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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지대 신앙의 인물가운데
기도로 하나님의 역사를 바꾼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루었던 신앙의 영웅들도
종말론적인 이스라엘의 멸망 앞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돌이킬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예레미야서는 모세와 사무엘도 하나님의 뜻을 돌이킬 수 없으며
에스겔서는 노아와 욥과 다니엘도 하나님의 뜻을 돌이켜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기도는 성서지대 신앙의 영웅들의 영적인 삶이요,
하나님의 신탁을 받은 선지자의 사역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기도에는 가정의 행복은 물론
성공과 번영을 위한 기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개인의 소원 성취를 위한 비전 기도는 바알 신앙이요,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금은동목석의 우상을 섬기는 무속신앙의 전형입니다.
기도의 커트라인은 최소한 환난 가운데 생명의 구원이요,죄의 용서며,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기도였습니다.
개인의 소원 성취를 위한 무속적 기도는 바알 신앙이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믿음의 기도와 확실히 구별됩니다.
요즘 유행하는 에스더 기도 운동과 다니엘 기도 운동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믿음의 기도라기보다는 무속적인 기도의 전형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원 운동의 기도를 비롯해서
새벽기도회와 금요 기도회와 특새 등 모두 무속적 기도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기도를 통한 무속 신앙의 발원은
예배의 무속화를 이루어 사사로운 기원 예배를 드리는 토착화 신앙의 전위가 되었습니다.
길선주 목사로부터 시작된 한국형 기도의 특징인 통성기도와 새벽기도는
불교의 염불과 그 새벽 예불의 영향으로 토착화된 기도 신앙이 되었습니다.
한평생 목회를 하면서 새벽 기도회를 하지 않았던 대구 서문 교회의 이성헌 목사는
한국 교회의 새벽 기도는 불교의 새벽 예불의 영향을 받은 사실을 주지하였습니다.
물론 새벽 미명에 기도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복음서는 담았지만
그것이 초대 교회와 기독교 이천년 역사의 새벽기도 운동으로 발전하지 않았습니다.
통성 기도를 통한 방언 기도는
이단적 직통계시의 영성을 낳았습니다.
바리새인의 시장 어귀에서 기도하는 모습은
외식적인 신앙의 전형이 되어 예수님의 책망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기도의 비전이 없는 바리새인은
유대교의 중심 세력이었지만 중언부언하는 이방인의 기도를 외식적으로 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외식적인 기도는
오직 하나님 앞에서 하는 골방의 기도와 본질적으로 구별됩니다.
나라를 잃고 성전이 불타고 포로된 믿음의 영웅들은 기도의 강을 가졌는데
에스겔은 그발 강가에서 기도하였고 다니엘은 을래 강에서 기도하였으며
에스라는 아하와 강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간구하였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뜻을 이룬 선지자들의 기도는 그 기도의 삶이 깃든 사역의 비전을 이루었고
한결같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에스겔서와 다니엘서와 에스라서 등 자신의 이름으로 된 성서의 기록을 남겼습니다.
선지자와 사도들에게서 무속적인 기도의 모습이나 내용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는 불교적 기도와 샤마니즘과 무속 기도의 문화를 광신의 늪으로 가졌습니다.
이렇게 소원을 담은 기도의 발원과 성공과 번영의 설교는
이단과 사이비의 정체성을 가진 기형적인 한국 교회로 성장하였습니다.
특히 성령의 전이를 목적으로 하는 중보기도 운동은
고유한 "중보기도"라는 예수님의 예수님 되심의 메시야적 기도, 그 복음의 본질을 무속 신앙으로 변질 시켰습니다.
한국 교회는 복음적인 것은 무엇이든 인본주의로 변질시키는
종교적 DNA로 충만한 것 같습니다.
초대 교회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은 믿음의 역사를 차용하여
오늘날 예배의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하는 것은 온갖 이단과 사이비를 양성하는 모맨텀이 되었습니다.
비복음적인 이현령비현령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게 함으로
이단과 사이비에 대한 경계심을 잃어 버리고 좀비적 광신의 늪에 함몰되었습니다.
설교에 대한 복음적인 비평 문화를 가졌다면
오늘날 처럼 우후죽순으로 사이비와 이단이 창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옥가는 크리스챤이라는 희롱은
오늘날 한국 교회의 혼합주의를 방조한 그 실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복음적인 기도와 설교를 잃어버린 한국 교회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바알을 여호와로 섬겼듯 불교적 기독교의 옷을 입었습니다.
복음적인 신앙의 진실과의 싸움은
성령의 은혜와 진리의 말씀에 깨어있는 종말론적인 성도의 신앙이 될 것입니다.
참으로 한국 교회의 토착화 신앙은
선지자와 사도의 터 위에 세워진 성서적 기독 신앙에로의 회귀본능, 그 개혁의 과제를 남겼습니다.
돌이켜 보면 필자의 새벽 기도는 몸에 밴 어린시절, 그 자체이며
오늘날도 말씀을 묵상하며 깨어 기도하는 성령으로 충만한 골방의 기도를 가졌습니다.
새벽 기도 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만 있는 성미의 유례는
복음이 들어 오기 전 밥을 지을 때마다 식구들의 건강과 복을 빌며 쌀 한줌씩 따로 떼어
신주 단지에 모아 집안을 지켜 주는 귀신에서 바쳤습니다.
이것이 성미의 유례요,
귀신을 섬겼던 신주단지는 신앙의 주단지가 되어 성미로 드려졌습니다.
성미의 긍정적인 면도 많지만
신주단지를 섬기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토착신앙의 전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듯 한국 교회의 성공과 번영을 위한 기복 신앙은
샤마니즘과 혼합되어 사사로운 푸닥거리 예배의 미신을 낳았습니다.
소위 말하는 가정 예배는 하나님 중심의 가정을 소원하지만
무속적 푸닥거리 예배의 전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말씀과 하나님 중심의 예배라는 미명하에
예배의 본질을 훼손하는 사사로운 기원 예배는 예배를 통한 소원 성취를 발원하는 기복신앙의 주체를 이루었습니다.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기도는 믿음의 고백이요,그 찬양이지만
소위 말하는 성령의 충만한 은혜와 은사를 받기 위한 광신적 기도는 무속신앙의 푸닥거리일 뿐입니다.
성령의 충만은 성령으로 세례 베푸는 메시야의 사역이요,
진리의 복음 곧 구원의 말씀을 그의 안에서 믿어 구원을 인치고 보증하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것은 위로부터 내리는 구원을 얻는 믿음의 은혜요,
소위 말하는 영성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기도의 무속화를 이루는 영성신앙은
기도원 운동을 비롯하여 교회의 각종 기도회와 에스더 기도와 다니엘 기도의 전위가 되었습니다.
기도의 전위 신앙은
기독교 신앙의 무속화를 이루는 혁명 전선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혁명적 무속신앙의 토착화를 이룬 한국형 기독교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그 본질에서 탈선하여 세속화의 전형 이루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에스더 기도회는
성경의 에스더서 이외에 어떤 성서의 저자나 신앙 인물의 영향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위 말하는 다니엘의 기도 역시........
성서의 본질적 신앙을 형성하는 데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차라리 엘리야의 기도라면
야고보서에 영향을 미친 믿음의 역사를 이루는 기도의 전형이 되었습니다.
외식적 기도의 대가인 바리새인들도
시장 어귀에서조차 기도하였지만 에스더와 다니엘의 이름을 팔지 않았습니다.
누구든 죽으면 죽으리라는 에스더의 기도를 할 수 없고
사자의 굴에서 구원받는 다니엘의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다니엘의 기도는 이스라엘의 멸망이 배경이요,
기복과 공덕 기도가 아니라 철저한 회개의 기도요, 장래 일의 계시를 기도의 응답으로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묵시적 다니엘의 기도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영원한 언약의 기도였습니다.
다니엘의 종말론적인 묵시적 기도는
느헤미야와 에스라의 기도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와 에스라의 기도는
포로 귀환을 비롯한 스룹바벨 성전의 종교 개혁을 위한 위대한 기도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기도는
모세의 기도와 사무엘의 기도와 다윗의 기도에서 그 위대한 신앙의 진면목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모세의 기도는 출애굽의 구원을 성취하였고
사무엘의 기도는 사사시대의 암흑기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이스라엘의 여명을 열었습니다.
사무엘의 미스바 기도 운동은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위협에서 구원하고 바알과 아스다롯 등 우상 숭배에서 오직 여호와를 섬기는 신앙의 부흥이 되었습니다.
다윗의 기도는 하나님의 통치를 왕국으로 이루었으며
여호와 전쟁의 전사로서의 기도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대한 아브라함의 언약을 성취하였고
영원한 메시야 나라의 언약, 그 뿌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위대한 신앙의 인물을 상고하며
종말론적인 아모스의 기도와 하박국의 찬양을 묵상하였습니다.
아모스는 북왕국 이스라엘으 멸망을 예언하였으며
하박국은 남왕국 유다의 멸망, 그 참혹한 가운데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구원의 묵시를 찬양하였습니다.
아모스는 남왕국 유다의 드고아 사람으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북왕국 이스라엘에 가서 하나님의 신탁을 전하였습니다.
당시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은 여로보암 2세로
솔로몬 이후 가장 넓은 영토를 확장하였으며 부강한 나라를 이루었습니다.
☞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고난이 심하여
매인 자도 없고 놓인 자도 없고 이스라엘을 도울 자도 없음을 보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의 이름을 천하에서 없이 하겠다고도 아니하셨으므로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손으로 구원하심이었더라(왕하14:25-27)
☞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한 나라를 일으켜 너희를 치리니
그들이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시내까지 너희를 학대하리라 하셨느니라(암6:14)
이 시대 활동한 선지자는
아모스를 비롯하여 호세아와 요나 등 선지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모스 선지자에게 이스라엘의 범죄에 대한 참혹한 심판을 예고하였고
아모스는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종교적 범죄를 우롱하였는데
그 가운데 날마다 죄를 지으며 자신들을 기쁘게 하는 희생을 아침마다 드리며 삼일마다 십일조를 드렸다고 하였습니다.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선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가 기뻐하는 바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암4:4-5)
이와 관련하여 말라기 선지자는
제사장들과 유다의 백성들이 봉헌물과 십일조를 도적하였다며 이스라엘의 회복이 아닌 영원한 멸망을 선포하였습니다.
봉헌물, 곧 절기의 희생 똥을 너희 얼굴에 쳐바를 것이라는 하나님의 진노는
말라기 시대 스룹바벨 성전을 중심으로 타락하여 멸망한 신앙의 전형이 되었습니다.
말라기서의 십일조의 도적과 십일조의 축복에 대한 말씀은
이스라엘과 예배 회복을 위한 메세지가 아니라 영원히 이스라엘을 버리겠다는 심판의 선언문입니다.
말라기서의 심판과 멸망의 저주는 하나님의 선지자적 신탁이 사라진 중간기 시대를 거쳐
신약시대 메시야의 출현으로 영원한 다윗의 왕국, 그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였습니다.
율법을 완성한 그리스도의 복음은 성령으로 세례 베푸는 메시야의 사역으로
주의 몸된 교회를 통한 종말론적인 예수의 하나님 나라를 이루었습니다.
☞ 보라 내가 너희의 자손을 꾸짖을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말2:3)
☞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말3:8-9)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종교적 외식을 책명하며
화있을진저 지옥의 판결을 받을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마23:23-24)
☞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23:33)
이처럼 아모스 선지자는 삼년마다 드리는 십일조를 삼일에 한번씩 드리며 종교적 죄의 낙을 누리는 그 악을 책망하였으며
말라기 선지자는 온 나라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여 저주받은 사실을 주지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면서
십일조의 정신, 곧 의와 인과 신을 잃어버린 바리새인의 외식을 지옥의 판결로 책망하였습니다.
문제는 아모스의 신탁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멸망하였으며
말라기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스룹바벨 성전은 헬라에게 짓밟혔으며
예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성전은 로마에게 무너졌습니다.
성서지대 종교적 타락과 그 범죄는
하나님의 뜻과 그 열심을 가장하였으나 심판의 올무와 함정과 덫이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종교적 열심 뒤에는 이단과 사이비의 사령부가 있고
광명한 천사의 옷을 입은 악한 영의 역사가 횡행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범죄에 대한 무지막지한 하나님의 심판을 앞에 두고
아모스는 구원의 말씀을 외쳤습니다.
☞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그렇지 않으면 그가 불 같이 요셉의 집에 임하여 멸하시리니
벧엘에서 그 불들을 끌 자가 없으리라
정의를 쓴 쑥으로 바꾸며 공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
묘성과 삼성을 만드시며 사망의 그늘을 아침으로 바꾸시고 낮을 어두운 밤으로 바꾸시며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이를 찾으라 그의 이름은 여호와시니라(암5:6-8)
☞ 너희는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불쌍히 여기시리라(암5:14-15)
그런 가운데 심판을 가볍게 해 달리는 아모스의 기도는
무거운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돌이켜 아모스의 기도를 두 번이나 들어주었습니다.
☞ 주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왕이 풀을 벤 후 풀이 다시 움돋기 시작할 때에 주께서 메뚜기를 지으시매
메뚜기가 땅의 풀을 다 먹은지라
내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청하건대 사하소서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 하매
여호와께서 이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셨으므로 이것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암7:1-3)
☞ 주 여호와께서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주 여호와께서 명령하여 불로 징벌하게 하시니 불이 큰 바다를 삼키고 육지까지 먹으려 하는지라
이에 내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청하건대 그치소서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 하매
주 여호와께서 이에 대하여 뜻을 돌이켜 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것도 이루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암7: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