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당 이기성 등단 심사평】
[소망에 불꽃을 점등하다!]
사랑은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무왕과 선화공주와 같은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어쩌면 노트르담의 꼽추에 등장하는 흉측한 종 치기와 가장행렬에서 만난 집시 에스메랄다의 사랑이 저들의 사랑보다 몇 배 절절할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이 시(詩)가 되다’라는 주제로 덕향문학 강의실에서는 매주 목요일에 문학강의가 있다. 최기복 교수는 정치, 교육, 학문, 문학 등 여러 방면에서 석학이다. 최교수가 심혈을 기울이는 분야 중 하나가 바로 문학(文學)이다. 파란만장한 삶의 노선에서 소용돌이치는 파도를 넘고 천인단애에 드리운 외줄을 타는 광대를 자처하고 생명을 붙들어줄 쥘부채로 문학을 선택하고 혼신을 다하고 있다.
문학 강의실을 노크하는 수강생들도 살아온 보따리 풀어놓으면 굽이굽이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를 오르내리면서 간직한 역사가 가득 담겨 있다. 세상에서 전성기 시절 뾰족한 이등변 삼각형의 꼭짓점을 짙게 찍었던 사람, 지역에서 내로라하고 이름 석 자 대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활약했던 사람, 넓은 가슴과 어깨를 쫙 펴고 목에 힘을 주는 사람들이 문학 강의실에서는 순한 어린아이와 다름없다.
우선 모든 분야의 학문과 이론을 총망라하여 문학으로 승화한 최교수의 열정적인 강의에 놀란다. 시제(詩題)를 내놓으라는 요구에 눈앞이 캄캄해진다. 그러다가 용궁의 용왕 앞에서 해학과 재치로 탈출하는 별주부전의 토끼의 입담에 모든 긴장의 끈을 늦추고 넋을 잃는다. 사람이 사람이기를 거절한 참담한 현시대에 맑은 물 한 바가지 쏟아붓는 일은 시(詩)를 쓰는 일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해진다.
강의실에서 강의를 듣는 순간, 너도나도 할 수 있을 것만 같다고 한다. 시를 쓰는 일이 혼탁한 세상에 맑은 물 한 바가지 붓는 일이라는 것에 투사처럼 팔을 걷어 올린다. 그중 한 사람이 성당 이기성 시인이다. 원성 1동 주민 자치회장으로서 원성천 물길축제 시화전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문학(文學)에 귀의하게 되었다.
성당 이기성 시인의 도전은 결코 늦지 않았다고 역설한다. 지금까지 살아온 시인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아내와 세 자녀의 행복을 든든하게 지켜준 가장의 모습이 귀감이다. 기관의 굵직한 직책들을 맡아왔던 이력을 채마밭을 가꾸고 있는 소박한 일상으로 덧씌운다. 그리고 새로 얻은 시인이라는 이름을 가장 고귀하게 받아 가슴에 담는 소년이 된다. 그의 작품을 살펴본다.
1. 나이가 드나 보다
호젓한 그리움에 몸을 뒤챈다
새벽잠을 잃어버린 노년의 시간
시간 속을 잠행하다 보면
흑백 영사기가 돌아간다
실루엣이 되어 펼쳐지는 영상 속의 주인공은
나!
앳된 모습의 유년
손에 들린 솜사탕 위엔 은빛 하늘이 살랑 거리고
가끔씩 가위에 눌리는 꿈 속에서는
병상에 누워 죽을 날 기다리는 노년의 자화상이
초음파의 영상으로 일렁인다
처마 끝의 낙수 소리라도 들리는 날엔
삭신이 쑤셔 오는 신경통 증세가 도진다
남은 세월을 어이 해야 하나
기울기 시작하는 해를 동여맬 동아줄은 없는 것인가
붙잡지 못하는 세월 앞에
당당한 모습으로 서기를 바라는 염원
어차피 무위가 될 부질없는 기원(祈願)
허무의 극치 앞에 서 있는 오만?
아니다!
삶은 그런 게 아니다 // <나이가 드나 보다> 전문
첫 번째 작품 <나이가 드나 보다>에서 나이가 들어가는 시인은 새벽잠을 잃어버리고 있다. 이리저리 뒤척이다 모로 누워 상념에 잠겨 비몽사몽 시간여행을 하면서 파노라마처럼 돌아가는 추억 저편 유년시절에 정착한다. 손에 들린 솜사탕 위에 유영하는 구름과 바람이 있다. 그러나 이내 가위에 눌린 꿈 속에는 노년의 자화상이 짙은 초음파의 영상으로 일렁인다. 기울기 시작하는 해를 동여맬 동아줄을 찾는 시어(詩語)가 이토록 절절하다니. 청춘을 돌려달라는 대중가요의 노랫말과 오버랩되면서 허무의 극치 앞에 서 있는 시인을 본다.
2. 물길 축제에 부치는 글
원성천 천변에 앉아
흐르는 냇물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태고산 정기를 담고 아래로 아래로 흐르며
전하는 말
사랑과 이별은 인간의 뿌리 깊은 속성이란다
물이 물일 수밖에 없듯이
사랑은 사랑이고 이별은 이별이란다
천년을 흘러오며 안으로 안으로 숨죽여 온 젖은 음성은
냇가를 찾아 배회하는 시민들의 허기진 일상에 양식이 되고
물속을 헤엄치는 송사리 떼의 몸짓에는 삶의 욕망이 꿈틀댄다
미나리 밭의 전설 속에
홍수로 몸살을 앓든 기억의 회로는 지워지지 않는다.
바다로 향하는 대의를 품은 물줄기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드는 물줄기의 한(恨)
소담한 역사가 쌓인다
원성천은 영원한 축제의 장이다 // <물길 축제에 부치는 글> 전문
두 번째 시 <물길 축제에 부치는 글>에서 상선약수(上善若水)를 떠올린다. 그 말은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물은 최상의 선이라는 의미이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장애물을 만나면 돌아 흐르고, 절벽을 만나면 폭포가 되어 낙하하고 종국에는 바다로 흘러간다. 시인은 원성천 천변에 앉아 태고산 정기를 담고 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물을 보고 흐르는 물에 사랑과 이별을 투영시킨다. 냇가를 찾는 시민들의 허기진 일상에 양식이 된다는 표현에 방점을 찍는다. 미나리 밭의 전설과 홍수로 몸살을 앓던 기억의 회로는 원성천 물길 축제 시화전을 만나 물속을 헤엄치는 송사리 떼의 꿈틀대는 몸짓으로 덕향문학 강의실을 노크했으리라.
3. 천변의 요람
어디에 사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원성천변에 산다고 대답하리라
왜 거기서 사느냐고 묻는다면
태조산의 정기를 타고 나오는 전설이 숨쉬기 때문이라고
왜 원성천이 좋으냐고 묻는다면
살다 보니 정이 들어서라고
무슨 정(情)이 그렇게 도타우냐고 묻는다면
보면 모르느냐고
저 철모르는 송사리 때의 유영이 보이지 않느냐고
원앙의 물갈퀴에 희살 짖는 물살이 보이지 않느냐고
추억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70년 세월 속
또랑치고 미꾸라지 잡던 소년 이 보이고
봄이면 피어나는 벚꽃 그늘 속에
미숙한 한 청년의 사랑 고백이 들리고
남은 여생 떠날 수 없는 운명이 나를 결박하기 때문이라고
이팝나무의 연가가 줄기마다 피어오르는 오월
하릴없이 바라다보는 냇물이 햇살을 받아 눈웃음을 치고 있다
원성천과 결박 지워진 운명이 기구하기도 하다 // <천변의 요람> 전문
세 번째 작품 <천변의 요람>은 마치 소크라테스와 제자들의 대화처럼 다가온다. 그 유명한 공자의 ‘천 가지 질문에 한 가지 대답’, ‘한 가지 질문에 천 가지 대답’과도 다르지 않다. 항간에 이슈가 된 유명한 스님의 즉문즉설을 듣는 것 같다. 문학 강의 시간에 ‘사물에게 생명력을 부여해 주고 그 사물이 하는 말을 들어보라. 그 말을 글로 적으면 시(詩)다.’라고 했던 강의 내용을 실행하는 모습이다. 시인 스스로 묻고 시인 스스로 대답하다가 냇물을 희살 짓는 햇살의 눈웃음에 겸연쩍어진다. 그 눈웃음이 시인의 자조 섞인 웃음으로 다가온다.
4. 이팝나무꽃
5월의 하늘이
눈이 부시게 푸르다
유년시절의 이맘때
힘겹게 넘었던 보릿고개
가마솥 바닥 박박 긁어
식구들 밥그릇에 담고
두레박으로 우물물 떠서
배부르게 마시고 밭으로 간 어머니
어둠을 등에 지고
사립문에 들어서는 어머니 치맛자락 잡고
배고프다고 칭얼대던 철부지
온몸에 밥풀 묻히고 피어난 이팝나무꽃
배곯던 자식
배부르게 먹이고 싶었던 어머니의 화신인가 // <이팝나무꽃> 전문
칠순이 넘은 시인의 연륜을 헤아린다. 눈이 부시게 푸른 5월 하늘아래 흰 이팝나무꽃이 절정이다. 파란 하늘빛을 머금고 이팝나무꽃의 흰색마저 파랗게 물들어버릴 것만 같은 아름다운 계절이다. 그러나 시인의 기억 속에는 보릿고개를 넘던 유년시절의 허기가 화인처럼 각인되어 있다. 흰쌀밥을 닮은 이팝나무꽃을 보면서 유년시절 단상이 떠오른다. 가마솥 바닥을 박박 긁어도 식구들 밥은 부족하기만 했던 시절, 우물물로 한 바가지 들이켜고 밭으로 가야 했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하얗게 피었다. 이팝나무 가지마다 하얗게 매달린 꽃송이를 보고 온몸에 밥풀 묻히고 피어난 꽃, 배고픈 자식들 배부르게 먹이고 싶었던 어머니의 화신이라고 읊조린다. 시인의 시상에 감동하고 시상을 엮어 한 편의 시로 완성한 능력에 감탄한다.
5. 채마밭을 일구며
겨우내 얼었던 대지
채마밭을 갈고 모종을 하는 날
고랑을 파고
두둑한 이랑을 만들어 멀칭을 하고
고추 몇 이랑 심고
나머지 이랑에 가지와 상추를 심는다
밭 가장자리 돌아가며
호박을 심고 오이를 심는다
뜨거운 햇살이
등줄기를 핥고 지나가는 오후
주렁주렁 매달린
고추며 가지를 생각하니
마음은 어느새 넉넉한 부자다
애호박 열리면
이웃들 불러서
호박전에 막걸리 한잔 해야지 // <채마밭을 일구며> 전문
다섯 번째 작품 <채마밭을 일구며>는 햇살이 잔잔한 냇물을 간질이듯 잔망스러운 전율이 전해진다. 채마밭을 갈고 모종을 하는 시인의 모습에서 원초적인 인간의 모습을 본다. 고랑을 파고 이랑을 두둑하게 만들고 멀칭을 하는 과정을 지루하지 않게 표현하였다. 채마밭의 규모는 알 수 없으나 고추, 가지, 상추를 심었다는 표현에서 섬세하고 다정다감한 심성을 느낀다. 밭 가장자리 돌아가며 호박을 심고 오이를 심었다는 말에서 작은 땅도 허투루 두지 않는 농부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뜨거운 햇살이 / 등줄기를 핥고 지나가는 오후 / 표현에서 이미 시인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평한다. 몇 이랑의 고추와 가지가 열매 맺을 날을 생각하면서 넉넉한 부자라는 시인이다. 애호박이 열리면 이웃들을 불러 호박전에 막걸리 한잔 하려는 시인은 사람과 사람 사이 따뜻한 정(情)을 공유하고자 하는 향기 나는 사람이라는 확신에 흡족하다.
소망의 횃불을 밝히고자 하는 나이 든 시인의 시심에 영원히 꺼지지 않을 불씨를 점등한다. 다섯 작품 중 <나이가 드나 보다>, <물길 축제에 부치는 글>, <천변의 요람>, <이팝나무꽃>, <채마밭을 일구며> 다섯 편의 작품을 천료하면서 이기성 시인의 문운을 빌며 시인이라는 거룩한 관을 씌워드린다.
<심사위원 김구부, 김인희(記), 신상성, 최기복, 최태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