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특집>
염전 외 4
조영웅
소금 위에 단단한 뼈대를 세우고 섰던
건물 하나가 무너졌다
그의 얼굴은 검게 그을렸고
투명하고 단단하던 뼈는 잘게 부서져
새의 먹이가 되었다
태양을 유일신으로 숭배하던
조상의 거대한 역사 하나가
우리가 사는 지상에서 사라진 것이다
들꽃
날아가다 길 위에 멈춘 작고 하얀 나비
미처 보지 못한 내 마음을 여기에서 보는 것 같아
찬찬히 들여다본다
연초록 암술 1개에
옹기종기 둘러 모인 갈색 수술 8개
잠시 잊고 있었던
나의 하루를 저리 아름답게 시작할 수 있을까?
자세히 들여다보니
슬픔조차 고맙고 아름다운 아침이다
나비
나, 비 쓸쓸한 비
후드득 내려
그대 슬픔 가린 양철지붕 위로
날아가다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출렁거려
그대, 바다 그리고
바다 위를 날아가는 나는
비, 비처럼 아득한
뜨거운 나, 비
꿈에 대한 편견
공중에 매달아 놓은 꿈은 사각이다
만나는 평행선이 각져있다
칼을 품고 있는 것이다
방어의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몸이 둥근 나는 언제나
한곳에 상처가 나야 멈춰 설 수 있다
우리의 꿈은
가시처럼 뾰족한 상처 위에 서있다
단단한 괴물이 되어
너를 보호한다는 거짓의 보편성으로
반듯한 척 부당한 거래를 꿈꾸는 것이다
단단한 저 건물은
집은
또, 그곳에 깃들어 사는 사람, 너는
봄비
조영웅
우리 함께 숲길을 걸어볼까요?
푸른 나무, 슬픔 한 소절
출렁거리는 안개 사라지기 전
애푸른 잠 깨어
풀잎 젖은 이슬 향기 맡아볼까요?
귀 맑게 트여오는 아침
하얀 별, 어둠 깎아
풀잎에 내려놓은
물방울 구르는 소리 들어볼까요?
꿈인 듯 안개 속 뒤척거리다가
그대 오시는 기척에
화들짝 놀라 깨어 흔들리는 꽃잎
붉다. 저, 봄비
<번역 작품>
낙화(落花)
지난 밤
바닷물이 마을 깊숙이 들어왔다
빠져나갔다
미처, 돌아가지 못한 바다가
해당화 붉은 가시에 찔려
비틀거린다
아아! 아리고 진한 향기
책받침 없이 꾹꾹 눌러 써 놓은
고향의
슬픈 이름이 핏물로 배어나와
꽃잎처럼 아프다
<저서 발간 특집>
염화미소(拈華微笑) 외 4
조영웅
반눈 뜨고 세상을 바라본다는 말은
결국
반눈 감고 세상을 읽는다는 말
어차피, 우리는
반쪽뿐인 세상을 살아간다
완전한 평화는 마음속에 있을 뿐이니
절망보다는
따뜻한 세상의 희망을 말해야하리
반쯤은 나를 다스리고
반쯤은 어수선한 세상에 따뜻한 마음을
내려놓으며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이 되어야하리
내가, 다시 돌아가는 날
아름답지는 않았으나
그곳에 꽃씨 같은 마음 두고 왔노라고
진흙 수렁에서 핀 연꽃처럼
반쯤 뜬 눈으로 웃을 수 있어야 되리
* 염화미소(拈華微笑)
속마음을 알고 빙그레 웃어 보이는 모습
흐르는 돌
저 돌, 서로 몸 비비고 자기 아픈 소리를 내면서도
돌아서지 않는 저 돌
서로 다른 세상의 소리를 담고 굴러와
옹기종기 그늘을 어루만지며 쓰다듬어 주고 있는 모습이
서로 닮아있다
안부를 묻기도 하고 살 냄새를 맡기도 하고
서로 다른 곁의 체온을 느끼며
몸속으로 흐르는 긴 강물소리를 듣는다
투덜거리며 마을 어귀를 들어서는 발자국 소리를 듣는다
서로 다른 생각을 나누어가진 돌의 손목이 희다
단단한 몸속에 부드러운 소리를 들어야 하리
부딪히고 깨지면서 둥근 모습으로 다듬은
웅숭깊은 가슴의 말을 핏물처럼 따뜻하게 느껴야하리
쿵쿵쿵, 자기 가슴 치면서 흐르는 돌
떠나왔거나 또 떠나갈 차비를 하는 이웃의 곁에
자기 몸 담금질하는 뜨거운 상처의 광장,
피도 잠시 멈추고 슬픔도 잠시 내려놓아야하리
너와 나의 인생이란 처음부터
맞닿아 둥글둥글 빈칸을 채워주며 함께 다듬어가야 할
멀고 긴 여정이 아니었더냐
피 흐르는 돌이여,
우리 처음부터 어깨 걸고
뜨거운 여행을 시작했던 이유가 아니었더냐.
쓸쓸한 다비(茶毘)
저, 꽃잎
자동차가 바람을 일으키며 지나가자
한꺼번에 일어나
회오리치며 따라간다.
마치, 장엄한 의식이라도 치르려는 듯
한군데 모여 웅성거리며
모닥불을 피워놓고 수군거리더니
길이 정해지지 않았던지
작은 바람 스쳐가니
화두라도 꺼내든 양 한꺼번에 일어서
부딪치며 뒤엉켜 안으며
길 잃은 소처럼
뜨거운 *화엄의 세상으로 간다.
*화엄(華嚴)
만행과 만덕을 닦아서 덕과를 장엄하게 함
사과나무 목욕탕
햇살이 그녀를 한입 베어 물었다
으깨어 씹힌 그녀의 젖은 몸에서 사과향이 났다
그녀의 깨끗한 몸은
씨앗을 받을 준비가 되었다
머리카락은 더듬이처럼
발광체가 되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바람이 칼금을 긋고 간 지구의 한쪽 갈비뼈에서
맑고 흰 피가 쏟아졌다
햇살에 눈을 찔린 그녀가 비틀거렸다
너무 눈부셔!
푸른 사과나무 잎사귀에 박힌 화살이
윙윙거리며 떨고 있을 때
그녀 검은 안경을 꺼내 쓰고
천천히 세상 속으로 살을 밀어놓기 시작했다
내 몸의 지배자는 누가 될까
그녀가 깨문 햇살의 아랫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향기가
7월의 사과나무 숲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봄이 오는 소리
베란다 창문 옆에 놓아둔
화분에 물을 준다
화초가 물을 빨아 당기는지
흙속으로 물이 스며들어가는지
쪼록쪼록
아이 젖 빠는 소리가 들린다
알을 깨고 나올 때
어미닭이
바깥세상의 문을 열어주듯
파악! 팍, 실핏줄 터지는 소리
내 머릿속에
피가 돌기 시작한다
조영웅.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