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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타자에서 타자, 혹은 타자에서 비타자로의 분리와 결합
- 이희은, 『밤의 수족관』, 지혜, 2018
- 최혜옥, 『왼손의 애가』, 지혜, 2018
권혁재
시는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창작의 소산물이다. 세계는 보이는 대상의 모든 것들이고, 그 대상을 매개로 하여 하나의 창작물인 세계를 재창조해내는 것이다. 이 때 세계를 만들거나 변주해낼 때 시인들은 그 세계로부터 다른 세계를 분리하거나 결합시키는 방식에서 완전한 다른 세계를 창작하여 재정립해내는 것이다. 창작의 과정은 항상 기존의 대상물에서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분리와 결합이라는 부단한 노력을 통해 얻어지고 있다. 그러나 분리와 결합이 지니는 양자의 방식을 두고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르다는 명확한 해답은 없다. 분명한 것은 대상의 접근에서 직관으로 떠올린 것을 두고 많은 시인들이 분리에서 결합하거나, 결합에서 분리하는 양자의 방식을 모두 혼용하여 써 왔다는 것이다. 이희은이 비타자에서 타자로의 분리를, 최혜옥이 타자에서 비타자로의 결합방식을 취하고 있으나 사실 두 시인은 분리와 결합을 혼재하여 쓰기도 하였기 때문에 창작의 의도에는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희은이 비타자에서 타자로의 분리방식이 밖으로 밀어내는 원심력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면, 최혜옥은 타자에서 비타자로의 결합방식을 안으로 끌어들이는 구심력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비타자에서 타자로의 분리
- 그물을 벗어나려는 물고기의 문장
이희은의 첫 시집 『밤의 수족관』에는 “사막, 월식, 저녁, 손바닥, 등고선, 사람, 방, 그늘, 고양이, 빨래, 바다, 소녀, 여자, 목구멍, 서랍, 그림자, 오카리나”등과 같은 물고기들이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물고기들은 “꼬리지느러미가 잘”렸거나 “토르소를 닮”아 있거나 “아가미엔 늘 모래가 서걱”거리고 있는 “퇴화”한 듯한 비타자의 모습을 본질적으로 지적해, 시적 성찰을 고취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이희은의 시의 가치를 새삼 되새기게 된다. 그것도 등단하지 않은 얼마 되지 않은 시인의 첫 시집에서 강렬한 색채로 발아된 시세계의 케미가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이희은이 본래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시는 전통적인 서정성의 시세계임에도 불구하고 비타자를 타자로 분리시켜 나가는 내밀성과 진정성에서 시의 미학적 가치를 획득하고 있다는 사실이 역력히 드러난다. 이러한 예는 이희은 시집 곳곳에 산재해 있는 시말에서 찾을 수 있다. 이희은에게 타자는 “여자, 어머니, 할머니, 물고기” 등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궁극적으로 비타자에서 타자로 분리되는 계기는 “지도에 없는 골목”(「손금」)으로 들어가면서 시작된다. 시집 첫 부분을 장식한 작품 「손금」은 이희은의 시집 전체의 분위기를 암시해주는 서론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비타자의 “손금”에서 보이는 몇 개의 “비밀”은 “당신의 목소리”에서 타자로 치환되고 있다. 비밀과 당신의 목소리 사이에는 “담장 낙서, 기울어진 그늘, 금 간 유리창에 비친 나”를 엿보거나 바라보는 화자를 통해 시가 암시하는 “손바닥 안 골목”에서 “손금”을 확장해냄으로써 결국 비타자에서 타자의 “기울어진 그늘”을 주시하고 있다.
이희은은 “자꾸만 빠져나가는 물을 견디”며 “모래 무덤이 솟아”오르는 것을 감내하며 “발뒤꿈치가 사르륵 사르륵 부서”지는 비타자의 “바람이 머물고 간” 건조한 흔적을 “사막을 짓는 여자”로 분리시켜 타자화로 대치해내고 있다. 더 나아가 자연현상인 “월식”을 통해 타자인 엄마와 비타자인 화자의 관계에 있는 “바다”와 “물결” 또는 “기일”과 “생일”에서 여성성을 들춰냄과 동시에 월식이 가져다주는 에로틱한 이미지 너머의 엄마에 대한 타나토스를 “레퀘엠” 또는 “압화”로 그려내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월식”을 통해 드러난 시적전개는 “엄마의 바다가 닫히면서/ 나의 물결은 시작되었네”라는 첫 연에 시의 내용이 압축되어 있다는 점이다. 엄마는 타자로서, 나는 비타자로서 “자정의 시간”이 “교차”하기를 기다리지만 “기도는 오래전에 늙어”서 “월식”이 되면 닫히거나 시작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림자와 함께 춤을 추는 밤”의 “월식”은 엄마와 화자가 그 경계를 주고받는 “자정의 시간”에서 오래전 기도를 하는 지경은 타자로의 분리에서 나온 결과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이희은에게 “둥근 식탁 밥풀처럼/ 깨진 저녁이 뒹굴고 있었다”에서처럼 “(「평평한 저녁」)”은 엄마를 통해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또 하나의 작품이다.
『밤의 수족관』이라는 시집 제목에서 드러나듯 이희은의 작품 거개에서 나타나는 “물, 그물, 등고선, 물살, 물고기”등의 시어나 시구들은 “물살의 골”(「헐렁한 등고선」)같은 불완전한 세계에서 “바다를 준비”(「바다를 준비하세요」)하며 완전한 세계로 나아가려는 “문장”으로 넘쳐나고 있어 이희은의 시세계가 애틋하고 물고기의 지느러미같이 분명한 방향성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몸의 등고선이 무너지고” “폐곡선을 그리는 등뼈 위에/ 무거운 햇살이 내려와 앉”는 “물의 발자국”을 추적해 드러낸 「헐렁한 등고선」은 이희은이 「밤의 수족관」을 빌어 구체적으로 표출하고자 하는 본래의 시말이 다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등고선은 물살이나 물고기의 이미지를 주로 연상시켜주고 있다. “물살의 골, 묵은 나이테, 몸의 등고선, 폐곡선, 물의 발자국”은 물고기 또는 등고선으로 변주되어 결국 할머니에게로 접맥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희은이 타자를 분리해내는 그 정점에는 항상 물이나 물고기가 있다는 것이다.
여타의 다른 시들에서도 사람으로 돌아갈 수 없는, 따뜻한 눈물을 흘리고 싶은 눈사람이나(「한 방울 사람」) “까만 눈동자 하나/ 정화수 속으로 투욱, 떨어”져 내리고 “처마 밑 그늘”에서 “마른 꽃”이 되어 버린 할머니의 기도에서처럼 어김없이 물이 등장한다. 또한 “어머니 눈 속의 파도를 다독여/ 가장 잔잔한 바다를 준비해”둠으로써 “사리마다 수위가 높아져도 넘치지 않”는 「바다를 준비하세요」에서 “물고기”로 나타나기도 한다. 어떤 때는 “밤의 그늘”이나 “묵은 물감 냄새”가 나는 대상에서 “늙지 않는 웃음”(「늙지 않는 여자」)을 흘리는 여자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이면에는 근본적으로 “여자, 할머니, 어머니”등이 정체성으로 포장하고 있는 화자의 경계에서 “그물, 물살의 골, 물살, 물결”등 장애의 요소들로부터 극복해내려는 실존적인 양상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즉 타자화로 보이는 대상들을 단순한 필연의 관계가 아닌 동화와 투사의 거리를 적절히 유지하고 있다 하겠다.
악몽은 옆구리에 지느러미를 달고
방 안을 헤엄치기 시작했다
시간이 반쯤 남은 수족관
벽시계는 아주 천천히
아가미를 벌렸다가 닫았다
굴절된 별빛의 방향을 따라
가시 뼈 사이사이 통증이 물풀처럼 흔들렸다
나는 매번 거품 같은 질문을 했고
시계는 물결처럼 매번 같은 대답을 했다
바람 빠진 부레로 물살을 넘나드는 동안
새벽은 몸속의 가시를 뽑아내며
비리내만 남긴 채 허물어졌다
- 「질문」전문
이 시는 「밤의 수족관」을 위한 전주곡이다. “악몽”의 빌미를 제공한 “질문”은 “굴절된 별빛”인 듯, “바람 빠진 부레”인 듯 “매번 같은 질문을 했고/ 시계는 물결처럼 매번 같은 대답을 했다”. 그러나 「밤의 수족관」에 이르러서는 “물살 위로 떠오른 물고기 한 마리”로 상승시키면서 “자신의 별자리를 찾아 떠나갔다”고 하며 시적 사유의 외연을 넓히고 있다. 이희은에게 “지느러미, 아가미, 부레”가 있어도 “수족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매번 같은 질문에 같은 대답을 들으며, “물살을 넘나드는 동안”에 “비린내만 남긴 채 허물어져”가는 과정을 타자로의 질문을 통해 잘 획득해내고 있다.
그러나 “악몽”같은 “질문” 이외에도 불완전하거나 불편한 시편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불발된 폭죽만 드문드문 모래밭에 박혀 있었다”(「청춘」)는 표현에서부터 “화면이 깨진 실금, 당신이 버린 식탁, 목마른 허기”(「건조 소녀」)까지 사실적으로 건조하고 불완전한 대상으로 화자와 무관하게 타자로 잘 분리시키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관절마다 성에가 핀 양버즘나무, 썩은 나이테, 구부러진 달빛, 진물처럼 흘러내리는 안개”가 나타나는 「검은 목구멍」을 통해 불완전한 것을 더욱 그로테스크한 불완전한 것으로 처리하여 비타자와 철저히 분리시키고 있다.
이희은은 “비늘에 십자가의 낙인이 찍힌” 수족관에서 “화석이 된 일기”를 꺼내 읽음으로써 “아무에게도 손 내밀지 못했던 글자들”에서 다시 “부장품으로 구석에 있던”(「서랍 무덤」) 타자와 비타자 사이에 “굳어 버린” 화자를 “서랍 무덤”에서 찾아낸다. 이희은이 시를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당신이라는 주체에서 나라는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부단한 인식과 철학적 성찰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예는 「오카리나 부는 여자」에서 그 면모를 여실히 들춰내고 있다. “새떼, 그물, 발톱, 공중에 나이테, 찢긴 날개, 날갯짓” 등이 시사해주는 시적사유는 새의 은유를 넘어 그물을 벗어나려는 물고기의 몸짓과 흡사하다. 새나 물고기는 그물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날 때 참된 자유와 이상을 누릴 수 있다. 새나 물고기에게 그물은 그런 자유나 이상을 얽매는 장애물이다. 「오카리나 부는 여자」라는 시는 이희은이 시집을 마무리하면서 그물이라는 장애물을 초월하여 “날갯짓을 부화”시켜 완전한 세계로 나아가려는 “소리처럼” 평온하고 가쁜 호흡을 가다듬는 작품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기저에는 오카리나를 부는 여자를 통해 “공중에 나이테를 새기고 찢긴 새”로 치환되는 타자를 철저히 분리해내어 “그물”을 뚫고 헤쳐 나가고 있는 이희은의 시적면모를 밑그림으로 깔아 놓고 있다. 이희은의 시세계는 전통적인 유형의 서정성에 짙게 접맥되어 있지만 오래 묵거나 빛바랜 서정이 아닌 전혀 다른 이미지의 구성이나 대상을 대하는 시점을 비타자에서 타자로의 분리를 잘 견지해냄으로써 시의 미학적 효과를 한 층 더 심화시켜내고 있다. 마지막으로 짧지만 비타자에서 타자로의 완결미가 돋보이는 작품을 한 편 수록하면서 이희은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릴까 한다.
바람과 달빛이 올 사이 끼워둔 나의 축축한 이야기를 다 읽어 주었다
- 「한밤중 빨래를 널면」전문
타자에서 비타자로의 결합
- 이타와 자기애로 향하는 익숙한 사랑
최혜옥은 2018년 『애지』봄호에 등단하여 작품 활동을 시작하면서 종내에는 첫 시집을 상재하였다. 비록 등단한 지는 얼마 되지 않지만 그의 시를 자세히 읽어보면 시력과 상관없이 내공이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최혜옥의 시세계를 전반적으로 지배하는 주된 경향은 의식과 무의식의 분리와 결합에서 파생되는 문명과 비문명에 대한 폐해와 아픔, 그리고 근본적으로 어쩔 수 없는 고적감을 사랑으로 환유하여 자문자답하는 데서 담대한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일면에는 “부팅, 하이퍼 링크, 바퀴, 공식” 등 문명을 암시하는 작품에서 “포맷된 세포(「굿모닝 부팅」), 아스팔트에 찍힌 붉은 눈빛(「바퀴 달린 사람들을 고발한다」), 내밀한 길(「외로운 날의 하이퍼 링크」), 먼지가 된 가방 속의 어제들”(「직진의 공식」)로 문명에 잠식당하는 인간 정신의 폐해를 적나라하게 들춰내고 있다. 또한 “괄약근, 무른 뼈, 비문증” 등에서도 지단한 문명의 비대에 따라 야기되는 인간의 질병을 지적해내고 있는데, 시인은 이런 일련의 시를 통해 노파나 아버지 심지어는 화자의 증세까지 들춰내고 있다. 이외에도 “간절곶, 우체국, 들판, 정수리, 연주자, 바다, 가시, 파우스트, 보바리 부인, 괴테, 왼손, 애월항, 그림자, 거미, 그믐, 편지, 도시, 블랙홀” 등 다양한 층위의 시편들을 구성하여 그만의 시적 진실로 잘 정치시키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등장하는 모든 대상물들은 최혜옥에게는 타자이면서 타자가 아닌 그 자신의 무의식에 오래도록 잠재해 있던 기억과 상상을 통해 현재의 의식으로 다시 재현된다는 사실이다. 이는 유년의 기억을 편린으로 되짚으려는 것이 아닌 일상에서 획득한 대상물을 오래도록 응시하거나 관찰하는 치밀성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래서 최혜옥의 시에서는 타자가 아닌 비타자와의 관점에서 쓴 작품이 많다. 어떻게 보면 최혜옥은 타자에서 비타자로의 결합하는 방식을 습득한 후 그만의 방식대로 시를 써 왔을 것이다. 그의 시를 정독해 보면 아픔을 아픔으로 보듬는 아름다운 시말들이 산재해 있다. 이러한 예는 “간절곶”을 비롯하여 “왼손의 애가, 물푸레 여자, 애월항, 거미”등에서도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최혜옥의 시는 읽기가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감동의 수위도 높다. 이것은 그의 시세계가 다양하면서도 여러 층위의 시적 대상들을 시로 잘 용해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파랑으로도 닿을 수 없는/ 그대만 간절한 곳에서/ 간절곶을 본다”에서는 “그대”와 “간절곶” 사이에 있는 타자들의 거리를 화자의 간절한 마음으로 이접시켜 비타자로 결합해내고 있다. 다른 작품 “굿모닝 부팅”에서도 마찬가지다. “부팅”이 내포하는 문명의 이미지에서 “빛의 속도로 도착하는 하루”에 “압축을 풀어내면 경계가 무너질” 때 “사랑 파일에 적극 엑세스 할 것”을 부추기도 한다. “간절곶”에서 이중적인 경계와의 결합을 하고 있다면 “굿모닝 부팅”에서는 물질문명에 무너진 경계와 결합시키는 점이 주목받을 만하다. 아스팔트에 붉은 눈빛만 남기고 로드킬을 당한 고라니에서 어미를 찾는 새끼 고라니 울음소리(「바퀴 달린 사람들을 고발한다」)에서부터 바람을 안을 때마다 자라나는 「무른 뼈」에서 “슬픔이 뭉쳐 뼈가 된다”는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연민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아프게 자국 난 내 심장의 이력” 때문에 “사랑했지만 과녁을 뜷지 못한 목마른 만남들”(「비문증」)에서 화자 자신의 온전하지 못한 건강을 “동공에 맺힌 마지막 연인처럼”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시적 전개는 “과속방지턱을 넘는 듯”(「배경은 어제와 같음」) 어제와 똑같은 배경에 갇혀 있다. 그렇게 “직진만을 거듭하다”(「직진의 공식」) “먼지가 된 가방 속의 어제”들이 들어있는 비정상적인 도시에서 “직진의 공식”으로 일탈하려는 행위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 행위의 시작은 “붉은 초상화”로 보이는 사랑의 불확실한 대상에서 추상과 구체적인 개념을 비타자로 결합시켜내려는 “붓을 들고도 그릴 수 없는 당신은/ 당신은 누구세요”(「누구세요」) 하며 자문하는 데서 비롯된다. 어떤 때는 최혜옥 스스로가 시는 “아무 것도 해명하지 않는다”(「그녀의 낯선 바다」) 고 말하면서도 “침묵 속의 사유”가 안내하는 “생앓이”로 “낯선 시간”을 파악해내기도 한다. 이것이 최혜옥이 지니고 있는 시에 대한 믿음이자 진정성을 대하는 분명한 증거이자 자세이기도 한 것이다. 최혜옥은 시에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인물들의 이름을 제목으로 차용하거나 시의 내용에서도 비유적으로 인용하여 그 자신의 무의식과 의식에 무관하지 않게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오래 전에 각인된 감동과 충격이 많은 시간을 경과한 후 기시감이나 상상력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이러한 바탕에는 항상 과거를 토대로 상상력이나 무의식작용으로 현재에서 재현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최혜옥 시에서 나타나는 “파우스트, 괴테, 보바리 부인”은 시인이 아닌 화자로 대체된 인물들로서 철학적 사유를 시적 심급으로 이어 놓고 있다. 먼저 「파우스트의 시인」에서 “불씨 하나를 얻기 위해/ 가진 보석을 다 팔고도” “불꽃으로 피어날 시를 찾아/ 백지에 불씨를 나르는” 화자는 파우스트라는 타자를 “사유의 늪”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비타자화로 등가시키고 있다. “괴테의 거리”에서 나타나는 “이방인”은 비타자의 대체물로 “오래전 세상을 떠난 시인”과 대등한 시적대상물이다. 이러한 타자들의 “묵은 향”에서 최혜옥은 시의 접점을 “못다 핀 시간”에 “하얀 정장을 차려입은 구름”이라는 비타자의 시각에서 “농익은 포도주”를 마시며 “카르페 디엠”이라고 말하며 눈을 반짝거린다. 그리고 또 「보바리 부인의 열애기」에서는 대리만족을 환기해 주는 것으로 보이는 것 같지만 사랑을 부르는 방식이 독백이나 방백이 아닌 도저하고 절대적인 위치에서 당당하게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최혜옥 시가 지니는 가장 큰 특징은 자기애로 점철된 사랑에 대한 상처와 아픔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사랑 때문에 더 아파해야 하고, 아픔을 스스로 감내하는 면역력을 터득한 후 나온 시편들이라 더욱 안타깝게 여겨진다. 이는 현 시대의 사람들에게 몇 가지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사랑할 줄 못하는 사람에게는 사랑하는 법을 일깨워 준다는 사실이다. 사랑은 알지만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에게 사랑하는 법을 시로 깨우쳐 주고 있는 것이다. 다음 시들에서 자기애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그 일면을 조금은 알 수 있다. 그늘을 짓는 그림자가 지니는 속성에서 화자를 복사하는 그림자를 통해 “그림자”라는 타자에서 “온몸을 재단한”(「그림자는 나를 복사한다」) 비타자로 복사하거나 “엉킨 타래”나 “파리 목숨” 같은 비타자를 “가 둘 그물이 될지 모른다고” 불안해 하는 “밀폐된 삶의 도가니”로 표현하는 「그리움에 다가가다」는 비타자의 자기애를 더 겹쳐 포장하는 것으로 정점을 찍고 있다. 이러한 고독이나 사랑으로 내포한 자기애는 비타자로 하여금 언제나 슬프고 애절한 것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예는 익숙한 길인데도 어둠에 묻혀 그대에게 가지 못하는 “「그믐」”이라는 타자에서 비타자의 안타까운 사랑을 “뭉텅뭉텅 밤이 무너”진다는 표현에서 잘 획득해내고 있다.
거기 내밀한 길이 있다네
한 잎의 낙엽 되어 바람 속을 뒹굴 때
숨 멈추고 눈 감으면 나타나는 문,
나를 인식하고 열리는 조붓한 길이 있다네
어둠이 깊어 갈수록 선명해지는
외줄기 통로
더듬어 끝 간 데로 따라가면
거기 낯설지 않은 방
나를 닮은 한 외로움이 골똘히 앉아 있다네
아, 비로소 알아채는 것이라네
나를 떠난 건 바로 나 자신이었다는 것을
외로움도 익숙하면 따뜻해지는 법.
찬비에 지워진 길이 몸을 움츠릴 때
나는 링크를 한다네
은밀한 문, 빗장을 풀고
나에게로 나를 전송한다네
「외로운 날의 하이퍼 링크」전문
최혜옥의 작품 대개가 다 수작이나 그 중에서 문명과 비문명의 사이로 전송하고, 전송을 받는 “내밀한 길”이 있는 작품을 꼽자면 위의 시가 아닌가 싶다. 「외로운 날의 하이퍼 링크」는 전통적인 서정과 현대의 테크놀러지가 결합하여 만든 새로운 유형의 시작품이다. “내밀한 길”을 통해 들여다보는 외로움은 “익숙하면 따뜻해지는 법”을 “하이퍼 링크”를 연결해둠으로써 깨닫게 된다. 이 시는 외로움에 대처하는 한 방식을 링크를 걸어 내밀한 길을 만들어 은밀한 문의 빗장을 풀고 “나에게로 나를 전송”하면서 외로움을 재확인하려는 사랑과 사랑이 아닌 것들을, 타자와 비타자와의 최고조에 이르는 상태로 결합해내고 있다. 그리고 비타자화의 정수가 잘 드러나는 두 편의 시가 또 있다. 그것은 바로 「왼손의 애가」와 「가을 한 권」이다. 오른손 때문에 갖게 되는 타자의 위치와 시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왼손이라는 입장에서 “대소사를 치”르거나 “굼뜨고 어눌”하여도 “한 번도 비난하지 않고” “눈시울 붉히며 고마워만 했”던 비타자의 서늘한 손길을 추적하여 화자에 대한 “왼손의 애가”를 진솔하게 탐색해내고 있는 반면에, 「가을 한 권」은 나뭇잎이 쓰는 “붉은 유서”를 통해 “사족, 퇴고, 탈자, 표절” 등의 용어에서 나타나듯 시 쓰기의 어려움을 비유적으로 토로하고 있다. 시 쓰기의 열정을 나뭇잎이 “붉은 빛”을 띄거나 “물기 한 점 없는/ 노을을 표절한 문장”으로 사실적이고 자연적인 현상에서도 풀어낸다. “몸으로 쓰는 곡진한 사연”을 “고요히 더 고요히/ 가벼이 더 가벼이”하는 경건함을 지닌 채 “가을 한 권”을 “최후의 열정”으로 정제하여, “붉은 유서가 기록”이 되도록 “나무의 변심”에도 흔들리지 않고 절차탁마를 하는 환유적인 이미지로 잘 그려내고 있다.
최혜옥의 시에서 그 자신의 처지나 심경을 잘 드러낸 시는 「물푸레 여자」이다. 시인이 물푸레 여자이면서 동시에, 물푸레 여자가 시인이 되어 결국 “물푸레 여자”로 동일화되어 나타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잠재의식의 세계에 흩어져 있는 익숙한 사랑의 행위를 간절한 바람으로 다시 재정리하고 있다 하겠다. 잠재의식의 가장 큰 바탕이 되는 인간행위의 단초는 과거의 사건이나 정신적인 층위로 짜여진 다양성이 현재의 사건이나 대상에서 다시 상상력으로 재현된다는 것이다. ‘사랑, 고독, 그리움, 슬픔’ 등 비가시적인 사유의 층들이 “여자”라는 본질적인 자연물과 인지할 수 있는 상황으로 결합될 때, 과거의 상처나 고통으로 인해 비타자의 심경을 혼란스럽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그리하여 타자에서 비타자로의 동화를 통해 많은 대상물이나 시적인 용어에 타자를 비타자처럼 대유시키거나 은유시킨 것 또한 사실이다. 시에서 타자에서 비타자로의 결합 방식은 생득적으로 취하는 자연스러운 기법이며 신에게서 입은 은혜이자 신이 내린 축복이라 하겠다. 따라서 최혜옥은 사랑의 시로 인해 축복을 받았고, 타자에서 비춰지는 무위식이나 이타적인 자기애로 인해 은혜를 입었다고 볼 수 있다. “천 년 묵은 돌기”로 “바람이 지은 집”에서 “불치병 같은 사랑”을 마음껏 하길 바라며, 최혜옥의 내면을 추동하는 이타와 자기애가 항상 시라는 과녁을 겨누고 있기를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 날에 명중되어 나올 시를 위해 미리 축복의 인사를 남겨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