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29일. 10시부터
■ 작가의 삶
심훈(沈熏. 1901. 9. 12~1936. 9. 16)
1901년 9월 12일 경기도 시흥군 북면 노량진리 검은돌집(현 서울시 동작구 흑석동)에서 아버지 심상정(沈相珽)과 어머니 해평 윤씨 사이에서 3남(우섭, 원섭, 명성)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남. 이름은 대섭(大燮). 1915년 서울교동보통학교를 졸업. 경성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 입학. 1917년(18세) 전주 이씨 해영(海暎)과 결혼. 1919년(20세, 4학년) 3·1운동 참여. 3월 5일 남대문역(서울역) 학생 시위에서 구속되어 8개월 투옥과 함께 퇴학 처분.
1920년 이희승에게 한글 맞춤법 배움. 1921년 항주 지강(芝江)대학교 극문학과에 입학했으나 1922년 중퇴. 베이징에서 단재 신채호, 우당 이회영 등을 만나 독립운동에 감회. 1923년 중국에서 돌아와 최승일, 이경손, 안석주 등과 신극연구단체인 극문회(劇文會) 조직. 1924년 이해영과 이혼.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로 입사. 1925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 발기인으로 참여. 1926년 필명 ‘훈’으로 『동아일보』에 영화소설 「탈춤」을 연재 시작. 1926년 철필구락부(鐵筆俱樂部) 사건으로 『동아일보』에서 해직.
1926년 4월 26일 순종(융희황제)이 서거하자 독립운동이 일어날 것을 예감하고 5월 16일 『시대일보』에 「통곡 속에서」를 게재. 6·10만세운동의 기폭제 역할.
1927년 일본으로 건너가 영화 공부. 식민지 현실을 다룬 영화 <먼동이 틀 때> 집필, 각색, 주연, 감독 10월 26일 단성사에서 상영. 1928년 『조선일보』 입사. 1930년 3월 1일 시작품 「그날이 오면」 집필. 소설 「동방의 애인」을 『조선일보』에 연재. 일제의 게재 중지 처분. 12월 24일 안정옥(安貞玉)과 재혼. 1931년 경성방송국 문예 담당으로 일하다가 사상 문제로 그만둠. 8월 「불사조」를 『조선일보』에 연재했으나 일제의 게재 중지 처분. 1932년 부모가 살고 있던 충남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로 낙향해 창작 생활에 정진. 시집 『그날이 오면』 발간 조선총독부의 검열로 무산. 1933년 장편소설 「영원의 미소」 7월 10일부터 『조선중앙일보』에 연재. 1934년 장편소설 「직녀성(織女星)」 3월 24일부터 『조선중앙일보』에 연재. 당진에 ‘필경사(筆耕舍)’ 자택 짓고 「상록수」 집필에 매진.
1935년(36세)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장편소설 공모에 「상록수」 응모해 당선. 9월 10일부터 이듬해 2월 15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되어 독자들에게 큰 호응. 상금 500원 중 100원을 기부하여 상록학원(현 상록초등학교) 설립. 1936년 8월 16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 선수의 우승에 감격해 「오오, 조선의 남아여!」 시 발표. 「상록수」 영화 제작 일제의 방해로 좌절, 단행본 출간 위해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침식하며 집필에 몰두하다가 장티푸스에 걸려 9월 16일 오전 8시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향년 36세로 타계. 200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음.
■ 작품 해설
「상록수」(『동아일보』, 1935. 9. 10 ~ 1936. 2. 15)
고등농림학교 학생인 박동혁(朴東赫)과 여자신학교 학생인 채영신(蔡永信)은 모 신문사가 주최한 학생계몽운동에 참여하였다. 계몽 대원 중 우수 대원으로 선정되어 체험담을 발표한 것이 계기가 되어 서로 동지가 된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인 농촌을 지키려고 내려간다. 박동혁은 고향인 한곡리로, 채영신은 기독교청년회연합회 특파로 경기도 반월면 천용리(샘골)로 가 농촌사업의 기초적인 작업에 임한다. (『상록수』에서는 천용리가 청석동(靑石洞)으로 바뀐다.) 박동혁은 농우회관 완성, 부인 근로회 조직, 공동답 설치, 소작권 이동 금지, 고리대금업의 금지, 진흥회 운영, 반상타파론 계몽 등을 추진한다. 채영신은 강습소 운영, 청석학원 건립 등으로 사람들로부터 판사, 의사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온갖 문제를 해결해준다. 그렇지만 채영신은 박동혁과 달리 경제 투쟁이나 정치 투쟁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각자의 사업 진행을 편지로 알리며 의논하고 사랑으로 발전한다. 그러면서도 동지 의식이 견고해 3년 뒤 후진에게 일을 맡길 수 있을 때가 되면 혼인하기로 약속한다. 그러던 중 채영신은 과로와 영양실조로 점차 몸이 쇠약해진다. 학원 낙성식장에서 하객으로 초대된 박동혁 앞에서 쓰러지고 만다. 박동혁은 맹장염 수술을 한 영신을 정성껏 간호한다. 박동혁이 학산리로 돌아왔을 때 또 다른 역경이 놓였다. 동네의 악덕 지주이자 고리 대금업자인 강기천(姜基千)이 농우회 회원들을 매수하는 등 박동혁의 농민운동을 방해하고 있었다. 화가 난 박동혁의 동생 동혁이 회관에 불을 지르는데, 박동혁은 동생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투옥된다.
건강을 어느 정도 회복한 채영신은 서울연합회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정양 겸 유학을 떠난다. 그렇지만 보람을 느끼지 못하고 곧 돌아온다. 채영신은 다시 일에 몰두하는데, 과로와 각기병과 맹장염의 재발로 숨을 거두고 만다. 채영신의 유언대로 청석학원이 보이는 곳에 묻힌다. 감옥에서 풀려난 박동혁이 청석골에 갔을 때 채영신은 이미 세상을 뜬 뒤였다. 동혁은 비탄에 잠기지만, 두 사람 몫을 해낼 것을 다짐하며 한곡리로 돌아온다.
■ 장소 해설
□ 지하철 9호선 흑석역 1번 출구에서 집결.
□ 심훈공원에 도착해 심훈 일대기 작품 세계 살펴봄.
□ 학도의용병 현충비 및 효사정 답사.
□ 심훈 생가터(흑석동 성당) 답사.
□ 강의(커피니 중앙대점. 또는 청맥살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