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에세이 30>
웃음꽃 피던 우리 집
심영희
한국전쟁 때 살던 집이 불타고 피난처였던 초가삼간에서 여덟 칸짜리 집으로 이사 왔던 일곱 살 아이는 온 세상을 얻은 듯 좋아서 이방에서 저방으로 뛰어다니며 신바람이 났습니다.
지금 사진에 찍힌 곳은 부엌과 다락방 퇴비장이 전부이지만 아름답습니다. 돌담 위에 짚으로 엮어 덮은 이엉이며, 펌프수도, 김치항아리를 우려내는 시골풍경은 그대로 한 편의 수필이고 시입니다.
초등학생이 된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초가지붕은 간데 없고 까만 루핑 지붕으로 변해있었습니다. 변한 집을 보면서 정말 신기했습니다. 이웃의 집들은 모두 누런 초가지붕인데 우리지붕만 까만 지붕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지붕은 또 바뀌었습니다.
이번에는 함석지붕이었습니다. 정말 좋았습니다. 초등학교 앞에 끝이 뾰족한 함석집이 있었는데 아주 예뻐 보였거든요. 집 기둥이 약해서 기와지붕을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기까지 아버지께서는 많은 고민을 하셨을 것입니다. 함석지붕으로 바뀐 집은 소낙비가 쏟아지는 날은 전쟁을 하듯 시끄러웠습니다. 굵은 빗방울이나 우박이 쏟아지는 날은 콩을 볶을 때 콩이 후다닥 후다닥 튀는 모습을 연상케 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돈을 많이 모으셔서 집 가까운 곳에 기와집도 지으셨고, 가게가 붙은 집을 구입하여 갑자기 집을 세 채나 소유한 집 부자가 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께서 일곱 살짜리 소녀와 처음 만났던 집을 미련 없이 허물어내고 붉은 벽돌에 이중 석가래 지붕에 기와를 덮은 양옥과 한옥이 어우러진 절충식 집을 크게 지으셨습니다. 헐지 않고 두었던 별채에는 쓰던 물건을 정리하고 새집에는 자식들과 친지들이 선물한 새 물건으로 가득 찼습니다.
기쁨만큼 아쉬움도 컸습니다. 모든 것이 최신식으로 바뀌었지만 옛정취가 사라졌습니다. 가족들의 추억이 묻혀버렸습니다. 다락방도 없어졌습니다.
다만 꽃밭과 정원이 그대로 있다는 것에 위안이 되었습니다. 온 가족이 꽃가꾸기를 좋아해 꽃밭에는 언제나 많은 꽃이 활짝 피어 웃음을 웃고 있었고, 안토시안으로 나뭇잎이 곱게 물들 때면 단풍잎은 붉다 못해 피를 토해내는 듯 했습니다.
그런데 세월 속에 더 큰일이 생겼습니다. 대대로 살겠다고 정말 튼튼하게 지었던 집이었는데, 젊은 시절 오늘은 이 집에서 내일은 저쪽 집으로 뛰어다니며 수많은 추억을 만들었는데 이제는 추억 담긴 집이 한 채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두 채는 오래 전에 팔았고 큰 벽돌집은 도로에 자리를 빼앗기게 되어 흔적도 없습니다. 강원도 평창군 도암면 횡계리 748번지에서 우리 집을 아무리 애타게 찾아도 이제 우리 집은 없습니다.
어머니 장사 때 춘천에서 조문하러 오던 선생님들이 집을 못 찾고 헤매다가 전화를 걸어 확인한 후 집을 찾아와 “이게 절이지 무슨 집이냐”고 했을 정도로 집은 크고 높았습니다(조문 오던 선생님들은 우리 집을 보았는데 사찰인 줄 알고 집을 못찾아 전화를 했다고 하였습니다)
이 집에서 함께 울고 웃으며 추억을 만들었던 흔적이 하나 둘 퇴색되어가고 있습니다. 집이 헐렸다는 사실보다 친정이 없어졌다는 서러움이 가슴을 아프게 했습니다. 군청에서 집을 헐기로 약속한 전날 나는 어처구니 없게도 첫수필집 ‘아직은 마흔아홉’ 출판기념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라지는 집을 한번이라도 더 보겠다고 출판기념회에도 참석 못했던 절반의 남매들, 출판기념회에 참석하느라 하루라도 더 집에 못 머무른 남매들의 갈라진 마음에 고향집은 영원히 아쉬운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2006년 출간 포토에세이 “감자꽃 추억”에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