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평동의 기억-평택장에서 통복시장까지 선일상화 이도훈(남, 1925)씨
2015.12.19.
일제강점기부터 원평동 평택장에서 부친이 ‘선일상회’라는 건어물점을 운영했다. 안중에 분점을 내고 세교동에 김공장을 운영할 정도로 사업이 확장됐다. 이씨는 본래 철도공무원이었지만 해방 후 그만두고 부친의 뒤를 이어 선일상회를 운영했고 지금은 통복동 통복시장 안에 점포를 두고 아들을 거쳐 손자까지 계승됐다.
선일상회는 어떤 가게였어요?
선일상회는 한 장소에서 아버님이 장사했고 그 다음에 내가 하고, 우리 아들이 장사하고 지금은 손자까지 간 거지.
그럼 변하지 않고 지금까지 온 건가요?
그렇지. 바뀌지 않았지.
옛날에 노점을 했다는 말도 있던데요?
노점은 아니고 백산상회(통복시장) 자리에서 어물장사를 했지.
현재 위치로 옮긴 것은요?
얼마 됐을까, 아주 오래됐어요.
고향이 팽성읍 대사리라고 했는데 처음 평택에 나와서는 어디에서 사셨어요?
내가 3살 때 나왔어. 처음 나와서는 평택리(원평동) 육간(정육점) 옆에서 살았지. 동아병원에서 경찰서 사이 골목. 거기가 우리 살림집이었어. 거기서 장사를 시작했다가 나중에 장터로 옮겼지.
그 때 상호가 뭐였어요?
우리는 처음부터 선일상회. 그 때부터 지금까지 선일상회여. 아버님이 선일이라는 상호를 사용하면서 착할 선(鮮) 한 일(一)자였지. 우리 아버지가 일자무식인데도 어디가든 선일하면 알아줬지.
아버님 나이 몇 살 때 시작했어요?
우리아버지 스무 살 초반에 시작했지. 나는 철도공무원하면서 장사를 도왔어.
아버님은 성함이 어떻게 되고 생년이 언제예요?
우리 아버님은 이근안이고 나이는 모르겠네.
어르신은 어떤 기술을 가졌어요?
나는 전기기술자여. 서울에서 전기학교 나왔어. 성동(중)학교 나와서 서울전기(수도공고)를 나왔지. 여기 나와서 철도청 들어갔고. 기술요원이니까 기계 들어오면 검사해서 합격시켜 내보내는 일을 했지.
그럼 어떻게 장사를 같이 하셨어요?
시간나면 하는 거지. 출근했다가 돌아와서 일하고.
선일상회에서 취급한 물품은?
어물이지, 건어물 일절.
건어물은 어디에서 가져왔어요?
우리가 직접 서울에서 가져왔지. 주부상회라고 거기서 떼어다 팔았어.
원산이나 다른 지역에서는 가져오지 않았어요. 우편택배로 가져오기도 하던데요?
오래전(일제강점기)에는 그랬지. 우리는 거리가 멀어서 안 했어.
장사는 잘 됐어요?
잘 됐지. 우리가 평택장에서는 독점이니께.
당시 평택장에서 건어물상은 선일상회밖에 없었나요?
우리가 독점을 했지. 안중이고 성환이고 둔포고 우리가 도매를 했어요.
선일상회를 통하지 않으면 건어물 취급을 할 수 없었네요. 돈도 많이 벌었어요?
벌만큼 벌었지.
철도공무원보다 많이 벌었어요?
그것보다는 많지. 철도청은 징병, 징용 안 갈려고 다닌 거지. 하하
당시 철도공무원은 징병, 징용 안 잡혀 갔어요?
그 때는 군인가면 죽고 그랬잖아. 철도공무원은 안 잡아가.
6.25 때 평택장이 폭격 맞았잖아요. 그 때 상황이나 그 뒤의 상황이 궁금해요?
아마 그 때는 내가 장사했을 때인데... 6.25 전까지는 철도청 다니고...
6.25 때 폭격을 맞은 뒤 통복로터리 땡땡거리에서 노점을 했다는데?
예전에는 시장자리(통복시장)가 일부 과수원이었지. 저기 세무서(통복동) 쪽으로. 군수 관사도 있었고. 군수 관사가 농협 있는데 있었지.
세무서는 본래 어디에 있었어요?
6.25 후에 세무서가 그 자리(통복시장 옆)로 옮겨왔지.
성동학교는 지금 자리로 오기 전에는 어디 있었어요?
원평동 세무서 있는 데는 진청학교 자리였지. 어릴 때는 철둑 넘어서 세무서(통복동) 자리에 있는 학교 다녔지.
6.25 때 폭격은?
폭격 맞았는데 저쪽 본정통 쪽은 부서졌는데 이짝(반대편)은 안 부서졌지. 전쟁 끝나고 관공서가 (철로 동쪽)넘어오니까 시장도 같이 옮긴 거지.
시장 옮길 때 누가 옮겼어요?
상인들이 알아서들 옮겼지.
선일상회는 언제 옮겼어요?
우리는 가게가 부서지지는 않았는데 다들 옮겨가서 장사가 안 되니까 같이 옮겨왔어.
처음 옮겨와서 장사한 곳이 백산상회 자리인가요?
노점이고 뭐고 우선 자리 잡아서 했다가 나중에 점포로 들어갔지.
통복시장을 보면 싸전, 생선전, 고추전이 나눠져 있는데 평택군청에서 그렇게 해준 것인가요?
군청에서 그렇게 나눠줬어.
지금 선일상회가 현재 위치에 있게 된 것은 군청에서 정해준 건가요?
아녀, 지금 가게는 우리가 사가지고 지은 거지.
처음부터 규모가 컸어요?
아무렴 컸지. 터가 넓었으니께. 그 때는 처음이라 복잡한데 우리가 땅을 사서 지은거지.
통복시장이 상업적으로 장사가 잘 될 때는 언제죠?
10년 전까지(2000년대 초반)만 해도 아주 잘 됐지. 건어물은 이것저것 다 팔리는데, 건어물이 뭐냐면 ‘어물어물 잘 판다’고 해서 건어물이여. 허허
어르신은 직접 산지에 가서 물건을 사오기도 했다면서요?
우리는 주로 속초고 강릉이고 다 다녔지.
배를 타고 같이 어부들과 오징어도 잡아오고 그랬어요?
상회 가서 입찰해가지고 사오는 거지 어떻게 잡아와. 잡아온 사람들한테 사는 거지.
오징어 배는 안탔어요. 싸게 사는 비법은 뭐예요?
싸게 사는 것은 입찰 잘하면 돼지.
그래도 친해지면 싸게 주잖아요?
거래하다 보면 친해지게 돼 있어. 다 친해.
같이 잡으러 가지는 않고요?
같이 배타고 나가서 잡는 거 구경은 했지.
속초까지는 어떻게 다녔어요?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버스 타고 갔지. 트럭을 갖고 대관령을 넘어오려면 아침 9시나 출발하면 저녁에는 도착했어. 도로가 나빴으니까.
돈 잃어버릴까봐 숨겨가지고 다녔다면서요?
그럼 전대차고, 내가 말이여 배에다 전대차고 배자 입고 다녔어. 우리는 그렇게 다니면서 한 번도 도둑질 안 맞고 잘 관리했다고. 오징어는 중간에서 저장해주기도 했어.
동해안에서는 주로 오징어와 명태를 사왔어요?
그렇지. 명태 사오려면 여간 무거워. 그래서 대관령(덕장)에다가 맡겨서 말려. 나중에 관태가 되면 가져오는 거지. 곶감도 사오고. 강릉에 곶감이 많찮어.
서해안으로는 사러 가지 않았어요?
서해안이야 김, 미역 같은 거 사오는 거지.
어디에서 사왔어요?
대천. 서천 것도 가져오고. 김도 참 많이 사왔지. 미역은 남해안 것 사오고.
미역은 어디 것이 좋아요?
기장 기장 하잖어. 기장 미역이 좋지.
멸치는요?
멸치는 대중없어요. 대천 것도 가져오고. 전국을 다 일주했어. 취급 안 한 것 없이 어디를 가든 말이여, 필요하면 다 사왔어.
사온 물건은 어디에 보관해요?
창고에다 보관했어. 선일상회 창고가 얼마나 큰데. 통복다리 넘어서 거기에다 창고를 만들고 보관하고 그랬지. 오징어는 집에다 두기도 했고.
그 때가 1970년대인가요?
그렇지.
물건 사러 갈 때 얼마씩 들고 갔어요?
그 때는 현찰 아니면 안 되니까. 전대차고 숨어 다니듯이 했어. 발각나면 큰일 나니까.
옛날에는 100원짜리 지폐였잖아요?
그럼. 그 때는 지폐니까 양이 많았어. 전대도 두 개 였어. 그래서 사람 많은 곳에는 안 가. 한쪽에 숨어 있다가 버스 오면 얼른 타지.
자녀는 어떻게 뒀어요?
저 애(손자) 아버지 하나지. 딸이 몇 명 있고. 나는 형제였고, 6남매인데 형 있고 누나 있고.
손님들이 많이 오게 할 수 있는 비결은 뭐예요?
비결은 뭐. 친절하고 신용 있게 잘하는 거지 뭐. 그 때는 누구든지 노력만 하면 먹고 살 수는 있었지.
명절 때가 대목인가요?
아무래도 명절 때가 잘 됐지. 명절에는 사람이 차서 치일 정도로 많이 왔어. 굉장했었지.
선일상회가 유명했는가 봐요?
전국에서 선일상회 하면 알아주지 않는 사람이 없어. 평택장에서는 선일상회가 왕이었어.
김 공장도 운영했다면서요?
세교동에서 했지. 생김을 가져다가 말려서 생산했지. 옛날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어떻게 사가는 줄 모를 정도였어. 훔쳐가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이 천안에서 사는데 장날마다 시장에 오는 거여. 그 사람 하는 일이 장날에 훔쳐가는 사람을 잡아주고 돈을 받았어. 잡아다 주면 얼마씩 주고 그랬지.
시장에는 거간도 있고 말감고도 있고 마차도 있었잖아요?
그렇지. 우리는 일정 때 안중에다 지점을 냈어. 그래서 숙성리에 마차를 두고 새벽에 평택에 와서 마차에다 가득 실어서 안중까지 실어다가 장사를 했다고. 그 양반들도 새벽에 한 마차 실어다가 삯을 받고 그랬지. 그 분네들 지금은 잘 살아. 큰 부자여. 조영묵씨라고.
안중에도 가게가 있었던 거죠?
그렇지.
안중에는 어디에 가게가 있었어요?
안중장 가게는 버스 터미널에서 올라가는 중간쯤에 있었지.
이버님 있을 때는 종업원들도 있었어요?
배달하는 아이들 두세 명쯤 있었지.
종업원했던 사람들도 나중에 돈 좀 벌었나요?
다 잘 됐어.
6.25 후에 장은 어디 장이 가장 컸어요?
평택장이 가장 크고 서정리장, 안중장이 크고. 숙성리장은 작아도 4개면에서 다 오니까 장사가 잘 됐지.
통복시장이 잘 될 때는 어떤 가게가 잘 됐어요?
우리 가게가 첫째였지.
제 생각에는 철도공무원이 가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 같은데 왜 그만뒀어요?
철도공무원이 월급이 박해요. 월급을 가져와도 그거로 살기가 힘들어. 거기다가 아버지 장사가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됐어. 그렇게 도와주다보니 공무원 그만두고 장사하게 된 거지. 아버지도 월급도 적은 거 그만두고 장사하자고 그러셔서 그만 뒀지. 해방되고 나서 그만뒀어.
물난리나 화재에 대한 기억은 있나요. 병술년 물난리 같은 거요?
병술년 때는 평화병원하고 진청학원하고 물난리 때 싹 쓸렸지 뭐. 평화병원 위까지 잠겼고 병원은 허벅지까지 잠겼고.
건어물상회도 피해가 컸겠네요?
갑자기 둑이 터지면서 물이 밀려들어서 시장사람들이 물건 옮길 새도 없었지. 피난은 어디로 가. 우리는 트럭에다 중요한 것만 대충 싣고 역전으로 갔어. 거기가 지대가 높아서 물이 차지 않았거든.
6.25 때는요?
우리는 평택 대사리로 피난 갔어.
장사해서 돈 많은 사람들을 인민군이나 지방좌익들이 건드리지 않았나요?
뭐 건드릴 만큼 아니었고.
옛날에는 돈 벌면 은행에 저축했어요?
저축은 뭘. 장광에 쌓아두고 그랬지.
평택리 살 때 곡물상회는 어디에 있었어요?
지금 혼마찌 중간 쯤 평화병원 못미처에 있었지.
곡물상회 조합장 이민훤씨가 유지였던가 봐요?
그 양반이 지역사회 큰 유지였지. 곡자재조합장도 하고 진청학원도 하고 도의원도 하고. 지역사회에 좋은 일도 많이 했어요. 사람들한테 인심을 잃을 필요가 없었어요. 소신대로 살았고.
해방 후 좌우익 갈등이 심했는데 기억나는 건 없어요?
..... (침묵) 우리는 그냥.... 차관영씨가 그 때는 대단했었지. 청단(청년방위군) 대대장도 하고.
이민훤씨는 6.25 후에는 뭐했어요?
한 게 없어요. 친일파라고 어디 나갈 수도 없었고 그랬지.
어르신은 어디에서 활동했어요. 신탁통치 반대운동 같은 것도 했어요?
더러 했지.
당시는 좌익들이 쎘잖아요?
좌익들이 쎘지.
최준화 같은 사람은?
그 사람 완전히 우익이지. 신대리 사람인데 대단히 활동적이었지. 대동청년단 같은 청년단체를 많이 했던 사람이야.
최명환씨는 기억나세요. 군수했잖아요. 평택중학교도 세우고?
그 양반 군수하고 국회의원 출마해서 떨어지고 그만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