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대학로의 연가 1편 / 단편소설. 김시화
1980년대 중반이었던 그 시절 동숭동 대학로는 참 낭만적이었다. 주말이 되면 차를 못다니게 막아놓았고 그 길에서 많은 젊은이들과 예술인들이 어울려 멋진 문화를 만들어냈다.
내가 대학로를 처음가 본 것은 1986년 가을이었다. 난 그 시절 서울 사촌형 집에 기거하면서 재수를 하고 있었다. 자세히 말하면 재수라기 보다는 85학번인 나는 학사경고를 연속으로 두번을 받아 학교에서 제적을 당했었다. 공부를 못해서가 아니라 수업도 거의 안들어가고 데모를 쫒아다니고 그러면서 지내다 보니 당연히 F학점이 가득했었다. 재수를 시작하면서 처음엔 열심히 공부를 하였는데, 계절이 여름을 지나 가을로 접어들면서 지독한 쓸쓸함을 이겨내지 못하고 9월의 어느 토요일날 말로만 듣던 동숭동 대학로를 혼자서 가보았다.
그곳은 별천지였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북새통을 이루었고 주말이면 도로에 차가 다니지 않아 그곳에서 술도 마시고 공연도 하고 어떤 젊은이들은 당시에 유행했던 브레이크 댄스를 끼리끼리 모여 놀고 있었다. 거기에 마로니에 공원에서는 거리의 화가들이 일정한 돈을 받고 초상화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그림을 그려주고 있었다. 재수를 하느라 한창 나이에 책만 보고 있었던 나는 그런 모습들을 구경하다가 문득 주위가 연인들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자 갑자기 외로움이 밀려왔다. 그 외로움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2
나는 혼자 있는 여자에게 말을 걸어 차라도 한 잔 마셔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대학로에는 혼자서 다니는 여자도 무척 많았다. 일단 말을 걸 용기를 내기 위해서 캔맥주를 하나 사서 담배를 피면서 마셨다. 그 다음 힘을 내어 혼자 걷는 여자에게 차 한 잔 마시자고 청하였으나 남자친구 만나러 간다고 하여서 실패하고 말았다. 두번째도 실패. 난 연거푸 두 번이나 실패하고 의욕을 상실해서 그냥 포기할 생각으로 대학로 방통대 입구쪽 벤치에 앉아 있었다. 난 담배 하나를 피우고 여자와 차 마시는 것은 포기할 생각이었다. 그냥 지하철을 타고 재수학원 독서실에 가서 공부나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마음이 붕떠서 공부는 잘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고 있는데 하얀 바지를 입은 어떤 여자가 지나갔다. 순간 뭔가가 나를 끌어 당기는 것 같았다. 그 여자의 얼굴은 못보았지만 뒷모습은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조금 긴 생머리에 잘록한 허리와 어깨에 둘러맨 검은색 핸드백, 그리고 적당히 긴 다리와 조금은 큰듯한 풍만한 엉덩이의 곡선이 내 시선을 끌어당겼다. 나는 자석에라도 끌린 듯이 일어서서 그녀를 따라갔다. 50미터 정도를 그녀 뒤에서 걷다가 몇번을 망설인 끝에 마침내 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실례지만 말씀 좀 묻겠는데요?'
갑작스럽게 뒤에서 나타난 남자가 그냥 앞으로 가지 않고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에 그녀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고 웃음기 섞인 얼굴로 말했다.
"아, 네. 말씀하세요."
"사실 제가 오늘 대학로 라는데를 처음 왔는데 '마로니에 공원'이 어디에 있나요?"
난 일단 말을 트기 위해서 마로니에 공원 위치를 알면서도 물어보았다. 전에 대학 다닐때 곧 잘 쓰던 방식이었다.
"여기서 조금만 걸어가면 바로 마로니에 공원이예요."
"그렇군요. 아, 참 하나만 더 물어 볼 것이 있는데요."
"네. 그러세요."
"사실 제가 마로니에 공원 위치를 몰라서 물어 본 것이 아니고 방통대 앞 벤치에 앉아 있는데 제 앞을 그쪽이 지나가셨어요. 그리고 저도 모르게 걸음이 움직여서 따라오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은 정말 처음입니다. 실례가 안된다면 차 한 잔 마시고 싶습니다."
나는 필사적으로 거짓말 까지 보태서 그녀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왠지 그녀하고 잘 될 것만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겨나고 있었다.
"어머! 그러셨어요. 근데 전 지금 집에 들어가 봐야 해서. 다른 여자분한테 한번 청해 보세요."
"그게 제가 아무 여자한테나 말을 거는 사람은 아니라서. 그쪽 분 느낌이 참 좋아서 용기를 내어 말을 걸게 되었습니다."
하얀 바지를 입은 그녀는 좀 놀라는 눈치였다. 조금씩 그녀는 내 말을 믿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정말요? 정 그러시다면 차 한 잔 정도는 괜찮을 것 같네요."
3
나는 전에 그녀와 함께 그녀가 가 본적이 있다는 '애플' 이란 커피숍으로 같이 들어갔다.
그곳은 테이블 사이사이에 사과가 그려진 칸막이가 있어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심리적으로 편안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녀의 이름은 '이연지' 였고 고향은 '충남 대천' 이었다. 생판 처음 본건데도 커피를 같이 마시면서 나누는 대화가 상당히 잘 통했다. 나는 재수한다고 얘기 하기가 왠지 챙피해서 건국대학교 국문학과에 다닌다고 말을 해버렸다. 나는 그 말을 하고 나서 아차 했다. 그냥 사실대로 얘기 하는 것이 맞는건데 나중에 들통나면 판이 깨질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또 거짓말을 했다는 죄책감도 들었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한 번 내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우리는 책에 대한 대화도 꽤 나누었다. 그녀는 그녀가 읽은 책 중에 남녀가 계약 동거 하는 내용이 소재인 책이 괜찮았다고 말했다. 어느정도 만남을 가진 남녀가 방이 두칸인 같은 집에서 서로 월세를 나누워 내며 육체적인 관계는 가지지 않는 걸로 계약을 맺고 같이 사는 내용이었는데, 나중에 그 약속을 잘 지키는 남자에게 사랑을 느낀 여자가 먼저 남자와 육체관계를 원하고 그 관계후에 둘이서 부부가 되어 잘 산다는 내용이었다.
그녀와 나는 한참을 거기에 대해서 대화 했다. 나는 남자가 그것도 젊은 남자가 그렇게 욕망을 이겨내고 한 집에 있는 여자를 건드리지 않는 것은 참 대단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결혼전에 그런식으로 동거 하는 것도 현실적으로는 힘들겠지만 괜찮을 것 같다고 자신의 의견을 얘기 했다. 나도 거기에 동의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