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빨치산, 그 이름 없는 사람들의 진정성
더 부서질 것이 없다시피한 인천이 다시 불바다가 되고, 뒤따라 서울도 불바다가 되었다.
비행기들이 서울을 무차별 폭격해대는 정도는 작년 구월에 비해 몇 갑절 심했다. 일월이 끝나가고 있는 추위 속에서 서울은 며칠이고 계속해서 폭탄세례를 받으며 불길에 휩싸였다. 깨지고 무너지고 잿더미가 되어가는 도시 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미군 비행기들은 독판을 치고 날아다니며 그저 미친것처럼 폭탄을 퍼부어댈 뿐이었다. 서울을 불태우고 파괴하는 것은 비행기만이 아니었다. 김포 쪽에서 수없이 날아드는 폭탄도 한몫을 거들고 있었다. 이십육일에 재차 인천상륙을 감행한 지상병력의 공격이었다.
해방일보는 다시 후퇴를 서두르고 있었다. 작년 구월과 똑같이 폭격을 피해 변두리로 옮겨앉은 비좁은 신문사 안은 두서없이 어수선했다.
"이 동무, 어떡하시겠어요!" 갑자기 귓속을 파고드는 낮으나 뜨거운 여자의 음성이었다. 바쁘게 짐을 챙기고 있던 이학송은 반사적으로 허리를 폈다. 귓속말을 했던 김미선도 황급히 몸을 바로세웠다. 입을 꾹다문 이학송은 김미선을 정면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언제나 감돌던 웃음기가 사라져버린 그의 얼굴에는 무거운 우울이 담겨 있었다. 그를 올려다보듯 하고 있는 김미선의 눈은 물기가번진 채 무슨 말인가를 간절하게 하고 있었고, 얼굴에는 초조한 기색과 함께 괴로움이 드러나 있었다. 그녀의 입김이 귓전에 느껴질 정도로 그녀가 가깝게 말을 해오는 순간 이학송의 뇌리에 퍼뜩 떠오른 것은 두 가지였다. 어찌나 굶주렸는지 뼈만 앙상하게 남은 그녀의 두아이였고, '저는 못 가겠는데...'하는 생략된 말이었다.
"나는...가야 되겠습니다." 이학송은 그 짧은 말을 해놓고 마른침을 삼켰다. 김미선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달라지며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곧 눈길을 떨구며, "네, 알았어요." 들릴 듯 말 듯 말하고는 돌아섰다. 이학송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는 한숨처럼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그녀가 하려다가 말아버린 말이 들려오고 있었다.
"아이들 찾기를 단념하셨나요?" 그녀가 이 말을 참아낸 것은 자신의 괴로움을 건드리지 않으려는 것이었음을 이학송은 알고 있었다. 김미선은 열사흘 뒤에 서울로 돌아왔다. 그때 이미 이학송은 세 아이를 찾아내려고 일과만 끝나면 서울시내를 미친 듯이 헤집고 다니던 참이었다. 부역자나 그 가족을 단심제로 처단한 형편에 그때까지 소식이 없는 아내의 생사에 대해서는 이미 포기한 상태였다. 그러나 엄마를 찾겠다고 저희들 발로 걸어나간 세 아이의 행방은 찾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시당에 특별히 부탁도 했고, 집이나 부모 잃은 아이들을 모아놓은 곳을 찾아 매일같이 허덕거리고 다녔다. 한복판에 뚫린 구멍이 날마다 커져가는 가슴을 붙안고 그는 추위로 얼어붙은 하늘을 향해 소리 없는 통곡을 토해내고는 했다. 그 어린 것들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하면 한순간인들 살아 있고 싶지가 않았다. 피가 타고 살이 꼬이는 괴로움으로 그는 나날이 메말라갔다. 비록 기아상태에 빠져 있기는 했지만 두 아이가 친정어머니의 손에 무사히 지켜진 것을 확인한 김미선은 그의 괴로음을 덜어주려고 진정으로 애를 썼다. 입바른 위로의 말 같은 것은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그녀도 그의 아이들을 찾아 추위를 무릅쓰고 나섰던것이다.
"그러지 말고 일과가 끝나는 대로 빨리빨리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세요. 엄마와 오래 떨어져 산 애들이 엄마를 얼마나 기다리겠어요." "아니에요. 서너 시간 더 빨리 엄말 본다고 해서 그 애들이 더 행복해지는 건 아녜요. 저나 애들이나 서로 품고 자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제가 괴로워서 하는 일이니까 너무 마음쓰지 마세요" 그러나 세 아이의 모습은 서울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헛바람이 새는 가슴으로, 허방을 딛는 걸음으로 한 달을 보내고 다시 서울을 떠나게 되고 말았다. 그런데 김미선은 그 엇갈림길에서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고 있음이 분명했다. 사무실의 소란은 더 심해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분주하게 지시하고 응답하는 소리들이 오락가락 뒤엉키고, 책상 밀어붙이는 소리나 걸상 넘어지는 소리도 요란하게 울리고는 했다. 김미선은 그 소란 속을 곧장 걸어갔다. 그녀가 걸어가고 있는 방향에는 한 남자가 창 밖을 하염없이 내다보고 서 있었다.
그녀는 그 남자와 예닐곱 발짝 간격을 두고 걸음을 멈춰 섰다. 옆얼굴을 보이고 섰던 남자가 인기척을 느끼고 그녀 쪽으로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그는 이원조였다. 그녀를 알아본 이원조의 얼굴에 웃음기가 떠오르는 것 같다가 이내 의문이 담겼다. 이원조의 눈이 그녀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녀도 이원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물기 젖은 눈은 무슨 애절한 말인가를 담고 있었다. 슬픈 애원인 듯, 괴로운 하소연인 듯, 반쯤 울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눈에 담긴 말을 구체화 시키고 있었다. 이원조의 눈이 느리게 느리게 내려감겼다. 그리고 다물린 입술에 힘이 모아졌다. 그 힘이 풀리면서 눈이 다시 느리게 느리게 뜨여졌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이원조의 얼굴은 그저 담담했다. 그는 아까처럼 창 밖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도 소리 없이 돌아섰다. 그리고, 여전히 소란한 사무실을 그녀는 서두르는 기색 없이 걸어서 밖으로 나갔다.
그들 두 사람의 소리 없는 대화를 목격한 사람은 이학송뿐이었다. 혹시 누가 눈치챌까 싶어 그는 그녀가 문 쪽으로 가는 것을 보고 눈길을 돌려 딴전을 피웠다. 적진에서 부디 무사하시오...이학송은 담배연기를 깊이깊이 빨아들였다. 통화를 먼저 떠나오면서는 그녀의 우는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어 자신이 뒤돌아보지 않았고, 이제 그녀는 뼈마디 앙상한 두 아이곁으로 돌아가면서 그녀 자신이 뒤돌아보지 않고 떠나갔다. 그는 그녀가 떠났다는 사실 외에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는 담배를 끄고, 소각할 종이뭉치들을 한 아름 끌어안았다. 느낌이 서로 다른 폭음들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래, 얼어 죽었거나 굶어 죽었을 거야... 그는 그 동안에 애써 피해왔던 생각을 가슴에 못을 치듯이 분명하게 정리했다. 두 아들과 딸아이의 모습이 왈칵 밀려들었다. 그는 현기증과 함께 울음덩이가 치미는 것을 느끼며 오른손을 다급하게 주머니에 넣었다. 안고 있던 종이뭉치들이 와르르 마룻바닥에 쏟아져 내렸다. 주머니 속에서 그의 손아귀 가득 팽이가 잡혔다. 그는 팽이를 으스러져라 쥐며 부르르떨었다.
"이 동무, 어디 아프오?" 누군가가 물었다. "아닙니다, 갑자기 주머니에서 뭘 좀 찾을 게 있어서요." 이학송은 흩어진 종이뭉치들을 그러모으기 시작했다. "아 예에, 빨리빨리 합시다. 곧 출발하는 모양이오." 이학송은 종이뭉치들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 담 옆에서 종이들이 타며 불꽃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불길 속에다가 안고 온 종이뭉치들을 던졌다. 문득 불길이 잦아지는 듯하다가 연기를 물큰 피워올리며 활짝 기세를 폈다. 혹독한 추위를 뚫고 다시 서울로 와 해방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열성적으로 기록했던 것들이 불길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는 그 불길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 크지 않은 불길은 민족통일의 역사, 인민해방의 역사가 좌절되고 있는 상징으로 느껴졌다. 이렇게 떠나서 또다시 서울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인가... 그는 고개를 젖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서울시내가 며칠째 계속 불타고 있는 연기가 그대로 겹겹이 뭉쳐진 것처럼 하늘에는 구름이 두껍게 끼어 있었다. 이월로 접어들면서 추위도 어느 만큼 수그러져 있었다.
"이대로 가면 양키들은 곧 몰아낼 수 있을겁니다." 남진하는 부대를 따라 서울을 떠나기 직전에 김범우가 찾아와 한 말이었다. 그는 어느 때없이 미군에 대해 자신감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다시 서울을 무자비하게 쑥밭을 만들어대고 있었다. 적이고 민간인이고를 가리지 않는 그들의 무차별한 폭격은 그야말로 자기네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제국주의적 잔학이고, 발악이었다.
다만, 그들의 무자비한 초토화작전에 박수갈채를 보내고 있는 인간들은 이미 서울을 떠나 이승만정권을 에워싼 채 덕을 보고 있는 친일반민족세력들과 새롭게 생겨난 기회주의자들뿐이었다. 김범우는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이학송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 동무, 빨리 안으로 들어오시오. 곧 출발이오!" 이학송은 외침을 따라 몸을 돌렸다. 무의식적으로 오른손이 주머니로 들어갔다. 다시 손에 팽이가 잡혔다. 그래, 가야지. 그는 팽이를 꼬옥 쥐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월 칠일이 저물고있었다.
"대장님, 큰일났습니다!" 부관이 뛰어들며 토해낸 말이었다. 그는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또 무슨 일이오?" 심재모는 퉁명스럽게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찡그러진 얼굴에 짜증이 묻어나고 있었다. "예, 장정들이 데모를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데모?" 심재모는 그 색다른 사건에 문득 긴장을 느꼈다. "예, 우리는 짐승이 아니다 급식을 제대로 하라, 우리는 개죽음할 수 없다 약품을 조달하라, 이렇게 외쳐대기 시작했습니다." "그 수가 얼마나 되오?" "장병 전원입니다." 심재모는 팔짱을 끼었다가 오른손을 입으로 가져가며 고개를 수그렸다. 올 것이 온 것이었다. 어쩌면 늦게 온 일인지도 몰랐다. 마음이 무겁게 내리눌리고 있었다. 전혀 수습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른 교육대들은 어떤지 좀 알아보시오." "예, 알겠습니다." 부관이 돌아섰다.
"아니오, 아니오, 관두시오." 심재모는 금방 말을 고쳤다. 주변의 훈련소들이 같은 상황이라 하더라도 무슨 뾰족한 해결책이 강구될 리 없었다. 고작해야 사정없이 몰아치라거나, 주모자를 색출해내서 본때를 보이라는 정도의 말을 듣게 되기가 십상일 터였다. 그리고, 자기네 교육대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은 소장에게는 흉만 잡힐 일이었다. "지금 어떤 상태에 있소?" "예, 소대마다 막사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양쪽 문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습니다." "됐소, 그러지 말고 모두 연병장에 집합시키시오. 내가 곧 나가겠소." "아니, 어떻게 하시려구요? 무슨 좋은 해결책이 있으십니까?" 부관의 얼굴에 의문과 기대가 엇갈리고 있었다.
"일단 집합이나 시키시오." 심재모는 명령을 내리고 등을 돌렸다. 정규훈련소에서 급조된 방위군교육대로 옮겨오면서부터 온갖 문제점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말이 좋아 교육대장이었지 그것은 엄연한 좌천이었다. 소위의 구타살인사건은 결국 흐지부지 묻혀지고 말았지만, 자신의 전출이 그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그는 잘 알았다. 결국 참모부의 장교들에게 떠밀려난 것이었다. 참모부의 장교들로 뭉쳐진 힘을 자신의 혼자 힘으로써는 어쩔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축하하오. 계급은 달라도 심 소령은 나와 똑같은 직책인 교육대장으로 영전하는 거요." 훈련소장이 목울대만 크게 울리는 소리로 껄껄거리며 웃었다. "군대에서 폭력행위는 꼭 근절되어야 합니다." 심재모는 훈련소장의 눈을 응시한 채 이 말을 똑똑하게 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이 돼먹지 못한 관동군 출신 놈들아! 부르짖고 있었다.
"아 좋소, 좋아." 훈련소장은 얼굴이 경직되면서도 더 큰 소리로 껄껄거렸다. 국민방위군교육대는 훈련소가 아니었다. 난민수용소거나 병자수용소라는 것이 옳았다. 모두가 영양실조 상태인데다가, 반 이상이 동상환자였다. 그런데 세 끼 밥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고 있었다.
가장 기본적인 급식이 해결되지 않고 있는 형편이었으니 다른 것들은 더 말할 것이 없었다. 피복 지급이 될 리가 없었으며, 추위를 막을 잠자리가 제대로 갖추어졌을 리가 없었고,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한 의무시설이 규모 있게 꾸며질 수가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전시라고는 하지만 그 무계획과 우격다짐 앞에서 심재모는 망연자실할 뿐이었다. 그가 해야 할 급선무는 교육대장의 임무가 아니라 난민수용소장의 임무였다. 그래서 그는 상부에 전화를 걸어대는 것이 중요 일과였다. 그가 독촉해대는 것은 정상급식, 난방설비, 의료시설의 조속해결이었다. 그러나 상부의 응답은 변함없이 '예산 미책정'이었다. 영양실조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는 정량미달의 부식도 없는 급식을 겨우겨우 해결해가는 상황 속에서 동상자들의 증세는 날로 심해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중환자들이 발생하면서 죽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교육대 주변에서 발발하고 있는 민폐 같은 것은 막을 수도, 처벌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각처에서 교육대까지 오는 동안 필요한 것들을 '현지 조달'해온 장정들에게 민폐는 몸에 익은 해결 방법이었고, 그들의 생존조건을 행정적으로 강구하지 못한 입장에서 민폐근절이나 처벌 같은 것은 공염불일 뿐이었다.
"조금만 더 참고 기다립시다. 곧 조처가 내려올 겁니다. 일선에선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비하면 우리 고생은 좀 나은 편 아닙니까." 심재모는 부지런히 막사를 돌며 장정들을 다둑거리고, 환자들을 위로했다. 그러나 그런 행위로 악화되어가는 동상을 막을 수 없는 일이었고, 중환자들이 치료되는 것이 아니었으며, 자꾸 생겨나는 병자들을 예방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방위군교육대라는 울타리는 생사람들을 몰어넣고 서서히 굶겨 죽이고, 병들어 죽이고 있는 살인장에 지나지 않았다. 심재모는 아무 효과가 없는 전화질을 하기에 지쳐 직접 상부를 찾아갔다.
"치료를 해줄 수 없는 형편이면 동상자들과 병자들은 속히 귀향조처를 취해야 할 겁니다. 훈련을 받을 수 없게 몸이 상한 사람들을 더 붙들어 둬봐야 아무 쓸모가 없을뿐더러, 자꾸 사망자만 늘어나게 됩니다." 이런 상황보고를 겸한 의견제시를 했지만 아무런 조처도 취해지지 않았다. 보고는 항의로 바뀌었다. 그래도 아무런 울림이 없었다. 그런데 마침내 어느 교육대에서 집단탈출극이 벌어졌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집단탈출이 용인되었을 리가 없었다.
총격을 가하고,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집단탈출은 진압되었다. "여러분, 집단탈출을 시도한다는 건 무모한 행위입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기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건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긴 군대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그래서 그 해결을 위해 상부를 상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참는 김에 조금만 더 참고, 우리 교육대에서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 억울하게 희생당하는 사람들이 없기를 당부합니다." 심재모는 집단탈출사건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았다. 미리 공개해서 자신의 교육대에서는 그런 일을 예방하고자 했다. 그런데 돌림병이 퍼지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무슨 병인지도 모른 채 열이 펄펄 끊다가 잇따라 죽어간다는 것이었다.
"글쎄요, 무슨 병인지는 빨리 조사를 해봐야 되겠습니다. 전염병 예방이라면 대개 파리나 모기, 이 같은 중간매개물을 차단해야 하고, 음식의 불결을 막아야 합니다. 겨울철이니까 파리나 모기는 없고, 금년 겨울은 또 유난히 추우니까 음식이 부패할 리도 없습니다. 그 대신 오랫동안 목욕도 못하고 옷들도 더러운 사람들한테서 이는 엄청나게 들끊고 있을 겁니다. 그것부터 소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기성부대 군의관의 처방이었다.
심재모는 소대별로 이 소탕작전을 전개시켰다. 그건 이를 일일이 손으로 잡아내서 될일이 아니었고, 불을 피워놓고 옷을 털어댄다고 될 일도 아니었다. 옷의 박음자리 깊은 곳에 붙어있는 서캐까지 말끔하게 제거하지 않는 한 이는 며칠이 못 가 또 생겨나게 마련이었다. 서캐까지 없애는 방법은 옷을 푹푹 삶아내는 일이었다. 그는 장교들한테서 염출시킨 돈으로 장작을 사들여 소대별로 옷 삶기를 시켰다. 그 일은 효과가 있어 그의 교육대에서는 돌림병을 막아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한 달이 다 되어 지난 일월 삼십일에 예산이 국회를 통과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심재모는 너무 반가워 상부에 전화를 걸었는데, 그곳의 반응은 의외로 냉랭했다.
예산이 통과된 것뿐이지 집행이 언제 될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무성의하고 막연한 대답도 대답이었지만, 심재모는 완전히 울화통이 터지다 못해 주저앉는 심정이 되어 버린 것은 며칠이 지나 예산내역을 알고 나서였다. 방위군 총인원을 오십만 명으로 추산하여, 하루 식량을 일이당 네 홉, 취사용 연료대 사십원, 잡비를 십 원씩으로 계산하여 일월부터 삼 개월 간의 총액 이백구억 원이 책정되었던것이다. 예산내역은 그것이 전부였다. 그 외에도 당연히 있어야 할 부식비, 난방연료비, 의료비, 피복비, 훈련비, 부대운영비 같은 것은 아예 없었다. 반찬은 아무것도 없이 밥만 씹고, 불기라곤 없는 천막에서 얼어 죽든 말든 알 바 아니고, 병든 자들은 죽으면 될 거 아니냐는 식이었다. 그러니 피복비며 훈련비며 부대운영비 같은 것은 더 따질 필요조차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더 중요한 문제는 하루 일인당 네 홉이라는 급식량이었다. 전쟁포로들에게도 하루 급식량은 다섯 홉이었던 것이다.
장정들이 단체행동으로 들고 일어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들은 그런 세부적인 내용은 모른 채로 예산이 국회를 통과했다는 사실만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개선되는 것이 없자 결국 행동으로 나선 것이었다. 심재모는 부관의 연락을 기다리지 못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연병장에는 장정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그 몰골들이 천상 거지때와 다름없는 웅성거림을 심재모는 죄스러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법이라는 강제행위로 저런 참상을 빚어내고 있는 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군인도 아니면서 군인들의 통제 아래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은 어떻게 보상될 것인가. 보상은 차치하고 그 죽음의 명목은 도대체 무엇인가. 전사인가, 자연사인가. 아직 군인이 아니니 전사로 취급할 리가 없다. 그럼 자연사인가? 그렇지도 않다. 그들이 얼어 죽고, 굶어죽고, 병들어 죽은 것은 아무 대책이 없이 행해진 강압행위에 의해서였다. 그들은 여러 종류로 타살당한 것이고, 정부는 공공연한 살인행위를 저지른 것이었다. 중공군의 개입이 국민방위군을 창설한 이유는 될 수 있어도, 그런 무책임한 살인행위까지 합리화시킬 수 있는 근거는 아니었다. 소문으로는 각 교육대에 도착할때까지 죽어간 사람들이 엄청나다는데, 도대체 그 수가 얼마나 될까...
"대장님, 벌써 나와계셨습니까? 집합완료했습니다." 부관이 경례를 붙였다. "갑시다." 심재모는 모자를 고쳐쓰고 앞장섰다. 심재모는 천천히 구령대로 올라섰다. 또다시 자신 없는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숨을 깊이 들이켰다. 그런 요구조건들을 내걸고 데모를 벌였던 사람들답지 않게 조용한 것이 고맙고도 미안했다. 그들의 그런 질서유지가 자신에 대한 신뢰의 표현인 것을 그는 느끼고 있었다.
"장정 여러분, 여러분의 요구사항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건 곧 내가 상부에 대고 계속 해결을 요구해온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집단행동을 하게 된 것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여러분들은 그동안 말할 수 없는 악조건 속에서 참으로 오래참고 견뎌왔습니다. 그 고통에 대해서 나는 잘 알고 있고, 그것을 하루빨리 해결하려고 내 나름으로 최선을 다해왔습니다. 그러나 나 혼자서 하는 일이 아니고 상부를 상대로 하는 일이기 때문에 노력에 비해 별다는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 자꾸 여러분들한테 거짓말만 한 결과가 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또한 면목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교육대 장교들이 몇 푼 안되는 월급을 털어가며 여러분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의 천만분의 일이라도 덜어드리려고 노력한 진정은 이해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그동안 잘 참아준 것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예산이 통과되었으니 이제 집행될 날이 머지 않았습니다. 이 막바지에서 며칠만 더 참아내서 우리교육대가 무사하기를 바랍니다. 나를 비롯한 장교들과 사병 모두는 다 여러분들의 편입니다. 우리 교육대에서 일체의 구타가 없는 것은 여러분들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여러분, 집단행동을 하지 마십시오, 그건 일을 해결하는 방법이 아니라 우리끼리 반목을 조장하는 행위일 뿐입니다. 나는 또 상부를 찾아가겠습니다. 여러분들은 나의 진심을 믿고 며칠만 더 기다려주십시오. 나는 여러분들을 믿습니다. 이상입니다." 심재모는 구령대를 내려갔다. 장정들은 말없이 소대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즈음에 교육대마다 새로운 문제가 야기되고 있었다. 여러 지방에서 뒤늦게 도착한 장정들을 수용할 수가 없어서 거부사태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 또한 무계획적인 과잉징집이 빚어낸 심각한 문제점이었다. 국회를 통과한 예산은 오십만 명으로 추산되었는데 정작 서울이남의 각 지방에서 강제징집된 사람들은 그 두배인 백만 명을 헤아렸던 것이다. 교육대의 수용을 거부당한 사람들은 아무런 후속조처도 받지 못한 채 뿔뿔이 흩어져야만 했다. 빈털터리인 그들은 갈데없는 거지꼴이 되어 고향을 찾아가야 하는 난감한 처지에 빠지고 말았다. 난데없이 수십만 명의 거지때가 생겨난 샘이었다. 그들은 끼니와 잠자리를 구걸하지 않고서는 몇백 리씩이 넘는 고향을 찾아갈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정작 예산집행을 하면서 부정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방위군사령부에서는 각 교육대에 예산을 영달하면서 허위영수증 작성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 허위영수증은 다름이 아니라, 일, 이, 삼월까지 삼 개월 동안의 예산 중에서 이미 날짜가 지나버린 일월 한 달분과 이월 분 중에서 수령직전까지의 금액을 착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액수는 어마어마한 거금이 아닐 수 없었다. 부관으로부터 그 보고를 받은 심재모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며 외쳐댔다.
"뭐라고, 이런 개애새끼들! 어떤 새끼가 그런 개소리를 쳐, 개소릴 치길!" 얼굴이 하얗도록 흥분된 심재모는 의자고 책상이고 닥치는 대로 걷어차고 있었다. 그리도 무섭게 화를 내는 상관을 처음 대하는 부관은 심재모의 긴 다리가 쭉쭉 뻗칠때마다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심재모가 그렇게 화를 내는 것은, 벌교에서 지주들이 입산한 좌익의 집에는 소작을 주지 않기로 결의한 사실을 알고 나서 그랬던 이후 처음이었고, 책상이며 의자를 닥치는 대로 걷어차고 있는 모습도 그때와 똑같았다.
"대, 대장님, 진정, 진정하십시오." 상관을 붙들 수가 없는 부관은 두 팔을 엉거주춤 든 채 말을 더듬거리고 있었다. "우리 교육댄 그따위 짓 절대로 못한다고 거부하시오!" 심재모가 숨을 몰아쉬며 내린 명령이었다. "대장님, 저어..." 손을 맞잡은 부관이 어물거렸다. "뭐요!" 담배를 빼든 심재모가 부관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저어... 제가 먼저 안 된다고말했습니다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상대방이 저보다 계급이 높아놔서..." "알았소. 내가 사령부로 직접 가겠소." 심재모는 성냥을 득 그어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는 깊게 들이마신 담배연기를 한숨으로 길게 토해냈다. 또 하나의 벽에 부딪쳐 있었다. 그는 암담하고도 착잡한 기분이었다. 이벽을 뚫고 나갈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또 튕겨질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비록 또 튕겨져나간다 하더러도 자신의 이름으로 허위영수증을 써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형용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린 장정들을 생각해서도 그렇고, 가짜 영수증을 만들어줘 그런 부정에 동조할 수도 없었다. 아, 이 나라 군대라는 것이 이런 것인가... 그는 군대에 몸담게 된 것을 또 후회하고 있었다. "자 보십시오, 부식비, 난방비, 의료비, 피복비, 훈련비, 부대운영비 같은 것들이 책정되지 않은 건 전시상황이라 불가피했다는 걸로 좋습니다. 그럼, 이미 경과분의 예산은 마땅히 그런 명목들로 체되어야 옳지, 어째서 수령하지도 않은 공금을 놓고 무조건 영수증을 만들어내라는 겁니까. 내 이름으로 영수증을 쓰는 것은 내가 바로 그만한 액수의 공금을 횡령했다는 결과가 됩니다. 나는 그런 터무니없는 죄를 뒤집어쓰고 싶지 않습니다." 심재모는 맞은편의 소령을 똑바로 쳐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 참 심소령님, 너무 그렇게 딱딱하게만 나오지 마시고 협조하는 쪽으로 마음을 좀 돌리십시다. 내가 확실하게 말하지만, 심 소령님한테 공금횡령죄가 돌아갈까 걱정하는 건 하늘이 무너질까봐 걱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집니다. 심 소령님만 협조해주시면 일은 감쪽같이 되게 돼 있습니다. 그리고 말입니다, 심 소령님이 협조를 잘해주시면 군대생활에 이익이 갔으면 갔지 손해야 있겠습니까?" 소령은 뒷말을 은근한 어조로 하며, 군복에도 몸집에도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눈웃음을 간사스럽게 쳐 보였다. "아니, 그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역겨움을 느낀 심재모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심 소령님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인데, 어쨌거나 심 소령님이 우리 방위군 교육대장이 된 건 운수대통한 겁니다. 우리 이 분이 말입니다." 소령은 엄지손가락을 빳빳이 세워보이고는, "저어 위에, 그리고 더 그 위에 직통으로 통하고 있다는 것 정도만 알아두라 그말입니다." 검지손가락을 세워 하늘을 향해 팔을 뻗치고, 엉덩이를 들먹해서 또 뻗어올리고하며 자뭇 거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글쎄요,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군요, 어쨌든 내 뜻은 전했으니 우리 부대 돈은 곧 지급해주기 바랍니다." 심재모는 몸을 일으켰다. "아니 심 소령, 정말 이러기요!" 소령이 몸을 벌떡일으키며 내쏘았다. 그 얼굴이 험악하게 변해 있었다. "내 할말은 다 했소." 심재모는 소령을 짧게 쏘아보고 몸을 돌렸다. "건방지게! 분명 후회하게 될 거다." 소령이 외친 소리였다.
다음날 저녁 심재모는 대구시내 어느 요정에 앉아 있었다. 그와 마주 앉은 사람은 방위군부사령관 윤익헌 대령이었다. 심재모는 윤 대령의 전화를 직접 받고 어쩔 수 없이 나오게된 것이었다. "자아, 심 소령! 심 소령의 젊은 혈기와 정의감, 아주 믿음직스럽고 든든하오. 뭐 긴 말 할것 없이 이번 일에 깨끗하게 협조해주시오. 그럼 나도 심 소령한테 섭섭잖게 하리다. 다른사람들은 다 협조가 됐는데 심 소령만 안 돼서야 말이 되겠소? 이 일이 다 우리 단독으로만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쯤 알아두고, 자아, 협조하는 뜻으로 한잔 쭈욱 듭시다." 윤 대령이 호걸스럽게 헛웃음을 쳐대며 잔을 들었다.
"저어... 저는..." "자아, 자아, 말이 많으면 빨갱이고 공산당이야. 어서 잔 들어요." 윤 대령이 밀어붙였고, "그래요, 어서 잔 드세요." 옆에 앉은 화장 짙은 여자가 냉큼 술잔을 들어올렸다.
술상이 내려앉을 정도로 가득 찬 가지가지 안주며, 야하게 몸치장을 한 여자며, 전쟁은 딴나라의 이야기 같았다. 돈은 전쟁통에 진기한 안주들을 얼마든지 술상에 오른게 하는 마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러나, 윤 대령이 치를 술값이며 화대라는 것은 어디서 나온 돈일 것인가. 바로 가짜영수증에서 나오는 돈이었다. 그것은 또 수없이 많은 장정들을 굶기고, 얼리고, 병들게 해서 모아진 돈이었다. 심재모는 술을 별로 즐기지 않는데다가, 이런 생각까지하고 있으니 술맛이 날 리가 없었다. 이튿날 일과가 시작되자마자 소령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심 소령님, 어젯밤 재미가 좋으셨다구요? 빨리 영수증 좀 부탁합니다." 소령은 턱없이 친근하게 굴었다. "영수증이라니요? 내 맘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아니, 뭐라구요! 그럼 대령님한테 거짓말한 거요?" "내가 영수증을 쓸 거라는 건 대령님의 일방적인 생각이고, 난 헤어지면서 분명히, 생각해보겠다고 했었소." 고함과 함께 전화가 끊겨버렸다. 심재모는 손에 들린 야전용 송수화기를 어처구니 없이 쳐다보며 흥!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송수화기를 제자리에 놓으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래, 예편도 맘대로 안 되는 판에 군복이나 벗겨줬으면 좋겠구나. 심재모는 끝없이 가라앉아가는 고단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틀 뒤에 심재모는 명령서 한 장을 받아들였다. 그건 예편명령서가 아니라 전출명령서였다. 전출지는 싸움하기에 가장 어렵기로 소문난 동부전선이었다. 신고날짜가 촉박해서 바로 짐을 챙겨 떠날 준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 너무 심한 처삽니다. 대장님께서 협조를 하실 걸, 괜히 잘못하신 것 같습니다. 동부전선이 지금 얼마나 위험합니까." 부관의 애태우는 말이었다. "괜찮소. 이미 각오했던 일이고, 이런 진창 속에서 사느니 차라리 전선에서 지내는 게 편할거요." 심재모는 짐을 들고 일어났다. "그런데 말입니다. 지금 각 부대마다 심각한 문제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위에서부터 그렇게 되니까 영수증을 써준 부대장들이 맘놓고 돈들을 챙겨넣느라고 정신이 없는 모양입니다." 부관은 자기네들끼리 오가는 말을 털어놓았다.
"다 그럴 줄 알았소. 어쨌거나 죽어가는 건 장정들뿐이오." 심재모는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뚜벅뚜벅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그때 이미 국민방위군에 얽힌 여러 가지 문제들은 사회여론으로 들끓어오르면서 '하나의 큰 사건'으로 뭉쳐져 부산의 피난정부를 위협하고 있었다.
반쪽달이 구름 사이로 떠가고 있었다. 구름의 움직임에 따라 어슴푸레한 달빛의 감도가 묽은 물감의 농담처럼 은근하게 변했다가 재빛으로 돌아가고는 했다. 그 빛의 변화를 따라 드넓은 들녘은 가라앉았다가 떠올랐다가 하는 것처럼 환상적으로 모습을 바꾸고 있었다. 너무 환하지도 않고, 너무 어둡지도 않은 속에서 그들 소대는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일 해치우기 딱 좋은 밤이지." 소대장 솥뚜껑이 톱을 든 손에 침을 튀기며 했던 혼잣말이었다. 전선줄을 제거하기 위해 전봇대를 잘라 쓰러뜨리는 작업을 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전봇대를 하나씩 타고올라가 전선줄을 끊는 게 더 빠르지 않겠어요?" 무작정 톱으로 전봇대를 자르려고드는 솥뚜껑에게 손승호가 말했다. "이, 계산상으로야 분명 그렁마요, 근디 우리가 일얼 쉽게 해불먼 적들도 쉽게 줄을 이서불지 않겄소? 허고, 저 전선줄이란 것이 전기선, 체신선, 전화선, 경찰선, 군인선, 철도선 해서 한두가닥이 아닌디, 선얼 전봇대동 끊어대는 것이나 전봇대를 너덧 개 짤라서 엎어치는것이나 그 시간이 그 시간일 것이오." 솥뚜껑의 설명이었다. "그렇겠군요. 그게 좋겠어요."손승호는 금방 동의했다. 속에서 일어나는 면구스러움을 지우려는 듯이.
"손 동무는 저 왼쪽에서 보초나 스고 있다가, 이따가 불르면 와서 오짐이나 푸지게 누씨요." "오줌이요?" " 이따가 알게 될 꺼싱게 얼렁 가 보초나 스씨요."솥뚜껑이 씨익 웃으며 돌아서 다른 대원들에게 임무지시를 시작했다. 손승호는 작업을 시작하는 대원들을 등지고 섰다. 그리고 전방좌우에 눈길을 모았다. 자신에게 보초임무를 맡기는 것은 물론 솥뚜껑이 베푸는 호의였다. 그리고 그건 거절할 수 없는 소대장의 명령이기도 했다. 그는 언제나 호의를 베풀고자 했고, 다른 대원들의 눈치가 보여 사양하려고 하면 '소대장의 명령'이라는 말로 묵살하고 들었다. 그럴때마다 그는 가식없는 순박한 웃음을 웃고는 했다. 그로서는 한문선생에 대해 깍듯한 예절을 차리는 셈이었다.
상부에서 받은 오늘밤의 과업은 전선줄을 삼백미터 정도 절단제거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솥뚜껑은 힘든 것을 무릅써가면 전봇대까지 잘라버릴 작정을 하는 것이었다. 솥뚜껑은 그런 사람이었다. 아니, 그런 빨치산이었다. 자신의 고달픔이나 괴로움 같은 것은 아랑곳 하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 조직의 임무에 충실하고, 조직의 이익에 봉사하려는 그의 태도에 손승호는 그저 고개가 수그러질 뿐이었다.
혁명 경력자로서 소대장이란 직책은 어울리지 않았다. 물론 도당사령부에서 그에게 맡기려던 직책도 소대장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는 굳이 사양을 해서 소대장을 맡게 되었던 것이다. 높은 직책을 맡자면 싸우는 기술로만 되는 것이 아닌데 자신은 모르는 것이 너무 많고, 해방전쟁 전에는 일개 전사에 불과했는데 소대장을 맡는 것만도 과분하다는 것이었다. 그의 진정 어린 겸손을 총사에서도 접수했던 것이다. 그러나, 직책 앞에서 그런 겸손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손승호는 잘 알고 있었다.
소학교 때 급장은 말할 것도 없고 분단장을 뽑는데도 가슴 조마조마하고, 전신이 팽팽해지는 긴장을 느끼지 않았던가. 그건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갖게 마련인 피의 농도만큼 진한 명예욕의 발동이었다. 그 욕구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커졌으면 커졌지 줄어드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하나의 도당이 유격부대를 조직하고 간부를 선정하는 것은 한 학급에서 반장이나 분단장을 뽑는 일일 수가 없었다. 그의 겸손이 학교공부라고는 전혀 배운 바 없는 머슴이라는 출신성분의 열등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열등감의 발로였다면 그 반작용으로 오히려 어떤 직책이든 능력보다 더 탐하게 마련인 것이 대부분의 경우였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는 신분이나 배움에 대해 전혀 열등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자신은 기본출로서 혁명의 주체계급이며, 배우지 못한 것은 언제든지 배우면 된다는 생각을 그는 확고하게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계급혁명론을 통해서 열등감을 극복한 건강한 의식을 가졌음과 동시에 열렬한 공산주의자였다. 그의 자발적인 혁명의 열정과, 과욕이 없는 겸손은 바로 그런 의식을 바탕으로 생겨나는 것이었다.
"속에 든 것 없이 높은 자리만 차고앉는 것은 해당행위제라. 빨치산은 쌈만 하는 것이 아닌 당의 정치군댄디, 나가 속이 덜 차서 신문에서고 학습에서고 해득이 안되는 말이 쌔고쌘판에 워찌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겄소. 산이나 넘보덤 쪼깐 빨르게 타고, 총질이나 헛방 덜쏜다고 혀서 높은 자리에 앉어기간디라. 높은 자리에 올라갈수록 손 동무 겉은 사람덜이 많아지는디 쌈 허는 기술만 갖고서야 워디 자리값을 지대로 할 수가 있겄소. 나가 바래는 것은 우선에 해득이 안 되는 말이 없이 속을 채우는 일이고, 그 담에 나 속에 든 생각얼 사석에서고 공석에서고 술술 풀어낼 수 있어야 허는 것이오. 위원장 동지맹키로 그리 될 수 있으먼 그때야 무신 자리고 맡을 수 있겄제라." 솥뚜껑의 차분한 말이었다.
부하들에 대한 사상교육이나 연설 같은 것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완벽한 지휘관이나 간부이기를 목적하고 있는 그에게 '정치위원'이나 '문화부지도원'이 따로 있지 않느냐고 일깨울 필요는 없었다. 그가 말하는 위원장은 바로 도당의 방준표였다. 그가 방준표 위원장을 표본으로 우러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방준표 위원장은 모든 면에서 표본이 될 만한 인물이기도 했다.
철도노동자 출신인 방 위원장은 투쟁경력과 당의 학력을 겸비하고 있었다. 일제 때부터 철도노동자들을 이끌며 투쟁했고, 대구 십일항쟁을 주도한 다음 월북해서 당의 추천으로 모스크바대학 단기 이년을 마치고 해방전쟁과 함께 전북도당을 책임맡은 당의 대들보 중의 한사람이었다. 마흔이 가까운 그는 언제나 금방 낯을 씻은 것 같은 신선하고 맑은 인상이었다.
그런 인상은 얼굴이 희고, 마른 편인 몸에 옷차림이 단정한 데서 오는 것이었다. 얼핏 스치는 인상만으로는 혁명이니 투쟁이니 하는 말이 어울리지도 실감할 수도 없는, 멋이 밴 중년남자로 보기 쉬웠다. 그러나 그 얼굴을 자세히 보면 강직한 차가움과 예리한 번뜩임을 품고있었다. 특히 순간순간 날카롭게 빛나는 눈은 그의 사람은 물론 솥뚜껑 하나만이 아닐 것이었다. 많은 농민출신들이나 기본출들은 거의가 같은 심정이라고 보아야 했다. 철도노동자에서 도당위원장에 이른 그의 경력은 모든 그들의 선망이었고, 가능성이고, 또한 그들을 고무시키는 힘이기에 충분했다.
"손 동무, 절로 가서 오짐 잠 누시게라." 언제 가까이 왔는지 솥뚜껑이 나직하게 말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손승호는 뒷덜미가 섬뜩해지도록 놀랐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놀라움을 감추며 태연한 척했다. 솥뚜껑은 구빨치답게 언제나 걸어도 발소리를 내지 않았고, 목소리도 나직나직했다. 일체의 소리를 내서는 안되는 산생활이 몸에 완전히 배어 있었다. 손승호는 무슨 오줌을 누느냐고 묻지 않았다. 모르는 것을 미리 묻지 않고 일을 치르면서 알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 방법은 머리를 좀 쓸 줄 안다는 자들이 흔히 하는 약삭빠른 교활이라는 것을 그는 알았다. 그러나 그 방법을 순간적으로 써놓고는 깨닫는 것이지 근본적으로 고쳐지지 않았다. 그는 솥뚜껑의 솔직함으로 일관된 태도 앞에서 자신의 그 어설픈 지식훈련으로 고질화된 교활에 진정 미안함을 느끼고는 했다.
"여그다가 씨언허게 오짐얼 누시씨요." 솥뚜껑이 톱질을 하고 있는 전봇대의 아랫부분을 가리켰다. "여기다요?" 손승호는 난처한 얼굴로 솥뚜껑을 쳐다보았다. "그래야 톱질 소리가 안 나는구만요. 대원들이 돌아감서 다 누고 인자 손 동무 차례요." 손승호는 사람들 앞에 그것을 내놓고 오줌을 눌 자신이 없어서 한 말이었는데, 솥뚜껑은 어슴푸레한 달빛으로 손승호의 난처해하는 얼굴을 잘못 보았는지 그 이유를 댔다.
"그게 아니고, 이거 사람들 앞에서..." 손승호는 더 난색을 표하며 말을 얼버무렸다. "이, 알겄소." 솥뚜껑은 쿡쿡 웃고는, "밤인디다가 여자도 없는디 낮개리기넌. 동무덜, 절로물러나서 쪼깐 숨 돌리더라고." 톱질을 멈추게 해서 동지들을 멀어지게 했다. "어먼 디로 안 가게 저 톱 꽂힌 자리다가 푸지게 누씨요." 솥뚜껑은 웃음 섞어 낮게 말하고는 돌아섰다. 손승호는 전혀 뇨기를 느끼지 못하면서도 그것을 꺼냈다. 아니, 뇨기가 가셔버렸다고 해야옳은 말이었다. 그는 아랫배에 힘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이상한 버릇이 있었다. 기껏 소변이 급하다가도 어느 사람이 옆에 있게되면 어떻게 된 일인지 소변이 나오지를 않았다. 소변을 보는 도중에 누가 옆에 와서 소변을 보게 되면 상관이 없는데, 시작이 문제였던 것이다.
그래서 소학교 때 아이들이 흔히 하는 자지힘겨루기인 오줌발 창 밖으로 넘기기는 해본 일이 없었다. 그것을 남 앞에 내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누가 옆에만 있어도 오줌이 나오지 않는 그 증상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때의 그 일 이후가 아닌가 싶었다. 여섯 살 때였던가 그랬다. 어떤 어른이 아파서 그런다며 동네 할머니가 아이들 오줌을 받으러 다녔다. 큰 아이들 오줌은 약이 안 되니 소학교에 안 들어간 아이들만 오줌 눌 자격이있었다. 굳이 자격이라고 하는 것은 그 할머니가 사탕을 가지고 있어서 아이들이 서로 오줌을 누려고 다투는 바람에 정해진 것이었다. 꽁꽁 힘을 써대며 오줌을 눈 아이들은 사탕 하나씩을 입에 물고 깡충깡충 뛰었다. 아무데나 깔겨버릴 오줌을 누고 그 달고 맛난 사탕 하나를 얻어먹는다는 것은 횡재가 아닐 수 없었다. 자신도 당연히 줄을 섰다가 자지를 꺼냈다.
막 기운을 쓰려는 참인데 어떤 아이가, "야, 니 자지 넌 워째 꼬부랑허니 삐틀어졌냐!" 하고 외쳤던 것이다. 그러자 아이들이 "워디, 워디" 하며 몰려들었다. 왈칵 창피스런운 생각이 들면서 자지가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곧 나올 것 같았던 오줌이 나오지 않았다. 아이들은 서로 머리를 디밀고, 할머니는 오줌 쏟아진다고 소리를지르고, 사탕생각은 간절하고, 그러나 아무리 힘을 써도 오줌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사탕은 얻어먹지도 못하고 '삐딱자지'라는 놀림만 당하게 되고 말았다. 그 별명은 소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끈덕지게 따라다녔다. 그래, 빨치산이 되었으니 그 고질병을 고치자. 내가 오줌을 뉘야 소리나지 않게 톱질을 해서 작전수행을 제대로 할 수 있다. 옆에 붙어 있는 사람도 없지 않느냐. 그는 숨을 몰아쉬며 몇 번이고 아랫배에다 힘을 쓰고 또 썼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줌은 나올 듯 나올 듯하면서도 나오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반듯한 모양을 갖추었는데도 어찌하여 그 버릇은 고쳐지지 않는지 모를 일이었다.
"오짐이 안 매러운 갑제라?" 가까이 온 솥뚜껑의 물음이었다. "예, 잘 안 나오는데요." "안 매러운 오짐 억지로 눌 수야 없는 일인게 진작에 말씀허실것인디." 솥뚜껑이 내려준 사면조처였다. 손승호는 비감하면서도 살아난 기분으로 그것을 밀어넣으며 긴 숨을 내쉬었다.
다시보니 그동안 잘려진 전봇대는 네 개였다. 네 개의 전봇대는 전선줄들로 연결되어 있어서 밑이 잘렸는데도 넘어지지 않고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전봇대들의 무게를 지탱하느라고 전선줄들은 늘어질 대로 늘어져 아래로 처지는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필요한만큼 전봇대를 자를 다음 좌우 양쪽의 전선줄을 끊어버리면 잘린 전봇대들은 한꺼번에 곤두박힐 판이었다.
손승호는 전선줄을 제거하는 또 하나의 방법을 배우고 있었다. 적들이 그 전봇대들을 새로 박고, 전선줄까지 다시 잇는 복구를 하자면 하루이틀로 될 일이 아니었다. 통신이 단절된 그 사이에 총사에서는 모종의 큰 작전을 전개하게 될 참이었다. 손승호는 제자리로 돌아와 다시 경계에 들어갔다. 어떤 전화선이든 먼저 끊어져 전화가 통하지 않으면 적의 수색대가 나타날 위험이 있었다. 지난해 십이월로 접어들면서부터 적들의 공격은 차츰 심해지기 시작했다. 경찰력을 제치고 군병력이 공격을 주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상대적인 화력에 따라 이쪽의 공격이 수비로 바뀔 수밖에 없게 되었다. 섬진강을 낀 화문산 일대를 해방구로 장악하고, 임실과 순창 사이의 국도에서 밤낮에 구애받지 않고 적을 공격해대던 초기의 적극작전은 차츰 쓸 수가 없게 되었다. 군인은 경찰과 달라서 몸을 사리는 것 없이 무작정 밀어붙이기 작전으로 나왔다. 화력을 앞세운 그 저돌성에 이쪽의 사상자는 늘어가면서 해방구가 위협당하기 시작했다.
군인들은 닥치는 대로 마을들을 불질러댔던 것이다. 통비마을의 소탕작전인 초토화였다. 그 작전 앞에서 민간인들의 생명이 보존될 리가 없었다. 통비분자, 곧 적이었다. 그런데 일부러 한 달 동안은 군인들의 공격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주전선이 밀리고 있는 탓이었다.
그와 반대로 이쪽의 기세는 불붙어 올랐다. 도당이 다시 전주로 옮겨갈 꿈에 부풀어 있었다. 지역 군당들의 기세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오산에서 전선이 다시 북으로 밀리기 시작하면서, 이월 들어 군인들의 공격은 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적들의 공격은 훨씬 강력했다. 해방구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거기에 강력대응하는 작전을 펼치기 위한 예비작전으로 전선줄 절단 지시가 내려진 것이 틀림없었다. 쿵! 쿵!땅 울리는 소리에 놀란 손승호는 고개를 돌렸다. 마침내 전봇대들이 땅바닥에 나가넘어지고 있었다. 물러섰던 소대원들이 다시 달겨들어 넘어진 전봇대들 사이에 연결된 전선줄들을 마저 끊어대기 시작했다. 소대원들은 말 한마디 없는 가운데 민첩하게 움직이며 실로 완벽한 절단작업의 끝마무리를 하고 있었다. 손승호는 그 모습들을 또 신선한 감동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한 덩어리고 뭉쳐져 생각하고, 돕고, 싸웠다. 그는 입산을 하고 나서 그러한 인간집단을 최초로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입산 전에 도당에서 일하면서는 느끼지 못했던 현상이었다.
조직의 분산과 응집의 차이일 터였다. 서로 몸을 사리는 일도 없고, 서로 다투는 일도 없고, 서로 도와가며 자기가 맡은 일을 다 해내며, 함께 목숨을 내걸고 싸우는 그들 - 그건 같은 목적을 두고 자각한 사람들만이 지어낼수 있는 아름다운 모습이고, 신선한 감동이었다.
나만이 아닌 모든 사람들의 삶을 위해 나선 자각과 그 행동. 손승호는 산생활 다섯 달을 통해서 새롭게 태어난 자신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는 생피의 뜨거움과 떨림이 자신의저 깊은 내부로부터 솟아오르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그는 비로소 지식의 각질을 깨고, 위선을 벗어나 삶 앞에 알몸의 진실로 선 스스로를 발견하고 있었다.
"출발이시!" 솥뚜껑이 언제나처럼 앞장섰다. 소대원들은 자기 위치를 찾아 일렬종대 사보 간격의 행군대영을 이루며 신속하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푸른 색조의 달빛이 어슴푸레하게 담긴 들녘에는 새벽의 고요가 바다처럼 깊었다. 대기는 아직도 싸늘했지만 무슨 여린 향기처럼 문득문득 스쳐가는 냄새가 있었다. 그건 봄이 오고 있는, 땅이 부푸는 흙내음이었다. 나지막한 산들이 들녘 끝머리를 따라 무덤의 적막한 모습으로 검게 앉아 있었다.
길을 가로지르고, 야산자락으로 접어들려면 개울둑을 타넘어야 했다. 개울둑을 막 오르려고 하던 솥뚜껑이 순간적으로 몸을 바짝 낮추며 팔을 빠르게 흔들었다. 정지와 동시에 몸을 낮추라는 신호였다. 소대원들은 몸을 땅바닥에 납짝 붙였다. 손승호는 총을 움켜잡은 두 손아귀, 열 개의 손가락에 철사줄 같은 힘이 뻗치는 걸 느꼈다. 그리고 전신이 팽팽한 긴장과 함께 빳빳한 힘으로 뭉쳐지고 있었다. 적과 대치할 때마다 느끼게 되는, 언제나 변함없이 일어나는 응결된 힘의 충동이었다. 그 충돌은 곧바로 적에게 돌격하며 사격을 가할 수도 있고, 적을 피해 순식간에 질주할 수도 있는 완벽한 준비상태였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두려움과 공포에 짓눌려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총질을 할 수 있게 되고, 동지가 피 뿌리며 죽어가는 것을 보게 되고, 동지를 겨냥하는 적을 먼저 쏘아 쓰러뜨리게 되고, 위장한 반동에 대한 적개심으로 날창질을 하게 되면서 그 두려움과 공포는 용기와 힘으로 바뀌게 되었다.
솥뚜껑은 돌을 주워 개울둑 너머로 던졌다. 아니나 다를까, 돌 떨어지는 소리와 동시에 타당탕탕 총소리가 적막을 찢어대기 시작했다. "돌진 !"솥뚜껑이 외쳤고, 소대원들은 양쪽으로 흩어지며 내닫기 시작했다. 적이 듣기에 돌진이라는 명령은 후퇴였고, 대원들은 제각기 흩어져 비상선을 찾아가게 되어 있었다. 적을 기만하기 위한 그런 용어는 단위 부대마다 다르게 약속되어 있었다. 지금의 후퇴는 모택동의 유격전 십육자전법의 첫 번째 적진아퇴였다. 미리 매복, 대기하고 있는 적과 맞서 싸울 필요가 없었다. 적은 보나마나 이쪽보다 수가 많을 것이고, 유리한 지형을 확보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낮도 아닌 밤에 매복을 칠 적이 아니었다. 손승호는 솥뚜껑의 뒤를 쫓아 왼쪽 산자락을 밟으며 내달리고 있었다. 총소리가 숨가쁘게 울려대고, 피웅, 삐웅 총알 날아가는 소리가 허공에서 휘파람을 불어대고 있었다. 가까이 와서 박히는 총알은 없었다. 허공에서 휘파람을 불어대는 총알은 하나도 위험할 것이 없었다.
적들은 이쪽의 동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제멋대로 총을 쏘아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적들의 추격을 염려할 것은 없었다. 날이 어두워지는 것을 무엇보다도 두려워하는 적들이 한밤중에 산속으로 추격을 해올 리가 없었던 것이다. 군인이든 경찰이든 야간접전을 꺼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소대원들은 한 사람도 이상이 없이 비상선으로 다 모였다. "검은 개들이시."솥뚜껑은 뚜벅 한마디 하고는 앞장을 섰다. 손승호는 고개를 내둘렀다. 자신은 정신없이 뛰기만 했는데 그는 어느새 적들이 경찰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아까 적정을 탐지해낸 것도 그랬다. 자신은 아무런 낌새도 느낌도 갖지 못했는데 그는 정확하게 매복을 감지해냈던 것이다. 그는 야생동물과 같은 예리하고 기민한 청각과 후각 그리고 남다른 육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물총새가 물속의 고기를 실수하는 법 없이 찍어내듯이 그동안 수십 차례에 걸쳐서 적정을 틀림없이 탐지해내고는 했었다.
"그냥 지절로 그리 되제라." "글쎄요, 말로 꼭 집어 하기는 곤란하더라도 그래도 뭔가 그 방법이 있지 않겠어요?" 손승호는 또 자신도 모르게 감각의 문제를 지식인적인 논리로 풀리기를 바라고 있었다. "나가 배운 문자 한 분 쓸게라?" 솥뚜껑은 그 순한 웃음을 씨익 웃더니, "정신일도허고 산생활허먼 시나브로 그리 되는구먼요." 하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예, 그 말이 맞겠지요. 틀림없이 그럴 겁니다. 그게 말로 되는 일이 아니니까요." 손승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솥뚜껑은 시원하게 말을 해주지 못하는 것을 미안해하며, 군경한테서는 비누냄새, 치분냄새, 궐련 냄새가 나고, 밑창 두꺼운 구두들을 신었기 때문에 땅 밟는 소리, 돌 차는 소리가 잘 들린다고 했다. 반대로 빨치산한테서는 불냄새(연기냄새), 몸냄새(오래 된 땀냄새), 잎담배냄새가 나서 토벌대에게 들키는 수가 있다고 했다. 다른 냄새들은 어찌 구분이 된다 하더라도 궐련냄새와 잎담배냄새가 어떻게 다르다는 것인지 손승호는 아연해질 뿐이었다. 그런데 솥뚜껑은 그 구분이 어렵지않다고 했다.
중대의 트에 가까워지면서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 들녘과는 멀어져 산들의 어깨동무가 이어지고 있었다. "다리쉼덜 헙씨다." 솥뚜껑이 소대원들을 돌아보았다. 약간 크게 울리는 그의 목소리가 안심해도 좋은 안전지대에 들어섰음을 알리고 있었다. 모두 주저앉아 담배를 말기 시작했다.
몇 시간 동안 참아낸 담배들이었다. 빨치산들에게 담배는 그 불빛이나 냄새로 적에게 위치를 노출당하게 될 위험물이면서, 전투의 긴장을 풀어주고 깊은 휴식에 잠기게 하는 유일한 위안물이었다. 솥뚜껑은 정말 솥뚜껑처럼 투박하게 크고 거친 손으로 놀랍도록 빠르게 담배를 말았다. 그리고 불을 붙여 연기를 깊게 빨아들였다. 그의 눈이 사르르 감기고 있었다. 그의 그런 모습을 손승호는 웃음 띤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은 담배를 안 피우면서도 그가 느끼는 담배맛을 알 것 같았다. 그는 산생활을 철저하게 하듯 담배도 철저하게 피웠다. 산생활에 대해 그에게 배운 것이 수없이 많았는데, 유일하게 배우지 못한 것이 담배피우기였다.
"참말로 좋으요이." 솥뚜껑의 말에 손승호는 눈길을 들었다. 그는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넌 저리 기맥힌 경치럴 보먼 항시 눈물이 날라고 허요." 앞을 바라본 채 그가 말했다. 동녘 하늘은 밑에서부터 뻗쳐오르는 햇살로 붉게 물들고, 뭉텅이져 떠 있는 구름덩이들의 아랫부분은 맑고 빛나는 황금빛으로 적셔지고 있었다. 하늘을 가득 채운 붉은 햇발의 싱그러움과, 구름덩이들에 배어들고 있는 황금빛 현란함의 빛살무늬는 그 눈부심이 눈이 시릴지경이었다. 그 싱싱하게 살아 일렁이는 빛의 바다 아래로는 억센 산줄기들이 검은 모습을 뚜렷하게 드러내고, 겹을 이루는 산골짜기들을 감싸며 안개가 자욱하게 차 있었다. 아, 저아름다움, 눈물이 날 만도 하지. 그렇게 동의하면서도 너무 엉뚱한 말 같아 손승호는 솥뚜껑에게 눈길을 돌렸다.
"나넌 저런 경치럴 보먼 새 심이 솟기요. 저런 기맥힌 하늘이고 땅얼 반동덜한테 언제꺼지 뺏기고 있을 수 웂응께요. 기엉코 우리가 쥔이 되야제라." 여전히 앞만 바라보고 앉은 채 솥뚜껑이 말했다. 손승호는 그만 충격을 느꼈다.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서 눈물이 나려고 한다는 말은 솥뚜껑의 단순한 감상도, 나약한 마음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그 눈물나려고 하는 감격을 곧바로 혁명의지로 환치시키고, 혁명의 동력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또 아침해가 내쏘는 그 싱그럽게 살아 움직이는 현란하고도 황홀한 빛살을 향하여 혁명완수를 맹세하고 있었다. 해의 뜨거움에다 혁명의 열정을 데우고, 해의 생명력에서 혁명의 힘을 얻는 그는 혁명의 그날까지 식을 줄 모르는 불덩어리가 아닐 것인가. 아아, 또 하나의 염상진! 아니, 기초적인 배움을 갖지 못했으면서 그런 자각과 의지와 신념을 세울 수 있는 그는 염상진을 앞질러가고 있는 무산자혁명의 완벽한 전사가 아닐 수 없었다. 산골짜기 골짜기마다 또 다른 솥뚜껑들이 진을 치고 투쟁의 피땀을 흘릴 때 인민의 역사는 해 쪽으로 굴러갈 수밖에 없음을 손승호는 또다시 확인하고 있었다.
"인자 가보드라고." 솥뚜껑이 몸 가볍게 땅을 차고 일어났다. 손승호가 중대의 트에 도착하니 뜻밖에도 총사의 전출지시가 기다리고 있었다. 더 알 수없는 것은 자신이 새로 조직되는 연예대에 소속된다는 점이었다. 자신은 연예에는 아무런 소질도 재주도 없었던 것이다. 인문학교에 비해 연예의 비중을 크게 잡고 있었던 사범학교에서도 연극은 아예 해본 적이 없었고, 노래나 풍금치기는 겨우 수준을 지탱하는 정도일뿐이었다. 그렇다고 총사의 명령을 거역할 수도 없었다. 다음날 선요원을 따라 출발하게 되어 있었다.
"참말로, 정들자 이별이요이." 솥뚜껑은 이 한마디를 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투쟁에 나설 때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그의 눈언저리에 서려 있는 우수가 더 짙어지는 것을 손승호는 놓치지 않았다. "섭헌 맘으로야 소럴 잡어야 헐 일인디, 보잘것이 없소." 솥뚜껑의 나직한 말이었다. "무슨 말씀입니까. 이것도 진수성찬입니다. 이리 애쓰시지 않아도 되는 걸요." 손승호의 말은 입끝에 걸린 예의가 아니었다. 대원들은 반찬이 없는 잡곡밥으로 살아온 지가 오래였다. 그것에 비하면 삶은 닭은 분명 진수성찬이었고, 해방구를 장악하고 있다고는 하나 닭 다섯 마리를 차려낸다는 것은 보통으로 애를 써서는 안 될 일이었다. 손승호는 그의 마음씀에 그저 가슴이 먹먹할 뿐이었다. 술도 노래도 이별연은 담담하게 시작되어 담담하게 끝났다.
"원체로 손 선상님 같은 분이야 화선투쟁에 나스게 된 것이 잘못된 일이었구만요. 재목도 쓸 디가 다 지각각인디 사람이야 더 말할 것 있간디요." 단둘이 남게 되었을 때 솥뚜껑이 한 말이었다. 동무가 아니고 선상님이란 호칭이 야릇한 아픔으로 가슴을 찔러오며, 그와 자신과의 사이에 벽이 막히는 것을 손승호는 느꼈다.
"아닙니다. 솥뚜껑 동무. 난 명령에 따라 가긴 합니다만, 화선투쟁에서 보람을 느꼈고, 동무가 모든 걸 잘 가르쳐준 덕에 화선투쟁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소. 앞으로도 큰 힘이 될 것이오." 손승호는 진심으로 말했다. "손 동무가 나헌테 갤차준 것에 비허자먼 나가 헌 일이야 하품나는 것이제라. 나가 아매더 배울 복이 없느갑소." "아니오, 내 말 들어보시오. 옛날에 어느 부자가 외아들을 잘 가르치려고 유명한 선생을 사방으로 수소문했다는 거요. 그래서 고명한 선생을 찾아와 외아들을 집떠나 보냈소. 그 선생이 어찌나 엄하고 까다롭던지 학생이 글공부를 다 마칠 때까지는 집에를 내왕할 수 없다는조건이었소. 부자는 귀한 외아들을 오래 못 보게 되는 것이 마땅찮았지만, 외아들을 크게 만들 욕심으로 그 조건에 응할 수 밖에 없었소. 물론 부모가 아들한테 내왕하는 것도 금하게되어 있었소. 부자는 아들이 떠나고 나서 반 년을 가까스로 참아냈는데 더는 참을 수가 없게 되었소. 아들이 보고 싶기도 하고, 또 글공부는 얼마나 했는지 보고 싶어서 말이오. 그래서 선생 몰래 아들의 모습이나마 보자고 작정을 하고 집을 떠났소. 선생집에 가까워지니 글읽는 소리가 들렸소. 부자가 귀를 기울여보니 그건 분명 아들의 목소리였소. 부자는 반가워당장 선생집으로 뛰어들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고 글방의 봉창에 침바른 손가락으로 구멍을 냈소. 아들은 선생 앞에서 글을 읽고 있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그게 천자문이 아니겠소. 서탁에 펼쳐진 책도 천자문이 분명하고 말이오. 부자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소. 한달이 못 걸려 뗄 수 있는 천자문을 반 년 동안이나 붙들고 있다니, 저 자식이 그리도 머리가 둔하단말인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소. 부자는 못내 실망해서 집으로 돌아갔소. 그러나 또 반년이 지나게 되니 다시 아들이 보고 싶고, 그동안 얼마나 배웠나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소. 그래 또 선생집으로 갔소. 봉창으로 방 안을 들여다보니, 아니 이게 어찌 된 일이오. 여전히 천자문을 공부하고 있는게 아니겠소. 부자는 그만 하늘이 무너지게 낙담하고 말았소. 내 자식이 완전히 바보 멍텅구리로구나 하고 말이오. 아무리 낙담을 했어도 그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라 부자는 또 반년 만에 길을 나섰소. 아니, 정말로 이게 어쩐 일이란 말인가. 그때까지도 서탁에 펼쳐진 책은 천자문이었던 것이오. 도대체 저놈이 공부를 가르치는 건가 마는건가. 부자는 그만 선생한테 울화통이 치밀어올랐소. 아무리 자기 아들이 머리가 돌덩이라고 하더라도 선생이 애를 쓰면 일년 반 동안에 천자문 하나 떼지 못할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오. 공부고 뭐고 다 작파하고 아들을 당장 끌고가고 싶었소. 그러나 그동안 들인 돈도 아깝고, 그리 유명하게 소문난 선생이 엉터리일리도 없고 해서 부자는 화를 꾹꾹 눌러참으며 돌아섰소. 또 반 년이 지나 부자는 선생집을 찾아왔소. 아니, 그런데 이게 정말 무슨 귀신이 곡할 노릇인가요. 서탁에는 그대로 천자문이 펼쳐져 있으니 말입니다. 부자는 더는 참지 못하고 집으로 뛰어들었지요. 선생에게 그동안 쌓인 분풀이를 하고 아들을 끌어냈어요. 부자가 온갖 험한 소리를 다 해도 선생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어요. 아들을 집으로 데리고 온 부자는 천자문을 펼치고 읽어보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아들은 눈 딱 감고 숨도 안 쉬고 한달음에 외어버렸어요. 아니 이럴 수가 있는가. 그런데 왜 천자문만 펴놓고 있었을까. 부자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동몽선습을 폈어요. 그런데 막히는데 하나 없이 줄줄이 읽어내리고 말았어요. 부자는 놀랐고, 이상한 생각은 더 들었어요. 그래서 다음에는 논어를 펼쳐놓았어요. 아들은 그것도 막힘 없이 술술 읽고 말았어요. 부자는 그만 귀신에 홀리는 기분이었어요. 또 다른 책을 내놓았지만 아들이 막힘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어요. 그렇게 해서 아들은 결국 사서삼경을 다 읽어내게 됐어요. 그때서야 부자는 무릎을 쳤어요. 그 선생이 정말 기막힌 선생이로구나 깨달으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쌀 수십가마니를 달구지에 싣고 아들을 앞세워 선생을 찾아갔어요. 선생 앞에 큰절로 백배사죄하며 아들을 다시 맡아달라고 부탁했지요. 그런데 선생을 고개를 저었어요. 선생이 한 말은, 저 아이의 학문은 인제 버려버렸다,는 한마디였어요. 이 얘기는 곧 천자문이 모든 학문의 근본이고, 모든 문장은 천자문의 응용이라는 뜻입니다. 동무는 천자문을 다 뗀지 오래고, 응용도 얼마간 해보지 않았나요. 나와했던 것처럼 계속 해나가면 늘게 됩니다. 그리고, 이건 입에 발린 소리가 절대 아닙니다만, 지금으로서도 동무의 한문실력은 높고, 내가 더 가르쳐줄 게 없습니다." 손승호는 그의 손을 잡았다.
"손 동무 은혜야 평상 못 잊제라." 그는 손승호의 손을 맞잡았다. 이튿날 아침을 먹자마자 길을 나섰다. "이것으로 공부 열심히 하세요." 손승호는 그에게 만년필을 내밀었다. "아니 손 동무..." 솥뚜껑은 주춤했다. 손승호는 그의 손에 만년필을 쥐여주었다. "손 동무..." 그의 눈에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 손승호도 콧날이 찡 울리는 걸 느끼며 얼른 돌아섰다. 그리고 선요원을 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총사에서 손승호를 맞은 사람은 박두병이었다. "손 동무, 그간 고생 많았지요. 진작 가깝게 있고 싶었지만, 화선경험이 산생활에서는 필수적인 것이라서요. 그건 무엇보다 강한 무기니까요." "예, 화선투쟁을 보람있게 생각합니다." 박두병의 마음을 헤아리며 손승호는 솥뚜껑에게 했던 말을 또 했다. "아주 강인해 보이는 모습을 대하니 반갑소. 김범우가 손 동무의 변한 모습을 보면 너무놀랄거요." 박두병이 밝게 웃었다.
"예, 기절할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저는 연예에 대해선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는데요." 손승호의 얼굴에는 걱정스러움이 드러나 있었다. "원, 별걱정 다 하십니다. 아마 손 동무가 할 일이 가장 중요할 것 같은데요. 손 동무의 문학실력을 발휘해서 연극대본도 쓰고, 우리의 현장투쟁을 소재로 한 시도 쓰고, 할 일이 너무 많지요." "네에? " 손승호는 눈을 크게 떴다. 전혀 자신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솥뚜껑에게 선뜻 빼주고 온 만년필이 떠오르고 있었다.