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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룡
한성룡
2023.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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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쉬운 3단계 명상법>....p264
일단 많이 자고 편안히 누우면 준비 끝이다. 충분한 수면이 필수인 것은, 피로한 상태에서 눕게 되면 명상이 아니라 꿀잠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명상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기 때문에, 몸이 피곤한 상태에서 하는 명상은 잠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수면이 충분하면 편하게 누워도 잠이 오지 않는다. 이런 편안하고 또렷한 상태가 내가 말하는 명상에서 가장 중요하다.
이 조건이 갖춰지면 약 15분 정도 움직이면 안 된다. 이 상태에서 가볍게 눈을 감고, 두 눈썹 사이인 미간에 의식을 지그시 둔다. 너무 강하게 집중하면 눈이 사시가 되면서, 나중에는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그러므로 의식을 가만히 매어 두는 정도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 미간이라는 검은 칠판에 희고 작은 빛의 점이 찍혀 있다고 상상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이런 뒤에 숨을 들어쉬면서 '현성법신'이라고, 내쉬면서는 '현법열반'이라고 속으로 읊조리면 된다. 즉, 자신의 호흡 길이에 맞춰서 '현성법신'과 '현법열반'을 되뇌기만 하면 된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너무나 쉽고 간단한 방법이다. '현성법신 현법열반'의 의미를 간단하게 설명하면 "지금 진리가 성취되니, 모든 존재는 그 자체로 언제나 고요하다."정도가 된다.
이런 명상의 단계를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 3단계가 된다.
첫째, 많이 자고 편안히 눕는다.
둘째, 움직이지 않은 채, 미간에 의식을 둔다.
셋째. 호흡 길이에 맞춰, 들이쉬면서 '현성법신', 내쉬면서 '현법열반'을 되뇐다.
<현실을 관통하지 못하면 명상이 아니다>...p137
나는 명상을 배우려는 사람들에게 '오래된 방법'을 배우라고 조언한다. 연원이 깊고 오래된 수행법은 임상 시험을 통과한 안전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약으로 친다면 임상 3상까지 치룬 안전한 약이다. 그런데 오래된 방법은 대부분 효과가 빠르지 않다. 오랫동안 깎이는 과정에서 안정성을 중시하는 쪽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경험 많은 뛰어난 선생의 지도를 받지 않는다면, 전통적인 명상법부터 배우는 것이 가장 현명하고 타당한 방법이다.
명상 분야에도 거짓이 난무한다. 포털 사이트의 낚시성 제목보다 더 유서 깊은 구라(?)전통이 명상 분야에도 버젓이 존재하는 것이다. 정신이야말로 본질적이고 중요한 것이며 물질은 천하다는, 명상 분야의 상투적인 말도 그러한 거짓의 한 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 부류다. 첫째는 진짜 명상에 아편처럼 매몰되어 현실감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둘째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실제로는 남보다 더 물질에 집착하는 사람들이다.
물질에 초탈하기 위해서는 관점을 전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제로 가져봤느냐의 여부야말로 참으로 중요하다. 실제로 가졌다가 버린 사람은 정말로 집착이 없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입으로만 버리고 몸으로는 취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종교인과 수행자 가운데 많아보인다.
우리가 사는 곳은 매트릭스나 메타버스가 아니라 지금 이곳의 현실이다. 정신도 분명 중요하지만, 그보다 본질적인 것은 우리의 육체가 발을 붙이고 있는 현실이라는 점을 자각해야만 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것에 동의하기 때문에 현실의 삶과 경제 생활에 집중한다.
생각이 현상의 본질을 바꿀 수는 없다. 아무리 자기 최면을 걸고 관점을 바꾼다고 하더라도 먹는 것을 줄이지 않으면 다이어트는 성공하지 못한다. 따라서 정신이 물질 위에 있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정신이 물질을 보완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요즘 인터넷상에는 주 캐릭터와 부 캐릭터, 속칭 '주캐'와 '부캐'가 있다. 현실 세계는 '주캐'이고, 명상의 세계는 '부캐'이다. VR이나 AR처럼, 명상의 세계는 현실이 아닌 가상임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다만 명상의 세계가 순전한 허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명상은 현실에 기반하고 있으며, 명상에 따른 이익도 가상세계가 아닌 현실 세계에서 작용한다.
삶에서의 명상은 어디까지나 수단일 뿐 결코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그 자체가 목적인 명상에 몰두한다면 현실을 관통하는 삶을 살기 어렵다. 그러한 명상은 현실 생활에서의 패배를 겪게 하고, 그에 따른 스트레스만 증폭시킬 뿐이다.
명상은 장자의 친구인 혜시가 장자를 비꼬아서 말하는 '크기는 하지만 쓸모 없는'것이 아니라, 현실을 헤쳐 나가게 하는 가장 적실학 강력한 무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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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룡
꺼내 먹어요
<데이비드 A. 싱클레어> ...유전학자 생체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기술은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나요? -예를 들면 안구나 망막 세포를 재프로그래밍하는 연구를 하고 있어요. DNA를 한 번 복구하면 나이 든 쥐의 시력을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만약 모든 신체 기관의 세포를 재프로그래밍하는 데 성공한다면 DNA를 100회 정도 복구해서 신체 기능을 되돌릴 수 있죠. 앞으로의 과제는 이 이론이 타당한지를 증명하고 모든 신체 기관에 효과가 있는 약을 개발하는 일입니다. 노화를 일으키는 원인은 무엇입니까? -저는 노화가 신체 정보의 상실로 일어난다고 봅니다. 그 정보는 견고한 유전자 정보가 아니라 '후성유전' 정보입니다. 즉 세포가 적절한 유전자를 적절한 시기에 읽도록 하는 시스템이죠. 이 능력을 잃게 되면 시간이 지날수록 병에 걸리기 쉽습니다. 저희 연구진은 세포를 재프로그래밍하는 과정에서 세포 안에 있는 젊음의 백업 복사본이라고 부를 만한 것을 발견했어요. 젊었을 때의 DNA 정보가 마치 하드디스크처럼 세포에 저장되어 있는데 그 정보를 복원하면 세포가 젊은 DNA 유전자를 올바른 방법으로 읽게 됩니다. <리사 랜들>...이론물리학자 우리들 눈에 보이지 않는 암흑물질은 이론상으로만 존재하는 물질인가요? -'보이지 않는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아요. 우리는 자신의 눈에 직접 보이는 것만 실재한다고 생각해요. 많은 사람들이 안경을 쓰는데요. 안경의 렌즈를 통해 들어온 영상을 뇌가 처리해서 보고 있는 것이죠. 이처럼 모든 물질을 반드시 직접 보는 것은 아니에요. 마찬가지로 암흑물질은 우주에 존재하는 물질 중 하나지만 빛을 방출하지도 흡수하지도 않기 때문에 눈으로 직접 볼 수 없어요. 현재 밝혀진 것은 암흑물질과 보통 물질이 중력을 통해 상호작용한다는 것뿐이죠. 우리는 그것이 중력을 통해 상호작용한다는 증거를 '관측'할 수 있습니다. 우주에는 일정량의 암흑물질이 존재한다는 가설에 따라 항성, 은하계, 은하단의 움직임, 빅뱅으로 발생한 우주마이크로파배경복사와 같은 현상을 명학하게 설명할 수 있어요. 이런 의미에서 암흑물질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조지프 헨릭>...진화인류학자 멈출줄 모르는 과학의 진보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걸까요? -유전자 편집을 생각할 때 말할 수 있는 사실은 이미 인간은 일종의 도태를 계속해왔다는 겁니다. 인류는 집단에서 요구되는 조건을 옛날부터 매우 엄격하게 여겼습니다. 몇몇 수렵-채집 민족이 죄지은 사람이나 배우자가 없는 사람을 처형해왔듯이 우리는 계속해서 사회적 도태를 해왔죠. 이를 인류의 '자기가축화'라고 합니다. 개나 말을 가축화했듯이 우리는 자기자신을 가축화해서 다른 어떤 유인원보다도 온순하게 순응을 잘하는 동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반응적 공격성(위험에 처했을때 나타나는 공격성)'은 다른 유인원보다 훨씬 약합니다. 인류는 이미 자신의 진화 방향을 정해놓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너선 실버타운>...진화생태학자 박사님은 '과당의 덫'을 경고하셨는데, 무엇이 문제인가요? (과당fructose: 꿀이나 과일에 주로 들어 있는 단당류의 일종으로 단맛이 강함) -과당은 포도당 같은 단당류 중 하나로 간에서만 포도당과 글리코겐으로 분해됩니다. 따라서 간이 체내에 있는 모든 과당을 소화하죠. 반면 포도당은 우리 몸의 혈액 속을 돌아다니며 모든 세포와 조직의 에너지원이 됩니다. 과당은 이 점이 매우 달라요. 과당이 체내에 많이 쌓이면 간에 악영향을 미치고 비만이 됩니다. 과당은 달고 맛있는 데다 저렴하기까지 해서 가공식품에 감미료로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자기도 모르게 많이 먹게 되죠. 물론 과당이 든 식품을 조금만 섭취하면 오히려 비만을 예방하는 역활을 합니다. (생과일은 과당이 적고, 많은 섬유질이 흡수속도를 늦추기에 괜찮지만, 과일즙과 같이 농축된 과당은 문제가 많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유전자 변형 식품(GMO)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애초에 인공 식품과 자연 식품의 경계가 존재할까요?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약 20~30년 전에 유전자 조작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왔을 때는 아직 초기 단계였어요. 하지만 원래 농업에서 재배한 작물 또한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자연선택으로 인해 유전적으로 개량된 것입니다. 실제로 밭에서 나는 밀은 원래 종인 야생 밀보다 훨씬 큽니다. 연구소에서 인공적으로 개량하지는 않았지만 농민이 의도적으로 크게 자라는 품종을 끊임없이 선택해왔기 때문에 커진 것이죠. <찰스 코겔>...우주생물학자 집단으로 무리지어 사는 생명체는 누구 하나가 리더를 맡아 서로 의사소통하면서 전체를 통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는 사실이 아니라면서요? -개미와 조류의 행동을 보면 리더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인간이 피라미드처럼 거대한 유적을 건설할 때 혼란을 방지하기위해 지시를 내리는 리더가 당연히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다른 생명체가 자연에서 힘을 합쳐 먹이를 옮기거나 큰 무리를 지어 하늘을 나는 행동은 누군가의 지시나 명령에 따른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특정한 리더가 없어요. 언뜻 질서정연하게 보이는 생명체의 행동은 체내의 다양한 신호를 주고받으며 일어나는 '단순한' 상호작용의 결과일 뿐입니다. 화학물질로 교신하는 개미를 예로 들어볼께요. 일본 홋카이도에서 발견된 개미집에는 3억 마리의 일개미와 100만 마리의 여왕개미가 서식하고, 4만 5000개나 되는 개미집이 가로세로의 통로로 이어진 '대도시'구조를 이루고 있어요. 이런 거대한 도시를 만드는 일을 여왕개미가 통제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여왕개미가 일개미에게 어느 정도 지시를 내리는 것은 맞지만, 개미집을 만들거나 열을 맞추어 먹이를 나르는 일은 일개미끼리 상호작용한 결과일 뿐이에요. 단지 몸에서 페로몬이라는 화학물질을 내보내 가까이에 있는 동료들을 불러 모으죠. 이런 각 개체의 자발적인 행동이 결국 개미 수억 마리의 집단 행동을 낳는 겁니다.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듯이 생물이 물리법칙의 지배를 받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에요. 기본적으로 생물학은 물리법칙을 따릅니다. 물리법칙은 무한한 우주를 지배하고, 생명은 그러한 우주의 일부인 것이죠. <조너선 B.로소스>...생물학자 박사님께서 실험으로 진화 과정을 증명하려 했다고 하던데요. 사실인가요? -최근에 그런 시도가 진화생물학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가장 가슴 벅찬 진전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자연선택설을 주장한 찰스 다윈은 진화는 빙하가 얼듯이 천천히 진행된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이론은 데이터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직감에 가까웠죠. 근데 우리는 이런 다윈의 주장을 한 세기가 넘도록 추종해왔고, 진화가 일어나는 과정을 실험으로 증명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왔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에 따라 진화가 매우 빠르게 진행된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해충이 살충제 내성을 키우거나 박테리아가 약물 내성을 얻어 적용하듯이 우리 주변에서도 진화가 빠르게 일어나는 상황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진화 과정을 실제로 실험해볼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이런 인공적인 실험이 연구실에서는 수십 년 동안 이루어졌지만, 자연계에서는 트리니다드섬에 서식하는 구피를 대상으로 1980년대에 처음 이루어졌어요. 연구자들은 대부분 자연계에서 동일한 실험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15년 뒤에 우리가 도마뱀 진화 실험을 발표하기 전까지 누구도 이런 실험을 논문으로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현재 이런 연구는 걸음마 단계라 그만큼 숫자도 적지만 앞으로 더 늘어날 것입니다. 진화의 전제가 되는 유전자 돌연변이는 우연히 일어나는 건가요? -우연이 무엇을 뜻하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진짜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는 돌연변이가 있는가 하면 환경 속에서 방사선이나 화학물질 때문에 일어나는 돌연변이도 있어요. 진화와 자연선택에서는 '돌연변이는 필요할 때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추운 환경에 놓였다고 해서 추위에 적응하기위한 돌연변이가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환경의 관점에서 돌연변이가 무작위로 일어난다는 사실은 진화생물학에서 중요한 대전제입니다.
도덕적 동물...마지막 이야기 [종의 기원]은 성서의 창조론에 맹공을 퍼부었고, 뒤이어 나온 [인류의 기원과 성 선택]이 도덕 관념의 위상에 손상을 입혔다. 도덕적 규범도 정치적 타협의 산물에 불과할 뿐이다. 도덕 규범은 경쟁하고 있는 이해 집단들이 만들며, 각 집단은 온 힘을 여기에 집중한다. 그랫서 도덕적 가치들은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오며, 권력을 쥔 사회 계층에 따라 불균등하게 형성된다. 이에 애든버리 리뷰는 만일 다윈의 이론이 옳다면 "성실한 사람들은 고상하고 덕 있는 삶을 살려는 노력을 포기할 것이다. 그렇게 살려는 동기가 잘못된 것이고, 우리의 도덕 관념이 단순히 본능이 발전한 것임이 밝혀질 것이기 때문이다....이런 견해가 옳다면 급히 사고를 바꾸어야 한다. 그것은 양심과 종교적 관념의 신성함을 파괴함으로써 사회를 밑뿌리까지 흔들 것이다."라고 평했다. 스펜서는 진화의 역학 관계만이 아니라 진화의 '방향'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간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진화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스펜서는 진화는 종들을 더 길고 더 편안한 삶으로 그리고 자손들을 더 안전하게 키울 수 있는 방향으로 인도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인류의 사명은 서로 협동하는 이런 가치를 키워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윈과 밀은 모두 신이 없는 우주에서 도덕적인 지침을 찾아낼 합당한 장소는 공리주의라고 믿었다. 공리주의의 이념은 단순명료하다. 행복의 양을 증대시킬 수 있으면 선한 것이고 고통의 양을 증대시키면 나쁜 것이다. 포스트 다윈주의 세계에서 밀의 공리주의가 가진 미덕 중 하나는 미니멀리즘이다. 기본적인 도덕 가치들을 주장할 근거를 찾기가 더 어려워졌다면, 기본적인 주장들이 더 적고 더 단순할수록 좋을 것이다. 공리주의의 토대는 다른 조건들이 같다면 행복이 불행보다 더 낫다는 주장으로 간단히 구성되어 있다. 다윈은 자신의 윤리학이 자연 선택이 함축하는 가치들과 얼마나 심하게 충돌하는지를 보았다. 기생성 말벌의 음험한 살해 행위나, 생쥐를 가지고 장난하는 고양이의 잔인함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았다. 유기체의 사소한 진보를 위해 커다른 고통을 겪게하고 많은 죽음을 치르게 한다. 유기체의 디자인은 고통을 통해 더 번성하고, 고통은 유기체의 디자인 안에서 더 확산되어 나간다. 다윈은 도덕적인 존재란 자신의 과거 행동들과 동기들을 미래의 것들과 비교해서 행동할지 말지를 결정할 수 있는 존재라고 보았다. 그렇기에 인간은 도덕적인 동물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우리는 잠재적으로 도덕적 동물이라는 것이지 자연적으로 도덕적 동물이라는 것은 아니다. 도덕적인 동물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얼마나 철저하게 도덕적 동물이 아닌지를 깨달아야 만 한다. 어떤 사람들은 신다윈주의 패러다임이 그들의 삶에서 고귀함을 없앨 것이라고 우려를 한다.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단지 우리 DNA에 대한 방어에 지나지 않는다면, 또 친구를 돕는 것이 다만 주어진 혜택에 대한 보답이라면, 학대를 받는 자에 대한 연민이 값싼 물건을 찾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도대체 자랑스럽게 여겨야 할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다윈이 모범을 보였던 행동이 한가지 답이 될 수 있다. 끝없이 올라오는 생각을 뛰어넘어 보답해 줄 것 같지 않는 사람을 돕되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것이다. 또 다른 방법은 감사하는 마음이다. 다윈은 고뇌에서 신의 자비를 찾으려고 했다. 그는 삶의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전형적인 마음의 틀은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죽기 며칠전 에 그가 "나는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던 것은 더 좋은 어떤 것이 올 것이라는 기대에서가 아니라 현세의 고통을 덜 수 있다는 기대에서였다. 신 다윈주의 패러다임을 인간의 마음에 적용할 때 마주치는 어려운 문제들이 있다. 그 중 몇가지를 소개해보면 다음과 같다. 1. 동성애자는 왜 생길까? 보통 자연 법칙이 다음 세대로 유전자를 전달하는 것이기에 동성애는 무의미한 행위이다. 간혹 일개미에 비유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동성애자들이 일개미처럼 형제나 조카를 돌보는데 많은 시간이나 에너지를 소비하지는 않는다. 우리의 가까운 친척인 보노보는 분명 배타적인 동성애가 아니기는 해도 양성애를 나타내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보노보는 친근함의 표시이자 긴장을 푸는 방법으로 성기 마찰을 이용한다. 이는 자연 선택이 외음부 마찰과 같은 만족의 형태를 만들기만 하면 이 형태를 다른 역활에도 적용시킬 수 있다. 변화된 방식이 유전적 진화 혹은 문화적 변화를 통해 일반적인 방법으로 통하게 되는 것이다. 그 한 예로 고대 그리스에는 소년들이 가끔 성적 자극으로 남성들을 만족시키는 문화적 관습이 성행했다. 소년들이 이 기술을 이용해 상대방과 친분을 유지하는 동안에는 신분이 상승되었다. 다윈주의 관점에서 남성들은 시간을 낭비한 것처럼 보이지만, 소년의 입장에사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는 데에는 도움이 된다. 동성애에 관한 분명한 진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어떤 사람은 동성애적 삶으로 강하게 몰아가는 유전적, 환경적 여건의 조합을 가지고 태어난다. 둘째로 동성애자들 간의 동성애와 타인의 복지 사이에 고유의 모순은 없다. 2. 왜 형제들은 서로 그토록 다른가? 만약 유전자가 중요하다면 왜 동일한 유전자를 그리도 많이 갖고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그토록 다른가? 동생은 자주 권위의 상징인 손위 형제들과 자원을 위해 경쟁해야 한다.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 장남이 부모의 편애를 받는다. 대개 부모와 장남이 동맹을 이루게 되고 손아래 형제는 이에 대항해 싸운다. 체제는 법을 정하고 손아래 형제는 이에 도전한다. 그렇기에 손위 형제를 둔 아이들은 과격한 사상을 택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보다 큰 문제는 비공유 환경이다. 비록 두 형제가 같은 부모와 학교 등 환경의 일부를 공유했지만 1학년 때 담임이나 친구 등 많은 부분을 공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비공유 환경이 형제를 서로 다르게 성장하게 만든다. 이처럼 인간 행위는 많은 다른 다윈주의 수수께끼를 내놓는다. 이러한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은 현대 과학의 큰 도전이다. 이럴때 해답을 찾는 과정은 (1) 행위와 이를 관장하는 정신 기관을 구분하고 (2) 자연 선택에 의해 실제로 만들어진 것은 행위가 아닌 정신 기관이라는 점을 제시하고, (3) 비록 자연 선택이 정신 기관을 설계했다는 전제하에서 이런 기관이 주어진 환경에서 적응적인 행위를 이끌었음에 틀림없지만 더 이상 그렇지 않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제시하고, (4) 인간의 정신은 놀라울 정도로 복잡해서 온갖 종류의 세부적 상황에 따라 넓은 배열의 행위가 나타나고, 그 행위의 배열이 현대 사회 환경의 전에 없던 다양한 상황에 의해 확장된다는 사실을 제시하는 주제들을 포함한다. 예를들어, 자살을 왜 하는지, 왜 자살이 늘고 있는지에 대해 분석해 보자. 자신에 대한 나쁜 감정이 간혹 도움이 되는 환경이 있다. 여기에 적응한 정신기관이 필요한 경우에만 가끔 이런 감정을 일으켜야 하는데 이 정신기관이 망가져서 자기비하나 혐오의 감정이 쉴 새 없이 올라온다. 이런 증상이 오래 지속이 되면 자살에 이르게 할 수 있다. 특히 현대에 와서 사회적 고립이 자살을 더 가속화 시킨다고 분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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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동물...세번째 이야기 나는 인간의 기본적인 일체감을 인식하는 것이 진화 심리학자가 되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특히 우리가 해도 되는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해 주는 '도덕감'과 그것들을 어겼을 때 우리를 질타하는 '양심'을 설명하고 싶었다. 이런 도덕 감성은 자연 선택의 결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 도덕에 진화론적 잣대를 적용하고자 할 때 봉착하는 가장 큰 문제점은 도덕 기준이 너무 다양하다는 것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적 고상함과 의젓함이 있는가 하면 도덕적으로 용인된 야만 행위도 있고, 그 사이의 도덕적 사안들이 수도 없이 많다. 다윈은 "카스트를 부정할 때 힌두교가 느끼는 경악"이나 "이슬람교 여성이 자신의 맨 얼굴을 드러냈을 때 느끼는 수치심"과 같이 "이해할 수 없는 도덕 법칙"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만일 도덕이 인간의 생물학적 요소에 토대를 두고 있다면 도덕 법칙은 어찌도 그처럼 다를 수 있단 말인가? 다윈은 이런 서로 다른 도덕 관습이 인간의 공통 본성에 뿌리를 박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우선 그는 대중의 여론에 모든 인간이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인정에 대한 애착과 불명예에 대한 두려움뿐 아니라 칭찬받거나 비난받을 때의 감정"은 본능에 바탕을 둔 것이며, 여기에 특수한 내용이 후천적으로 추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런 특수한 내용은 각자가 처해있는 당시의 상황에 맞춰서 공동체에 이익이 되도록 다양한 형식으로 만들어 졌다고 생각했다. 어떤 이유로든 공동체를 벗어나 동료들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홀로 살아가는 개체들은 많은 수가 토태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트리버서는 우정, 혐오, 도덕적 공격성, 감사, 동정, 신뢰, 의심, 신용, 범죄형, 위선은 이타성의 체계를 정하는 데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죄수의 딜레마라는 고전적인 게임을 보자. 따로따로 심문을 받은 두 공범은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한다. 만일 당신이 자백을 하고 상대방이 자백을 하지 않으면 당신은 무죄를 받고 상대방은 10년 형을 선고받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나 상대방 모두 자백을 하면 둘다 3년 형을 받게되고, 둘 다 자백하지 않으면 1년형을 받는 조건이다. 물론 서로 상의할 수 없다. 이에 여러분 대부분은 상대방을 속여 자신만 자백하고자 할것이다. 하지만 둘 다 서로를 속인다면 그 둘은 결국 감옥에서 3년을 지내게 된다. 반면에 호혜적으로 신의를 지켜 입을 다문다면 이 둘은 1년 형을 받게 된다. 이 상황은 서로 소통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협동이 이루어 질 수 있을까? 라는 문제와 같다. 그리고 이 문제는 은혜의 개념조차 알지 못하는 동물이 어떻게 호혜적인 이타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었는가하는 문제와도 평행선상에 있다. 죄수의 딜레마게임을 계속 하다보면, 각자는 상대방의 과거 행동을 참작한다. 과거를 통해 미래의 행동을 예측하는데 이는 호혜적인 이타주의와 같은 방식이다. 즉 반복되는 죄수의 딜레마에서 협동을 이끌어 낼 수 있었던 논리는 자연에서 호혜적 이타주의를 이끌어 낼 수 있었던 논리와 거의 유사하다. 둘 다 논제로섬(non-zero-sum)이론이다. 논제로섬 이론의 중요한 특징은 협동을 통해서나 교환을 통해서 양자가 모두 더 많은 것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정보의 교환은 근본적으로 논제로섬이다 물론 때로는 정보를 오직 혼자만 할고 있을 때에 가치가 있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흔하지 않다. 1970년대 말에 로버트 액설로드는 되풀이되는 죄수의 딜레마를 위한 전략을 구체화시킨 컴퓨터 프로그램을 제시하기 위해 게임 이론의 전문가들을 초청했다. 각각의 프로그램은 다른 프로그램을 만났을때 어떻게 협동할 것인지 규칙을 만들었다. 이 중 어떤 규칙을 따르는 프로그램이 가장 번성하는지를 경쟁했다. 이는 서로 관계를 맺는 개인들 몇 십 명으로 구성된 아주 작은 세계였다. 각 프로그램들은 이전의 만남에서 다른 프로그램과 협조를 했는지의 여부를 '기억'할 수 있었고, 그에 따라서 자신의 행동을 조정했다. 각 프로그램들이 다른 모든 프로그램들과 200번을 만나면 점수를 모두 더해 승자를 발표했다. 그러고 나서 분류를 마친 후 두 번째 세대가 경쟁하도록 했다. 그 결과 적자만 살아남았고 세대를 거져 진행되었다. 우승을 차지한 프로그램은 애너톨 래포포트는 팃포팻(TIT FOR TAT, 맞받아 서로 응수한다)이었다. 팃포탯은 가장 단순한 규칙에 따라 작동되었다. 일단 처음 만난 프로그램과는 협동을 한다. 그 뒤부터는 다른 프로그램들이 지난번에 했던 행동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이다. 즉 좋은 행위에는 좋은 행위로 대응하고 나쁜 행위에는 나쁜 행위로 대응했다. 이처럼 팃포탯은 협동할 의사를 보여야만 협동을 하기에 서로 배신을 하는 값비싼 연결 고리를 끊어버렸다. 이런 팃포팻은 뇌가 작았던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몹시 닳았다. 이후 동물들 중 붉은털원숭이, 돌고래 무리들도 서로 협동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흡혈박쥐 역시 흡혈에 성공한 박쥐가 그렇지 못한 박쥐에게 피를 토해 먹이는 것이 목격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얻어먹은 박쥐는 나중에 이 호의에 보답한다는 것도 관찰되었다. 반면에 우정의 탈을 쓰고 배신을 하거나 노골적으로 도둑질을 하는 현실에서 '착취'는 좀 더 강력히 억제되어야 했다. 이에 우리는 부당한 대우을 받았다는 본능적인 느낌에서 오는 '도덕적인 분노'가 일어나서 그 죄인은 당연히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직관적이고 분명한 생각이자 인간 정의감의 핵심인 '인과응보'라는 개념은 이런 의미로 보면 진화의 부산물이며 유전자의 단순한 전략이다. 그럼 의로운 분노는 왜 그렇게 격정적일까? 왜 유전자는 '명예'처럼 실체가 없는 무엇을 위해 죽음까지도 감수하도록 만들었을까? 트리버서의 다음과 같은 말이 대답이 될 수 있다. "사소한 불공평이 일생 동안 반복되면 그 대가가 너무 커질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습관적인 속임수에 대해서 강한 공격성을 보이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다. 1966년 진행된 실험을 보면, 비싼 기계를 망가뜨렸다고 생각하는 실험자들이 더 힘든 실험에 지원하는 경향을 보였다. 근데 이는 자신의 잘못이 밝혀졌을 때에만 그랬다. 이처럼 죄책감이라는 것이 누군가에게 들켰을 때만 생기는 감정이기에 죄책감을 성스러운 도덕심이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죄책감의 강도는 잘못의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잘못을 누가 알고 있는지 또는 곧 알려지게 될지의 여부에 달려 있었다. 일대일의 호혜적 이타주의는 그 자체가 집단주의자의 행동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당신을 속였다는 말을 퍼뜨리는 것만으로도 효과적인 보복을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손해를 볼까 두려워 그 사람에게서는 호혜를 거둬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불만'의 진화를 설명해 줄 수 있다. 부당하게 대우받았다는 느낌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공공연히 알리도록 다그치는 그런 불만 말이다. 사람들은 불만을 나누어 들어주며, 그 불만이 정당한 것인지, 그래서 그 사람들에 대한 태도를 바꿀 것인지를 결정하는데 많은 시간을 소비한다. 아마도 인간은 구경꾼들 사이에서 진화를 해 왔기 때문에 도덕적인 특질들이 나타나고 불만이 구체화되었을 것이다. 데일리와 월슨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도덕은 유난히 인식 능력이 복잡하고, 유난히 복잡한 사회에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동물들의 고안물 이다." 평판은 이 '도덕적'동물들이 게임을 하는 목적이다. 그러므로 위선은 타인의 죄를 들춰 내고자 하는 불만과 자신의 죄를 감추고자 하는 경향이라는 두 가지 자연적인 힘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도덕적 동물...두번째 이야기 사실 다윈주의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남성들의 대부분은 일부일처제가 더 유리한 반면, 대부분의 여성들은 그렇지가 못하다. 왜냐하면 일부다처제하에서는 신분 상승을 노리는 여성들이 많아질수록 남성은 자신의 지위에 비해 등급이 낮은 여성을 선택할 수 밖에 없고, 등급이 제일 낮은 남성은 아예 아내를 구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모든 여성이 남편을 공유할 자유를 누린다면 남편을 공유하지 않을 여성까지 포함해서 많은 여성이 선택의 폭을 더 넓힐 수 있다. 이처럼 제도화된 일부일처제는 종종 평등주의와 여성에게 커다란 승리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치않다. 이혼의 가장 큰 문제점은 아이들에게 미치는 악영향이다. 일반적으로 양부모는 친부모보다 아이들을 돌보는데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1976년 미국의 경우를 보면, 양부모와 함께 사는 아이는 친부모와 함께 사는 아이에 비해 학대받을 가능성이 100배가량 더 컸다. 현존하는 결혼 제도는 일부일처제이지만 결혼과 이혼이 자유롭기에 '연쇄적인 일부일처제'라 부를 수 있다. 근데 이 '연쇄적인 일부일처제'는 일부일처제와 일부다처제의 단점을 다 가지고 있는 가장 나쁜 제도이다. 왜냐하면 능력있는 남자는 반복적인 결혼과 이혼을 통해서 여러명의 가임기 여성을 차지하여 일반 남성의 선택의 폭을 좁히고, 아이들은 반복되는 이혼으로 어는 한쪽은 양부모와 같이 살게 만들어서 제대로 된 사랑을 받기 어렵게 한다. 사실 이런 분석들이 점점 현실과 괴리되고 있다고 생각하며 의아해 할지도 모른다. 점차 많은 여성들이 사회에서 남성보다 더 많은 소득을 얻기에 현실과 맞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다루는 것은 단순히 여성의 의식적인 계산이 아니라 그들 의식의 '깊숙이 잠재해 있는' 로맨틱한 매력이며, 이 같은 느낌은 지금과는 다른 환경에서 조성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떻게 도덕률이 발생할 수 있는지에 대해 다윈주의는 대략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설명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데 도움이 되는 도덕적 판단들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도덕률은 유전자가 자기 이익을 두고 경쟁하는 와중에서 비공식적으로 타협한 결과로 생겨난 것이고, 유전자는 도덕률을 자기의 목적에 부합하게끔 그 지렛대를 자기 쪽으로 돌려 놓여려고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성에 대한 이중적 잣대를 생각해보자. 남성들은 자신들은 성적으로 관대하지만 여성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즉 성적으로 문란한 여성들은 '마귀'로 여기게끔 만들지만, 남성의 바람기는 상대적으로 너그럽게 봐준다. 근데 이는 일부 남성들이 선호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남편이 간통으로 가정을 버리기 것보다 일부 허용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하는 아내들도 이런 이중 기준의 강화에 책임이 있다. 어린 땅다람쥐는 포식자를 발견하면 뒷다리로 서서 소란스러운 경고음을 낸다. 그러고는 이내 잡아 먹히고 만다. 이들이 하는 짓을 자연 선택의 관점에서 보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를 해밀턴의 관점에서 해석해보자. 죽지 않고 살아남는 유기적 존재는 오로지 유전자뿐이다. (물론 복제한 유전자는 소멸하기에, 엄밀히 말하면 유전정보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어떻게 개개의 동물이 생존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개개의 유전자들이 생존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럼 경고음을 내는 유전자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상황만 유리하다면 이 유전자는 거뜬히 살아남을 수 있다. 경고음을 내기에 주변에 있는 다른 땅다람쥐는 살 수 있다. 살아남은 땅다람쥐 중에는 절반의 유전자를 공유하는 형제와 자매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보초 다람쥐가 희생되더라도 형제를 살린다면, 혼자 도망가는 이기적 유전자보다는 이런 이타적 유전자가 대를 거듭하여 살아남을 가능성이 훨씬 더 커지게 될것이다. 해린턴의 수식은 이런 총체적인 적합성을 설명한다. 이 수식을 보면 희생적인 원인이 되는 유전자는 이타주의자가 입는 손실(c)이, 관련성의 정도(r)를 곱한 수혜자의 이득(b)보다 적다면, 즉 c가 br보다 작다면(c<br) 번성하게 됨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친형제 사이의 r은 1/2이고, 이복형제나 조카, 삼촌과의 r는 1/4, 사촌과는 1/8이다. 자매 개미는 혈통이 같음으로 유전자의 3/4를 공유하는데, r이 3/4보다 크다면 이타성 및 사회적 연대에 대한 진화론적 논증은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r이 1이면 이타심은 최대가 된다. 그럼 이타주의의 비용(c)과 수혜자가 얻는 이득(b)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형제가 있다면 형제 중 잘생기고 똑똑한 남성이 자식을 낳는 데 훨씬 더 유리할 것이다. 그리고 가족의 사회적 위치도 한 몫을 담당한다. 여성에 비해 특히 남성은 자식을 낳는데 가족의 경제적 & 사회적 지위가 더 중요하다. 그래서 딸보다는 아들에게 재산과 지위를 더 투자해야 할 것이다. 반면 가난한 집안의 어머니는 아들보다 딸에 더 투자를 한다. 왜냐면 일부다처제하에서 아들보다는 딸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을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이다. 실제 플로리다 큰쥐 암컷은 음식이 부족할 경우 수컷 새끼에게 젖을 물리지 않아 굶어죽게끔 방치하는 데 반해, 암컷 새끼에게는 마음대로 젖을 빨게 한다. 인류학자 로라 벳지그와 폴 터크가 미크로네시아 군도를 연구했을때도 지위가 높은 부모들은 주로 아들과 시간을 보내고 지위가 낮은 부모들은 주로 딸들과 시간을 보낸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런 연구들은 최상류층의 가족들은 딸보다는 아들에게 더 투자를 한다는 트리버스와 월러드의 연구 결과와 부합한다. 자식이 사춘기를 지나면 투자자나 보호자로서 부모의 역할이 줄어든다. 그리고 자식이 중년기를 넘어서면 부모에게 자식은 유전자 전달자 노릇을 거의 하지 못한다. 이 시기에 이르면 자식은 늙고 허약해져 부모에게 유전적으로 거의 쓸모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이때에 이르면 자식이 부모를 돌보겠지만 자식은 부모에게서 오는 짜증과 분개의 감정을 견뎌 내야한다. 그러나 자식은 예전에 부모가 자식에게 그렇게 했듯이 기쁨으로 부모의 필요를 채워 줄 수가 없다. 부모와 자식 간에 느끼는 애정과 의무가 변하면서 나타나는 이런 부조화는 인생에서 가장 근원적이면서도 씁쓸한 경험이다.
부적을 쓰는 종이는 황지가 가장 일반적이다. 이때 황지는 괴화나무를 우린 물로 염색하기 때문에 괴황지라고도 한다. 황색은 자색과 더불어 황제와 성인을 상징하는 최고급 색이다. 부적에 황지를 사용하는 것에는 '신성함의 강조'와 '신령한 기운과의 소통'이라는 두가지 이유가 존재한다. 즉 권위의 세움과 동시에 신적인 존재와의 연결이라는 이중성을 갖는 것이다. 자색의 대표 상징은 밤하늘 별들의 제왕으로 평가받는 북극성이다. 북극성의 도교식 이름이 자미대제이고, 그 궁성이 바로 자미원이다. 또 하늘의 주재자인 자미대제에 상응하는 이가 바로 지상의 황제이고, 황제와 같은 레벨이 성인이다. 자색 종이는 계피를 우린 물에 반복적으로 염색해서 만드는데, 이렇게 되면 종이가 탁한 수정과 같은 색을 띠게 된다. 계피는 계수나무의 껍질로 붉은색을 띠기 때문에 일찍부터 벽사의 의미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수인성 질병이 우려되는 마을 우물에는 계수나무를 심어 삿된 것이 범접하지 못하도록 했다. 또 달나라의 토끼가 계수나무아래에서 떡방아를 찧는 것도 부정을 물리치기 위한 조치다. 왜냐하면 토끼가 찧는다는 떡방아는 원래 불사약을 만드는 약절구였다. 즉 불사약인 금단(신선이 되는 약)의 제조에 삿된 것이 범접하지 못하도록 계수나무가 배치된 것이다. 정신에 이상이 있어 평상시와 다른 행동을 보이거나 경기를 일으켰을 때, 부적을 태운 재를 물에 타서 먹이기도 했다. 이는 부적 글씨의 재료인 주사를 먹임으로써 마음과 정신을 안정시킬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사는 종류가 많은데 개중에는 수은의 독성이 남는 경우도 존재한다. 따라서 부적을 불에 태워 마시는 행위는 절대로 해서는 안된다. 도장밥인 인주도 원래는 주사로 만든 것을 최고로 여겼다. 그러나 주사는 중국으로부터의 수입에 전량 의존해야만 했던 고가의 물건이었다. 이 때문에 인주는 철을 산화시켜 녹슨 쇠를 이용한 방법으로 대체되기도 했다. 흥미로운 것은 주사와 녹슨 철은 도자기에서 색을 내는 안료로도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주사로 도안이 되면 선명한 붉은색의 '진사 도자기'가 되고, 녹슨 철을 사용하면 검은색의 '철화 도자기'가 된다. 어린 시절 살아 있는 사람의 이름을 빨간색으로 써서는 안된다는 얘기를 들었을 것이다. 빨간색으로는 죽은 사람의 이름만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장밥인 '인주'는 붉은 색이 아닌가? 빨간색으로 이름을 쓰는 것이 죽음이나 불길한 것과 관련된다면, 이름이 새겨진 도장을 붉은 인주로 찍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저승의 명부가 빨간색으로 적혀있다는 속설때문이었을까? 사실 이는 붉은색의 강렬함을 저승과 연결시킨 고대판 뇌피셜에 불과할 뿐이다. 붉은색이 벽사의 의미를 가진다는 것은 동지팥죽이나 고사 때 팥시루떡을 올리는 행위, 또 불교의 점안의식이나 구병시식에서 팥을 뿌리는 행위 이외에도 전통 건축의 단청에서 기둥의 기본색을 팥죽색으로 칠하는 행위는 통해서 미루어봄 직하다. 동아시아의 전통문화에서 저승은 이승의 거울 속 세상과 같은 반대의 세계다. 그 때문에 평소에는 왼쪽이 오른쪽보다 높지만, 장례식장에서는 절을 할 때, 평소와는 반대로 오른손을 위로 올리게 된다. 같은 이유로 상주와 조문객이 흰색 상복을 입기에 저승사자는 올 블랙 패션으로 그린다. [주역]에서는 점을 칠 때, 원래는 '시초蓍草'라는 풀을 사용하게 되어 있다. 시초는 성인의 무덤에서 자란 신령한 풀로 구하기 어렵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대나무를 잘개 쪼개 산가지, 즉 서죽을 사용한다. 이러한 산가지를 세는 설죽(설시)을 통해서 점을 치게 되는데, 이렇게 산가지를 셈하는 것을 산수算數라고 한다. 요즘은 수학으로 통일되어 있지만, 예전의 초등학교에서는 산수였고 중학교부터 수학이었다. 또 산가지를 담아놓는 통을 산통算筒이라고 하며, 우리가 사용하는 '산통이 깨지다'는 말이 여기에서 유래한다. 침으로 병을 치료하는 기원은 놀랍게도 뾰족한 바늘을 몸에 찔러서 몸 안의 귀신과 삿된 기운을 쫒아내는 방법에 있다. 이 연장선상에서 침엽수 가지를 이용해 삿된 것이 범접하지 못하도록 한다. 최근까지도 시골에는 문 쪽에 엄나무를 심는 문화가 남아있다. 이런 문화는 일본에도 존재하는데, 문 앞에 소나무 가지와 대나무를 죽창처럼 잘라서 장식하는 카도마츠가 대표적이다. 이는 인도가 침엽수가 없어서 버드나무 가지를 사용하는 것이 불교를 통해 전래된 형태다. 이는 양류관음이 버드나무 가지로 감로수를 뿌려 모든 질병을 소멸한다는 것이나, 불화<수월관음도>에 버드나무 가지가 등장하는 것 등을 통해서 확인해볼 수 있다. 향을 피우는 것은 공간을 정화하기 위함이다. 향은 이집트에서 신에게 올리는 성물로 발전하여 인도로 전래되었고, 이후 불교를 타고 동아시아로 전파되었다. 이집트에서 향이 신에게 올리는 첫 번째 성물이 된 이유는 모든 것을 갖추어 부족함이 없는 신도 향을 올리면 기뻐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목 문화에서는 번제를 올릴 때 제물이 연기를 타고 하늘의 신에게 전달된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향을 피우는 것은 '정화'와 '기원의 성취'라는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부적의 가장 원시적인 형태는 그림이다. 이 중 오늘날에도 사용되는 가장 대표적인 부적으로 <삼두일족응부>를 들 수 있다. <삼두일족응부>는 머리가 셋이고 다리가 하나인 매부적으로, 삼재를 소멸하는 '삼재부'에 해당한다. 삼재(화재, 수재, 풍재)란, 불교에서 말하는 인간에게 존재하는 12년 주기 중 운이 쇠하는 3년을 말한다. 이 3년을 다시금 세분화해서, '들삼재(들어오는 삼재)->눌삼재(눌러앉은 삼재)->날삼재(나가는 삼재)'라고 한다. 원래 삼재는 우주의 순화론에서 우주가 사라질 때 수-화-풍에 의한 파괴 행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를 '대삼재'라고 한다. 이 삼재가 12년 주기로 3년씩 드는 것이다. 즉 자(쥐)-축(소)-인(범)-묘(토끼)-진(용)-사(뱀)-오(말)-미(양)-신(원숭이)-유(닭)-술(개)-해(돼지)의 12간지에 따른 12년을, '자-축-인(봄)->묘-진-사(여름)->오-미-신(가을)->유-술-해(겨울)'로 봐서 겨울에 해당하는 3년을 삼재로 규정하는 것이다. 즉 삼재는 인간의 운이 쇠하는 때를 의미한다. 흥미로운 점은 범-말-개, 돼지-토끼-양, 원숭이-쥐-용, 뱀-닭-소가 각각 셋씩 네 팀을 이루어 삼재에 든다는 점이다. 이렇게 같은 팀이 구성되는 것은 기질이 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같은 팀을 소위 삼합 즉 잘 합치하는 셋이라고 한다. 또 이 삼합의 띠를 나이로 환산하면, 4살씩 차이가 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생긴 말이 "4살 차이는 궁합도 안본다."는 것이다. 반면 충돌 구조도 존재하는데 원숭이-쥐-용은 범-말-개와 상충이고, 뱀-닭-소는 돼지-토끼-양과 상충이다. 삼재를 극복하는 것이 '삼재부'인데, 이 중 <삼두일족응부>는 매의 세 머리를 통해서 삼재의 각각에 대응하도록 하고 있다. 문자 부적으로 '복福'자를 거꾸로 붙여서 집 안으로 복이 들어오는 것과 같은 모습을 상징하는 것은 중국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우리 전통에서는 복을 발음이 같은 박쥐(박쥐 복蝠)로 이해해 날개를 펼친 박쥐무늬를 사용하고는 했다. 날아다니는 박쥐는 복이 날아 온다는 상징으로, 이를 편복문이라고도 한다.
다윈의 자연 선택설이 담고 있는 내용은 단순한다. 만약 한 종에 속하는 개채들이 보유한 유전적 속성에 차이가 있다면, 그리고 어떤 속성이 다른것보다 생존과 번식에 있어 더 효율적이라면, 그와 같은 속성은 집단 내에서 더 널리 퍼지게 된다는 것이다. 더 간단하게 표현하면 번식시키고, 변화시키고, 가장 강한 자(환경에 가장 잘 적응한 자)는 살아 남게 하고 가장 약한 자는 죽게 한다...는 것이다. 진화심리학자는 그레이(Gray)의 [해부학]에 그려진 해부도 하나하나가 전 세계인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듯이 마음의 해부도 같지 않을까 해서 출발하게 되었다. 예들 들어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자식을 사랑하게 하는 정신 기관은 인류에게 전형적이라는 주장이다. 마음의 자연 선택설에서 유의해야 할 사항이 있다. 우선 어떤 것을 자연 선택의 산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을 바꿀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환경을 적절히 변화시킬 수 있다면, 인간 본성이 발현된 것일지라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그와 같은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요구되는 환경의 변화가 감내할 수 없을 정도로 극단적인 경우도 있다. 둘째, 어떤 것이 '자연스럽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좋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지 않다. 자연 선택이 '가치 있는'것으로 여기는 것이라고 해도 우리가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단지 그렇게 하고자 한다면, 그 과정에서 큰 어려움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유전자의 복제를 극대화하도록 디자인 되지 않았다. 오히려 '진화한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하도록 진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같은 환경은 진화적 적응 환경(Environment of Evolutionary Adaptation)이라는 말로 일컬어진다. 다르게 표현하면 우리의 마음은 '조상의 환경'속에서 가장 잘 적응하도록 진화되었다. 여성은 일생 동안 남성들보다 훨씬 적은 수의 자손을 갖기에 일반적으로 남성보다 뛰어나다. 이 점은 우리의 조상이 인간이 되기 이전부터, 그리고 그들이 포유류가 되기 이전부터 변함이 없었다. 다윈은 암컷을 귀하게 만드는 것은 그들의 조신함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암컷이 본래 귀중하다는 사실, 즉 생식에 있어서 암컷이 담당하는 생물학적 기능 때문에, 그리고 그에 따른 암컷의 완만한 생식 속도 때문에 귀중하다는 사실은 간과했다. 반면 자연 선택은 이 점을 인식했으며 암컷의 수줍음과 그와 같은 암묵적 이해의 결과이다. 윌리엄스는 암수의 유전적 이해 문제를 번식에 필요한 '희생'으로 으로 전환시켜 다루었다. 포유류의 수컷이 번식하는 데 있어 요구되는 희생 정도는 제로에 가깝다. 수컷의 핵심적인 기능은 교미와 함께 끝난다고 볼 수 있다. 이에 수컷은 가급적이면 많은 암컷과 짝짓기 위해 공격적이고 즉각적인 능동성을 보이는 것이 유리하다. 반면 암컷의 입장에서 보면 교미는 기능적 & 육체적인 면 모두에게 지속적인 부담을 주며 그로 인한 스트레스와 위험을 끌어안는 작업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강건한 아빠는 강건한 자식을 낳기 때문에 암컷으로서는 가장 강건한 수컷을 선택하는 것이 유리하다. 몇년이 지난 후 트리버스는 윌리엄스의 '희생'개념을 '투자'라는 개념으로 대체했다. 트리버스는 '부양 투자'를 '다른 자식에 투자하는 대신에 특정한 자식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부모가 하는 투자'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암컷이 수컷에 비해 부양 투자를 많이 하기때문에, 교미할 상대를 고르는데 있어서 더 신중하다는 부양투자이론을 내세웠다. 세상에는 별종이 많기에 어떤 종에서는 자식에 대한 수컷의 투자가 암컷의 그것과 대등하거나 오히려 능가하는 경우가 있다. 도요새는 암컷 대신 수컷이 알을 품기에 암컷 도요새는 자유로이 먹을 것을 찾아 나설 수 있다. 그래서 도요새는 암컷이 더 크고 화려한 색채를 띤다. 이런 현상은 암컷이 수컷을 놓고 경쟁하는 상태, 즉 일반적인 것과 반대방향으로 일어난다. 한 생물학자는 도요새 암컷들이 수컷이 알을 품고 있는 동안 마치 수컷이나 되는 양 "저희들끼리 싸우고 과시했다."라고 보고했다. 이런 양상은 다른 조류와 파나마산 독화살개구리, 모르몬 귀뚜라미에서도 보였다. 하지만 수컷과 암컷의 역활이 바뀌었을 뿐, 부양 투자를 많이 하는 성이 교미할 파트너를 선택함에 있어 더 신중하다는 부양투자이론에는 부합된다. 인간 수컷은 진화 과정에서 언제부터인가 부양 투자를 많이하게 되었다. 동물학자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은 이제 부양 투자가 큰 종이 되었다. 그렇다고 남성의 부양 투자가 여성의 그것에 견줄 수 있을 만큼 커진 것은 아니다. 높은 부양 투자는 미묘한 방식으로 남성과 여성의 목적에 꼭 들어맞는다. 그러나 높은 부양 투자는 동시에 구애 기간과 혼인 기간 동안 남자와 여자가 추구하는 목적이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엇갈리게 하는 결과는 낳았다. 큰 부양 투자는 오히려 남녀 관계를 상호 착취적으로 만들었다. 남녀는 적어도 때때로 상대방을 비참하게 만들도록 디자인된 것이다. 남성은 진귀한 여성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도록, 여성은 이상적인 남성의 투자를 확보하도록 진화하게 되었다. 남성의 입장에서 본능적인 공포는 투자를 잘못하는 것이고, 여성의 입장에서는 배우자가 투자를 회수하는 것이다. 즉 남성에게 가장 큰 진화적 위험은 배우자의 간통이고 여성의 위험은 버림받는 것이기에 남성과 여성의 질투는 서로 다르다. 실제로 아내들은 남편의 부정 행위가 전적으로 성적인 경우, 이를 충격적으로 받아들이고 그에 대해 엄하게 대응하지만, 길게 보면 자신을 더 아름답게 보이도록 자기계발의 형태로 나타난다. 하지만 남성의 경우 배우자의 부정 행위에 대해서 분노하고, 그 분노가 사그러진 후에도 종종 아내와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지 못한다. 남녀에게 자신들의 배우자가 여러 가지 속상하는 행위를 저지르고 있다고 상상하는 실험을 했다. 남자들은 배우자의 성적 부정 행위에 대해서만 심박동수가 상승하고 땀이 흐르고 인상을 구겼지만, 여자들은 배우자가 다른 여성에 대해 애정을 가지기 시작하는 것만으로도 큰 생리학적 고통을 느끼는 것으로 밝혀졌다. 생리학적으로 인간에 대해 좀 더 살펴보자. 수컷의 평균 체중에서 고환이 차지하는 무게를 보자. 체중에 비해 고환의 무게가 많이 나가는 침팬지나 여타의 종들은 암컷이 몹시도 문란해 여러 수컷과 짝짓기를 한다. 반면 체중에 비해 고환의 무게가 적게 나가는 종들은 일부일처제(긴팔 원숭이)나 수컷 한 마리가 여러 가족들을 독점하는 일부다처제(고릴라)의 관계를 맺는다. 일반적으로 암컷들이 수컷들 여럿과 짝짓기를 한다면, 수컷의 유전자는 자신을 전달하기 위해 정자를 더 많이 생산해야만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고환비율은 침팬치보다는 작고 고릴라보다는 큰 편이다. 이 사실은 여성들이 침팬지 암컷들만큼은 아니더라도 천성적으로 다소 모험적임을 암시한다. 사랑의 본래 목적은 여성을 자식에 유익한 남자에게로 이끄는 것이다. 생물학자인 알렉산더는 일부일처제가 생존을 겨우 유지할 만한 수준의 문화권에서 발견된 경우에는, 그것을 "경제적으로 강요된"이라고, 풍요롭고 계층화된 사회에서 나타나는 경우에는 "사회적으로 강요된"이라고 불렀다. 왜 사회가 그것을 강요했을까? 알렉산더의 이러한 생각은 지참금 제도가, 즉 결혼할 때 신부가 신랑에게 자산을 전달하는 현상이 사회적으로 강요된 일부일처제를 시행하는 사회에서 발견됨을 밝혀 냈다. 계층화된 일부일처제 사회의 37%에 지참금 제도가 있는 반면, 계층화되지 않는 일부일처제 사회에는 겨우 2%만이 그런 제도가 있다.(일부다처제 사회에 있어서 이 수치는 1%내외이다). 남자가 저마다 얻을 수 있는 아내를 한 명으로 제한함으로써 일부일처제는 부유한 남자를 인위적으로 고귀한 상품으로 만들었다. 지참금은 이들을 차지하는 대가로 지불되는 것이다. 만약 일부다처제가 합법화된다면, 부유한 남자는 지참금을 많이 가져오도록 하기보다는 다수의 아내를 거느리려 할 것이다.
원시 문화는 빛과 어둠처럼 단순하게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대비시킨다. 때문에 질병은 삿된 기운이나 귀신 때문일 수 있으며, 저주가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무당은 병의 치료자인 동시에 악령의 퇴마사이고, 운명을 열어주는 주술사이기도 한 것이다. 동아시아 전통에 따르면 귀신은 죽은 후에도 산 사람과 함께 존재하게 된다. 이 때문에 제사를 통해, 주기적으로 제삿밥이라는 에너지를 공급해주어야만 한다. 과거에는 3년상이라 3년 동안 매일 세끼를 올려야 했지만, 지금은 3일장이라 3일 동안만 올리면 된다. 3년상이 지나고 나면, 귀신도 점차 죽음의 세계에 적응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면 가끔씩만 먹으면 되는데, 이것이 제사와 차례다. 다만 제사가 자가용과 같은 개별성을 가진다면, 차례는 대중교통과 같은 전체 조상에 대한 합동의례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또 차례는 '차'라는 명칭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불교의 영향을 받은 낮의 의례고, 제사는 밤(자시, 23~1시)의 의례라는 점에서도 차이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제사는 영원히 지내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의 제사는 4대 봉사(제사를 받든다), 즉 '부모->조부모->증조부모->고조부모'까지만 모신다. 귀신은 제사를 통해서 에너지를 공급받지만, 이 정도의 에너지 공급으로는 오래 존속하지 못한 채(대개 80년) 새벽안개가 동이 트면 사라지듯 점차 옅어지면서 흩어지게 된다. 이 기간을 후손의 기억이 남는 4대 정도로 추정한다. 이런 동아시아의 귀신론은 모든 것을 기운의 응축과 흩어짐, 즉 기의 이합집산으로 이해하는 기철학을 따른다. 그러나 무당의 중심 신령인 몸주는 최영 장군이나 단종처럼 오래된 영혼인 경우도 있다. 여기에는 '강력한 영혼은 세월이 지나도 흩어지지 않고 존속한다.'는 판단이 깔려있다. 하지만 무속인의 주장과 달리, 설령 이들이 빙의되었다해도 당시의 중세 국어를 구사하지는 못한다. 귀신에게 부적은 1차적으로는 표지판의 기능을 한다. 부적은 주사라는 붉고 강렬한 안료로 제작된다. 물론 때에 따라서는 먹을 묻힌 붓으로 쓰거나 목판 인쇄를 해서 검은 색을 띠기도 한다. 조선 후기에는 귀신의 문제를 처리할 때, 부적과 함께 귀신을 물리치는 경문을 독송하기도 했다. 이 중 가장 강력한 것이 [옥추(보)경]이며, 가장 폭 넓은 것은 [천지팔양신주경]이다. [옥추경]은 강렬한 빛으로 어둠을 물리치듯이 귀신에 대한 압살의 의미가 강하다면, [천지팔양신주경]은 부처님이라는 보호막을 통해서 모든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고 본다. 부적 하면 으례 민초나 하층민과 같은 사람들만 사용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조선에서 부적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하기야 오늘날에도 '마스코트'나 '징크스'등이 횡행하고 있으니, 어떤 의미에서 부적과 주술의 문화는 불완전한 인간에서는 필연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정초에 붙이는 세화로 가장 유명한 것은 까치와 호랑이를 그린 <작호도>일것이다. 호랑이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포식자이며, 고양이과의 강렬한 눈빛은 귀신을 볼수있고 귀신을 이긴다는 설정을 가능하게 했다. 호랑이가 사람을 잡아먹으면, 그 사람의 영혼이 속박되어 창귀가 된다고 하는 속설도 전해진다. 창귀는 호랑이에게 지배받는 앞잡이 귀신으로, 사람을 홀려서 호랑이에게 먹이로 인도하는 역활을 한다. 그런데 문제는 호랑이가 매복과 근접전에는 능하지만, 상대적으로 멀리 보는 측면은 부족하기에 이를 보완하기 위해 까치가 등장한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에 호랑이를 나타내는 글자인 '호(虎)'와 '용(㡣)'글자를 써서 양쪽 대문에 붙이기도 했다. 입춘에 붙이는 입춘첩은 덕담에 가까운 문자부적으로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등이 있다. 입춘은 봄이 시작되는 첫째 절기의 양력 명절로 보통은 2월 4일경이다. 입춘과 동지(12월 22일경)는 양력이기 때문에 , 태양력을 사용하는 요즘에는 날짜가 고정되어 있다. 현재 우리는 양력 설인 1월1일을 기준으로 나이를 1살 더 먹지만, 띠의 변화는 입춘을 기준으로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중국의 전설적인 왕조인 하나라는 입춘을 기점으로 한 해를 시작했는데 이를 따르기 때문이다. 다른 예로 주나라는 동지를 기점으로 했기에 오늘날까지 동지를 작은 설이라고 하고, 동지 때 팥죽을 먹으면 1살 더 먹는다고 하는 문화가 남아있다. 입춘대길은 '봅이 확립되니 크게 길하다.'는 뜻으로 봄이 도래하였으니 이제부터 농사를 준비하라는 상징적인 의미다. 건양다경은 '봄의 양기가 굳건해졌으니, 앞으로는 경사가 진진하다.'는 뜻으로 농상의 풍요와 복됨을 기원하는 길상의 메세지다. 입춘첩은 입춘 시에 맞춰서 대문의 양쪽에 붙인다. 즉 문을 통해서 모든 길함을 받는 동시에 삿됨을 물리치겠다는 생각이다. 또 입춘첩은 대문에 붙이지 않고 사선으로 비스듬하게 배치하는데, 이는 햇빛을 상징하는 빗살을 통해 벽사의 의미를 강화하기 위해서다. 빗살문은 빗살무늬토기에서부터 빗살 창호나 꽃살 등에 이르기까지 두루 쓰이는, 실로 오랜 연원의 벽사 상징이다. 1년 중 양기가 가장 강력할 때인 5월5일(천중절, 중오절)인 단오를 기리는 단오첩도 있다. 단오(端午)란, 오午 즉 남쪽의 양기가 중첩되어 확립되었다는 의미다. 입춘첩이 대문에 붙이는 것이라면, 집 안쪽의 기둥에 경계 문구를 종이에 써 붙이거나 나무판에 조각해서 걸어두는 것을 '주련'이라고 한다. 주련은 귀감이 될 만한 글을 통해 스스로를 바로잡기 위한 유교문화로, 대구가 되는 글이 많으므로 '대련'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왕궁과 사찰 외에 단청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주련 문화는 사대부 양반가에서 기둥에 글을 써 붙이면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나중에는 단청 기둥 위에 주련을 붙이기도 했는데 이는 '양복입고 갓을 쓴 꼴'이다.
부적이란, '부절'과 '문서'를 결합한 신비한 힘이 깃든 그림과 글씨를 가리키는 우리식 표현이다. 부절에서 '부'는 믿음의 징표라는 뜻이며, '절'은 나뉘어 있다는 의미다. 즉 부절이란, '분리된 징표'정도의 뜻이라고 하겠다. 부절은 본래 고대에서는 사신이나 전령이 가지는 징표로, 황제의 칙렬과 관련된 내용이나 지위를 나타내는 표식이었다. 후대에 와서는 하나를 깨트려 나눠 가지는 것이 번거롭고, 또 다른 방식의 보완 기능이 발전한 덕분에 부절은 패나 문서로 대체된다. 암행어사의 마패나 직인이 찍힌 문건 등을 생각해보면 된다. 부적은 흔히 종이에 붉은 주사로 그린 그림이나 글씨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때론 돌에 음각하거나 나무판에 양각하는 등 이외로 다양하다. 우리의 태극기는 [주역]을 기반으로 한다. [주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태극과 음양, 그리고 팔괘다. 팔괘는 건-태-이-진-손-감-간-곤으로, 이 중 태극기에 표현되어 있는 건(하늘), 곤(땅), 감(물), 리(불)가 대표적이다. [주역]에서 태극기와 같은 구조가 갖춰지는 것에는 복희씨와 하나라의 시조인 우임금의 전설이 있다. 복희 시절에 황허에서 용 같은 말인 용마가 나타났는데, 그 용마의 등에 부호가 있었다고 한다. 이것을 황허에서 나타난 그림이라고 해서 <하도>라고 하며, 이것이 태극과 팔쾌의 기원이 되었다. 이후 우임금이 낙양 인근의 낙수에서 관계수로를 정비하고 있었는데, 이때 신령한 거북인 신귀가 나타난다. 그런데 이 거북의 등에도 부호가 있었다. 이것을 낙수에서 나왔다고 해서 <낙서>라고 한다. 이러한 <하도>와 <낙서>를 풀어서 체계화한 것이 [주역]이며, 이러한 [주역]을 공식처럼 기호로 정리한 것이 바로 태극기다. 현존하는 유물로 판단해보면, 한국 부적의 기원은 윷판 암각화와 곡옥에서 찾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윷판 하면 흔히 윷놀이를 생각하지만, 윷판은 선사시대의 암각화부터 존재해온 연원이 아주 깊은 도상이다. 윷판은 중앙의 북극성을 중심으로 북두칠성이 동서남북으로 배열된 고대의 천문도다. 곡옥은 신라나 가야의 금관 장식 등에 널리 활용되어온 가장 오래된 디자인 중 하나다. 쉼표가 확대된 모양의 곡옥은 '우주의 소용돌이'나 '태아의 모습' 그리고 '큰 동물의 송곳니'등 다양한 관점으로 이해되고 있다. 또 곡옥을 태극이나 삼태극과 연관지어 생각해보는 것도 일정 부분 가능하다. 어떻게 보든지 간에 곡옥은 군장의 권위를 상징하며, 신성한 의미를 내포한다는 점에서 길상과 벽사를 추구하는 부적과 그 의미가 맞닿아 있다. 부적은 내용 면에서 크게 선을 증장하고(길상) 악을 소멸하는(벽사) 두 가지 범주라고 이해하면 된다. 물론 이외에도 신선이 되는 부적이나 첩을 떼는 것 등 기타로 분류되는 내용도 있다. 우리 문화에서 역신을 막는 부적 백신인 <처용도>를 붙이는 곳은 다름아닌 문이다. 이는 문을 통해서 귀신이나 삿된 기운이 들고 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귀신이나 삿된 기운이 굳이 문으로 드나들까 싶지만, 예전 사람들은 이렇게 인식했고 실제로 문을 잠그면 이들이 들어올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달마도>는 선불교의 시조로, 당나라 말에는 중국불교의 주류가 되는 선불교 안에서 신격화되는 인물이다. 이로 인해 선수행의 깨달음과 관련해서 <달마도>가 유행하게 된다. 우락부락한 달마의 모습은 민중적으로는 모든 삿됨을 물리치는 벽사의 그림으로 인식되었다. 이런 벽사 기능은 오늘날 <달마도>가 수맥 차단에 효험이 있다는 등 신비적인 그림으로 이해되는 배경이 된다. 실제로 달마 인형(다루마)은 소망하는 바를 반드시 성취한다는 기원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칠성부>는 도교의 북두칠성 신앙을 바탕으로 불교적인 요소가 가미된, 이른바 모든 소망을 이루어주는 부적이다. 전체적으로는 밖은 둥근 원이고 안은 네모인 방형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동아시아 전통의 우주론인 천원지방설에 근거한 것이다. 둥근 원 안에 네모가 있는 엽전의 형태와 유사하다고 이해하면 되겠다. 도교에서 북두칠성은 죽음을 주관하는 사명신(죽음의 신)으로 이해한다. 이 때문에 음력7월7일인 칠석날에 실타래를 올려놓고 북두칠성에 장수를 기원하는 의식을 행한다. 또 북두칠성의 각각은 인간의 길흉화복을 관장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북두칠성 각각에 따른 일곱장의 <칠성부>도 존재한다. 칠성은 죽음의 신이기에 동아시아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북두칠성이 새겨진 칠성관에 시체를 누이고 일곱 번 묶는다. 이는 죽은 사람을 북두칠성에게 보내고, 사후에서의 길함을 염원하는 행위다. <칠성부>맨 안쪽의 방형에는 위아래로 밀교에서 가장 강력한 진언으로 평가되는 <육자대명왕진언>인 '옴마니밧메홈(오! 연꽃 속의 지극한 보주여!)'이 있다. 그리고 좌우에는 수륜-화륜-풍륜-토륜을 표기해 불교 우주론에서 말하는 이 세계의 적층 구조를 나타내준다. 이렇듯 <칠성부>는 사명신이자 인간의 삶을 주관하는 북두칠성을 중심으로 북극성의 상징 및 중요 별자리를 통한 수호, 그리고 불교적인 세계관 속의 '옴마니밧메훔'이라는 벽사와 깨달음이 담겨 있으며, 끝으로 자미대제의 권위를 빌려 장검으로 모든 악신을 물리치는 구조임을 알 수 있다. 즉 도교와 불교가 결합된 전방위적인 수호와 길상의 부적이라고 하겠다.
<마지막 강의>...마지막 아홉번째 이야기 이 강의를 시작할 때 나는 사실적 불교(윤회나 신이 없는 불교)가 영적, 종교적 세계관으로서 자격이 있는가 하는 문제에 관심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윌리엄 제임스의 말을 인용했는데요. 제임스는 종교의 살아있는 본질은 '눈에 보이지 않는 질서가 존재한다는 믿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최고 선은 우리 자신을 그 질서에 조화롭게 맞춰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잠정적으로 불교가 이런 것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불교는 세상에 관한 진실이 대개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질서를 발견해 우리 자신을 그 진실에 조화롭게 일치시킨다면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의 최고 선을 실현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 우리는 불교에서 말하는 진실이 무엇인지에 관하여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일단 불교에서 말하는 진실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건 확실해 보입니다. 깨달음을 얻어야만 분명히 드러나는 진실이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 이 진실을 보지 못했으니까요. 그런데 그것은 질서일까요? 이 진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질서로서 정말 자격이 있을까요? 이것은 중요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종교가 '질서'가 존재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신이 부여한 계획'이 존재한다는 겁니다. 그들은 이 우주가 바로 신의 계획을 구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종교를 따르는 사람들은 신이 부여한 이 계획에서 자신들의 삶의 의미를 찾습니다. 이 계획 속에서 그들의 위치가 그들의 삶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도덕적 방향을 부여하며 이 종교관에 매우 강하게 헌신하도록 영감을 줍니다. 그런데 불교는 심지어 종교적 불교라도 전지전능한 창조신이 존재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목적과 계획을 부여한 창조신 말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적 불교는 신이 부여한 계획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습니다. 그럼 "이런 사실적 불교가 눈에 보이 않는 질서의 존재를 주장할 수 있는가?"하는 질문입니다.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질서, 즉 특정한 힘을 갖는 질서, 사람들이 헌신하도록 영감을 주는 질서가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렇게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적 불교가 주장하는 질서를 살펴보면 그것은 그러한 영감과 힘을 일정 부분 갖고 있습니다. 우선,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질서는 말 그대로 '질서정연'합니다. 우리는 보았습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깨달음이 커다란 연속성을 지닌 세계관을 준다는 것을요. 깨닫게 되면 세상의 사물들 사이에, 그리고 당신과 세상 사이에도 더 큰 연속성이 생깁니다. 지금까지 파편화 되어 있던 것들이 이제 커다란 일체성을 지녔다는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눈에 보이지 않는 질서'입니다. 이것을 '눈에 보이지 않는 질서'라고 말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앞 강의의 '깨달음 체크리스트'에 두개의 란이 있습니다. '세계에 관한 진실'과 '도덕적 진실'이었습니다. 이것의 핵심 요지는 깨달음의 길을 가면 두 가지 진실 모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진실 사이에 연결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불교의 주장은 당신이 세계를 명료하게 보고 그에 맞게 응대한다면 당신 자신을 도덕적 진실에 일치시키게 된다는 겁니다. 이렇게 세상에 관한 진실과 도덕적 진실이 일치하는 것은 그 자체로 매우 깊은 차원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질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반드시 이런 식으로 만들어졌을 필요는 없었을 것 같습니다. 즉, 세계에 관한 진실을 안다고 해서 도덕적 진실에 조금도 가까이 가지 않는 세상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이 반드시 세계에 관한 진실과 도덕적 진실이 일치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질 필요는 없니까요. 하지만 불교에 따르면 세계에 관한 진실과 도덕적 진실 사이에는 연결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당신의 행복, 즉 괴로움의 종식과도 연결됩니다. 이것은 일석삼조의 방식입니다. 이것이 우주에 심어져 있다는 것이 진실이라면 놀라운 일입니다. 그래서 불교가 비록 신이 부여한 계획이라는 의미에서 질서를 말하지는 않아도 또 신의 의지로서 경외감과 헌신이라는 의미에서 질서를 말하지는 않아도 그럼에도 불교에는 나름의 방식으로 경외감을 일으키는 그런 종류의 질서가 존재합니다. 윌리엄 제임스는 종교에 관해 한 가지를 더 말했습니다. 제임스는 "종교 일반에는 무엇보다 우리의 본래 모습 그대로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어떤 불편함이 수반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더 높은 힘과 적절히 연걸함으로써 그 잘못됨으로부터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도 있습니다. 불교는 분명히 제임스가 말한 첫 번째 문제를 다룹니다. 즉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둑카라는 괴로움, 불만족이 있다는 거죠. 그렇다면 두 번째는 어떨까요? 더 큰 힘과 연결될 때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이요.물론 사실적 불교에서 이것은 신과 접촉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 진지한 명상가들은 자신들이 때로 더 높은 형식의 자각과 접촉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확실히 흥미로운 시나리오입니다. 왜냐하면 자연선택이 애초에 의식을 창조할 때 의식에 왜곡을 일으켰지만 그럼에도 결국에는 자기를 성찰하는 존재가 생겨났다는 점입니다. 바로 우리 인간입니다. 인간은 문제를 해결하고 자신에게 심어진 왜곡을 제거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의식을 해방 시킵니다. 창조자가 애초에 심어놓은 왜곡에서 자신의 의식을 해방시키죠. 물론 우리들 대부분은 순수한 형식의 알아차림(자각)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깨달음을 얻어야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진지한 명상가 중에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순수한 알아차림과 접촉한 이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명상을 하는 중에 사물에 관한 실제적 진실과 실제로 접촉한다고 느낍니다. 이들의 지각은 일반적인 왜곡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나는 이런 체험, 즉 사물에 관한 실제적 진실과 접촉하는 이런 순간이 수행에 전념하도록 영감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그것이 가진 힘에 있어서 더 높은 힘과 연결하는 방식으로 다른 종교에서 영감을 주는 헌신과 비견할 만합니다. 그렇다면 저는 종교에 대한 자연주의적 대안으로서 이 사실적 불교가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당신이 지금 대안을 찾고 있지 않더라도 즉 당신이 이미 전통적 의미의 종교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저는 사실적 불교가 그것을 보완하는 것으로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명상 수행과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명상 수행의 기본 철학이 다양한 종교 전통과 양립할 수 있다고 봅니다. 심지어 나는 명상 수행과 주요 종교 전통 사이에 시너지 효과가 있다고 말하겠습니다. 나는 주요 종교 전통 모두가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세계관과 공명하는 주제와 계율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기독교 전통에서 자랐는데요. 예컨대 예수는 이런 말을 했죠. "네 눈의 들보는 못보면서 다른 사람 눈의 가시만 보이느냐." 다시 말해 여기서 요점은 다른 사람들이 가진 사소한 지각상의 왜곡에 왜 그렇게 집착하느냐는 겁니다. 정작 당신 자신에 대해 거대한 왜곡을 가졌으면서 말입니다. 성경의 이 말은 분명히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세계관과 매우 일관됩니다. 제가 알기로는 모든 종교가 주제 상으로 이 세계관과 시너지 효과를 갖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이 세계관을 뭐라고 부르던 간에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인간의 진화의 역사가 인간에게 지각의 왜곡과 도덕적 편견, 불만족과 커다란 고통을 안긴 방식을 들여다보며, 이런 문제를 다루는 세계관이 존재하는가 묻는다면 수많은 세계관이 이런 문제를 효과적으로 다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도 있고 다른 치료 전통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사실적 불교의 세계관 만큼 이 문제를 직접적이고 정직하고 거리낌 없이 다루는 자연주의적 세계관을 알지 못합니다. 이러한 사실적 불교적 세계관 덕택에 나는 전보다 사물을 더 명료하게 보게 되었으며, 이 배움을 지속할 예정입니다.
<마지막 강의>...여덟번째 이야기 어떤 것이 더 진실에 가까운 관점인가 더 객관적으로 진실인 관점인가라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미식축구 경기장에 앉아 양 팀의 차이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이것이 더 진실이고 객관적인 관점일까요? 저는 그렇게 주장할 수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우선은 당신이 그렇게 할 때 그것은 당신이 편견에서 거리를 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프린스턴과 다트머스의 열혈팬이 시합을 바라보는 편견에서 거리를 둔 것이니까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더 객관적인 관점을 가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때 당신은 우리 종의 관점으로부터도 거리를 두었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편을 가르는 것은 우리 종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사람 사이에 다툼이 생기면 우리는 즉시 누가 옳은 편인지 알려고 합니다. 누가 좋은 사람이고 누가 나쁜 사람인가? 이것은 내가 누구 편에 서야 하는가라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인간이 진화하는 과정에서 사회 내에 갈등이 생겼을 때 어는 편에 서야 나에게 이로운지 아는 것이 매우 중요했기 때문일 겁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편을 가르는 것은 인간 본성의 일부인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다트머스 학생이면 다트머스를 프린스턴 학생이면 프린스턴을 편들게 되어 있다는 거죠. 그리고 인간이라면 어느 한쪽 편을 들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런 성향이 우리 인간에게 심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일어납니다. 당신이 우리 종의 관점에서 거리를 두었을 때 진실에 더 가까이 간다고 할 수 있을까요? 더 객관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렇게 주장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왜 특정 종의 관점이 객관적 진실로서 특권을 누려야 하는가라는 겁니다. 결국, 다른 종들은 인간과 다른 관점을 갖고 있습니다. 예컨대, 늪은 인간에겐 좋은 장소가 아닙니다. 오히려 부정적 본질을 가진 장소죠. 하지만 모기에겐 매우 매력적인 장소입니다. 매우 긍정적인 본질을 가진 장소죠. 그러면 어떤 의견이 옳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분명히 인간에게 있어 늪은 피하고 싶은 장소 입니다. 병을 옮을 수도 있으니까요. 당신은 병을 옮기는 모기를 돈을 주고도 사지 않을 겁니다. 저는 그걸 부정하지 않습니다. 제가 의문을 제기하는 건 우리의 판단, 본질에 대한 우리의 지각이 객관적으로 진실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늘 자신이 지각하는 본질이 진실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사람들은 어느 와인이 더 좋은지 논쟁합니다. 7세기에 찬드라키르티라는 불교철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에게는 물이지만 어떤 천신은 꿀로 지각하고, 배고픈 아귀는 그것을 고름이나 피로 지각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기본적인 생각은 어떤 것의 의미, 즉 어떤 것의 정체성이나 본질은 그 존재가 가진 특정한 관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불교의 깨달음 요소들이 당신을 당신 종의 관점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한다면 그 요소들은 당신을 객관적 진실에 더 가까이 데려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깨달음의 요소들이 당신을 개인적 역사의 관점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할 때도 당신은 객관적 진실에 더 가까이 갑니다. 어떤 경우에 이런 깨달음의 경험은 당신을 종 일반의 관점에서 거리를 두게 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앞에서 깨달음의 몇몇 요소가 특히 형상 없음/공 사상, 그리고 외부적 무아 체험이 당신만이 특별하다는 생각을 허물 수 있음을 보았습니다. 나만 특별하다는 생각은 자연선택이 모든 생물 종에 심어놓은 편견입니다. 이 특정 생명체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거죠. 그런데 여기서 별표를 하나 달아야 합니다. 예외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다른 생명체가 당신의 고유한 유전자를 공유하는 정도만큼 당신은 그들이 매우 특별하다고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당신이 자손들이 매우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들이 당신의 유전자를 운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당신이 고유하게 특별하다는 생각은 자연선택의 전제입니다. 그리고 이 점에서 깨달음은 이론상으로, 당신의 관점을 생명 진화의 영역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깨달음 체크리스트를 다시 살펴볼 준비가 되었습니다. 네 가지 주요 포인트였죠. 이제 이 체크리스트에 칸을 두개 추가하겠습니다. 세상에 대한 진실, 즉 세상에 대한 '객관적 진실'과 '도덕적 진실'이 그것입니다. 이제 이 네 가지 깨달음의 요소를 살펴본 뒤에 이것들이 각 문장에서 진실에 이르게 한다고 말할 수 있는지 볼겁니다. 나는 특히 도덕적 진실은 정의하기가 매우 어려운 문제임을 알고 있습니다. 특히 불교에서는 이런 질문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잠시만요, 궁극적 깨달음은 선악의 이원성마저 초월하는 게 아닙니까?" 이러면 매우 복잡해집니다. 매우 훌륭하고 중요한 질문이지만 이 질문을 만족스럽게 해결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그래서 나는 대강 이렇게 말하려고 합니다. 즉, 도덕적 진실에 대한 거의 거친 정의는 무엇보다 도덕적 판단에 있어 명백히 왜곡된 편견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람을 죽이거나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 마음 상태라면 저는 그것을 도덕적 진실에 더 가까워졌다고 말하겠습니다. 이제 맨 위의 외면적 무아 체험부터 살펴 봅시다. 저는 이것이 당신을 도덕적 진실에 더 가까이 데려간다고 말하겠습니다. 외면적 무아 체험은 당신이 다른 생명체를 죽이거나 고문하는 데 시간을 덜 쓴다는 사실 외에도 당신이 지구 상의 다른 생명체보다 더 특별하다는 가정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외면적 무아 체험이 어떻게 이 편견을 허무는지 보았습니다. 나는 형상없음/공의 체험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공 체험이 당신이 특별하다는 가정에서 거리를 두게 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실제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우연히 '나쁜' 팀에 속한 사람들에게 나쁨의 본질을 씌우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본질을 씌우는 일을 정당화하지 않고 그들을 죽이거나 해치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당신은 이 두 가지 깨달음 요소가 세상에 대한 진실을 파악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주장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물리적 세계에 대한 객관적 진실이요. 그런데 이건 미묘한 문제 입니다. 이것을 더 파고들지는 않겠습니다. 내면적 무아 체험은 두 칸 모두에 체크할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습니다. 우리는 앞서서 내면적 무아 체험이 현대 심리학의 발견과 일치하는 자기 마음에 대한 지각을 가져온다는 걸 보았습니다. 마음의 실제적 실재에 대해 더 진실에 가까운 지각을 가져온다는 거죠. 그런데 나는 내면적 무아체험이 당신을 도덕적 진실에도 더 가까이 데려간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신이 느낌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하기 때문입니다. 즉, 세계에 관한 자기 중심적 판단, 세계에 관한 본질을 씌우는 자기 중심적 판단을 형성하는 느낌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무상은 도덕적 함의를 지닌 강력한 경우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무상은 우리가 사물이라고 여기는 많은 것들이 결국에는 과정이며 유동하고 있음을 알게해주니 '세상에 관한 진실'칸에는 체크할 수 있습니다. 이 분석 결과를 보면서 나는 불교적 깨달음과 그리고 진화론적 깨달음 사이에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진화론적 깨달음이란 무엇일까요? 내가 의미하는 것은 진화가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에 미치는 영향을 보면서 그리고 진화 과정의 흔적이 우리의 지각과 사고에 대해 편견과 왜곡이라는 형태를 취하는 걸 보면서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만약 모든 편견을 제거한다면 삶은 어떻게 될까? 그것은 어떤 경험일까?" 나는 이것이 우리가 상상하는 불교의 깨달음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강의>...일곱번째 이야기 나는 나의 친구를 '선'으로, 나의 적은 나의 친구를 '악'으로 판단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분명 누군가는 틀렸습니다. 어딘가 모순이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순은 자연선택에 의해 우리의 시스템에 심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이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의 지각 시스템이 자기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중요하다는 가정에 따라 설계되었다면 분명히 모순이 발생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 자체로 내부적 모순인 가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들 모두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중요하다는 건 사실일 수 없습니다. 이제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사물에 본질을 씌우는 행위가 훨씬 큰 의미를 갖는 경우 입니다. 그것은 개인에 대한 판단을 떠나 집단에 관한 판단을 내리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인종주의도 본질주의의 한가지 형식입니다. 특정 인종 집단 전체가 어떤 나쁜 성질을 가졌다고 봅니다. 그 집단에 대해 그런 느낌을 갖는 것이죠. 민족주의도 본질주의의 한 가지 형식입니다. 내 민족, 내 나라가 좋은 점을 가졌다는 생각입니다. 한편 다른 나라, 다른 민족은 좋은 점을 별로 갖지 않았다고 봅니다. 그러다 실제로 두 나라 사이에 긴장이 발생하면 상대 나라는 적극적으로 나쁜 본질을 갖게 됩니다. 갈등이 깊어질수록 상대 국가에 내리는 판단도 더 확연해집니다. 우리나라가 더 좋을수록 상대 나라는 더 나쁜 존재가 됩니다. 이것은 집단 일반에도 해당됩니다. 인종 집단이든 국가 집단이든 종교든 사상 집단이든 말입니다. 긴장이 커지고 갈등이 깊어질수록 그들은 더 나쁜 존재, 우리는 더 착한 존재로 보입니다. ' 우리 대 그들'이라는 도식은 매우 강력해서 집단에 본질을 씌우는 우리의 행동을 지배합니다. 어떤 때는 매우 파괴적인 방식으로요. 우리가 본성상 인종주의자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또 본성상 민족주의자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우리는 본성상 집단주의자라는 것입니다. 우리안에는 '우리 대 그들'이라는 도식을 갖고 있습니다. 실제로 심리학자들은 이것에 대해 많이 연구했습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연구가 미식축구 시합에 의해 처음 시작되었습니다. 1951년 프린스턴 대학의 팔머 경기장이었는데요. 프린스턴 대학과 다트머스 대학의 시합이었습니다. 과격하기로 유명했던 시합이었죠. 프린스턴에는 미국에서 유명한 딕 카즈마이어가 뛰었는데 그는 코가 부러지고 뇌진탕을 입었습니다. 다트머스에는 다리가 부러진 선수가 있었고요. 반칙도 부지기수였습니다. 시합이 끝난 뒤 많은 논의가 있었습니다. 어느 팀에 문제의 책임이 있는가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두 심리학자, 프린스턴과 다트머스의 심리학자 한 사람씩 이 연구를 하기로 했습니다. 연구자들은 실제 시합을 본 학생, 시합의 영상을 본 학생, 프린스턴과 다트머스 학생들을 상대로 설문지를 작성하게 했습니다. 어느 팀에 더 책임이 있는가에 관한 설문지였습니다. 누가 먼저 문제를 일으켰으며 지속시켰는지에 관해서요. 연구자들은 프린스턴 학생들은 문제의 책임이 다트머스에 있다고 여긴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한편 다트머스 학생들은 다른 견해였습니다. 이런 사실은 전혀 놀랍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런 편견이 얼마나 보편적인지 충분히 예측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하지만 제가 이 연구에 대해 흥미롭게 여긴점은 두 심리학자가 자신들이 알아낸 사실을 프레임 짓는 방식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음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보기에 세계에 대한 실제적 지각, 즉 세계에 대한 단순한 지각에는 그 지각에 관한 의미 부여가 본래부터 수반된다는 점입니다. 다음은 그들이 쓴 글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 '시합'이 실제로는 서로 다른 수많은 시합이었다는 점이다. 실제 일어난 사건에 대한 각각의 버전은 특정 사람에게 매우 실제처럼 보였다. 그와 다른 버전이 다른 사람에게 실제적으로 보인 것과 마찬가지로. 미식축구 경기장에서 일어난 일은 또는 다른 모든 사회적 상황에서 일어난 일은 거기에 어떤 의미가 부여되기 전에는 경험적 사건이 되지 않는다. 일어난 일은 그것이 의미를 가질 때에만 사건이 된다. 일어난 일이 일반적으로 의미를 갖는 경우는 이미 학습된 의미를 재가동시키는 때 뿐이다. 그 사람의 가설적 형상 세계에 이미 등록되는 있는 의미를" 그래서 지각하는 행위 자체가 어쩌면 사물에 의미를, 사물에 형상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앞의 강의에서 그런 메커니즘 중 하나를 보았습니다. 미식축구 시합과 유사한 상황에서 의미를 부여하는 메커니즘을요. 우리는 우리의 동맹이 좋은 일을 하면 그것을 그들의 본성, 본질적 성질로 돌립니다. 한편 우리의 동맹이 나쁜 일을 하면 다르게 설명합니다. 그것이 그들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는 이유를 대죠. 한편 우리의 적은 반대입니다. 이런 매커니즘이 우리 안에 심어져 있어서 우리는 적과 친구의 본질에 관한 자신의 신념을 계속 유지합니다. 그들의 행동에 상관없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문제에 관한 우리의 판단을 신뢰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이 연구의 저자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의미 중 많은 부분이 우리가 세상을 지각하는 과정에서 부여한 의미라는 것을요. 그래서 그들은 이런 질문을 제기합니다. 만약 이런 과정이 없다면 미식축구 시합 자체가 정말로 존재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간단히 말해 이 데이터는 사람들이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시합이라는 건 없다는 점을 가리키고 있다. 시합은 특정한 일이 그 사람의 목적에 의미를 갖는 한에 있어서 한 사람에게 존재하며 오직 그 사람에 의해서만 경험된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가운데 그 사람은 자기 중심적 입장과 전체 맥락에서 보았을 때 의미가 있는 사건만을 취사 선택한다." 이것은 저기 바깥의 실제 세상은 우리가 거기에 형상과 의미를 부여하기 전까지는 형상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거의 다름이 없습니다. 그리고 앞서 보았듯이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면 사물에 본질을 씌우게 됩니다. 그리고 본질을 씌우는 것은 그 사물에 감정적 가치를 부여하는 데 달려 있고요. 연구의 저자들은 만약 우리가 사물을 완전히 객관적으로 본다면 경기장의 두 선수를 구분하지 못하거나 두 팀이 입은 서로 다른 유니폼 색상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당신이 진정으로 객관적이라면 당신이 세상을 볼 때 사용하는 전체 의미 프레임이 떨어져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약 당신이 깨달음을 얻은 뒤에 이 미식축구 시합을 보러 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흥미로운 경험이 될 겁니다. 깨달음의 요소 중 형상 없음/공의 체험이 당신의 지각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살펴 봅시다. 두 팀이 유의미한 방식으로 분명히 구분되지 않습니다. 즉, 당신이 프린스턴 학생이나 다트머스 학생이라 해도 당신이 형상 없음과 공의 느낌을 경험했다면 당신은 어느 팀에서도 선의 본질이나 악의 본질을 보지 않을 것입니다. 그저 22명의 선수가 경기장에서 자기 일을 할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외부적 무아 체험도 우리의 지각에 크게 영향을 줍니다. 당신은 자신과 경기장의 선수들 사이에 어떤 연속성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 연속성을 갑자기 보게 되는데 하나는 당신과 다른 사람들 사이의 연속성이고, 또 하나는 선수들 사이의 연속성입니다. 당신이 깨달음을 얻은 뒤 미식축구 경기장에 가면 이런 느낌일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모든 사람이 깨달음을 얻었다면 미식축구 관중들에겐 좋은 일이 아닐 것입니다. 애당초 경기장에 갈 이유가 없겠죠. 재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깨달음을 얻었다면 전쟁과 대량학살 같은 것도 줄어들 겁니다. 그래서 이것에 대해 말할 가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깨달은 관점은 전쟁과 같은 것을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줄여준다는 점에서 보다 희망적인 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강의>...여섯번째 이야기 지금까지 우리는 두 가지 매우 심오한 명상체험을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는 외부적 무아 체험이고 나머지 하나는 공 또는 형상없음 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한 많은 사람 중 하나라면 그리고 깨달음이 무엇인지 궁금하며 그것을 상상해보고자 한다면 공과 외면적 무아라는 두 가지 체험이 깨달음 체험의 기본 요소로 적절한 후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앞에서 내면적 무아 체험도 이야기 했습니다.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며 생각, 느낌 등이 진정한 자아가 아님을 아는 것이죠. 나는 이 내면적 무아 체험도 깨달음의 기본 구성요소로서 적절한 후보라고 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무상을 깨닫는 것도 깨달음의 요소로 적절합니다. 영원하지 않은 성질, 유동하는 성질이 실재에 스며들어 있음을 깊이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내가 깨달음의 요소에 대해 발표를 한다면 이 네가지를 실제적인 체크포인트로 들겠습니다. (외면적 무아, 공/형성없음, 내면적 무아, 무상) 물론 사람에 따라 깨달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깨달음에 살을 붙이며 이해해 보려 한다면 내가 보기엔 이것이 네 가지 기본적인 차원입니다. 저보다 깊은 명상 체험을 한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그리고 불교 교리에 대한 저의 이해를 토대로 했을 때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깨달음의 네 요소를 살펴보았는데요. 이제 큰 질문에 답할 차례입니다. 그것은 "깨달음은 정말 우리를 깨닫게 하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 네 가지 기본적인 체험이 사람들을 사물에 관한 진실에 더 가까이 데려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짐작하시겠지만 나는 이 질문을 진화론의 관점에서 다뤄보려고 합니다. 나는 자연선택이 우리에게 부여한 편견과 왜곡된 지각을 염두에 두고 논의를 진행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세상을 진실되게 이해한다는 것에 관한 저의 개념의 토대가 됩니다. 이 분석의 준비 과정으로서 강의 서두에 꺼냈던 주제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저는 불교의 명상이 자연선택에 대한 일종의 반역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자연선택의 의제에 대한 반역, 자연선택에 내포된 가치에 대한 반역말입니다. 저는 앞에 말한 깨달음의 요소들을 이 관점에서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어떤 점에서 이 요소들이 자연선택에 대한 반역인지 이야기하려 합니다. 이렇게 하면 이 반역이 정말로 진실의 편에 서 있는지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우선 제가 말한 외면적 무아 버전부터 봅시다. 앞서 보았듯이 이것은 당신과 타인, 세상 사물이 서로 분리되어 있다는 생각이 줄어드는 것입니다. 실제로 당신과 타인이 연속되어 있다고 느끼므로 타인을 해치는 것은 당신 자신을 해치는 것이 됩니다. 다시 말해 당신의 이익과 타인의 이익이 정말로 차이가 있는지 의아하게 생각됩니다. 아시다시피 이것은 자연선택의 관점으로는 완전히 이단입니다. 자연선택이 우리 안에 심어놓은 한 가지 생각이 이것은 나의 몸이고 내 몸은 여기까지이며 나의 이익과 다른 존재의 이익은 같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이익은 다른 존재의 이익보다 명백히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자연선택의 논리에 따르면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내 안에 정말 어떤 유전자가 있어 복제를 잘해 다음 세대에 잘 전한다는 이유로 선택된 유전자가 있다면 이 유전자가 제일 먼저 할 일은 유전자 운반 도구인 이 몸을 잘 돌보는 일일 것입니다. 이것은 나의 뇌에 이런 생각이 심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내 몸을 돌보는 일이 다른 사람의 몸을 돌보는 일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 나의 이익이 가장 중요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특별하다는 것이죠. 이런 편견은 모든 동물의 삶에 심어져 있습니다. 온갖 방식으로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 동물들은 서로를 잡아 먹습니다. 인간도 때로 서로를 죽입니다. 좀더 미묘한 방식으로요. 사람들은 지배 서열에서 서로를 끌어내리려고 다투죠. 어떤 때는 아주 미묘한 방식으로 그렇게 합니다. 당신이 손을 흔들어 택시를 부르는데 바로 옆의 어떤 사람도 택시를 부른다고 합시다. 당신은 택시를 잡고 싶어 자연스럽게 그 사람보다 팔을 더 높이 흔듭니다. 이 행위에 들어있는 생각은 당신이 택시를 잡는 것이 그가 택시를 잡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누군가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급히 병원에 가야 하는 의사일지 모르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외부적 무아 체험, 즉 당신의 이익과 다른 생명체의 이익이 근본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지각은 자연선택이 우리에게 심어놓은 가장 기본적인 규칙, 즉 '나는 특별하다'는 규칙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공/형상 없음의 체험도 이런 성격을 가졌습니다. 즉 나는 특별하다는 기본적인 생각을 넘어서거나 타파하는 성격을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논리가 조금 더 미묘합니다. 이것을 살펴보겠습니다. 공은 사물이 본질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공을 경험하면 사물이 강력한 감정적 가치를 갖지 않습니다. 개별 사물에 관한 강한 느낌, 고유한 느낌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다시 앞으로 돌아가 느낌의 역활이 애당초 무엇이었는지 질문해 봅시다. 느낌이 처음으로 생명계에 생겼을 때 느낌의 사명은 생명체를 돌보는 것이었습니다. 느낌은 생명체에 유리한 사물에는 다가가고 불리한 사물은 피하게 하는 역활을 했습니다. 다시 말해 느낌은 주변 환경에 대한 판단이었습니다. 특정 생명체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본 판단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단순한 생명체가 어떤 독소에 대해 나쁜 낌새를 느끼면 그것을 피할 것입니다. 피하는 것이 그 생명체에 이롭습니다. 그렇지만 그 독소가 보편적으로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생명체에 나쁜 건 아니죠. 그래서 이 특정한 판단은 그 생명체의 관점에서 바라본 판단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 생명체가 독소를 피한다는 사실은 커다란 도덕적 의미를 지닌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내리는 수많은 감정적 판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복층 주택에 좋은 느낌을 갖고 있는데요. 이것은 아마도 내가 복층주택에 살았던 적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반대로 나에게 나쁜 느낌을 주는 집들도 있습니다. 너무 과시하는 듯한 집들이 그렇습니다. 어쨌거나 이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나는 집에 대해 이런 느낌을 또 다른 사람들은 다른 느낌을 가질 수 있는 거죠. 커다란 의미를 가진 문제는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감정적 판단을 타인에 대해 내리기 시작하면, 즉 타인에게 본질을 씌우기 시작하면 문제는 더 큰 중요성을 갖게 됩니다. 저는 제 친구들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친구들은 나에게 좋은 느낌을 줍니다. 친구들이 뿜어내는 '좋은 사람'의 본질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한편 저는 저의 경쟁자와 적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정말로 그렇게 느껴집니다. 나는 그것이 객관적 진실이라고 느낍니다. 하지만 그것은 객관적 진실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 친구들의 경쟁자들은 내 친구들을 보면서 이런 부정적인 본질을 느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 적의 친구들은 나의 적을 보면서 긍정적인 느낌을 가질 것입니다.
<마지막 강의>...다섯번째 이야기 나는 명상을 통해 사물에 대한 감정을 줄여서 사물의 본질을 줄여서 볼 수 있다는 생각을 스님인 비투 보디와 나누었습니다. 저자 : 우리가 해석을 내림으로써 어떤 사물에 본질을 부여할 때 그 해석에는 그 사물에 관한 느낌도 따라오는 것 같습니다. 즉, '나의 적은 나쁜 사람이다, 나의 집은 따뜻하고 안락한 장소다'처럼 말이죠. 내가 사물에 부여하는 본질의 일부는 나의 느낌에서 나오는 것 같은데요 보디 : 맞습니다. 저자 :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군요. 만약 당신이 불교 수행을 열심히 밟아간다면 탐욕과 성냄의 느낌에서 벗어나게 될 거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외부 세계의 사물들이 지금처럼 강한 감정적 무게를 갖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외부의 사물에 본질이 없다고 지각할 것입니다. 보디: 여기서도 제 대답에 신중해야겠군요. 너무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면 불교의 궁극적 목적이 감정이 전혀 없는 로봇처럼 되는 것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으니까요. 제 어머니는 이런 말씀을 했죠. 깨달은 불교인과 식물은 차이가 없다. 네가 불교 승려가 되려는 이유가 고작 식물처럼 되고 싶어서냐? 하지만 제 의견과 경험으로는 불교 수행의 길을 계속 가면 감정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감정적으로 더 민감해지고 더 행복하고 더 기쁨에 차게 되죠. 그래서 세상 사물에 대해 더 자유롭고 더 행복하고 더 기쁜 마음으로 응대하게 됩니다. 저자 : 그러니까 그 자유는 당신이 사물에 대해 감정적 함의를 붙이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오는 거군요? 다시 말해 사물에 강하게 본질을 부여하지 않는 것이 자유의 원천이라는 말이군요. 보디 : 맞습니다. 그것이 감정적 불편함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가져옵니다. 우리는 양극단을 오가며 사는데 거기서 감정적인 불편함이 일어나죠. 우리는 대개 즐겁고 좋은 것에는 집착하고 위협적이고 불쾌한 것은 혐오하며 살죠. 제가 보기에 보디 스님의 말은 다음 생각과 일치해 보입니다. 감정 반응이 줄면 그만큼 본질에 대한 지각도 줄어든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은 공에 대한 지각도 설명해 줍니다. 제가 다시 말하고 싶은 것은 그렇다고 해서 공에 대한 지각이 부정확한 지각이라는 의미는 결코 아니란 겁니다. 이 문제는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실제로 공에 대한 지각은 긍정적인 도덕적 효과를 갖습니다. 이 문제도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서 다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당신이 사물의 공성을 지각한다 해서 그것이 무미건조한 지각이거나 불쾌한 경험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점에 대해서는 게리 웨버의 말을 다시 들어봅시다. 저자 : 당신은 감각을 통해 기쁨을 얻는다고 말씀하시는데요. 문제적 감정이 개입하지 않는 감각을 통해서요. 어쨌거나 당신은 감정의 개입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거군요. 게리 : 맞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감각을 잃어바리는 건 아닙니다. 녹차는 여전히 녹차 맛이 나고 포도주는 여전히 포도주 맛입니다. 그걸 모르는 게 아니에요. 당신이 버리게 되는 건 감각에 뭔가를 더하는 태도입니다. "환상적인 와인이야" "멋진 거울이야"처럼 말입니다. 단지 감각으로 느끼는 걸 넘어 거기에 감정적 내용을 덧붙이는 것이요. 저자 : 그렇지만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할 겁니다. '좋은 와인이야'라는 말도 못하면 사는 게 무슨 재미냐고요. 당신은 이런 질문과 맞닥뜨릴 텐데요. 어떤 것을 좋아할 만큼 감정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면 왜 그렇게 되는 거죠? 게리 : 훨씬 더 깨끗한 지각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내가 마신 와인 한 잔에 대해 식당 평론가나 친구에게 멋진 인상을 주고 싶다고 합시다. 그러면 저는 이야기를 지어내게 됩니다. 와인 맛이 어떠해야 한다는 기대를 품고 마시게 되는 거죠. 그러면 와인 맛을 명료하고 단순하게 지각하는 데 방해가 됩니다. 이런 감정적 장애물을 걷어내면 어떤 감각이든 더 직접적으로 지각할 수 있죠. 덧붙일 말은, 게리는 '공'이란 말로 자신의 체험을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그가 지각하기에는 세상이 실제로 매우 역동적이기 때문입니다. 에너지로 가득 차 보입니다. 그러나 그가 설명하는 체험은 공과 형상없음의 고전적 체험에 부합합니다. 그는 말하기를, 주변의 개별 사물이 강하고 독립적인 정체성을 갖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는 주변 사물에 강한 느낌이나 특별한 느낌으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는 주변 사물들 간에 일종의 연속성을 봅니다. 다시 말해 그는 사물이 개별적이고 고유한 본질을 가졌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는 일종의 집단적 본질 또는 사물의 충만함을 느낍니다. 이 점을 고려하면 이런 체험에 대해 '공'보다 '형상없음'이라는 용어을 사용하는 것이 더 나을지 모릅니다. 게리의 체험을 뭐라고 부르던 이 체험을 당신의 일상으로 가져가는 작업은 매우 즐거운 일입니다. 게리 : 당신이 마침내 이 공간에 이르면 이것을 표현하는 단어로 '텅 빈 충만' 또는 '충만한 공'같은 표현을 쓸 수 있겠지만요. 이떤 것을 더하거나 뺀다고 해서 더 완벽해지지 않는 공간입니다. 절대적이고 완벽하며 만족스럽고 충만한 공간입니다.' '만족스럽다'는 단어를 들어셨을 텐데요. 기억하시겠지만 불교의 기본적 생각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는 반복적으로 불만족이 일어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깨달음을 얻으면 이 불만족을 완전히 소멸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게리 웨버는 자신이 깨달았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체험에 대한 그의 설명은 지속적이고 헌신적인 명상 수행으로 둑카 즉 고통과 불만족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과 부합합니다. 또 그의 체험은 수행의 길을 따라가면 세상을 훨씬 명료하게 볼 수 있다는 생각과도 부합합니다.
<마지막 강의>...네번째 이야기 명상 지도자인 로드니 스미스와 대화 중에 나는 공을 지각할 때 뇌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한 저의 생각을 슬쩍 꺼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로드니 : 사물의 모양과 색깔이 사라지는게 아닙니다. 단지 사물 사이의 공간이 더 이상 서로를 구분짓지 않는 것이죠. 저자 : 평소보다 사물에 대한 감정 반응이 줄어드나요? 사물에 감정적 내용물을 덜 싣게 되나요? 로드니 : 그렇다고 볼 수 있죠. 평정 상태를 볼 수 있고 사물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는 깨달음이 찾아오죠. 로드니는 공을 지각할 때 뇌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관한 저의 지론을 지지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로드니 : 맞습니다. 사물에 대한 감정 반응이 약화되는 것과 공을 지각하는 것 사이에는 상호 관련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보기에 이것이 작동하는 방식은 공을 정확히 지각하면 그 결과로 감정 반응이 약화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단 사물이 비어 있음을 보고 나면 강한 감정적 반응이 일어나는 것은 타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는 반대 순서로 봅니다. 감정 반응이 줄어드는 현상이 먼저 온다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본 데 따르는 감정 반응이 약화되는 것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물이 본질이 없이 비어 있다고 보는 감각을 일으킨다고 말입니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공을 지각한다는 것이 느낌이 약화되었을 때 일어나는 일이라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유효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란 겁니다. 이 강좌에서 나는 일반적으로 느낌이 실재와 명료한 지각에 이르는 믿을 만한 안내자가 아니란 점을 강조해왔습니다. 그래서 공에 대한 지각이 어떤 의미에서는 참된 지각일 수 있습니다. 비록 느낌이 줄어든 결과로 일어나는 일이긴 하지만요. 이 문제는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비불교적 관점에서 본질에 관해 이야기한 심리학자가 폴 블룸입니다. 그가 보기에 사람들을 원래부터 본질주의자입니다. 그의 말은 사물이 내면적 본질을 가졌다고 보는 것이 우리의 본성이라는 의미입니다.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느낄 수는 있는 내면의 성질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내면의 성질이 그 사물에 정체성을 부여한다고 직관적으로 여깁니다. 그는 사람들이 소나무를 보면 아무리 미세하더라도 소나무의 본질, 즉 '소나무임'을 지각한다고 봅니다. 이에 관하여 그는 <쾌락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라는 책에 썼습니다. 폴은 우리가 사물에 부여하는 본질이 사물의 이면에 놓인 이야기에 좌우된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와인 한 병을 얻었는데 매우 귀한 와인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특별한 해에 만든 카버네 소비뇽으로 많은 병이 생산되지 않아 매우 귀하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면 이 와인병에 어떤 아우라가 생깁니다. 당신은 본질에 대한 감각을 갖고 있습니다. 분즈팜 와인(가장 싼 와인)을 당신이 인지하고 느꼈을 때와 다른 본질 말입니다. 폴이 제시하는 또 다른 예가 어떤 사람이 50만원을 주고 산 줄자입니다. 겉모양만 보면 마트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줄자입니다. 그런데 이 줄자는 존F.케네디가 소유한 줄자였습니다. 이것이 그 줄자 이면의 이야기였습니다. 이 이야기로 그 줄자에는 특별한 본질이 부여되었습니다. 이 것이 그 줄자에 돈을 지불한 사람에게 어던 느낌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뭔가 아우라가 있죠. 특별한 분위기가 있다고 느낍니다. 이것이 폴이 말한 사물 이면의 이야기로 인해 본질을 지각한다는 것입니다. 사물 이면의 이야기가 어떻게 사물에 관한 느낌에 영향을 주는지 알려면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사물의 이면에서 이야기를 끌어낸다고 말입니다. 당신은 이 남자에게 다가갑니다. 그는 케네디의 줄자 값으로 50만원을 냈습니다. 손에 든 줄자를 사랑스런 눈길로 바라봅니다. 당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실수가 있었습니다. 이 줄자는 복도 화장실 공사 중인 인부의 줄자입니다. 케네디의 줄자는 내일 택배로 배송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남자는 이 줄자에 대한 느낌이 크게 바뀔 것입니다. 이야기가 없어지면 느낌도 바뀝니다. 줄자에 케네디의 본질이 더 이상 남지않게 되죠. 폴 블룸의 주장은 흥미롭습니다. 이런 경우는 특별한 물건에 특별한 이야기가 담긴 경우입니다. 그렇지만 폴은 일상의 사물들에도 어떤 의미에서 이야기가 따라오며 그 이야기들이 우리가 본질을 지각하는 데 영향을 준다고 봅니다. 이 내용은 몇년 전 그의 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나왔습니다. 폴 : 단순한 쾌락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무엇에 의해 쾌락을 얻는가에 관한 당신의 신념에 영향 받지 않는 쾌락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음식의 경우에 당신이 나에게 먹을 것을 건내주고 내가 그것을 맛본다면 이 음식은 내가 신뢰하는 사람이 나에게 주었다는 것을 나는 알고 먹습니다. 그러면 이 음식을 마루바닥에서 발견했을 때와는 다르게 맛 볼 것입니다. 그리고 천 달러를 주고 산 음식이라면 또 다른 맛이 나겠죠. 그림을 생각해보죠. 우리는 종종 누가 어떤 상황에서 그렸는지 모르는 그림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냥 그려진 것만으로 그림을 감상하는 때가 있는데 그렇더라도 당신은 이것이 그림이라는 건 압니다. 미술관의 그림도 그것이 그림이라는 걸 알고 봅니다. 그냥 우연히 벽에 물감이 튀어서 그려진 게 아니라 누눈가 보여주기 위해 만들었다는 걸 알고 보는 거죠. 이것이 사물에 색을 입힙니다. 내 생각에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가장 단순한 감각에도 적용됩니다. 오르가즘, 목마를 때 마시는 물, 몸을 뻗는 동작 등 모든 것에요. 우리는 자신의 경험에 대해 언제나 어떤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경험은 특정 범주에 속하는 사례로 간주됩니다. 저자 : 암묵적인 이야기가 항상 존재한다는 거군요. 폴의 견해는 우리가 무언가에 관해 말하는 이야기, 즉 우리가 무언가를 집어넣는 범주가 그것의 본질에 대한 지각을 형성시킨다는 것입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렇다고 여기서 느낌이 아무 역활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겁니다. 저는 앞의 이야기를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케네디의 줄자에 돈을 지불한 그 남자는 처음에 그것이 케네디의 줄자라는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그 이야기가 그에게 줄자에 관한 느낌을 주었고 그 느낌이 줄자의 본질에 대한 그의 감각을 형성시켰습니다. 저는 폴 플룸이 이 작동 방식에 대해 저와 의견이 다르다고 보지 않습니다. 요약하면 제 견해는 우리가 사물에 대해 내리는 해석, 사물에 관해 지어내는 이야기, 그 사물이 어디에 속하는가에 관하여 지어내는 관념이 그 사물에 관한 우리의 느낌을 형성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느낌은 다시 본질에 대한 지각을 형성합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느낌이 강할수록 본질에 대한 감각도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다음처럼 추론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명상을 통해 사물에 대한 감정적 반응을 줄일 수 있는데 그러면 사물이 본질을 더 적게 가졌으며 더 비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