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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6 장 : 유다 왕국 시대 2 - 1
1. 히스기야(주전 715-686년, 대하 29:1-32:33, 왕하 18:1-20:21, 사 36:1-38:22)
1] 반 앗수르 정책과 개혁운동
히스기야 왕은 예루살렘에서 29년을 치리 했다(대하 29:1, 왕하 18:2). 역대기의 저자는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한 자라고 칭송한 하나님을 진심으로 의지한 사람이었다. 그는 모세의 율법에 충성하였고,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는 반 앗수르 적이었다. 그는 블레셋을 물리쳤다. 하나님께서 그를 형통케 하신 것이었다.
2] 종교 개혁 운동(대하 29:3-31:21)
히스기야는 아하스가 폐쇄한 성전의 문을 다시 열고 정결케 하는 데 힘썼다. 성전의 숙청이 끝난 후 모세의 법에 따라 번제와 화목제의 큰 제사를 드림으로 유다 왕국이 하나님 앞에 돌아온 것을 분명히 하고, 성대하게 유월절을 지킬 것을 명하였다.(대하 30:1-27) 그는 북쪽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초청장을 보내어 예루살렘에서 함께 절기를 지키도록 하였다.(대하 30:1) 북쪽의 많은 사람들이 이에 호응하였다.(대하 30:18)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매우 기뻐하였는데, 솔로몬 이후 그러한 기쁨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들은 감격한 나머지 7일의 절기를 지키고 나서 또 다시 7일간 절기를 지켰다.(대하 30:23) 히스기야는 모든 산당들을 훼파하고 모세 때부터 있어오던 놋뱀(민 21:8,9)을 부수고 "느후스단"(놋조각)이라고 했다.
3] 앗수르 왕과 히스기야(사 20:1-6)
히스기야는 처음부터 반 앗수르 적이었다. 사마리아를 점령한 사르곤이 살아 있을 동안에는 공개적으로 앗수르를 대항하지는 않았다. 사르곤 왕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포로로 끌어가고 다른 백성들을 그 곳에 이주케 한 후에 강력한 통치권을 행사했다. 주전 711년에 아스돗의 반란으로 그는 블레셋에 출병하여 그것을 진압했다. 그때 애굽은 아스돗을 돕기로 약속했으나 실패했다. 히스기야 왕도 아스돗을 도와야 할 입장에 있었으나, 지혜롭게 피하여 사르곤의 공격을 면하게 된 것은 이사야의 권면에 의한 것으로 생각된다.(사 20:1-6)
4] 산헤립 왕의 침략(대하 32:1-21, 왕하 18:13-19:37, 사 36,37장)
사르곤의 아들 산헤립이 앗수르왕이 되자 예속되었던 나라들이 독립하기 시작했다. 히스기야 왕은 애굽의 후원을 얻어 두로를 위시하여 아스글론과 에글론과 더불어 반 앗수르 동맹을 맺어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대하 32:5) 그는 앗수르 군이 공격할 때에 물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물을 막아 실로암 굴을 파서 물을 성내로 끌어들여 백성들이 그 물을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산헤립은 예루살렘을 공격해왔다. 그는 라기스를 점령하여 본부를 설치하고, 부하 랍사게를 예루살렘에 보내어 온갖 모욕으로 히스기야에게 항복할 것을 요구했다.
주변국들은 앗수르에게 굴복한 때였다. 히스기야는 라기스에 있는 산헤립에게 화해를 청하여 은 3백과 금 30달란트를 주고, 성전과 왕궁에 있는 은과 금을 다 거두어 보냈다. 이때 히스기야 왕이 받은 수욕을 다 말할 수 없었다.(왕하 18:13-16, 사 36:4-22) 그러나 재물로도 산헤립을 회유할 수 없었다.
이사야는 히스기야에게 용기를 주어 하나님께 기도하게 하고, 앗수르 왕이 물러나게 될 것을 예언했다. 그날 밤 하나님의 심판이 앗수르 군에 임하여 18만 5천이 죽고 산헤립은 떠나갔다. 북방 이스라엘은 아모스와 호세아를 배척하여 스스로 패망의 길을 갔지만, 유다 왕 히스기야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에 따라 하나님을 의지하여 나라를 보전할 수 있었다.
5] 히스기야의 병과 바벨론 왕의 사신(대하 32:22-31, 왕하 20장, 사 38,39장)
(1) 히스기야의 병(왕하 20:1-7, 대하 32:24-26, 사 38장)
히스기야는 전쟁 중에 병을 얻었다. 그의 간절한 기도로 생명을 15년 연장하였으며,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표징으로 일영표가 10도 뒤로 물러가는 이적을 보이셨다.(왕하 20:9-11)
(2) 바벨론 왕의 사신들의 내방(대하 32:25,31, 왕하 20:12-19)
히스기야 왕의 치유 후 바벨론 왕 부로닥발라단이 위문의 사신을 보냈다. 바벨론은 유다와 동맹을 맺고 그 동안 시달려온 앗수르를 공격하기를 원했다. 히스기야는 자기의 보물들을 보여주면서 부강함을 자랑했다.(왕하 20:13)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보내 그를 책망하고, 장차 왕궁의 모든 것과 열조가 쌓은 것을 바벨론으로 옮겨 갈 것을 예언하였다.
2. 므낫세(주전 686-642년, 대하 33:2-10, 왕하 21:2-16)
므낫세는 12살 때에 부왕 히스기야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55년간을 통치하면서 남북 이스라엘과 유다를 통틀어 가장 오래 동안 나라를 통치한 왕이 되었다.
1] 종교적 부패(대하 32:2-10, 왕하 21:2-16)
므낫세는 부왕이 헐어버린 산당들을 다시 짓고 바알의 제단을 다시 세웠으며 아세라 목상과 하늘의 일월성신을 숭배하였다(왕하 21:6, 대하 33:3-5). 몰렉에게 아들을 번제로 드려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였으며, 점을 치고 사술을 행할 뿐 아니라(왕하 21:6, 대하 33:6), 반대하는 사람들을 죽이기까지 하였다. 유대인의 전설은 므낫세가 선지자 이사야를 통속에 넣어서 톱으로 켜서 죽였다고 한다. 그는 앗수르의 호의를 얻기 위하여 앗수르의 종교와 풍속을 따랐으나, 오히려 앗수르에게 완전히 예속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2] 하나님의 징계와 회개(대하 33:11-20)
그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앗수르로 끌려가게 되었다. 포로에서 돌아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기도하였고, 모든 우상들을 제거하였으며, 여호와의 단을 중수하고 백성들에게 여호와를 섬길 것을 지시하기도 하였다.(대하 33:12-19)
3. 아몬(주전 642-640년, 대하 33:21-25, 왕하 21:19-26)
아몬의 2년 통치는 부왕의 타락한 정치를 재현한 데에 불과하였다. 므낫세는 말기에 회개하였지만 아몬은 마지막까지 회개하지 않았다. 마침내 하나님의 징벌로 인하여 자기 신하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백성들이 일어나 아몬을 죽인 자들을 다 처형하고 그 대신 8살밖에 되지 않는 그 아들 요시야를 왕으로 삼았다.
4. 신 바벨론과 유다 왕국의 멸망(주전 640-586년, 대하 34-36장, 왕하 22-25장)
요시야 왕을 끝으로 유다 왕국은 마지막 시대로 접어들었다. 앗수르의 세력도 약화되었다. 앗수바니발 왕의 뒤를 이은 왕들은 유능하지 못하여 니느웨가 멸망할 때까지(주전 612년) 약해져갔다. 신 바벨론은 이때를 이용하여 새로운 국제 질서의 주도권을 잡고 부강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요시야 때의 유다는 비교적 평화로운 중에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요시야의 뒤를 이은 왕들은 성장해 가는 바벨론에게 시달리다가 주전 586년에 멸망당했다.
1] 요시야(주전 640-609년, 대하 34-35장, 왕하 22:1-23:30) : 유다 왕국 최후의 개혁
요시야는 8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그의 배후에는 경건한 신앙 인물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요시야 왕을 충성으로 섬겼다. 치리기간 31년은 부흥 발전하던 시기로, 유다 왕국 창건 이래 가장 행복했던 때였다. 그는 온 이스라엘의 우상을 제거했다.
(1) 개혁 운동(대하 34:8-35, 왕하 22:3-23:25)
요시야가 등극한지 8년, 그의 나이 16세에 하나님을 찾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다. 20세에는 예루살렘과 유다와 북방 여러 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우상을 제거하였다. 이러한 정화 운동은 6년간의 세월이 걸렸다(대하 34:1-8). 이것은 유다 역사에 전무후무한 일로 성전을 수리하다가 발견한 율법책으로 인하여 절정에 이르렀다. 제사장 힐기야는 그 책을 서기관에게 주어 왕 앞에서 읽게 하였다. 율법의 내용을 들은 요시야는 그 자리에서 자기 옷을 찢으면서 회개하고(대하 34:19), 온 백성들과 함께 여호와 앞에 언약을 세워 하나님만 섬기기로 서약했다(29-33).
그의 신앙의 큰 부흥은 성경을 발견하기 전에 성전을 수리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에 시작 되었다. 그는 발견된 율법책을 읽으면서 열조의 죄를 깨닫게 되었고, 즉시로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서약 했다. 요시야의 개혁은 히스기야 때보다도 더 철저했다(왕하 23:13).
유다에서는 솔로몬 때부터 있었던 우상과 산당들이 제거되었으며, 이스라엘도 여로보암 때에 세웠던 우상의 제단들을 훼파해버렸다. 우상 제거와 함께 신앙운동이 절정을 이룬 것은 모세의 율법대로 온 백성들이 모여 유월절을 지킨 때였다(대하 35:1-19, 왕하 23:21-23). 구약 성경은 사사 시대 이후 요시야 때처럼 이스라엘의 역사 중에서 유월절을 크게 지킨 적은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대하 35:18, 왕하 23:22).
* 참고 : 요시야의 종교 개혁의 영향
요시야의 종교 개혁은 당시 뿐 아니라 이후에도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과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요시야의 종교 개혁은 말씀과 언약에 대하여 진지한 태도를 가지게 하였다. 흔히 정부가 주도하고 백성들이 호응하는 개혁 운동은 불안정한 기초 위에서 진행될 때가 많았다. 그러나 요시야의 종교 개혁은 왕이 직접 개혁을 주도하는 정치적인 상황에서 진행되었으나, 외국의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국가주의가 이에 박차를 가해 주었다.
예레미야는 이 운동을 적극 지지했다. 개혁이 형식으로 흐르자 이에 맹렬하게 공격하였다. 요시야는 백성들이 예루살렘에서만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하였다. 백성들은 여호와께서 그들 가운데 임재 함으로 자신들의 안전이 보장된다고 생각하였다(렘 4:4,5, 7:4). 그러나 순종하지 않는 백성들에게 안전이란 있을 수 없었다. 어쨌든 예레미야는 요시야의 통치방식이 훌륭했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그를 높이 평가하였다(렘 22:15,16).
신명기의 요지는 여호와를 신실히 경외하는 자에게는 보호와 축복이, 경외하지 않는 자에게는 고통과 불행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 원리는 국가의 번영을 비롯하여 사회의 전반적인 면에 적용되었다. 특히 불순종할 때는 그들의 땅을 잃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신 4:25-31, 8:19,20, 11:1-17, 28:58-68). 요시야의 종교 개혁 후에 이 원리에 대해 의아심을 품을 만한 고통스러운 사건들이 계속 발생하였다.
요시야의 종교개혁으로 인하여 주전 538년에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으로부터 돌아온 이후에 당연히 모든 예배는 예루살렘에서 드리는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 무렵에 동물들을 팔고 돈을 바꾸는 자들이 등장하여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예배드리기 위해 오는 순례자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었다.
(2) 요시야 말기의 국제 정세와 므깃도 전쟁(대하 35:20-27, 왕하 23:28-30)
앗수바니발이 죽은 후에(주전663년) 앗수르는 유약한 자들이 그 뒤를 이었으므로 국력은 쇠약해졌다. 약해진 앗수르는 바벨론의 공격을 받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메데까지 바벨론과 연합하여 앗수르를 공격했다. 주전 612년에 바벨론과 메데의 연합군은 앗수르를 점령했고, 2년 후에는 니느웨를 포위하자, 그 성은 포위 3개월 만에 점령되었다.(니느웨에 대한 멸망은 선지자 나훔에 의하여 20년 전에 예고되었다.(나 3:1-7, 16-19)
앗수르는 대오를 정비하여 하란에서 전쟁을 재개했으나, 주전 610년에 하란이 바벨론에게 점령을 당하고 말았다. 앗수르는 다음해인 주전 609년에 또 다시 하란 탈환 전쟁을 벌였으나 그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때 애굽의 바로느고가 급속히 성장하는 바벨론을 견제하기 위하여 앗수르를 도와 바벨론을 치려고 출정하였다.
요시야 왕은 이스라엘이 독립하기 위해 앗수르가 멸망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바벨론을 치려고 진군하는 애굽의 군대를 막으려 하였다. 요시야는 바로느고의 출정을 막기 위해 전쟁에 나갔다가 므깃도에서 전사하고(왕하 23:29,30, 대하 35:23,24), 이 일로 인하여 애굽은 앗수르를 돕지 못하고, 하란은 바벨론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