폭력, 체제의 폭력, 자본의 폭력 등등 쌍방으로 소통하지 못하는 모든 일방 관계들은 폭력에 속한다.

사람들이 폭력을 좋아하는 배경에는 그것이 일종의 구원 기능을 일으킨다고 착각하는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권력을 지니거나 돈이 많으면 혹은 힘 센 사람이면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말이다. 그것이 바로 <구원하는 폭력>이 지니고 있는 신화이다. 월터 윙크는 오늘날 우리가 믿는 종교는 <구원하는 폭력을 믿는 종교>로 전락되었다고 말한다. ‘과도한 힘’ 혹은 ‘넘치는 힘’이라는 폭력에 대한 숭배가 있는 것이다. 필자의 졸저 <기독교 대전환>에서도 밝혔듯이 <힘의 과잉에 대한 숭배와 동경>은 <모든 종교들 중의 최상위 종교>로서 자리있다.

예수운동은 이를 이겨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대안운동으로서 <힘의 숭배와 동경>이라는 우리 안에 내재한 그 신앙에 대해 정면으로 맞서 있다. 자본의 힘, 권력의 힘, 전지전능한 파워에 살해된 희생자들을 증언하는 예수운동, 이들에 맞서는 대안체제와 대안문화로서의 예수운동을 나는 바라고 있는 것이다. 나는 많은 사람들의 몸삶이 바로 여기에 올인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왜냐하면 실질적 구원이 여기에 있고, 진정한 삶의 건강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예수운동을 진정한 의미로서의 복음이라고 생각한다.
 
본래 이천 년 전 당시에는 로마 황제의 탄생과 집권을 <복음>(좋은 소식)이라고 불렀었지만, 성서의 복음서는 오히려 민중예수의 탄생과 하나님나라운동을 <복음>(좋은 소식)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기존의 복음을 대체하려는 일종의 <대안 복음> 혹은 <대항 복음>으로 볼 수 있겠다.
 
만일 이러한 성격의 예수사건을 담고 있지 않는다면 설령 기존의 기독교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엄밀히 말해 <예수의 기독교>가 아닌 것이며, 반면에 예수나 기독교라는 표현은 쓰질 않더라도 <희생양 메커니즘>을 폭로하는 <비폭력적 해방사건>을 담고 있다면 그것은 형식상에서 이미 <예수의 기독교>라고 충분히 볼 수 있는 근거가 있다고 생각한다.
 
각각의 종교가 다르더라도 형이상학적으로 화이트헤드 철학의 세계관에 기반한다면 서로 소통이 가능하듯이 마찬가지로 형이하학적으로는 이 같은 예수사건을 담고 있는 종교나 역사적인 사건들이라면 그 역시 얼마든지 서로 소통 가능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예수사건 혹은 예수운동 외에 굳이 다른 걸 찾거나 다른 걸 새로 알아야 할 필요성을 못느끼고 있다. 왜냐하면 예수운동의 신앙은 나의 몸삶을 전적으로 변혁시키기에 그 하나로도 너무나 충분하기 때문이다.
 
붓다가 설법으로 고통에 빠진 중생들의 삶을 깨우친 것이라면, 예수는 돌직구처럼 고통 속으로 뛰어들어 산화한 생명이었다. 예수운동은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체제와 문화의 폭력성과 그 모순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그대로 드러내보여주고 있는 사건이다. 태고적의 뿌리 깊은 원죄로도 볼만한 그 폭력의 고리를 끊고자 자기 몸삶을 내어준 것이기에 나는 여기서 더 큰 매력을 느낄 따름이다.

심지어 체제 변혁과 경제 정의를 말하는 마르크스주의까지도 예수운동 안에 이미 지양되어 있을 정도다. 예수운동은 이천 년 전에 있었지만 이천 년 동안 단 한 번도 제대로 계승되거나 발현된 적이 거의 없다. 적어도 주류 기독교 진영은 본래의 예수운동을 무참하게 왜곡시켰고 오히려 지배체제로 전락함으로서 <힘의 복음>에 해당하는 <반예수운동>을 전파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제 이천 년 이후에야 비로소 제대로 터져나올 수 있는 예수운동을 꿈꾼다.
 
하나님은 억울하게 죽은 희생자들의 편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함께 살해되셨다.
실로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모두를 빚지게 만든 사건이었던 것이다.
 
오늘 우리의 삶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온갖 불의와 착취에 맞서다
무참히 희생된 자들에게 빚져 있는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예수사건들에서
현존하는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또한 그러한 예수를 다시 <몸화>하는 일이야말로 
새로운 기독교, 곧 <몸 기독교>Momm Christianity의 핵심 신앙이 되어야만 할 것으로 본다.
 
역사적 '예수'의 예수운동은 앞으로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터져라 예수사건이여, 퍼져라 예수운동이여~!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