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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김래현 목사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질그릇 비유’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알려 주는 소중한 비유입니다.
유명한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는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으나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안에서 자기 생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때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아버지의 재산을 절반이나 들고 객지로 가서, 허랑 방탕한 생활로 재산과 인생을 함께 탕진해 버린 탕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탕자가 언제 아버지께로 돌아갔습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발견했을 때였습니다. 자기를 제대로 알지 못했을 때에, 그에게 있어서 아버지란 떠나버려야 할 의미 없는 존재에 불과했지만, 자신의 처참한 몰골을 의식했을 때, 이제 아버지는 자신이 ‘아버지의 종’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돌아가야 할 절대적인 존재로 바꾸어졌던 것입니다. 탕자가 자기를 발견했을 때 새롭게 아버지를 발견하게 되었고, 아버지와의 바른 관계 맺음의 시발점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바르게 깨달을 때 참된 평안과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저는 종종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의 인격을 격하시키고 학대하고 한숨으로 인생무상을 읊조리는 분들을 만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어떤 경우에도 절망하거나 낙심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나로서는 무능하고 필요 없는 존재이지만 그리스도안에서는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흙이다
성경에 말씀하는 인간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사야 64:8절에서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린도후서 4장7절에서도 우리는 하나의 질그릇 곧 흙덩어리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무엇이냐? 너는 흙이다.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2:7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하나님께서는 제일 마지막 순간에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때는 이미 이 세상 만물이 다 지어져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 없는 재료가 없었습니다. 단단하기로 말하면 강철이 더 단단하고, 불변하기로 한다면 금이 더 불변하고, 값으로 따진다면 다이아몬드가 훨씬 더 비쌉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실 때에 다른 재료가 아닌 흙으로 빚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을까요?
흙은 생명의 상징입니다.
모든 생명은 흙에서 잉태되어집니다.
초식동물이나, 육식동물 모두는 흙에서 나는 열매를 먹고삽니다.
사람을 흙으로 만드셨다는 것은 생명의 법칙을 알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서 하루를 보내고서는 하루를 살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하루를 살았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루를 죽였다는 말입니다. 매일매일 산다는 것은 매일매일 죽어간다는 것입니다. 50년 후, 30년 후이던 간에 언젠가는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점차로 죽음을 향하여 하루하루를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게도 언젠가 반드시 죽음이 온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남아 있는 시간을 영원한 생명으로 채워 가는 것이며 죽음 이후를 대비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4장 26절에 의하면 인간이 최초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던 것은 셋이 ‘에노스’를 낳은 후였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에서 4장 25절까지를 읽어보면 인간이 하나님을 자발적으로 부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이때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을까요?
에노스라는 이름은 히브리말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에노스 이전까지 인간은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무지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을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에게 죽음이 온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에 아들의 이름을 에노스라고 짓고 생명의 근원 되시는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던 것입니다.
인간은 본래 흙에서 나는 것을 먹고살다가 흙으로 돌아갑니다. 묘지 이장을 하는데 가보면 가난한 사람의 무덤을 파면 몇 개의 뼈만 남기고 흙이 되어 버린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호화롭게 묘를 꾸미고 두꺼운 관으로 거창하게 치장한 경우에는 몇 년이 지나도 다 썩지 않아서 흉한 경우가 많습니다. 아무리 잘 가꾸어 놓아도 시간이 흐르면 소용이 없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무덤인 피라미드 속의 미이라는 3000년이 지난 지금 대영 박물관의 전시품이 되어져 있을 뿐입니다. 인간은 흙입니다.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맹자의 어머니는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와 함께 동서양의 대비되는 현모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맹모삼천지교’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맹자를 데리고 장의사 옆에 살았더니 아이가 장의사 흉내를 냅니다. 시장바닥으로 이사를 갔더니 장사꾼 흉내를 냅니다. 그래서 학교 근처로 데리고 갔더니 공부를 하게 되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맹자의 어머니는 현모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 이 맹모삼천지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나왔습니다. 맹자의 어머니가 그야말로 동서양의 모든 사람이 현모로 인정하는 분인데, 그런 지혜로운 분이 왜 아무 생각도 없이 사랑하는 아이를 장의사 곁에서 살게 했겠는가? 그리고 이왕 이사를 갈 것이면 처음부터 학교 옆으로 갈 것이지 장의사나 시장 옆으로 갔을까? 그래서 새로운 해석을 하는 사람들은 맹자의 어머니가 맹자에게 먼저 인생의 죽음을 가르쳤다고 말합니다. 처음에 장의사 옆에 산 것은 매일 장의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장례식을 보면서 인생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에 맹자를 데리고 시장바닥으로 이사간 것은 죽음을 알아야 생존의 현장에서 바르게 살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학교 옆으로 데리고 간 것은, 생과 사를 분명히 아는 자만이 그 속에 참된 교육을 담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의미심장한 해석입니다.
로마에서 초기 기독교는 카타콤베, 즉, 지하묘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기독교의 시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골고다 위에 세워지면서 시작됩니다. 왜 골고다에 십자가가 세워졌을까요? 유대인의 전설에 따르면 그 골고다 위에 인류 최초의 인간인 아담의 무덤이 거기에 있었고, 그의 유골이 거기에서 발굴되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죽음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흙에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입니다. 이 과정으로 겸손하게 그리고 깨끗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죽는다는 문제에 대해서 미리 생각하고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얼마 전에 한 모임에서 부부가 자신들이 지금 죽는다는 가정아래 유언을 쓴 것을 서로 읽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사랑하는 이를 두고 떠나야 하는 절절한 사랑과 아픔이 마음에 다가와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언제 떠날지 모르는 인생이기에 준비하고 있다가 때가 되면 좋은 마음으로 “때가 되어서 갑니다”라고 떠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질그릇 속의 보배
오늘 말씀은 사람을 가리켜 금그릇이나 은그릇이 아니라 질그릇이라고 하였습니다. 깨어지기 쉽고 상처 나기 쉬운 것이 질그릇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질그릇’은 ‘유약을 발라 광택이 나는 상태가 아닌 초벌구이의 질그릇’입니다. 질그릇이란 값이 쌀뿐 아니라 깨어지기 쉬운 것입니다. 인간 존재가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은 흙에서 취함을 입었으며 언젠가는 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인격적으로도 완전하지 못한데다가 죄 아래 있어서 하나님의 보배를 간직할만한 자격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오래 전 어느 탄광에서 작업을 하던 한 광부가 옷감이 귀하다보니 어떤 짐을 포장했던 천을 잘 손질해서 옷을 해 입었습니다. 그런데 그 천은 어떤 깨지기 쉬운 물건을 포장했던 것으로서 굵고 선명한 글씨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옷을 만들 때 글씨가 윗저고리 잔등 뒤쪽에 위치하게 되었는데 내용이 이러했습니다. “깨어지기 쉬우니 취급주의!” 우리들 역시 쓰여지지 않았을 뿐 우리는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이라는 기막힌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질그릇이 보배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릇은 거기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그 가치와 의미가 달라집니다. 쌀을 담으면 쌀그릇이고, 쓰레기를 담으면 쓰레기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질그릇이 가치는 질그릇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겨져 있는 내용입니다.
옛날 서양 선교사들이 한국에 와서는 요강 그릇을 보니까 사탕 담아 먹기 좋게 생겼다고 사탕 그릇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나의 택한 그릇”(행9:15)이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그는 자신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우리를 그릇으로 만드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하필이면 질그릇입니다. 질그릇은 값이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속에 보화가 담겨 있기 때문에 굉장한 값어치를 지니게 됩니다. 값은 보화가 만들고 거기에서 평가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보화는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진 인간의 영혼 속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인간은 귀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질그릇은 값이 없지만 그 속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곧 보화가 담겨져 있기에 매우 비싼 값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것을 볼 때에 사물의 외면적인 부분만을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질그릇 속에 보화가 담겨져 있다고 해도 사람들 눈에는 속에 든 보화는 잘 보이지 않고, 질그릇만이 보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외모지상주의 사회 속에서는 사람을 볼 때에도 내면보다는 외면에 더욱 큰 가치를 부여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 코미디 프로그램 중에 ‘못생긴 것들이 잘난 척 하기는 적어도 나 정도는 돼야지’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 말을 할 때마다 야유를 듣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대사를 하는 코미디언은 그리 잘난 얼굴 생김이 아님에도 자신을 옥동자라고 부르기 때문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는 ‘잘생기고 예쁜 애들이 성격도 좋더라?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인성을 평가하는 기준에 외모를 비중 있는 요소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야흐로 외양이 내용을 지배하는 시대가 도래 한 것입니다. 이러한 외모지상주의는 사라져야 합니다. 외모가 한 사람이 가진 여러 가지 장점 중 하나로 인정받는 것은 수긍하지만 외모로 모든 것을 평가하려는 사회는 비정상적이고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외모는 외모일 뿐입니다.
탈무드를 보면 어느 날 아주 지혜롭지만 얼굴이 못 생긴 랍비가 로마 황제의 공주와 만나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공주가 랍비를 보고,"그렇게도 총명한 지혜로움이 이렇게 못난 그릇에 담겨 있군요"라고 말하자, 랍비는 화도 내지 않고 천연스럽게 공주에게 "공주님, 이 왕궁 안에 있는 귀한 술은 어떤 곳에 담아 둡니까?"
그러자, "보통 질그릇에 담아 두죠."
랍비는 깜짝 놀라는 표정으로 "아니 로마 황제의 공주 되시는 분께서 금이나 은그릇도 많을 텐데 왜 보잘것없는 질그릇 같은 것을 사용하시나요?"
그 말은 들은 공주는 이제까지 금이나 은그릇에 담겨 있던 물을 질그릇에 옮겨 담고 보잘 것 없는 질그릇에 들어 있던 술을 모두 금과 은그릇에 옮겨 담았습니다.
그러자, 술은 곧 맛이 변하여 본래의 술맛을 잃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황제가 술맛을 보고 누가 이런 곳에다 술을 담았느냐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공주는 놀라 황제에게 용서를 빌고 랍비를 찾아갔습니다.
"랍비님, 어째서 나에게 이런 일을 하도록 하셨지요?" 그러자, 랍비는 "나는 다만 공주님께 대단히 귀중한 물건이라도 때로는 보잘것없는 그릇에 담아 두는 쪽이 더 나을 수도 있음을 가르쳐 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겉모양이 좋다고 반드시 능력도 좋은 것은 아닙니다. 즉, 외모는 그 사람의 능력을 뜻하는 척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한 평가 기준이 달라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18년간이나 귀신들려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천대를 받은 여인을 보자마자 그를 고쳐 주시고 아브라함의 딸이라는 놀라운 축복을 하셨습니다(눅13:10-17). 자그마치 18년간 미치광이 노릇을 했다면, 그 외모가 말이 아닐 것입니다. 어떻게 옷은 입었는지 모르지만 그 몸에서 나는 냄새는 대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을 보자마자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질그릇을 보신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신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시각으로 우리 자신과 이웃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비록 금이 가고 깨어져 있어도 그 속에 보화가 있으면 값비싼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본문 7절 하반 절에 “우리가 이 보화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하노니” 금 그릇도 있고 은그릇도 좋은데 하필이면 질그릇인가? 그 이유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보화를 품은 인생
여러분! 우리가 때로는 병들고 힘들어서 약하고 비참하게 보일 때도 있지만, 질그릇같이 연약한 우리 안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연약한 그릇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십니다.
중국 내지 선교의 문을 연 허드슨 테일러는 이런 말을 종종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크게 쓰신 사람들은 모두가 연약한 사람들이었으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늘 그들과 함께 하신다고 생각했기에 그분을 위해 큰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질그릇과 같이 죄인이고, 약하고, 흠이 많고, 넘어지고 깨어지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의롭다 함을 얻은 죄인이며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기에 8절을 보면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는다고”라고 말씀합니다.
천대를 받아도 부끄럽지 않고, 깨어져도 아깝지 않고, 그 누가 멸시해도 조금도 낙심하지 않는 것은 우리 안에 보화를 담고 있어서입니다. 나는 비록 약하지만 주의 힘은 강합니다. 우리 자신이 질그릇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면 이 세상을 살면서 시비하고 흥분할 필요가 없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날씬한 사람들에게 뚱뚱하다고 하면 웃고 말지만, 저 같이 살을 넉넉한 사람에게 뚱뚱하다고 하면 화가 납니다. 유식한 사람을 보면 “이 무식한 사람”하면 가만있지만, 낫 놓고 기억 자도 모르는 사람에게 무식하다고 하면 싸우자고 달려들 것입니다. 이와 같이 화를 내고 분노하고 열등의식을 가지는 것은 아직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귀한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싸구려 옷을 입고, 싸구려 음식을 먹어도 상관이 없고 다른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말하든지 관계가 없습니다.
이제는 나를 무시한다, 상처받았다는 말을 그만했으면 합니다.
나의 진정한 가치가 내 외적인 것에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보화입니다.
내 속에 이 보화를 간직하고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교만하지 않으며, 보배로 인하여 자랑과 긍지를 지니게 될 것입니다.
비록 질그릇은 잘못 구워지기고 깨어지고 금이 가서 땜질을 했어도 보화는 그래도 있는 것입니다.
망하여도 깨어져도 멸시를 당하는 것은 질그릇뿐 보화는 어떤 경우에도 남습니다.
본문 11절에 “우리 산 자는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 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예수의 생명, 그것이 우리 속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하고 망해도 깨어져도 우리는 상관이 없지만, 오히려 깨어지는 것을 통하여 보화가 드러납니다. 어느 순간 이 질그릇은 요단강 가에 설 것입니다. 그리고 깨어 질 때 이 보화가 찬란하게 빛날 것입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고후5: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우리는 토기장이 되신 그 분의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셨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 인생은 질그릇이기 때문에 쉽게 깨어질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아 18장 4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는 우리를 빗으시고 다시 깨뜨리시는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한번 실수했다고 해서 아주 넘어지게 하시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의 삶을 돌이켜보면 어떤 사람은 소년 시절에 인격과 신앙과 건강이 파손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청년 시절에, 어떤 사람은 장년 시절에 인격과 신앙과 건강이 파손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인생의 끝장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은 토기장이가 되시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토기장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버리시지 않고 붙잡으십니다.
우리들의 부서지고 깨어진 인격과 신앙과 건강을 회복시켜 주시고 다시 아름답고 쓸모 있는 그릇으로 만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손안에 있을 때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다윗이 인생의 역경 앞에서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51;10)라고 기도한 것 같이 이 시간 회개하는 마음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여 깨어진 나를 새롭게 빚어 주소서. 나를 새로 창조하시고 나를 새롭게 하소서!" 이 기도를 통하여 내 속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그릇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의 도구 됨을 깨닫고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쓰임 받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