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픽션]
침묵의 그림자
세현은 일어나자마자 창밖을 바라봤다. 도시의 건물들은 차갑고 단단한 콘크리트의 성벽처럼 서 있었다. 햇빛은 희미하게 반사되어 무표정하게 서 있는 빌딩들 위에 머물렀다. 마치 감정이 없는 인간들처럼, 그 거대한 구조물들은 아무 말 없이 그를 압박했다. 하지만 그 압박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국가, 사회, 직장, 그리고 가정에서 끊임없이 세현을 짓눌러왔다.
그는 조용히 양복을 걸치고 넥타이를 맸다. ‘오늘도 어김없이 하루가 시작되는구나.’ 자신의 감정은 이미 오래 전에 잠식당했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직장에서는 상사들의 명령을 무조건 따라야 하고, 조직의 규율에 어긋나지 않도록 끊임없이 스스로를 조절해야 했다. 그리고 그 속에선 절대적으로 순응해야만 생존할 수 있었다.
세현은 대기업의 중간 관리직에 있었다. 그의 상사인 박 부장은 늘 그에게 무리한 업무를 떠넘기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반응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이거 내일까지 마무리해,” 박 부장은 아무 감정 없이 지시를 내렸다. 세현은 피로에 찌든 눈을 비비며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 "네" 속에는 저항이 섞여 있었다. 세현은 알 수 없는 불안과 억압이 자신을 뒤덮고 있음을 느꼈다. 직장에서의 폭력은 항상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그것은 침묵 속의 지배였다. 명령을 거부하면, 직장에서의 생존은 불가능했다. 그는 정해진 틀 속에서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는 상태로 점점 더 자신을 밀어 넣고 있었다.
동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누구도 박 부장의 명령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아니,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그렇게 서서히 그들의 영혼은 무색의 벽 안에 갇혀버렸다. 아무도 직접적인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보이지 않는 심리적 폭력 속에서 끊임없이 굴복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침묵의 폭력.' 그것이 이 조직의 실체였다. 말하지 않아도, 행동하지 않아도, 모두가 서로를 억압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세현은 현관문을 열자마자 차가운 공기가 그를 맞이했다. 아내인 민정은 부엌에 앉아 아무 말 없이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 사이의 대화는 이미 오랜 시간 전부터 사라졌다. 한때는 서로 사랑했던 사이였지만, 그 사랑은 일상과 현실 속에서 사라지고 남은 것은 서로를 향한 무관심뿐이었다.
민정은 그저 묵묵히 밥을 차렸고, 세현은 아무런 말 없이 밥을 먹었다. 그들은 말하지 않았지만, 서로의 침묵 속에서 무언의 폭력이 가득 차 있었다. 때로는 말하지 않는 것이 말보다 더 큰 상처를 줄 수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감정에 무감각해져 있었고,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오래 전에 멈췄다.
"왜 이렇게 침묵 속에 살아가는 걸까?" 세현은 식사를 하다 문득 자신에게 물었다. 직장에서 느끼는 억압과 폭력은 집에서도 형태만 다를 뿐 그대로였다.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그와 민정은 서로의 내면을 갉아먹으며 조용히 무너져가고 있었다. 직접적인 다툼이나 소리 지름은 없었지만, 그들은 보이지 않는 벽을 사이에 두고 점점 더 멀어져 갔다.
민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남편의 무심함과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감정을 느끼며 고통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표현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숨기고 있었을 뿐이었다. 가정 속의 폭력은 물리적이거나 시끄럽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침묵의 폭력이었다. 서로를 향한 무관심과 외면은 점점 그들의 관계를 질식시키고 있었다.
세현은 어느 날 아침, 민정과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그 순간, 그들은 알 수 없는 불안감과 함께 침묵 속에서 서로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동자는 오랫동안 보지 못한 깊은 감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제는 말해야 한다.' 세현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말하지 않았다. 직장에서의 억압된 감정은 가정으로 이어졌고, 가정의 침묵은 다시 직장에서의 억눌림으로 되돌아갔다. 폭력은 어디에서나 있었지만, 그것은 물리적인 형태가 아니었다. 그것은 말없이 사람들의 내면을 갉아먹고 있었다.
직장에서는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압박이 그를 옭아매고 있었고, 가정에서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외면하는 것이 관계를 파괴하고 있었다. 둘 다 보이지 않는 폭력의 양상이었다.
어느 날, 세현은 직장에서 가슴이 답답해져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는 차를 몰고 도시의 끝없는 고속도로를 달리며 그동안 억눌렸던 감정을 풀어내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도망쳐도 그 폭력은 그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조직의 기대와 사회적 규율, 그리고 가정 속의 침묵은 그를 어디에도 자유롭게 두지 않았다.
그는 이제 말해야만 했다. 직장에서 상사에게도, 집에서 아내에게도. 그 침묵의 사슬을 끊어내지 않으면, 자신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거란 걸 깨달았다.
그날 밤, 그는 민정에게 다가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우리,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
민정은 그 말을 듣고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처음으로, 그들은 침묵을 깨고 서로의 마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들 사이에 있었던 보이지 않는 폭력의 굴레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